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17강-확실성과 진리

아빠와 함께 2023. 4. 26. 08:44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7강) 삼하16:23(확실성과 진리) 20230424b
(강의: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56페이지, 십자가와 기도에 대해서 하는 대목입니다. 중간에 [기도란 이미 그 중심내용이 확정된 입장이다.] 이렇게 돼 있지요. 확정된 것을 주께서는 기도하라 이렇게 된 거예요. 네가 기도하면 채워줄게, 가 아니라 확정된 것을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기도는 기도하는 나한테 준 게 아니고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 받는 자를 기도 다 이루신 분이 만들어서 정해주지요. 나한테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뤘던 것이 그 이룸을 유지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기도를 할당해주는 거예요. 성과를. 이게 하늘의 왕국의 특징이에요.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줄 때 아버지의 것을 줘요. 내가 늙어죽고 난 뒤에는 땅을 나눠줄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라고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딸 셋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죽으면서 이렇게 해요. “이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큰 딸은, “대단하십니다.” “그래 좋아. 둘째 딸은?” “언니보다 제가 더 아버지를 사랑할 걸요?” “고래? 셋째는?” “아버지는 너무 독재적이고 포악합니다.” “너는 땅 하나도 없다. 네 땅 빼앗아서 언니한테 나눠줄 것이다.” 이게 리어왕의 비극이거든요. 다 죽어요. 그 집안 리어왕부터 해서 오해와 곡해에 의해서 다 죽습니다. <맥베스> 사대 비극이 다 그래요. <햄릿>, <오셀로>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도란 하나님 왕국에 대해서 땅을 나눠주는 게 아니고 땅에다가 들어가게 하지요. 이미 확정된 것을 우리 소유로 주는 게 아니고 넣어줄게, 혼인잔치에 참석케 해줄게, 이렇게 넣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이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나와요. 포도원비유, 천국이라 하는 것은 포도원비유로 나타나는 데 아침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이 사람들 특징은 다 놀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뭐냐 하면 자기 것이 없다.

그러니 천국이란 것은 천국을 볼 때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모집하는 사람의 특징은 천국의 주인이 볼 때에 자기 것이 아예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켜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 것은 없어. 네 것은 아예 없어. 있어도 없는 걸로 간주하면서 보내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포도원 일꾼들은 포도원 들어오면서 무엇을 배워야 되느냐 하면 천국을 배워야 되거든요. 천국을 배울 때 내 것이 없다는 것으로 들어가지요.

처음에 일꾼 네 명 다 그래 나는 놀고 있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일했습니다. 일하면서 뭐가 발생됐느냐 하면 내 것이 생겨버렸어요. 아침부터 노동했으니까 그 노동 값은 내 거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그중에서 9시, 12시, 3시, 5시에 온 사람 중에서 역시 내 것은 없었습니다를 아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온 사람은 제 것은 역시 없습니다, 에요. 처음부터 없었고, 처음부터 놀았고, 놀았다, 놀았다, 놀았다가 쭈욱 놀았다가 되는 거예요.

결국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천국이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천국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다 완료해놓고 그냥 일방적으로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그것을 요한계시록 21장 값없이 넣어주는 데 값없는 게 아니라 값이 있어요, 이게. 값이 너무 커서 인간들이 갚을 수 없어서 값없다고 언급하면서 넣어주는 거예요. 주께서 천국을 만드는 값은 이거는 자기 아들의 생명을 피를 바쳐서 만든 천국이기 때문에 인간들로서는 거기에 끼어들 수 없어요. 값이 너무 고귀해서.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그 천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모든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천국에 들어간 게 어딘데.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었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상관없지요. 상관없는 거예요. 이러한 천국을 들어갈 때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천국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아담의 혈육을 그대로 유지되는 인간들이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천국 들어갈 사람을 뽑아내니까 하나님의 작업이 얼마나 힘든 작업이겠어요.

아담의 죄가 그대로 있는데 그중에서 천국백성을 뽑아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 그럼 여기는 뭡니까? 다 못 뽑아내고 탈락해야 될 조건들을 계속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천국에 청함은 받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듯이 청함은 받았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조건이 있잖아요. 그 조건을 지속적으로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 중에 사무엘하 16장 1절에서 4절 보겠습니다. 그냥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종 주제에 주인을 모함해서 누명을 씌운 거예요. 다윗 임금님, 지금 우리 주인이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 편에 섰는데 저는 아니올시다. 제가 쫓기는 임금님을 위해서 이렇게 준비했으니까 저를 어여삐 봐 달라, 하니까 예상대로 다윗 왕이, 그래 네 주인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린 거예요.

므비보셋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 요나단과 언약을 맺었어요. 언약을 맺은 요나단의 자식입니다. 유모가 경솔하게 해서 어릴 때부터 저는 장애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 집안을 다 몰락시켜야 되는데 요나단과 약속 때문에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사했기 때문에 그 아들 므비보셋에 대해서 책임지고 므비보셋을 자기 왕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줬어요. 그리고 그 종이 누구냐? 시바란 사람이에요.

자, 성경에서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가? 오늘날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살잖아요. 우리는 지식으로 예수님이 하늘나라 이뤘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그 뻔한 멘트 다 알고 그것도 식상해. 너무 알아요. 그러면서도 우리 일상은 그대로 남아있어요. 일상 속에서 주님이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가 우리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그걸 다윗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똑같은 차원에서 우리 일상을 펼쳐나가는 거예요.

우리 일상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조성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움직여나가는 거예요. 너 탈락된 자인지, 아니면 네가 건짐 받을 사람인지. 그럼 이즘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확인해야 되지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요? 자기 것이 없다.

그러면 아까 사무엘하 16장에 나오는 시바는 뭡니까? 자기 것을 챙겼지요. 탈락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왕 다윗은 그것을 모르고 인간의 말만 듣고, 그래 주인 것이 다 네 것이 되었다, 이렇게 했어요. 그럼 시바란 사람은 원래 다윗과 요나단의 계약에 포함이 안 됐는데 계약된 자를 엎어버리고 지가 반칙해서 들어간 거예요. 다윗은 그걸 속아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9장 25절부터 보면,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뭐하고? “속이고”

참 이게 첫째 강의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속인다는 것. 속임의 차원이 두 개 있어요. 속임은 진리이냐, 아니냐? 이렇게 따지는 속임이 있고, 확실하냐를 따지는 속임이 있어요. 진리이냐, 아니냐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납니다. 진리는 비밀이기 때문에 벗어나는 데 인간은 기껏 진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내게 확실하냐, 확실하지 않느냐 따지는 수준에 이르러요. 나한테 확실하게 이익이 되느냐는 그 수준.

시바는 내게 이익이 될 때 확실할 때 본인한테 그게 진리고, 그걸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이걸 속아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이 조성해나가면서 이걸 속아내는 거예요. 분명히 천국 갈 때는 나의 것이 없지요. 이 말이 중요해요. 나의 것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무것도 없는 게 가장 나다워요.

없으니까 채워야 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은 내가 싫다는 뜻이거든요. “왜 남들은 가졌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어. 이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뭐 있어야 되겠어.” 지금 가난하다는 것이 결코 천국 가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내게 비어있다는 뜻이잖아요. 그걸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가난한 본인에게 있느냐? 없어요. 언젠가 이걸 마저 채워 부자 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가난해도 부자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확실하냐, 안 하냐? 이게 확실한 이익이 되느냐, 그것만 따지고 그걸 진리인 것처럼 자꾸 억지를 피는 거예요.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 뭔 뜻입니까? 진리 차원이 아니고 기도했더니만 내가 죄인인 걸 알았다. 이게 기도 응답이 돼야 되는데 이게 아니고 기도했더니만 내 소원 들어줬다.

이건 뭡니까? 시바 수준의, 지금 욕하는 것 아닙니다. (괜히 그런 말해서 은혜로운 사람들 은혜를 망쳤네) 기억은 확실히 나잖아요. 야아 시바가 그런 일을……. 챙길 때 확실히 챙겨놓는 거예요. 시바가 그런 일 했다는, 욕하는 것 아닙니다. 욕 아닙니다가 더 수상한 것 같아, 그만해야지.

인간 수준은 이 범위를 못 벗어나요. 기도하는 노림수도 확실성이냐? 주님께서는 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게 속임으로 본 거예요. “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저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요.” “고뤠?” “제가 그걸 믿습니다.” “그래?” 자, 그러면 일상생활로 들어가 볼까요? 그다음부터는 어디 있어요? “Why me?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낭패가?” 난리도 아니에요.

“네가 진리를 알잖아.” “진리는 알지요.” 진리는 아는데 왜 저에게, 이런 거예요. 확실성과 진리가 따로 노는데 우린 진리를 아니까 확실한 것도 챙겨주시는 것이 하나님답지 않으냐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문장을 하나 쓸게요. [인간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 진리를 대한다.] 그런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는 거지요.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나는 모든 걸 잃었어.” 아니 아니야. 너 아직 멀었어. 네가 좀 더 살아봐. 아직도 잃을 게 있었구나,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리로 속여 왔는지를 우리는 캐고 캐도 나올 게 계속 있는 거예요. 토했다 싶으면 또 토할 게 있고, 토했다 싶으면 또 토할 게 있고. 도대체 어제 저녁에 뭘 먹은 거야. 이거는 점심 때 먹은 거네. 계속해서 나올 게 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을 통해서 챙기려고 시도하는 그 못된 속임수, 그게 가룟 유다가 그런 짓했잖아요. 주님한테 은근히 기대한 게 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 싫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네 안의 사탄이 행동한다. 네가 차라리 사탄의 가면이 안 되면 좋을 뻔했구나. 사탄의 탈을 안 썼으면 참 좋을 뻔했다.” 나 알아. 네 속에 너는 가면이고 네 속에 마귀 있다는 것. 가룟 유다가 주님이 이야기할 다 알아들었어요. 머리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회계를 맡았잖아요. 경리 맡았잖아요, 경리.

아는데 주님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줄 몰랐던 거예요.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거예요. 주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뭔가 저렇게 겸손하니까 주께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때 내가 생각하는 그 사유의 생각의 그 한계까지 끝까지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몰고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가룟 유다도 떨어져나갔지만 소위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도 숨이 차서 못 따라갔어요. “헉헉 더는 안 되겠다. 그냥 일단 하소.” 지는 나가 떨어졌지요.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자, 결국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응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게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게 된다는 말은, 인간이 기도응답 받고 성의를 표한다는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의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한계 너머에서 오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게 보답을 할 생각하면 안 돼요. 보답할 것조차도 하나님께서는 퇴출하고 그것마저 걷어차고 주신 거기 때문에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될 때 첫 번째 강의에서 한 것과 연관됩니다. 십자가가 답변이죠. [어떻게 타인의 의미가 나의 의미가 될 수 있는가?] 이거는 정답은 없다, 에요. 인간은 자기 집으로 속히 들어오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자기한테 의미가 돼야 돼요.

꽃이 왜 있는지 꽃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김춘수가 출판사 책상 위에 있는 꽃 보고 너는 나에게 하나의 몸짓이 되었다, 이러면서 일방적으로 꽃은 그냥 피어있는데 지가 나한테 의미가 되었다고 내가 너한테 이름을 불러주마.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이러면서 <꽃>이란 시를 지었거든요. 꽃은 “뭐야, 너. 니 뭔데 니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하는 거야?” 그래 되지요.

그래서 인간은 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인간은 집에 강아지의 의미를 주인은 알 수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의미만 챙기기 때문에 타인의 의미를, 부부라도 배우자의 의미를 몰라요. 왜 화를 내는지 왜 갑자가 좋아서 까부는지 의미를 모른다니까요. 갑자기 기분 좋아서, 방에서 “여보 너무 기분 좋아.” 도대체 그 의미가 뭔지 보니까 컴퓨터게임에서 이겨서. 그거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거예요.

문제는 타인의 의미가 나의 의미가 될 수 없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신 죄 사함이 나의 의미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이 증거가 어디 있느냐? 이 증거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져요.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성경에서 보면 네 죄를 위해서 대신 제물에 섰다, 너는 죄 용서받았어, 너는 천국 백성이야, 얼마나 의미가 있지만 그건 다 예수님의 의미에요. 나의 의미 아니에요. 예 알겠습니다, 하고 우린 돈 벌기에 바빠요. 그건 예수님 자기 의미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의미가 우리 일상 속까지 아니 일상 자체를 우리 앞에 펼쳐내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응답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히브리서 7장을 볼 필요가 있겠지요. 기도라고 하면 무조건 히브리서 7장 25절이에요. 묻거나 따질 필요 없어요. 여기서 해답 있는 거예요. 이제부터 설명이 복잡해지니까 어렵게 나가겠습니다.

7장 24절에서 28절까지,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간절히 기도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다음에 나오지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여기서 대제사장 의미는? 예수란 이름의 타인의 의미에요.

이제 타인의 의미가 예수님의 스스로 기도해서 타인의 예수님 자신의 의미를 어디 집어넣는단 말입니까? 28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이 의미를 이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으로 파생된 자가 없는 데서 파생된 자가 성도가 등장하는 거예요.

처음에 했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요. 주님 자신의 기도는 그냥 기도로 끝나는 게 아니고 기도응답의 결과물을 주님의 대제사장 입장에서 만들어내어서 그 만들어낸 자체가 주님 자신의 응답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 뭐든지 주겠다는 게 요한일서에도 나오고 요한복음에도 나오잖아요. 그건 뭐냐? 예수 이름이죠. 우리 이름 아니고 예수 이름이에요. 그럼 예수 이름 붙이면 되잖아. 그거는 나의 의미죠.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의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기도를 하게 하신 분의 이름이죠. 우리 애가 고3인데 벌써 준비를 잘해서 그냥 실력대로만 점수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하신 분이 누구다?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왜? 자꾸 욕하면 안 되는데 시바, 이건 기억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네. 설명할게요. 다윗의 입장이 왕이잖아요. 왕인데 초라한 왕이 되었어요. 압살롬 때문에. 마치 예수님이 왕이면서도 이 땅에 초라하게 온 것처럼 다윗이 초라한 왕으로 된 거예요. 다시 복권할 거예요. 나중에 압살롬 죽이고 난 뒤에 할 때 그때에 므비보셋과 언약 맺지 않은 시바가 주인을 속이고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다윗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닙니다.

이참에 다윗과 관련돼 있는 주인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다윗이 주는 게 아니고 자기가 므비보셋의 종이니까 종의 관리인이니까 관리자에서 주인 하겠다는 의도로서 다윗에게 허가받기 위해 온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들통 나잖아요, 므비보셋한테. 그게 탈락인 거예요. 시바가 자기 의미밖에 모르니까요. 다윗도 인간인지라 알 수 없었지요. 나중에 둘 다 모르니까 므비보셋과 네가 갈라라 해서 이렇게 끝나버렸어요.

여러분들 솔로몬이 두 창녀의 자식을 재판한 것 아시지요. 설명할 필요 없이 다 알지요. 솔로몬이 어떻게 재판한지 알아요? 솔로몬은 모르고 재판한 거예요. 이게 재판이에요. 누구 아들인지 몰랐기 때문에 재판이 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솔로몬 자신의 의사나 의미가 재판에 관여하지 않았던 겁니다.

인간의 나의 의미가 예수님의 의미가 내 의미가 되려면 주님의 의미가 나의 의미를 핍박하고 정죄하고 이걸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기도응답이 돼야 되는 거예요. 기도응답은 어떻게 되느냐? 이건 내 써먹었지만 부무떨깨, 부셔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깨지고,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의미가 나의 의미로 이전되는 거예요. 전달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렇게 돼야 나의 의미가 박살나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어서 250억 가진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손해를 봤어요. 247억으로 재산이 3억 줄었습니다. 3억 깨졌지요. 이게 다음에 어려운 걸 설명하는 데 미리 쉽게 하는 겁니다. 3억 깨졌는데 247억은 누구 것이 됩니까? 주님의 것이 되지요. 이게 십일조에요. 내 것을 맏물을 끊어냄으로 말미암아 나머지도 나의 의미가 아니라는 거예요. 남아 있는 게. 이게 감사가 되는 거죠. 그게 뒤에 나옵니다.

56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과의 만남이라 했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인간은 만남이 없는데 어느 쪽에서 만나러 나온다? 하늘 쪽에서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 만나러 오는 거예요. 십자가가 만나주는 거예요. 우리가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그건 올라가는 거고. 더더더더 푸니쿨라처럼 올라가는 거고, 케이블카 타고.

그냥 우리는 주께서 만나게 해주는 데 이게 그 경험이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것이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 만나요. 만나면 그다음에 뭘 했느냐 하면 다시 57페이지 봅시다. [멜기세덱은 하늘을 대변하여 아브라함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말씀 완성은 성도의 위치를 정해준다. 성도의 위치는 본인이 정하는 게 아니에요. 말씀 완성이 성도의 위치를 정해줍니다. 공간을 만들어줘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일상은 어떤 차원입니까? 말씀 완성이란 것을 마치 불꽃놀이 터지듯이 터질 때마다 말씀 완성이 터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하늘의 복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통로로 그를 인정했다. 여기에 부응하여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지요.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복의 출처가 자기에게 있다, 없다?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삼각형이 피라미드처럼 되는 게 아니고 반대로 거꾸로 하늘에 도달된 채 밑으로 뾰족하게 되는 거예요. 역삼각형 되어 밑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이 지점에 아브라함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된 게 아브라함에게 온 게 하나님하고만 맹세를 한 거예요. 여러분 맹세하니까 맹세란 것은 두 가지가 다 포함돼요. 맹세=약속+성취. 약속 + 성취, 이게 맹세 안에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과 맹세했다는 말은 내가 너한테 준 약속은 내가 성취할게, 란 뜻이에요. 약속과 성취 두 내용이 포함이 된 맹세가 된 거예요. 맹세의 결과물이 뭐냐? 아브라함이에요.

결과물이 아브라함이죠. 그러면 시작은 하늘, 그 끝은 아브라함 이 사이에 맹세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실제로 아브라함은 여기서 뭘 드렸다? 십일조를 드렸다. 그래서 십일조는 곧 뭐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에요. 말라기, 나중에 안양 강의할 때 다음번에 십일조 할 거예요. 십일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주의 이름을 잉태한 거예요. 하늘에서 잉태했다 하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아버리면 예수님이 피조물 되니까 안 되고, 이 땅에 예수님은 피조물이잖아요. 죄 있는 육신은 잉태돼야지요, 마리아를 통해서. 그런데 마리아가 낳은 게 아니고 마리아를 통해서 나시니라 돼 있어요. 마리아가 일종에 아브라함 같은 역할을 한 거죠. 시작한 분이 자기 자신을 마리아를 통해서 나타낸 겁니다.

그래서 그게 왜 아브라함이냐, 란 생각이 들지요. 그게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방패요 상급이다(창15:1).] 아브라함이 그 전쟁이 있고 난 뒤에 11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네가 나의 방패고 내 상급이라고 돼 있어요. 누가요? 아브라함이. 신약에 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패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상급이 되는 거예요. 다만 아브라함이라 하는 것은 그때 필요한 인물로 채택했을 뿐이고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다음부터 아브라함이 뭐냐 하면 창세기 15장 봅시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그 뒤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에게 뭘 하게 하느냐 하면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 아브람이 쫓았다는 이 말은, 솔개라 하는 것은 먹을 것 있네 하고 하늘에서 달려들 거잖아요. 쫓았다는 말은 그 쪼개진 것을 쪼개지도록 유지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의미? 하나님이란 타인의 의미가 아브람이란 나의 의미로 들어오는 경로에서 뭐가 있어야 된다? 쪼개짐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쪼개지는 것은 그냥 쪼개지면 안 되겠지요. 마주봐야 되겠지요.

마주본다는 것은 쪼개진 상태가 하나가 되는 요소가 뭘까를 보게 하는 거예요. 샌드위치지요. 샌드위치처럼 쪼개놓고 서브웨이, 그 가운데 뭐가 통과하는지 봅시다. 밤중에 깜깜할 때에 뭐가 통과하지요? 잠잘 때에 17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부사로 나오지요. 영어로 between 사이, 간격, 틈. 간격, 틈은 주님에 의해서 알려지고 합해지는 것도 주님에 의해서 벌려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따로, 인간은 따로에요. 하나님이란 타인의 의미가 인간에겐 전달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인간이 접근할 수 없어요. 갭이 있기 때문에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에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생명을 안 준다는 일관된 뜻입니다. 너희들은 더는 생명이 없다가 뜻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생명이란 말할 때는 이거는 예수 안에 있는 조건 하에 생명이 있지 예수님 이용해서 우리에게 생명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생명 안에 그 틈 안에 우리가 주의 틈이 되는 하나의 파트너가 돼야 돼요. 하나님과 인간은 결별되었다는 역할을 맡아야 그게 생명이 있는 거예요.

연극하는 데 각본에 보면 주인공이 케이크를 들고 누구한테 주는 대목이 있다고 칩시다. 그 케이크가 예수님의 의미에요. 예수님의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에 있었던 완성된 의미입니다. 케이크를 들고 생명나무거든요, 영생. 관객들은 어디 있습니까? 관중석에 관객들이 있지요. 무대는 배우만 올라오니까. 주님께서는 누구 올라오라는 거예요.

“어이, 올라오세요.” 관객인데 구경꾼인데 관찰자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 박수칠 준비하고 있는데 박수치지 말고 올라오라는 거예요. 올라와보니까 관객이 무대에 올라오면 졸지에 배우가 돼버렸지요. 케이크를 먹여버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벌이시는 거기에 자기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의 역할을 맡게 되지요.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에는 그냥 박수만 칠게요, 구경만 할게요, 잘 믿을게요, 가 아니라 우리 일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자로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게 선지자요 사도들이요 아브라함이고 이삭이었고 야곱이었던 거예요. 성령 있는 사람은 다 그렇게 주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어딜 통해서? 주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무대,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뭐가 시바고 뭐가 므비보셋인지 알게 하시는 거예요. 욕도 그런 은혜로운 욕이 어디 있어요?

그 역할이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이번에 수련회할 때 갈라디아서 할 거예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돼 있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수님과 있는 그 의미가 누구한테 준 거예요? 아브람에게 넘겨준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아브람이 그 의를 소지하겠어요, 소지 안 하겠어요? 소지 못합니다. 그의 의가 아브람을 소지하지요. 왜? 의미를 갖는 게 아니고 의미가 우리를 생산해내지요. 아브람은 그다음부터 실수투성이에요. 실수투성이라도 여호와를 믿으니 의롭다는 그것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아브라함 되게 하는 작용이 아브람에게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브람을 아무것도 아닌 자 되게 하는 거예요. 그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작용하도록 의의 관계가 유지되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다시 57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하나님이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생산된 자가 아브라함이 됩니다. 현재 아브람은 그 의미를 몰라요. 일상생활을 더 끌어봐야 돼요. 끌어보면서 실수투성이, 아들 준다 했는데 믿지도 않고 웃어버리죠. 그게 다 뭘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미가 오기까지,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까지 하나님 쪽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그것을 아브람 속에 언약으로 계속 주입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57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러한 위상은 아브라함이 드린 최초의 기도는 의의 효과에 대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멸망의 도성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의인의 숫자에 관심을 두었다.] 왜?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기어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까지 봅시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될 수 없지요. 아브라함 생각은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의인을 멸망할 순 없잖아요. 하나님이 의로우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기어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셔야 했다. 그다음 내용이 보지 마시고요 여러분 같으면 이 두 가지의 요건을 어떤 식으로 충족시키겠습니까?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보세요. 여러분 그다음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이 두 가지 다 요소로 확정될 수 있겠어요?

하여튼 하나님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곤란한 것만 한다니까요.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걸 해요. 이게 오늘날 우리 일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고집대로 하게 만들어요.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 비로소 진실을 대한다는 이게 정답입니다. 그 조카 롯은 모든 걸 잃었어요. 맞지요. 모든 걸 잃었는데 거기다 더 잃은 게 있어요.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면 자기의 가진 것을 잃잖아요. 그런데 가지지 않았다는 그것조차 잃어버려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딸들이 자기를 건드릴 줄 생각도 못했지요. 이거는 아버지의 아이디어가 아니란 것을 성경이 강조했습니다. 이거는 딸들의 아이디어에요. 그런데 이 딸은 어디서 교육받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교육받았어요. 소돔과 고모라의 정신은 뭐냐 하면 수단과 방법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대를 잇는 겁니다. 생존이고 존재가 더 우선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 말한 확실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진리는 몰라요. 확실하게 자기의 대를 잇고자 남자가 아버지 밖에 없으니까 남자를 건드려서 자식을 낳은 거예요.

그러면 졸지에 롯은 자식에게 뭘 남긴 아버지가 됩니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뭘 남깁니까? 죄, 멸망, 저주를 계속 이어간 거죠. 소돔과 고모라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소돔과 고모라의 취지를 이어줄 사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롯의 가정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이 세상에 확산되지요 확대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가는 거예요.

이 말은 아브라함의 시대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다. To be continued……. 아브라함2, 아브라함3, 아브라함4 영화 계속 나와요. 끝까지. 누가? 아브라함 자손이 올 때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아브라함이 했던 모든 걸 무효로 돌리고 그거는 하나의,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십자가 사건과 만나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의 사건은 헛된 사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아 사건도 헛된 사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앞에 있는 사건들은 어디서 다 수집하고 다 끌어 모으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일으키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노아언약도 이뤄야 되고 소돔과 고모라도 다 이뤄져야 돼요.

그러면 거기에 동원됐던 인물들은 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지만 구원은 받았지만 전혀 그들의 결정과 행동과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쓸데없는 보탬이 되지 않는 요소였다는 것을 드러낼 필요가 있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필요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결부된 게 아니고 아브라함은 예수님과 결부되어서 아브라함 하나님으로 완성되는데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걸 알고 내가 예수 오기를 고대했다가 만나서 기뻐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단 말입니까? 자기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속성을 계속 전수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나라가 하나는 모압이고 하나는 암몬이죠. 그 나라가 누굴 공격합니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은 아브라함 대에서 완료된 게 아니고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이스라엘 나라가 나올 때까지. 도대체 저 소돔과 고모라의 속성은 누굴 공격하는 거야. 그 공격자가 누구냐, 라고 그때를 기다리죠. 그때가 누구냐? 야곱의 열두 아들의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등장이에요. 비슷한 근접한 곳에 땅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 이거는 뭐냐? 이거는 구약이잖아요. 신약은 어떻게 하느냐? 이미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 일상을 통해서 내가 왜 구원될 수 없는가를 구원받고 난 뒤에 그것을 구약 전체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다 우리 이야기고, 롯의 딸 우리 이야기고, 철딱서니 없이 종과 결혼해서 애 낳은 그 처신 그것 우리 이야기고, 또 나온다. 시바 이야기 다 우리 이야기고.

우리는 확실성, 나한테 이익, 타인의 의미를 모르고 나의 의미만 계속해서 그것을 끌어 모으는 우리 모습을 통해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그 사실을 주님은 스스로 우리 안에서 자기가 만든 일상 속에서 증명해내시는 겁니다. 철저하게 다 이루심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활용하신 거예요.

베드로가 뭘 잘했어요, 열두 제자 뭘 잘했어요? 십자가를 도망쳤잖아요. 도망친 사람보고 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무대까지 올라와서 케이크 먹으라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무대에 본의 아니게 올라가서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주지 않는다는 생명을 먹고 그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인 사도 바울에게 생명을 줘서 예수님의 사도가 되게 하고 십자가의 부활을 일상을 통해서 만나는 모든 사건을 통해서 증거케 하는 일을 성령을 통해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냥 내버려두지 마시고 주께서 기도해서 다 이뤄진 그것을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 안에서 십일조로 받아들여져서 우리가 아무것도 내 것이 없음을 날마다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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