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16강-투명성

아빠와 함께 2023. 3. 29. 07:46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6강) 마10:20(투명성) 20230327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54페이지 보겠습니다.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두 인물이 먼저 나와요. 아벨과 가인. 지금 기도에 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에서 “하나님은 아벨 쪽을 선택하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셨다.” 이렇게 돼 있지요. 아벨 쪽을 선택했다는 말은 땅의 소산물을 하나님께서는 거부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왜냐하면 아벨은 땅의 소산물을 드리지 않았어요. 땅의 소산물은 누가 드렸는가? 가인이 드렸다고. 그 인간은 주변에 자기 환경을 대변해주고 있거든요. 땅의 속성, 이런 걸 대변해주는 자가 가인.

그러면 아벨은 뭘 드렸는가? 땅이 아니고 양을 가축을 드렸어요. 가축을 드림으로써 하나님 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양 쪽으로 이미 선회했다는 것이 벌써 드러나고 있습니다. 땅의 소산물이 아니라 양을 드린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벨 쪽을 선택했다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했다, 이렇게 되지만 오히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을 낳게 하셔서 아벨이 하는 일을 하나님 자기 쪽에서 흡수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기도가 뭐냐? 기도란 하나님의 자기내부 순환시스템이 되겠어요. 그러면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기 순환시스템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고 끼게 되느냐? 그거는 하나님이 자기 내부부터 동그라미를 친다면 이쪽에는 뭐가 있냐 하면 땅의 인간이 폐쇄적 자기 순환시스템이 작동하겠지요. 그러면 인간의 폐쇄적인 자기 집단시스템에 하나님의 자기시스템을 집어넣으려면 여기선 필히 뭐냐 하면 희생의 죽음이 반드시 죽음이란 모습으로 확정된 채 들어가는 거예요. 확정된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 쪽에서 인간 속에 들어올 때 죽음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슨 방법 밖에 없다? 인간의 자기 폐쇄적 자기 내부시스템에서 하나님 나라 가려면 인간의 자기희생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하나님의 희생에 합류되어야 빠져나올 수 있어요.

합류되어야 빠져나올 수 있는데 내가 합류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선택할 때 아벨은 하나님 나라에 합류된 거예요. 아벨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피에 합류되려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가? 그게 아니고 땅의 자기 폐쇄시스템이 하나님에 선택된 하늘나라 천국 백성 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그러한 현상이 하나님께서 양쪽 시스템에 똑같이 작동을 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더 알기 쉽게 가만있으면 구원돼요. 그런데 많이 아파요.

아픈데 문제는 아벨이 많이 아팠는지 생각해보세요. 아벨이 형에 대한 복수를 생각했겠어요, 아벨이 형에 대해 불만을 가졌겠습니까? 아벨은 그냥 천진난만하게 생기발랄하게 아벨의 입장에선 자기가 양으로 제사 드렸더니만 하나님이 받으셨다. 이걸 자연스럽고 당연한 걸로 여겼지요. 아벨은 가인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가인은 누구와 비교했습니까? 아벨과 비교했지요. 따라서 기도하면서 비교하는 것은 가인 쪽이에요. “네가 두 시간을 해. 내가 두 시간 반을 못할 줄 알아?” 자꾸 비교하는 것은 자기가 조작된 자기희생을 자기 쪽에서 연출하는 셈이 돼버려요. 고난 받는 기도, 금식하는 기도, 맴이 그렇게 아픈 기도 이런 것, 애가 아플 때 다쳤을 때 어미로서 할 것은 기도 밖에 없다, 이런 기도.

그런데 아벨은 기도 밖에 없다가 아니고 그냥 구원받았어요. 천진난만하게. 그래서 제가 전에 마태복음 11장 했잖아요. 하나님의 계시가 오게 되면 그 현장에 뭐가 생긴다고요? 어린아이가 생기는 거예요. 어린아이는 없어요. 모든 인간은 어린아이는 없어요. 다 어른 됐으니까 되돌아갈 수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이미 다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을 어린아이로 만들어버린다고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냐? 어른들이 갖고 있는 속성이 없어요. 슬기롭고 지혜로움이 어린아이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어린아이만 있으면 되지 슬기 있는 어린아이, 지혜로운 어린아이 그게 아무, 어린아이 유지하는데 도움 안 돼요. 지난 광주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지옥 가는데 덕이 있는 돼지가 지옥 생활에 좀 편하겠습니까?

그런 사람 있어요. 덕스러운 사람 있어요. 덕스러운 딸기농사 짓는 사람 있거든요. 천국 갑니까? 인품이 대단하다든지 자애롭다든지 남을 특별히 배려할 줄 아는 돼지, 돼지까지 오기 전까지는 괜찮은데 갑자기 뒤에 돼지 또는 개가 붙어버리죠. 복음을 모르면 앞에 뭐가 붙든 개돼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상에서 많이 만나지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만나는데 세상에서 안 만날까요.

여기 보면 하나님이 아벨 쪽을 선택했다고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시스템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구축해가고 형성시켜 갈 것인가를 아벨과 가인 두 형제를 통해서 자기 설계도를 미리 뽑아낸 거예요. 나, 이런 식으로 한다. 천진난만하게 살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게 되는데 그 근거가 뭐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죽게 될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선택이 없었으면 이 세상은 그냥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대화하면서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사단이 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찾아와서 그런 거예요.

성경 봅시다. 요한복음 10장, 어제 오후에 했지만 자세히는 제가 말씀 못 드렸거든요. 요한복음 10장 26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말씀 참 어려워요.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분명해요.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요 단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못 믿을 말씀만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네가 때려죽어도 내 말은 안 믿기는 말씀만 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10장 5절 봅시다. 이거는 반대로 말씀하신 거거든요.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타인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짜 양들의 고집 또는 자기의 적극성, 자기의 판단력? 그런데 그 판단력이란 건 뭐냐 하면 목자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자기 양들에게만 허락하셨다 이 말이죠.

어린아이에게 이걸 적용시킨다면 어린아이라서 어른 말 다 듣는 게 아니고 자기 아빠가 아니고 엄마가 아니면 걔가 본성적으로 그 말을 안 듣게 돼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의 말씀만 딱 두고 보게 되면 인간이 구원받을 아무런 해결책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일방적 주장이기 때문에. 자체적인 순환노리에요. 네가 나를 믿는 것은 내 양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저들이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믿고 천국 가고 싶어도 내 쪽에서 막을 거야, 하는 식으로 못 믿을 말만 골라서 그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지옥 가는 것이 누구 책임입니까? 지옥 가는 것이 본인 책임이 아니지요. 자기가 지옥 가는 것이 본인 책임이 아니에요. 천국 못 가는 것이 본인 책임이 아니에요.

그래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어떤 선택을 하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이런 이야기하면 꼭 목회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하면 교회 어떻게 운영합니까? 안 하면 되지요. 그러면 내가 신학을 배웠는데 밥은 먹고 살아야 되는데 언제까지 마누라 피아노 레슨 시킬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아이는 커가고. 죽으라고. 그렇게 해서 백수로 죽으면 되잖아, 뭐.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네가 버려라, 이런 거요.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된다는 네 생각만 버려라, 이런 거요.

못 버립니다. 인간들은 자기내부 폐쇄 순환구조에서 악마의 허락 없이 버릴 수 없어요. 그래서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마귀가 베드로를 우는 사자 같이 덤비는 거예요. 베드로 힘으로 못 이겨내요. 내가 베드로 너를 위해서 날마다 늘 기도했기 때문에 마귀가 너를 최종적으론 삼키진 않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 하나님 나라의 자기 폐쇄적인 순환구조를 언급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자기내부 순환시스템이 기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만 그럴까요? 아니면 예배, 찬양, 선교, 경배 어떤 것도 창조, 구원 모든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가는 하나님 자기내부시스템의 일환입니다.

우리가 그걸 알면 되지요, 하는데 알 수가 없어요. 어떤 경우가 와야 알아요. 내가 속해 있는 내부시스템에서 나한테 압박이 와야 돼요. 압박이 올 때 비로소 우린 여기서 뭐냐? 하나님의 자기시스템에 있는 기도가 여기서 터져나와버려요. 이유가 선택됐기 때문에 그래요. 그 선택된 자의 기도, 그 전체가 구약에 한 곳에 다 모아져 있습니까? 그 구약이 뭐겠습니까? 시편이에요. 아버지여, 또는 시편 110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 주에게.

시편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그게 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몽땅 누가 가져가겠어요? 예수님이 가져가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에서 그걸 다 이루고 말았습니다. 시편 기도를 다 이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나라 하던 다윗이 실은 다윗이 아니고 그게 누구였다?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었다는 사실을 신약에서 다시 시편을 보면서 해석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린 지금 신약 입장에서 기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 분만할 때 하나님의 자기시스템을 여러분들이 먼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가 54페이지에 쭉 나오는 이야기였어요. 선택되었다는 이야기. 55페이지.

그렇다면 그 이야기 이어서 그러면 당신 말대로 하면 가인 계통은 하는 일은 결국 인간세계에서 가인 계통에만 다 속한 것이 아니고 아벨 계통에 있는 사람이 따로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그 말이고, 선택된 자에서 누가 선택됐는지 모르지만 가인 계통에서 아벨 계통을 압박하도록 하나님의 내부시스템이 인간 속에 작동을 하는 겁니다. 물어, 물어 하는 것처럼 가인 계열이 아벨 계통에 있는 사람을 희생하도록 그렇게 자극해서 죽음에 몰아넣는 그러한 운영시스템이 되도록 하나님이 배후에서 마귀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실을 우리가 결과적으론 그렇게 알지만 현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삶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경험하는가? 하나님의 내부시스템과 인간들의 폐쇄구조와 어떻게 둘 다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게 바로 55페이지 밑에 나옵니다. 그게 바벨탑 건립입니다. 헤어지지 말자.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라 리승만 대통령이 했다는.

이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국가입니다. 국가가 망하는 이유는 흩어지면 다 망해요. 전쟁에 패배하는 이유는 흩어지면 패배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 덩어리죠. 죽더라도 한 덩어리 되면 결국 그 나라는 후대가 그 한 덩어리의 결사정신을 이어받아서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덩어리 되는 취지가 뭐겠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취지.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취지.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행복이 우선인데도 불구하고 국가의 명분, 위기에 처한 국가를 살리자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 너도나도 동일한 생각으로 한 덩어리 될 수 있는 그 결집력은 어디서 생기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마귀가 허락해줍니다.

여러분들의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전쟁이 많은데 구약성경의 중반에 많은 전쟁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 블레셋이에요. 그런데 블레셋이 누굴 이겼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이긴 적이 있어요. 사무엘상 4장, 5장 쭉 나오지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긴 이유는 블레셋이 이스라엘다워서 그래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면 그냥 하면 복잡한데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WBC 세계야구월드컵게임에서 십 몇 년 전에 류현진이 있어서 이게 괴물투수거든요. 예를 들어서 일본과 한국이 하는데 류현진의 가치를 한국이 생각하는 가치 그 이상으로 일본팀이 류현진의 가치를 높여버리면 일본팀이 이깁니다. 상대방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요소를 묶을 수 있는 그 힘의 능력을 내 쪽에서 더 쳐주는 거예요. 더 쳐주면 그것으로 인하여 일본팀이 류현진에 대해 똘똘 뭉쳐버린 거예요. 실제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요. 그때 이긴 것은 삼성의 타자, 국민타자 이승엽이 때문에 이긴 거고요. 옛날이야기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는데 블레셋이 이스라엘다워서 이긴 거예요. 블레셋은 이스라엘보다 언약궤의 가치를 더 높여준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이 갖춰야 될 품격이었다고요. 언약궤를.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를 자기 시다바리인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것을 자기를 보호하는 이용물로 여겼던 겁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뭐냐?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지킴이로 여겼다는 거예요. 지금도 있어요. 자기를 지키고 보호해주는 용도로 사용한 거예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런 식으로 그따위로 사용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블레셋은 뭐냐? 언약궤 있으면 우리는 이유도 없이 그냥 망한다. 그냥 망한 걸로 봤어요. 믿음 얼마나 좋아요. 언약궤 있음으로 우리는 존재 자체가 뭐 할 것도 없이 망해버렸다는 거예요. 이 망했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거예요. 이스라엘은 언약궤로 살고자 했고 그들은 언약궤 앞에서 우리 팀 투수 백날 해봐야 류현진이 그때는 9회까지 던질 수 있어요. 류현진 던지면 우리는 한 점도 못 난다. 끝났어, 끝났어. 게임 끝났어.

그런 마음가짐 이거는 원래 이스라엘이 갖춰야 될 그런 마음으로 하나가 돼야 될 이스라엘이 적이 하나가 되면서 누굴 이겼느냐? 블레셋이 이겼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질질 끌고 와서 다곤 신 앞에 포로로 됐는데 사무엘상에서 언약궤가 하나가 작살나버린 거예요. 블레셋 나라 옮긴 대로 전염병이 퍼져서 이러다가 우리나라 망하겠다 싶어서 자진해서 반납한 거예요.

그게 사무엘상에도 나오지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 또 블레셋입니다. 할 때 자꾸 대치해 있어요. 그때 사울 왕과 붙어있던 군사들이 어떤 군사냐 하면 사사기에 보면 사울이 베냐민 지파잖아요. 베냐민 지파가 그 후에 후손들이 나타난 것은 이방 여인과 강제로 혼인해서 준 혼혈아들이에요. 길르앗 지방, 요단 강 서쪽 지방에 있는 이게 여호와 믿는지 안 믿는지 혼미한 그쪽 사람들 여자들을 지파 하나가 날아가게 돼서 강제로 솔로 프로그램 만들어서 선택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강제로 혼인한 후손들이에요. 그래서 그쪽 사람들이 불만이 많아요.

그렇게 사울이 이끄는 군대가 내부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할례 없는 자는 반드시 할례 받은 자로부터 멸망되게 돼 있다. 딱 이것 아주 단순하게 그것만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창 가진 사람, 칼 가진 사람 둘 밖에 없어서 같이 가자. 두 사람 갔는데 블레셋 자기들끼리 이상한 가짜 뉴스가 퍼져서 정신없이 자기들끼리 칼싸움해서 대혼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사울 왕이 꼴에 왕이라고 숟가락 얹으려고 갔지요. 율법의 명령에 의해서 요나단은 갔는데 거기에 누가 시건방지게 깝죽댔느냐 하면 나도 왕이다, 해서 사울 왕이 들어가서 누구든지 전쟁 끝날 때까지 먹지 마라, 이러고 있는 거예요.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데 네가 어떻게 배고픔을 생각할 수 있느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전쟁에 나서야지.” 어디서 신앙의 티를 내고 들은풍월은 있어서 숟가락 하나 얹으려고 주님의 전쟁에 인간이 끼어든 거예요.

“누구야 내 명령 어기고 꿀까지 먹은 사람, 뽑아보자.” 뽑아보니까 자기 아들인데. 사울 왕은 자기 아들보다 자기의, 악신 들렸지요. 그래서 나라를 누구 사유화시킨 겁니까?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 사유화시켰지요. 악마가 왜 그렇게 합니까?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어야 되는데 중간에 악마가 자꾸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요청한 거예요.

왜 요청하느냐? 불안해서 그래요. 왜 불안한가? 하나님의 자기폐쇄시스템보다도 자기가 자기 미래를 결정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결정하는 데 그 결정 자체가 뭐가 따릅니까?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과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하는 게 따르는 거예요. 슬기롭고 지혜 있는 어른들의 특성입니다. 불안하다는 것. 모든 조치를 다했는데 이상하게 불안해. 결혼할 때 그냥 결혼하면 되는데 아빠가 반대하고 엄마가 반대하면 어떻게 하나, 저쪽 집에서 반대하면. 신경 쓰지 마세요. 슬기롭고 지혜로운 거예요. 좋으면 그냥 하면 돼요.

망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 선택에 미련이 있으니까 망한다는 것도 같이 아직도 여전한 거예요. 그냥 고맙고 감사한 하나의 세트장으로 여겨서 선물로 받으면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데 내가 선택했다고 되니까 혹시 내 선택에 하자가 있으면 결과는 오롯이 내가 다 져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런 불안감을 선택과 동반해서 본인이 가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궁합 보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선택하려면 제대로 선택해야지. 궁합 보면 뭐 나오겠어요? 우상 섬기지 말라, 십계명 나오겠지. 그럴 줄 알았지. 궁합 보지 말라고 궁합에 막 나오는…….

이스라엘은 하나의 비밀이어야 돼요. 이스라엘은 비밀이거든요. 할례 받은 자체가 비밀이에요. 왜냐하면 이 비밀은 미래 가서 마지막 공개됩니다. 다윗의 자손이 와서 인을 떼면서 공개가 되거든요.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그 비밀, 우리가 아는 비밀, 살려고 하는 것은 헛짓이었다. 그런데 블레셋은 뭡니까? 비밀이 없어요. 비밀 있는 자가 비밀 없는 자를 이기는 게 마땅한데 비밀을 간직해야 될 이스라엘이 블레셋보다 자기 비밀을 무가치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이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패배해요. 왜? 신앙생활하면 안 돼요. 그냥 살면 되는데 이게 신앙인데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마치 내 앞에 언약궤를 눈에 보이는 안심하는 내 앞에 딱 보고 싶은 거예요. 왜냐? 나를 지켜주기 위한 하나님 되기 위해서.

거기서 나온 것이 국가가 든든해야 되고, 국가 안에 뭐가 있습니까? 법이 있지요. 국가 내부에 하부구조에 종교법이 있어요. 이게 중세시대 때 교황이나 주교들이 소속된 국가를 위하여 기도해야 될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주교에서 땅을 주고 땅을 받은 주교는 그 황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목, 원목과 비슷한 거예요. 그런 제도가 중세 때 봉건제도라 해서 땅을 분배받은 자가 땅 주신 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교회가 뭘 받았겠어요? 땅 받아 챙겼잖아요. 말 안 들으면 군대가 와서 빼앗아 가면 안 되잖아요.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제일 먼저 혁명군들이 한 것이 교회 모든 땅을 몰수했습니다. 그 뒤에 나폴레옹이 한 것도 모든 성당의 땅을 다 몰수했어요. 배려해서 약간 다시 풀어준 건 있지만. 그때부터 프랑스에선 자기의 인권이 그전엔 국가법이 우선이었는데 인권이 터졌고, 인권과 국가보다 낮은 것이 종교법이에요. 개인 자체가 그런 느낌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은, 오후예배 때 그런 것 했잖아요. 제일 우선되는 게 내 법이고 그다음에 국가법이고 그 밑에 하찮게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고. 순서가 피라미드처럼 그렇게 돼 있어요. 내가 만든 내 법, 내 원칙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바로 그렇게 한 통속이 돼 있는 폐쇄구조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선택했으면 외부에서 뭐가 들어옵니까? 국가법으로 인간이 만든 종교법이나, 국가법 또는 자기의 법칙이 나에게 압박으로 들어오겠지요.

내 기도대로 했고, 내 패턴대로 예배 참석 다했고 얼추 헌금 좀 했는데 주여 내 인생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라고 압박이 들어올 때 그게 바로 주께서 너 아벨이야, 하는 신호로 받아주셔야 됩니다. 왜? 어떤 법도 나를 지킬 법이 국가나 내 법이나 성경법도 나를 안 지켜주는 대상이라 하는 것을 비로소 알기 때문에.

그러면 사람들은 이러다 죽잖아요. 그런데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미 너는 죽었다는 거예요.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선 누굴 사용합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인간들의 가인의 폐쇄시스템이 작동해서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성경에서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따로 간수돼 있는, 하늘에 간수된 것 맞는데 내가 손댈 수 없는 곳에 따로 간수돼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 제가 어제 설교하면서 이 본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깜짝 놀란 그 체험을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28절, 29절인데 28절 잘 들어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지요. 자, 영생은 내가 얻어내는 게 아닙니다. 쟁취하는 게 아니에요. 영생은 내가 주는 거예요. 내가 주는 영생은 영원히 멸망치 않는 영생이에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바쁘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남기기 위해서 내가 만드는 영생 있잖아요. 내가 이 땅에서 나 위주로 돌아가는 구조,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을 주님의 영생을 돋보이기 위해서 나의 헛짓하는 영생을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뭐합니까? 핍박을 가하도록 세상으로 하여금 조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볼 텐데 그전에 마태복음 10장을 봅시다. 10장 16절에서 19절 길기 때문에 제가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양을 어디 가운데 보냅니까? 이리 가운데. 양은 맞아요. 구원 안 받는 양은 맞는데 어디로 보내야 양답게 된다?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예요.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자, 순결한 구조가 상황이 뭐냐 하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 증거죠, 주님 증거. 자기의 특수한 존재라는 걸 증거하는 거죠.

너희를 넘겨줄 때에 당부하는 게 있어요. 네가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우리보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 곤경에서 내가 빠져나가 며칠이라도 식구들 다시 만나고 자식 만나고 아내, 남편 만나서 며칠이라도 목숨을 연장해보려고 구차한 변명이 나오는 거예요. 살려달라고. 그런데 고마운 현상은 내가 살려 달랜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고 죽여 달라고 해서 죽는 게 아니란 것. 주님께선 어떤 선택을 해도 그걸 아무 별 일이 없도록 완전히 무시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찬양합시다.

내가 신앙적 행동을 해야 돼. 아니야, 신앙적 행동하면 안 돼. 예수님의 사진을 밟으면 안 돼. 아니 밟아도 별일 없을 걸? 쓸데없는 본인이 이걸 선택하나 저걸 선택하나 아무 달라질 것도 없는 자기 선택에 고민하고 있어요. 사태는 주님이 만들어놨는데 수습은 지가 하려 해. 왜 수습을 본인이 합니까. “내가 기도를 소홀히 했구나. 내가 헌금을 적게 하고 십일조 안 냈더니만 내가 봉사를 적게 했더니만 이런 사달이 났구나. 우리 집안에. 진즉 매 맞기 전에 잘할 걸. 하나님은 징계가 어떻고 징계를 때리고 한다는” 아이고, 참.

19~20절에 보면, 말하지 마. 말하시는 분은 따로 있으니까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 말한다는 거예요. 말해놓고 누가 놀라겠어요? 그 간수가 놀라겠습니까, 취조하는 순사가 놀라겠습니까, 아니면 말하는 본인이 놀라겠어요? 본인이 놀라는 거예요.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님 지금 상황을 좀 알아야 돼요. 그런 말해서 내 신세가 더 어렵게 됐습니다. 주님 좀 가만 계시면 안 됩니까?” “방금 누구와 이야기했어?” “당신은 모르는 분하고 이야기했어.” 성령이 말하게 해버려요.

“같이 집회를 했던 사람의 이름을 대란 말이야. 너만 복음을 부인하면 다른 사람 살려줄게.” 일제 순사가 그렇게 말하잖아요. 막 고문하고 안 그러면 잠 안 재우고 할 때 그러면 다음 중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객관식으로 해야 돼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①죽어도 나는 같이 있던 사람 말 못한다. ②같이 있는 숫자만 이야기하고 이름은 말 못한다. ③이거는 내 잘못이 아니라 당신이 고문해서 그렇다. 이름은 이렇다. 모이는 숫자는 이렇고 모이는 장소는 이렇다. ④고구마 맛있다. 몇 번입니까? ④번이죠. “성령님, 지금 아무 상관도 없는 고구마 맛있다가 왜 이야기합니까?”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순사가 그것 무슨 이야기냐? 나도 몰라, 무슨 이야기인지.

인간의 말은 어떤 것에도 자기 이익과 손해와 관련돼 있어요. 왜냐?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자기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그 말을 성령께서 미리 심판하고 내뱉어버리죠. 고구마 맛있다. 특히 밤고구마 맛있다. 이런 이야기 순사가 듣고 이놈 당장 죽이라 하잖아요. 그거는 고통을 덜 당하고 그날로 주께서 특별한 사랑의 조치를 하신 거예요. 괜히 고구마 때문에 일찍 천국에서 편히 쉬게 돼버린. 그래서 성령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예상 밖의 일을 하셔요.

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쭉 나오잖아요. 그렇게 하고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자, 그렇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이야기하신 이유가 요한복음 10장 28절과 29절에서 뭐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냐? 예수님이 영생을 주는 영생을 그 영생을 내가 보호합니까, 주님 자신이 보호합니까? 주님 자신이 보호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안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는 사람을 핍박케 해서 29절을 정리해요.

요한복음 10장 29절은 뭡니까?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뭐보다 크시다? 만유보다 크시다. 이걸 매일 아침 우리가 눈떴을 때 일상 시작할 때 우리가 이걸 자꾸 놓쳐버려요. 그래서 새로운 세트장을 준비해주는 겁니다. 그 세트장 안에서 뭘 느끼는 거예요? 오늘도 행복했다, 오늘도 맑은 아침 랄랄랄라~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생각한 목적보다 더 크시다.

그다음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또 하루를 우리에게 목숨을 연장시켜준 거예요. 다 말씀 자체의 순환입니다. 말씀에서 와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 밖에 벗어나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라는 것도 성령께서 우릴 구박하듯이 하지요. 네가 뭐 알아? 기도하면서 그걸 느끼는 내가 기도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께서 주시지 않는데 그런데 기도하게 하셨다. 그 이유가 뭐냐? 이제 마지막 어려운 것 남았어요. 참 어려워서 마지막으로 미뤘는데 제목일 수도 있어요. 세 자입니다. ‘투명성’ 보면 환히 비치는 걸 투명성이라 하지요. 앞에 붙이면, 주님의 투명성.

성령을 주시는 주님은 예수님 자신을 심해, 깊은 바다의 고기가 세상에 뼈다귀가 보여요. 투명해서 물보다 투명해서 갈비까지 보일 정도로 그런 고기를 본 적이 있어요. 주님은 우리가 보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 투명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뭔가 미세먼지 같이 몽골에서 날아온 황사처럼 시커멓고 탁탁해요. 시커매요, 모든 인간의 마음이. 사진 찍어보면 시커메서 찍을 필요도 없어요. 음침하고 시커멓고.

자기가 자기보고 물어봅니다. 너 누구야, 하면 뒤에 동굴이 있어요. 너 누구야야야야, 내가 한 소리만 들려요. 인간의 마음은 너무 깊어요. 주님은 어린아이 같아. 투명해서 아무것도 우리에게 줄 게 없어요. 그런데 투명한데 아버지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잘 살았어요. 말씀대로.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속이 시커먼 탁탁한 황사 또는 황토 물을 뭐로 만든다? 우리를 투명하게 만들 기도가 성령의 기도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형상처럼 되어라. 이게 로마서에 나오는 거예요.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뼈도 훤히 보일 정도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 투명성은 내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투명하다. 모든 욕설도 다 투과한다. 뭐가 있어야 부딪칠 게 있는데 투명하기 때문에

러더퍼드(Rutherford, E. : 1871~1937)라는 물리학자가 이십 세기 초에 원자구조를 어떻게 발견한지 알아요? 방사선을 쬐였는데 딴 건 다 지나갔는데 뭔가 튕겨 나와요. 그 튕겨 나온 것 보고 원자 속에 핵 있다고 발견한 겁니다. “믿습니다, 주여. 주의 형상을 닮아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옆에 사람이, “너무 오래 좀 비켜주면 안 됩니까?” “무엇이 네가……” 갑자기 원자핵이 발견됐어. 투명해야 되는데 뭔가 튕겨 나온 게 있어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성도의 기도가 성도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주님의 기도가 구원하지 성도의 기도는 응답받을 자격도 없고 탁탁한 주님을 투명하게 만들어요. “엄마, 나 애인 생겼어.” “너 애인 생긴 것으로 즐거워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걸 즐거워하라.” 그렇게 비약적인 앞의 중간과정 다 빼버리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엄마 그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애인 생겼다니까.” “고구마 맛있다.” “엄마 진짜 미쳤구나.”

쉽게 말해서 그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게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자기세계라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그리고 좋아하는 그게 바운더리의 전부니까 걔는 거기에 몰빵한 거예요. 그대와 함께 있으면 어떤 경우라도 늘 행복할 거야. 서로서로 이야기하면서 지낼 거야. <그대와 함께>(너랑나랑, 1979)라는 옛날 노래 보면 가사에 있어요.

산새들이 정다웁게 웃고 계곡에는 맑은 물소리
그곳에서 우리 집을 짓고 행복하게 함께 살아요
그대가 항상 내 곁에 있어 정다운 얘기 주고받으며
언제라도 푸른 마음으로 행복하게 우리 살아요

파도소리 멀리 들려오고 은모래가 반짝이는 곳
그곳에서 우리 집을 짓고 행복하게 함께 살아요
그대가 항상 내 곁에 있어 정다운 얘기 주고받으며
언제라도 푸른 마음으로 행복하게 우리 살아요

창을 열면 푸른 숲속에서 예쁜 꽃이 미소 짓는 곳
그곳에서 우리 집을 짓고 행복하게 함께 살아요
그대가 항상 내 곁에 있어 정다운 얘기 주고받으며
언제라도 푸른 마음으로 행복하게 우리 살아요
행복하게 우리 살아요

늘 투명한데 오늘 투명했잖아요. 내일 되면 몽골에서 미는 미세먼지가 내 마음에 가득 찹니다. 왜냐하면 오늘까지 괜찮았는데 갑자기 어떤 일이 세상의 구조가 와요. 가인이 일을 만든다고요. 일을 만들면 우리가 갑자기 내가 선택하고 싶어요. 옳은 결정을 오늘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그런 구조에 우리가 빠져버려요.

빠져버리면 결정은 나에게 미래에 대한 걱정근심을 아울러 우리에게 줍니다. 똑바로 결정해. 바른 결정해. 제대로 알아보고 결정했어, 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우리를 결정해놓고는 밤 세 시에도 잠을 못 자게 만들어요. 커피 때문에 못 잘 수도 있지만 세 시에도 잠을 못 자요. 걱정돼서.

그러면 그땐 우리는 뭡니까? 세상적인 종교에 의하면 뭘 합니까? 기도를 하지요. 그걸 누가 했는가? 다윗이 한 거예요. 다윗이 처음부터 투명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예수 이름으로 한 게 아니에요. 그냥 블레셋이 찾아오지요, 사울이 쫓아오지요. 그래서 나온 게 다윗의 시편이에요. 뭐 하소연 막 해댑니다. “하나님이여, 저 원수들이 언제까지 저를 괴롭힙니까?” 해놓고 마지막에 뭐로 끝납니까? “여호와께 찬양합니다.”

내가 이렇게 당한 것은 장차오실 주님이 내 앞서서 내 자리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폐쇄구조에서 아벨을 데려가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기도라는 걸 하게 하셨다는 것을 시편을 통해서 한 거죠. 그러면 제가 마지막 이야기할 것은 우리가 성경의 시편을 보자 이 말이죠. 시편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해답을 정답을 알고 보죠.

정답을 알고 봐도 그 시편의 기도내용과 자기에게 처해있던 자녀문제, 배우자문제, 자기 미래문제, 혼사문제, 고부간의 갈등문제, 이사 가는 문제, 모든 문제, 부동산 해놨는데 떨어지는 문제, 세종시 집값 전국 일등 이런 문제, 대출문제, 이자 올라가는 것, 그런 문제가 성경을 보는 순간 자극을 받아요. 나도 기도해야 되겠구나.

성경 안 볼 때는 문젯거리도 아닌데 성경을 보면서 다윗은 이렇게 믿은 좋은데 난 지금 뭐하고 노노, 막 놀아도 돼? 갑자기 슬기롭고 지혜로운 어른이 돼버려요.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 가운데서 잃어버렸던 말씀, 너는 이미 죽었고, 다 이루었다는 것을 되새기게 만들 때 기도케 하셨구나. 다시 한 번 나를 확인하셨구나. 내가 세상 폐쇄구조에 놓인 게 아니고 주님의 자기시스템,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는 그 시스템에 이미 놓인 것을 여러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순간에도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일에 분주하다보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주께서 기도하실 때 투명하게 기도한 것처럼 저희들도 투명한 기도에 응답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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