대전강의

신나는 몰락

아빠와 함께 2023. 4. 26. 08:42

대전-신명기(11강) 신5:9(신나는 몰락) 20230424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5장 9절부터 하겠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렇게 돼 있지요.

[자식이 물려받은 유산은 아버지의 죄이다.] 아버지의 확장이라 보면 돼요. 죽은 아버지가 계속해서 자식을 통해서 자식 안에 아버지가 살아 있어요. 아버지가 살아 있다하면 좀 잘못됐지요. 아버지의 저지른 죄가 살아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몸은 죽어도 죄는 안 죽는다는 뜻이에요. 죄가 세지요. 그래서 몸은 죽어도 죄가 안 죽는다는 말은 우리의 행함으로 죄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죄가 나오지요.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버젓이 먼저 있던 죄가 표현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없는 죄를 우리가 짓는 게 아니에요.

이 자식에게 물려준 아버지는 누가 있느냐 하면 자식 입장에서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어요. 또 그 위에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십계명 같은 구체적인 사물화 돼 있는 율법을 통해서 뭘 추적해 들어가느냐 하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계속 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너거 아버지? 네 속에 죄 남긴 아버지가 말이가? 있었지. 봐라. 율법 앞에서 죄 짓는 네 죄, 그 죄가 너거 아버지가 주신 거야. 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주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만약에 아버지와 자식이 한 집에 있다면 자식 입장에서는 ‘나’가 되겠지요. 아버지는 ‘너’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it’에요. 그것이에요. 나, 너 사이에서 그것을 주께선 찾아내고 발굴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자식 가운데서 너를 찾아내는 거예요. 죄를 찾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나, 너를 통해서 그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고 나를 다시 발견하는 이걸 가지고 인간세계에요. 인간세계의 모든 활동은, 내가 누구냐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활동합니다. 내가 만약에 돈이 많다면 역시 나는 부자 돼야 나에 합당한 역량을 갖췄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몸이 아프다. 이건 영 나답지 않아.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게 뭐냐 하면 아파하는 내가 됐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큰 고통입니다. 아프면 뭘 느끼느냐? 수치를 느껴요. 내가 수치를 느끼는 경우가 내가 몸이 아플 때 수치를 느끼는 이유가, 나는 남과 통해서 it, 죄를 발견하는 게 아니고 너를 통해서 나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데 남이 나만큼 안 아프고 멀쩡하잖아요. 화가 나는 거예요. 네가 뭔데 안 아파? 나는 아픈데.

그러면 약간의 위로가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 속에 나를 집어넣으면 되겠지요. 그걸 hospital 병원이라 하는. “아저씨, 여기 몇 개월 있었어요?” “난 침대 2년.” “아줌마는요?” “나는 6개월 있었어요.” “나는 3일 뒤에 나간다. 엄매 기 살아. 3일 뒤에 약만 타면 된데, 의사가.” 갑자기 자존감이 확 올라오지요.

인간세계는 나, 너 뿐이에요. it가 빠져있어요. 그것이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통해서 도로 나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정확합니다. [나는 아무도 만난 적이 없다.] 인간은 군중 속에서도 아무도 안 만났어요. 자기 마음에 일곱 인을 봉인해놨어요. 절대로 누굴 만나든 결혼생활하고 부부생활하고 애를 낳아도 내 마음의 봉인은 다 해체하지 않습니다, 단단히 걸어두지요. 절대로 열리지 않아요.

끝까지 자식이라는 타인, 남편이라는 타인, 아내라는 타인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수입해서 쓰는 수입업체에요. 수입해서 쓰고 일단 들어왔으면 어지간하면 내 것을 남한테 내놓는 법은 없어요. 다만 하나를 내놓고 둘을 얻을 경우에만 잠시 내놓지요.

자식이 도와줄 때 좀 도와주되 그다음에는 내 육십오 세 되거든 월 백 만원씩 되돌려주는 조건 하에 마음에 계약서 써서 이자 쳐서 그렇게 해야 가장 소중한 내가 손상되지 않잖아요. 가장 귀한 내가 손상되지 않아요. 그게 바로 누가 이야기했는가? 윗대 아버지가 그걸 우리한테 유산으로 고스란히 남겨준 겁니다. 그걸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고,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에요.

그러면 여기 신명기 5장에 나오는 말씀은 나, 너 사이에서 뭘 끄집어낸다 했습니까? 죄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죄를 끄집어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악마를 끄집어낸다. 악마를 끄집어내는 방법이 율법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자,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와 관련돼 있느냐? 아버지가 있는 거죠. 다른 노선의 아버지에요. 우리 육신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말고 다른 노선의 아버지 있어요. 그 아버지의 아들이 오신 것은 it를 그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아들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일을 멸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됩니까? 마귀의 일이 뭔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야 예수님의 활동이 이런 취지로 활동하시는구나. 하나하나 기적을 하던 뭘 하던 오병이어를 행하던 전부 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왔구나. 그런데 그 마귀의 일을 굳이 예수님이 오셔야 되지? 우리는 왜 못하는데? 이렇게 돼야 돼요. 구조가. 왜 못하는가?

바로 예수님의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말은 방금 제 하는 말씀을 정리하게 되면 이미 우리가 마귀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의 일을 모르는 거예요. 마귀에 속한 자가 무슨 마귀 바깥으로 튀어나옵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 그 자체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에서 벌어진 사건이거든요. 최고의 우리 아버지가 누굽니까? 아담이죠. 로마서 5장에 나오지요. 아담이 범죄 함으로 죄가 왕 노릇했다는 그 대목 나오잖아요. 그 아담이 확장되었다, 아담이 새끼를 친 거예요.

창세기 5장 봅시다. 창세기 5장과 신명기 5장 10절과 관련돼 있어요. 여기 5장 4절에 보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렇게 돼 있지요. 교회 나와서 성경 보겠다고 1장 4장까진 재밌게 온 거예요. 5장부터 잠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뭐야, 이거?” 갑자기 허들 하나 나왔지요.

이걸 그냥 뛰어넘을까, 이렇게 하고 싶은데 창세기 5장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놀랍게도 이 세상의 현실을 압축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에는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나한테 나를 기쁘게 할 것, 나한테 짜증날 것, 그 구분을 해나가잖아요.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어떤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고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실례지만 고향이 어딥니까? 묻지요. 혈액형이 뭡니까? 학교 어디 출신입니까? 와 이건 나보다 십이 년이나 어린데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따라오네? 평행이론인가 이러면서 <모범택시> 주인공 붙들고 유재석이 그런 이야기하죠. 자꾸 비슷한 걸 찾아내는 거예요. 자꾸 찾아가면 공통점이 여러 개 밝혀지겠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 그런 요건들이 충족되지 않게 됩니다. 인간들은 그러니까 공통점을 열 개를 끄집어냈는데 아홉 개가 같았고 한 개가 나와 다르다면 저 사람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느냐, 마느냐는 결정에서 그래도 아홉 개 맞았는데 계속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결정을 하겠지요.

그래서 제 이름은요, 하고 알려주는 거예요. <솔로>에서. 뭐 티비를 봐야 이야기가 되지. 제 이름은 옥자가 아니고요, 이렇게. 남자가 또는 여자가 서로 자기 이름을 알려주면 일단 당신을 선택했다는 거예요. 같이 사귀어서 결혼하기로 이제 준비에 들어가 볼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열 개 가운데 아홉 개 맞으면.

그런데 열 개라는 조건이 막상 사귀면서 하나둘씩 제거되는 거예요. 구라를 친 거예요. 거짓말한 거예요. 남자 쪽에서. 소 천 마리 키운다고 결혼까지 했는데 남의 소였어요. 그래서 <솔로> 프로에서 짝지어줬는데 나중에 결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거예요. 그럼 그 여자는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잖아요. 소 천 마리와 사랑했지.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나 제대로 만난 적이 없어요. 조건이 유지할 때만 한 거예요. 이게 인간이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조건은 인간의 모든 조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조건을 딱 두 개를 정했어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좋은 고기냐, 나쁜 고기냐? 끝내버렸어요. 키가 몇 센티냐, 혈액형 뭐냐, MBTI가 어떻게 되느냐, 성격조사 이런 것 다 무시하고 좋은 고기냐, 나쁜 고기냐? 신약에 와서 그래요.

우리는 지금 구약을 하고 있잖아요. 왜 주님께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우린 앞으로 계속 추적해봐야 되니까. 딱 좋은 고기냐, 나쁜 고기냐? 좋은 고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에요. 나쁜 고기는 뭐냐? 죄가 아니고 자기 의가 되었어요. 신약에서. 왜냐하면 좋다, 나쁘다를 인간의 선악구조에서 인간들은 판정을 내리잖아요. 인간이 선악구조 바깥에서 판정을 내릴 때는 하나님의 의냐, 자기 의냐? 자기를 집어넣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이런 설교에 대해서 비판을 해요. 왜 모든 설교, 강의에 자기를 집어넣느냐? 우리보고 하나님 이렇게 좋은 분입니다. 믿으세요, 하면 믿으면 되지 왜 우리 자신을 자꾸 하나님에 끼어 넣는가? “예수님이 십자가 졌습니다. 이렇게 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받아들이면 천국 가고 안 받아들이면 지옥 갑니다.” 받아들이라고 그런 식으로 설교 좀 하면 안 되느냐고 비판을 해요.

그 사람은 한 번도 주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마치 타인을 그렇게 만나도 결과적으로 만난 적이 없듯이. 남들을 이용할 뿐이죠. 잘 걸린 거예요, 잘 걸린 것.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개역한글)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 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공동번역)  하나님의 의를 할 때 거기 쌍으로 동반해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죄가 아니고 자기 의에요. 자기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에 힘써 굴복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자기 의. 내가 평생 살아온 것이 내가 하자 없는 인간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게 자기 의잖아요. 내가 이미 나를 점유하고 있어요. 나의 의로운 자리에 나의 의로 있는데 거기에 달리 하나님의 의가 몽땅 거덜 낼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를 추가할 이유는 되는데 지금 내가 있고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나의 의를 거덜 낼 그 이유는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어떤 차원으로 보느냐 하면 선악체계로 보는 거예요. 착한 하나님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 착하다. 저도 얼추 착해요, 이러고 마중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내 의가 있는 한 하나님의 의는 뭐로 오느냐 하면 이게 악해야 돼요. 심지어 바리새인에 의하면 이게 마귀 일이에요.

진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내 의를 믿으라, 이 말은 바리새인보고 너는 마귀를 섬기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여호와를 잘 섬기는 이에게 마귀 섬기라니 통할 리가 있습니까? 안 통하지요. 그들은 마귀 믿는 자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전문직업이었어요. 주님께선 “너희들 전문적으로 하는 일에 내가 휩쓸릴게. 그래 내가 죽을게.” 죽었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자기 일에 대해서 자기 의를 갖고 있는 자들을 제대로 처리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착한 하나님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건지는 착한 하나님을 믿는 나도 얼마나 착하냐. 나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대립관계가 아니고 잘 통하는 그런 관계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 의해서 죽었던, 귀신 들렸다고 죽였던 예수님을 사흘 만에 주께서 부활했으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당국자들이 그걸 가짜뉴스라고 유포시킨 이유를 아시겠지요. 예수님이 부활한 게 아니고 제자들의 퍼뜨렸고 사울이란 사람도 미쳐서 정신적으로 스데반 죽이는데 양심에 가책이 들었는지 그 소문이 자기 속에 심리적으로 각인되어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서 나한테 찾아왔다, 그런 식으로 성경책이 뭐냐? 사도 바울의 편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편지는 믿지 마라. 믿을 것은 예수님의 말씀, 산상설교나 믿어라. 그냥 십계명 믿고 바르게 살자. 오늘날 마귀가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창세기 5장으로 돌아와서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냈지요. 자녀를 낳았지요. 5절에 보면, 그가 얼마까지 살았습니까? 구백 삼십 세지요. 향수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죽었다고 돼 있잖아요. 죽었다는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의 약속한 대로에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여기 창세기 5장 4절, 5절만 있으면 선악과 따먹은 주동자가 죽었잖아요. 주동자가 죽었으니까 그 사건은 해결된 거죠. 선악과 도적질한 범인 잡혔잖아요. 체포해서 하나님이 죽였잖아요. 그다음부터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잖아요. 아담은 선악과 구경했지만 자손들은 구경 못했잖아요. 그러면 책임을 후손들에게 물을 이유가 없지요. 절도죄 당사자만 색출해서 죽였으니까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죄가 번지지 말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 어떻게 됐습니까? 6절에,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또 죽었대. 이것 왜 죽습니까? 애 낳는 게 죄입니까? 그걸 왜 죽여요? 아버지가 음주운전 걸려서 사형 당했다. 그걸 자식이 죽을 이유 됩니까? 안 되지요. 자식은 술을 안 먹는데.

죽는 이유가 있어요. 왜 자식을 낳았느냐? 왜 자식을 낳았어. 주님께선 자식을 의도적으로 낳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노아 홍수 이후에도 아담의 자식을 유지되는 방향으로 홍수심판을 내린 겁니다. 그때 노아 다 보내버렸어야 되는 건데 절대 안 보냈어요.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남겨둔 이유는, 죄가 그득 차기까지 마귀의 일을 멸하시러 오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가야 되는 겁니다.

그 대수가 몇 대냐 하면 천 대에요. 구백 구십까지 찼다. 천에 턱걸이 못하고 떨어지는 이유가 천이라는 그 숫자가 나타날 때까지 너는 계속해서 구백 년 살든 백 살을 살든 이백 년 살든 천을 향하여 나한테 전수받는 죄는 멈추지 않고 진격, 또 진격할 것이다. 그럼 천이 언제 천이 오느냐? 있지요. 천이 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봅시다.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20장 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사도 요한이 양쪽을 다 봐요. 위에 보다가 아래 보다가, 아래 보다가 위에 보다가. 요한계시록 내용 전개가 그래요. 위아래, 위위아래 이렇게 된 거예요. 위 보다가 아래 보다가, 위 보다가 아래 보다가 이렇게 보는 거예요. 중첩된 두 개의 세계를 한꺼번에 다 보는 거예요. 그 중첩된 두 개의 세계의 장면이 멋지게 묘사된 영화가 있어요.

봉준호 감독이 존경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Inception>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꿈속에서 들어가는 파고들어간다는 뜻인데, 주인공이 유명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살고 있는데 저쪽에 있는 건물들이 천장을 장식해요. 이게 휘어지는 거예요. 휘어져서 이걸 덮치고 있어요. 저쪽 동네가 하늘이 돼버린 거예요. 옆 동네가. 꿈속이니까 같이 덮치는 거예요. 두 개의 세계가 한 장소에서 중첩되는 겁니다. 영화에서 그렇게 묘사했어요.

요한계시록이 그거에요. 두 개의 세계가 겹쳐 있어요. 겹쳐있는데 두 개의 세계에 이게 단절돼 있습니다. 단절됐는데 내가 말로 설명보다도 직접 보는 게 제일 빨라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개의 세계가 단절돼 있는데 단절된 그 접촉지점이 있어요. 접촉지점이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나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또 뭡니까?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갈릴리 언덕하고 애굽하고 소돔하고 지역이 다 달라요. 이 땅에서는. 그런데 두 개의 팽이가 만난다는 접촉지점이 뭐냐? 그것이 십자가에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곳이 돼요. 그러면 이 세상은 한 지점에 전부 다 모이게 돼 있지요. 집중하게 돼 있지요. 어디에 모인다? 십자가에. 그러면 마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에서만 마중을 나가요. 하늘나라도 그냥 마중 나가는 게 아니고 만나는 장소가 이쪽에서 십자가에 죽은 성도, 두 성도가 십자가에 죽어요.

그럴 두 증인이 죽습니다. 9절에 보면, 왜 죽느냐 하면 7절에 보면, 이 세상의 짐승이 누굴 이기느냐? 예수님의 증인을 이겨요. 이겼다는 말은 죽여 버렸단 말이죠. 죽이는 데 성공했단 말이죠. 죽음이 발생돼야 십자가가 성립되잖아요. 예수님들이 사람들에게 죽었으니까. 두 증인이 죽어요. 죽고 난 뒤에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며칠 동안?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 사흘 반 동안 뭘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을 죽였다를 증거하는 그 시간이 뭐라고요? 사흘 반이죠. 그 사흘 반을 확대시킨 것이 바로 인간의 남은 역사의 기간입니다. 42달, 3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이걸 날짜로 축소하면 사흘 반 돼요. 십자가 사건의 시간적 요소로 확산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어요. 이만희는 해석 안 돼요. 해석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에 모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어떤 성경해도 마지막에는 십자가만 자랑해야 돼요. 갈라디아서 6장에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 10절에 보면, 두 선지자 죽고 난 뒤에 좋다고 축하하고 난리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좋다고 서로서로 격려하고 축하는 거예요.

그런데 12절에 보니까, 아니 사흘 반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부활됐어요. 부활되어 하늘로 올라갔네, 12절에. 올라가니까 나머지 13절부터 뭐가 일어납니까? 지상에 밑에 있는 세상이 성이 무너지고 죽은 자들이 발생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죄가 범람하고 이 땅에 마귀가 지배해야 될 이유가 어떤 경우에만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 건질 때까지만 유효하게 유지되는 세상, 그 세상이 대구고 대전이고 목포고 광주고 여수고 그렇습니다. 서울이고 부산이고.

그것도 모르고 부산 갈매기~ 이러고 있다고. 부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 있다면 부산시민은 그 사람을 향하여 집중 핍박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게 부산시민이 해야 될 일이에요. 2030부산세계박람회 그 유치가 문제 아니에요. 핍박해야 된다니까요. 핍박하게 되고 또 실제로도. 중첩되는 겁니다.

다시 창세기 5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니까 자식을 지가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속 낳게 하시는 거예요. 계속 낳게 하셔서, 자식을 낳는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나의 죽음을 잊어버리게 하는 요소가 바로 자식입니다. 부모는 자식 안에 부활해요. 안 죽어요. 비록 나는 죽지만 내 DNA 유전인자를 받은 자식이 살아 있는 한 이제 내가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그러니까 이 자식들아 장가가서 내 팔에 손자나 손녀 좀 안겨다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 DNA 이것 끝나면 안 돼, 내 DNA. 나 부활하고 싶어.” 손자, 손녀로. DNA 팔분의 일 가져갑니다. 15퍼센트인가 가져가고 자식은 50퍼센트 가져가고. 이거는 팔분의 일 가져갑니다. 법칙이. 어쨌든 팔분의 일이든 내가 살아 있잖아요. 영존 아닙니까, 영존. 불멸하잖아요. 그걸 조상들은 뭐냐 하면 DNA를 생각 못하고, “너 내 죽거든 제사 지내다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일거에 하나님이 난입해서 끊어버린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유월절 사건이에요. 유월절 사건은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식을 죽이는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자식은 아버지의 얼굴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어요. 자기에게 되돌아오지요. 단 예외가 있습니다. 자식에 대해서는 자식에게 자기를 넘겨줘요.

돈이 없어 넘겨줄 게 없어서 그렇지 마음 같으면, 내가 돈 있는 것 호강하려는 게 아니라 너 잘 되면 더는 소원이 없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려고 해요. 자식이 달라 안 해도 알아서 챙겨서 필요한 것 주려고 하는 거예요. 너희 집에 더운데 에어컨 없구나. 내가 알아서 에어컨 넣어줄게. 생일선물로, 이런 식으로 핑계대면서.

나라에서는 강력하게 반대하지요. 왜냐하면 부가 한 계열로 집중돼버리면 경제적 평등이 점점 더 불균형이 심화되지요, 강화돼요. 돈이 돈 먹고 하니까. 그래서 아예 세금을 30퍼센트 이상 때려버리죠. 상속세에서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짬짬이 백만 원도 넣어주고, 살아 있을 때 집어넣어주고. 현찰 들고 와서 우수수 쏟아내면서, 매달 조금씩 주면서. 법적으론 오천 만원까진 괜찮아요.

자기의 본능입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난 모른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희생할 준비가 돼 있어요, 자식한테는. 특히 애가 막 태어났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것도 이십 대 말고 삼십 대엔 낳아야 돼요. 이십 대엔 애 죽이는 수가 있어요. 술 먹고 자는 데 깨운다고 패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버지를 하고 자식을 죽여 버리니까 죽는 자식은 고통이 없지요. 원래 죽는 사람은 죽어도 고통이 없어요. 누가 고통을 하느냐? 산 사람이 고통이 심하지요. 자기의 소중한 것을 바깥에 내놨는데 그 소중한 것을 쳤다는 말은 네가 살아 있을 때 네 죄의 고통은,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친다는 거예요.

그러면 유월절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모든 자식들을 다 죽이는가? 그게 오늘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 5장 9절에 나와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렇게 돼 있어요. 질투하는 하나님, 이건 누구한테 하는 이야기에요? 이방민족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에게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 다시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 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하면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위한 하나님, 나 도와주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 앞에 뭐가 붙어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나라는 인간은 내가 하는 질투에 관해서만 반응을 나타내지 나 빼놓고 남이 되는 질투에 대해선 인간은 관심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화날 때 도와줄게”가 아니라 내가 화날 때 네가 도와줘야 돼, 라는 식으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섭해버리고 예속시켜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는 나를 떠나야 돼요.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말은 너를 위해서 섬기는 생활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될 시점에 와있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개하며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네 죄에 대해서는 내가 저주를 퍼붓는다.”

저주하는 질투하는 하나님, 달리하면 무슨 하나님입니까? 저주하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저주하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통이 무슨 계통입니까? 아까 아담이 자식을 낳고 구백 살까지 턱걸이 해봐야 결국 또 죽지요. 그 자식 낳고 또 구백 살 살아봐야 또 죽지요. 그 죽는 노선이 이스라엘 노선으로 하나님 앞에 들어온 거예요. 이 노선에서. 이스라엘을 아담의 노선으로 전체를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서 생각해보자 이 말이죠.

“그렇다면 나는 언제든지 너를 질투해서 벌할 수 있다. 있는데 이런 소리, 이런 이야기 해준 것에 대해서 네가 복인 줄 알아.” 이 말이에요. 너희들만이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편인 것을 너희들은 알고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방민족과 달리. 하나님이 율법으로 찾아들지 않은 다른 민족과 차이 나야 되지 않느냐.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니 멀쩡하게 밤에 침대에 자고 있는데 창문 깨고 들어와서 “나는 말이야.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말이야.” 자고 있는데 붙들고.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알아? 삼사 대까지 가는 거야. 다음에 보자. I'll be back. 다시 돌아올게.” 가버리죠. 이게 영화에 보면 이 대사가 나온다는 설이 있고 안 나온다는 설이 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위키백과
I'll be back은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오는 영화에서 맡은 인물이 하는 대사이다. 2005년 7월 21일, 미국 영화 협회의 영화 인용구 랭킹에서 37위를 하였다. 제일 처음 사용한 영화는 1984년 영화 《터미네이터》였으며, 처음 대본은 "I'll come back"이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터미네이터’라 해요. 터미네이터의 특징이 우리말로 하면 ‘종결자’에요. 종결자는 뭐냐 하면 ‘시작자’에요. 끝을 정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계셨다는 거예요. 또 달리하면 처음부터 계신 분이 끝을 이미 다 아는 거예요. <터미네이터> 영화 첫 장면에 보면 거기에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올 때 옷 없이 나왔지요. 꿇어앉아서 덩치 큰 남자가 있는 거예요. 있는데 전자기장이 일어나면서 번개가 막 뜁니다.

그 터미네이터가 종결자가 처음부터 등장해요. 처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종결을 그 사람이 마감할 수 있는 거예요. it가. it를 아는 분은 it가 돼야 돼요. 인간들 사이에 너, 나가 모르는 낯선 분이 인간세계, 이스라엘 속에 뛰어 들어와 버린 거예요. 십계명 가지고 종결자가. 종결자가 뜨니까 뭔가 다르거든요. 남들은 옷 입고 돌아다니는데 지는 옷이 없거든요. 그래서 아무나 패서 남들 옷 빼앗아 그때부터 활동하고 총 쏘고 이렇게 영화 시작되잖아요.

이 터미네이터가 바로 주님의 기능이에요. 모든 것을 끝장내시는 분입니다. 끝장내는 데 규칙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규칙이 뭐다? 십계명이에요. 십계명으로 뭐 한다?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그러면 십계명으로 악마의 일을 멸하려면 십계명을 들이밀어서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뭐가 발췌해냅니까? 우리가 뽑아내지 못한 내 속의 악마를 뽑아내는 기능을 율법이 하는 거예요.

그 악마 나올 때까지 계속 인간의 족보를 유지하면서 죽었더라, 죽었더라의 체인 연쇄 고리로서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늙어죽고 난 뒤에 자식 죽는 것은 덜 서러운 데 아버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식 죽어버리면 내가 죽어야 된다고 가슴 칠 게 않겠습니까. 이태원이나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유월절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 어느 부모도 네가 죽는 것은 이 어미를 잘못 만나서 죄라고 그런 마음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네가 이렇게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내 몸에 나지를 말지 왜 태어나서 못 볼 것을 보게 하느냐, 인간아” 하고 가슴 치고 난리도 아닙니다. 물론 사억 오천으로 약간의 위로가 되겠습니다만.

인간이 왜 존재합니까? 죄의 전달자로서 존재하고 악마의 앞잡이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악마의 앞잡이에요. 우리는 사람을 만나지 악마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아까 했지요? 악마는 나올 때 뭐로 나온다 했습니까? 자기 의. 자기 의로 나오지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라 했으니까. 선악과 따먹는 인간을 자기의 앞잡이로 세워서 그 인간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따먹었다는 사실을 계속 유지시켜나가는 게 악마의 전략이거든요.

하나님 손으로 하나님을 죽이게 만드는 거예요. 창조자의 손으로 피조물을 죽이게 만드는 데 악마는 성공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계속 죽어나가니까. 죄를 보지 못한 하나님이 죄를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죽게 될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 말고 다른 노선을 개시했거든요. 아담 노선 말고 다른 아담을 준비해놨어요. 언약의 사람. 첫 번째 아담은 죽어 마땅하지만 둘째 아담은 부활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은 죄를 전달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하나님의 의가 준비돼 있어서 의가 왕 노릇해서 의를 증거하는 자기 자식들을 계속 이 땅에서 만들어내요. 성도지요. 그게 바로 악마의 일을 멸하러 온 거예요.

자, 그러면 악마를 끄집어내야 된다 말이죠. 끄집어내는 방법은 율법에 대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반항하고 저항하게 만드는 그 작업을 이제는 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을 어떻게 해내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십계명을 볼 때 자기가 정당하다는 식으로 보지요. 자기 의롭다는 식으로. “십계명이야? 지켜야 돼. 지금도 양심적으로 의롭지만 더 의로울 수 있어.”

그렇다면 네가 복을 받는다 했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은 십계명을 지키면서 또는 말씀을 지키고 목사님 말씀을 섬기면서 확인에 들어가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내가 말씀 지켰으니까 십일조 했으니까 내 인생에 대해서 얼마나 지금보다 더 형편이 나아지는가, 복이란 것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내 앞에 등장하는지 확인하는 데 확인이 어떻게 돼요? 실망스럽지요.

말씀이 지켜지게 되면 나는 복을 받고, 율법이 그러니까. 복을 받게 되면 형편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아지겠지요. 주께서는 이걸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전체를 뭐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자기 의, 악마가 집어넣은 의가, 이 죄가 자기 의라는 그러한 아바타, 이런 가면을 딛고 이렇게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내게 뜻대로 잘 되면 복 받은 걸로 간주하면서 확인 작업에 나서면서 주님께선 걸려들었어, 걸려든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 지키고 이스라엘이 가면서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의 뜻과 어긋 맞는 어깃장 나는 사태가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본심을 안 드러낼 수 없어요. 원망하게 돼요. 누구부터 닦달 냅니까? 모세 붙들고 닦달 내는 거예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의심함으로써 숨은 정체가 들통 났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고자 합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이야기해요. 그런데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믿은 만큼 어떤 변화나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 같은 걸 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삑사리 나거든요. 믿는데 집안 꼴이 더 몰락했어요. 더 무너졌어요.

앞집에 사는 보살이 놀립니다. “네가 종교 바꿔서 그렇다. 너거 엄마 믿던 절에 안 가고 왜 갑자기 교회 가서……. 네 집구석 봐라. 자식 돌아가는 것 봐라. 아직도 장가도 못 가고. 종교 바꿔서 그렇다.” 기존교회에 그런 것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목사님 말씀 잘 듣지 왜 복음에 관심 둬서, 종교 바꿔 그런 일 벌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종교 안 바꾸면 의심은 중지됩니까? 아니죠. 끝까지 인간은 하나님을 긴가민가 평가하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자신이 마귀가 돼요. 마귀로서 더 뚜렷해지는 계기를 마련하지요. 끝까지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더라. 복음 알아도 소용없고.

그걸 로마서 7장에서 뭐라 하느냐? 그게 너야. 너는 가만있어. 율법이 가서 너로 하여금 네 속에 있는 마귀 끄집어내 줄게. 마귀의 모습을 너를 통해서 뽑혀 나오도록 도와줄 테니까. 의심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의심해라 네가 뽑아낼 수 없는 마귀를 주께서 율법을 통해서 말씀으로 뽑아내주니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서 성도의 삶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제가 한 문장을 남겼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를 함부로 해도 상관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성도에요. 나를 함부로 해도 내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상관없는 사람. 주여, 어느 수준이 돼야 이 정도 수준 돼요?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거든요. 나를 함부로 대해서 개의치 않는 것.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것 설명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마귀가 그렇게 시켜요. 신이 있는 쪽으로 올라가잖아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다가, 그 이유가 거룩함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위에 있으니까 더더더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여기서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마주쳐버리면 여기 십자가와 마주치면 내가 오르겠다는 더 나아지고 멋있게 된다는 자체가 이게 십자가에 의해서 마귀의 얼굴인 것을 발견하지요.

발견했으면 이미 복 받은 거예요. 왜? 내가 못 끄집어낸 것을 끄집어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이미 만남이 없는 가운데서 주님 쪽에서 우리를 만나게 해준 거예요. 양이 헤매다가 목자를 만난 거예요. 그 목자가 우릴 위해서 대신 이미 죽으셔서 다 이뤘던 목자를 주님 쪽에서 만나게 해주니까 여기서 성립 안 되는 만남이 성사됐지요.

그다음에 우리는 뭐가 남았느냐? 몰락만 하면 돼요, 몰락. 몰락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놀이동산에서 신나는 대목이에요. 우에에에 으아아악~ 계속 몰락하는 가벼워지는 몰락만 남는데 이게 성경에선 뭐냐? 네가 어린아이 같이 되는 거예요. 체중이 확 줄어요. 그냥 몰락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함부로 나를 다뤄도 괜찮고, 집에 불나도 괜찮고, 강아지 죽어도 괜찮고(미안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미 내 자신을 주께서 만나게 해줬으니까 이제는 내가 올라가면서 올라가 하면서 나의 의를 계속해서 축적했잖아요. 더더더더 축적, 축적, 성화, 성화론에다가 막 했는데 이제는 그걸 다 놔버려도 괜찮아요. 그냥 <비트>란 영화에 정우성이 오토바이 탈 때 손 놓지요.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그냥 몰락이죠.

몰락할 때 무슨 풍경을 보느냐? 내가 올라오던 풍경을 주께서 보게 하십니다. 아등바등 십일조하고 성수주일하고 성경공부하고 선교회비 내고 목사 잘 섬기고 봉사 많이 하고 앞에 제단 막 닦고 꽃꽂이하고 구역예배 다 참석하고 봄 됐다 싶으면 예수 믿으세요, 해서 행복은 건강에 있지 않고 예수 믿는 게 행복입니다, 그것 돌리고. 다른 교회는 사탕 두 개 주면 여기는 휴지 하나 물수건 주고 돌아다니는 모든 것, 내가 저랬었었지. 많이 묵었다.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켜라  (0) 2023.05.31
십자가17강-확실성과 진리  (0) 2023.04.26
십자가16강-투명성  (0) 2023.03.29
마귀와 함께  (0) 2023.03.29
3/26오전설교 핵심  (0) 2023.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