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 - 악령과 나
22,03,2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22페이지부터 하겠는데, 방금 질문한 내용은 여기 22페이지와 23페이지에 보면 다 나와있다는 겁니다. 교재 22페이지에 '2. 인간의 이름' 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부터 보겠습니다.
--------------------------------------
** 인간의 이름은 아담이다. 곧 흙이다. 하나님이 친히 지어주셨다. 이로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그들의 존재를 모두 삭제하고 나면 역시 남는 것은 아담, 즉 그 본래의 이름과 운명으로 되돌아온다.
--------------------------------------
* 인간의 이름은 아담 !!
여기에 보면 "인간의 이름은 아담이다. 곧 흙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인간의 이름이 아담, 즉 흙인데, 이게 본질적이라는 말이죠. 흙에서 사람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이름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흙에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이름' 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이름' 이라는 것을 붙여주셨는데, 그 이름의 근거가 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사람의 운명을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래서 그 이름대로 본질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런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흙인데, 즉 먼지라는 겁니다.
*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 !!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것은 흙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러니 관상은 진흙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도 성형외과에서는 의사가 그 진흙을 다듬고 있는데, 당기고 세우고 째고 한다는 것이죠. 양악수술이라는 것도 하고 말이죠.
그러니 마치 미술시간에 진흙을 가지고 사람 얼굴을 만들어서 다듬듯이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 흙의 운명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게 여기 교재 22페이지에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곧 운명이니까 그렇다는 말이죠.
이 정도로 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리가 되었지 싶은데,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숨까지 쉬고 있는데 무슨 흙이고?" 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는 매일 매일 조금씩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 흔히들 신앙의 영웅인 것처럼 추앙된 자들도, 사실은 아담에서 삐져 나온 곁가지들이다. 잘라내면 남는 것은 역시 아담, 그 사람뿐이다. 그 아담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다. 인간은 하나님과 마주서있고, 하나님은 인간과 마주 서 계시다. 세상사의 구조는 이 구조가 전부다. 다른 구조는 없다.
--------------------------------------
* 아담의 곁가지들 !!
신앙의 영웅은 없는데, 그냥 아담의 곁가지들이란 말이죠. 아무리 영웅이라도 해도, 그런 가지들을 다 잘라내면 남은 것은 아담이라는 몸통이라는 겁니다. 그 아담과 하나님이 상대하시는데, 그런데 그냥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원리원칙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원리원칙인데, 하나님께서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인간은 처벌대상 !!
그래서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법이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법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법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모든 법은 사법적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위반하면 반드시 처벌이 따른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서 처벌대상인데,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를 지은 죄수가 판사를 보고 사랑해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판사의 할 일은 죄수를 처벌하는 것인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죄수는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달게' 라는 것은 사탕과 같이 달다는 말인데, 흔쾌히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무엇을 말인가요? 하나님의 처벌인데, 자기가 흙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있을 때는 '살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경우에만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 아담의 곁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는데, 몸통인 아담과만 상대하신다는 말이죠.
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는 살았는데, 하지만 이제는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몸통 자체가 죽은 나무라고 하면, 곁까지는 당연히 죽어있다는 말이죠. 대선에서 이겨서 대통령 당선자가 되던 말던 다 죽은 자라는 겁니다. 즉 "너도 죽고 나도, 다 죽은 자다" 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동창회를 한다고 7명이 모이면, 그것은 시체가 7명 모였다는 겁니다. 물론 좀 시끄러운 시체들이 되겠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니 부부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돌잔치를 하고 제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그것은 비본질이고, 본질은 무엇인고 하니, 시체에서 시체가 하나 삐져 나왔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계약, 바로 그 원리원칙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자기 좋아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었던 일방적인 원칙대로, 그렇게 일관되게 활동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것을 교재 23페이지에서는 '두 언약' 이라고 하는데, 잠시 보겠습니다.
--------------------------------------
**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아예 이런 식으로 굳혀서 인간을 보려고 하셨다. 그것이 '두 언약 구조'로 보는 방식이다.
--------------------------------------
(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 두 언약 !!
여기 24절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라고 되어있는데, 여자들이 뭐라는 겁니까? 여자들이 언약의 비유라는 겁니다. 이게 정말 어려운데, "여자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여자들이 언약의 비유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자라는 것은, 자기 쪽에서 스스로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고, 다른 것과 마주칠 때 왜 자기가 여자인지, 그 이유가 비로소 밝혀진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서 "나는 여자다" 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비유가 아니고 실제가 되기 때문인데, 비유기능이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 너는 돼지야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보고 살이 좀 졌다고 해서 "너는 돼지야"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한 번도 돼지를 보지 못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나는 난데, 왜 돼지가 등장하지? 도대체 돼지가 뭐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비유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비유는 뭐야? 나보고 나라고 하면 되는데, 왜 무엇 무엇의 비유라고 하지?" 라고 할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설명을 해주면, "아하,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를 이용해서 견주었구나. 나를 옆에 붙였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자든 여자든 간에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더 중요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로 있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게 갈라디아서 4장 24절 말씀이라는 겁니다.
* 서로 갈 길이 다른 두 종류의 인간 !!
이 두 여자가 한 남자의 아내들인데, 그 남자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아내 두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있었던 약속, 이 언약을 약속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서로 갈 길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을 이 땅에 파생시켰다는 겁니다.
파생이 무슨 말인지 알지요? 파생상품이라는 말이 있는데, 특히 금융부분에서는 주의를 해야한다는 말이죠(ㅋㅋ). 옆으로 계속해서 퍼진다는 것이죠. 그런데 서로 갈 길이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겁니다. 한 쪽은 지옥으로 통하는 약속이고, 다른 한 쪽은 천국으로 통하는 약속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지옥에 가는 자들도 있고, 그리고 천국에 가는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중간은 없는데, 두 종류만 있다는 것이죠. 반드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양과 염소로 말이죠. 이렇게 나누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데, 같이 붙어있지 말라는 겁니다. 서로 갈 길이 서로 다른 부류라는 말이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찢어놓는다는 겁니다. 서로 굳이 친하게 지낼 이유가 전혀 없는데, 주님이 찢어놓으면 그렇게 각자 찢어져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이런 말을 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러운데 말이죠(ㅋㅋ).
* 점점 세밀해지는 언약 !!
이제 아담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 점점 더 세밀해지는데, 사실은 이게 아담이 아니고 흙이란 겁니다. 즉 흙과 하나님 사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흙과 하나님이 대화가 됩니까? 안 되는데, 그래서 여기에 이름을 붙이는데, 그게 '아담' 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이란 이름과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의 이름이니 하나님과 대화가 된다는 겁니다. 아담이라는 이름과 하나님이 대화를 하시는데,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약속을 맺게 된다는 말이죠. 그 약속이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장 15절인데, 그런 약속을 주신다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너는 네 갈 길로 가라 !!
여러분, 싸운다는 것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너는 네 갈 길로 가라" 라는 겁니다. 싸운다는 것, 그것은 회유하고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라는 것은 사람은 꼬드겨서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닌데, 교회에 데리고 오면 전도성공이고 데리고 오지 못하면 실패가 아니라는 겁니다.
전도(傳道)라는 것은, 말 그대로 도는 전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약속을 그들에게 알리고 소개하는 것이란 말이죠. 교회에 오고 말고 하는 것은 전도하는 사람의 소관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하게 하는 것도 자기 일이 아니고 성령의 일인데, 그렇게 전할 때는 주님이 주신 방식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는 전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개나 돼지와 같은 자들이라는 말이죠. 물론 이것도 비유인데, 개나 돼지와 같은 인간들에게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전도를 하게 되면 그 뒤에 그것을 알게 되는데 말이죠.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러면 무엇을 전하면 됩니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그 약속을 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싸운다" 라는 것이죠. 모든 인간들은 남자의 후손인데,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여자의 후손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데, 남자 없이 태어난 분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뱀의 후손은 뱀의 지배를 받게 된 인간들을 의미하는데, 그 인간들과 싸운다는 겁니다.
* 새로운 피조물 !!
모든 인간들은 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모두가 뱀의 후손인데,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무엇입니까? 기존의 없는 인간인데,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죠.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오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라고 말이죠.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게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나'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의 경우에는 "내가 천국에 간다" 라고 하면 정말 곤란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나'가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기존의 '나' 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었는데, 그러면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죽었으니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누가 했다는 겁니까? 죽은 자기가 교회에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추가적인 실천을 가져다준 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만이고 속임수인데, 즉 자기가 자기를 속인다는 겁니다. 그게 소위 제자훈련이라는 것인데, 교회에서 얼마나 사기를 많이 치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권한 !!
제자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는데,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이라는 겁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당연한 것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내 육신은 엄마 아빠도 없이 만들었어"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아이도 없지만 말이죠.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모르는데,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는 '나'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해서 천국으로 가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닌데, 물론 우리 사람은 놀 때도 있고 잠을 잘 때도 있지만, 주님은 그런 경우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주님은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전혀 하자가 없이 계속 활동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주님의 부지런한 활동으로 인해서, 죽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의 구원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북한이든 이슬람 지역이든 간에, 그런 곳에서도 "너희들이 나를 죽이든 말든 알아서 해라. 하지만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은 이렇게 순교한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천국에 간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자기 희생, 바로 그런 결과물을 낳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너의 죄가 해결되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 주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노력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주님의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혹시 이런 말이 여러분은 섭섭하게 들립니까? 이게 짜증이 나고 분노를 유발시킵니까? 이게 감사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고 화가 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서 그러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노력을 너무 많이 가했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 노력과 공로를 잊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도한, 그런 큰 죄라는 것이죠. 물론 십자가도 모르고 말이죠. 교회를 핑계거리로 삼아서 "내 인생은 내가 다듬고 만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주님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 내가 나를 수습하려고 하지 말자 !!
그것은 어제 낮 시간에 "내가 나를 수습하려고 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허겁지겁 자기를 수습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예를 들었는데, 자기가 아끼는 손거울을 그만 떨어뜨려서 깨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울의 파편들이 생기는데,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아이쿠, 내 거울이 깨졌네" 라고 하면서 깨진 조각을 붙여서 "이제는 나답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수습이란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허겁지겁 수습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인간의 하루일과가 이런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답게 되려고 자기 자신을 수습하는 것, 우리는 하루 24시간 이것만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자꾸만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귀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아깝다는 것이죠.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신봉하는 것인데, 그렇지요? 교회에 다닌다고 매주 헌금도 하고 교육관을 짓는다고 목돈도 내고, 그렇게 했던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면 집을 사고도 남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여기에서 어떻게 분노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그런 것이 다 코스프레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새로운 피조물 흉내를 내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곧 기만인데, 즉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를 속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기만과 속임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데,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해서 같이 한 통속이 되고자 한다는 말이죠.
* 의미의 교란 !!
지금부터 좀 어렵더라도 '의미의 교란'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어제 오후시간에 단어만 던져놓고 설명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기에 아주 매끄러운 옥이 있는데, 혹은 수정 덩어리나 유리알이 있다는 말이죠. 너무 너무 매끄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종이를 붙이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미끄러져서 붙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게 사물인데,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사물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물에 의미를 붙이는데, 의미가 그만 미끄러져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죠. 붙이면 자기에게 돌아오고, 붙이면 또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사물은 다 누가 만든 것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주님이 만들었고, 또한 주님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 몸뚱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자꾸만 미끄러진다는 겁니다. 기도, 전도, 선교, 예배 등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이 하신 기도, 주님이 하신 전도라고 하면서 거기에 달라붙으려고 해도, 의미가 결국은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죠. 이것을 "의미가 본질에 달라붙지 않는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 당신을 사랑해 !!
그 대표적인 것이 '사랑' 이라는 것인데,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하면, 상대방은 "어느 정도 사랑하는데?"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당신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라고 하는데, 그러면 "겨우 그 정도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을 죽도록 사랑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만 말의 의미가 붙는다는 것이죠.
"하늘만큼 땅만큼, 죽도록, 내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사랑해. 죽도록 사랑해" 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괜찮은 말을 자꾸만 붙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불러도 그냥 부르면 허전하니,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하면서, 계속 의미를 가져다 붙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붙이다가 나이 30살에 암에 걸리면, 그만 미끄러져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은 남들처럼 나를 건강하게 살려주지 않고, 그만 30살에 암에 걸리게 합니까?" 라고 하면서, 처음에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라고 했던 그 모든 것이 누구에게로 돌아옵니까?
자기 사랑으로 돌아가는데, 즉 자기가 소중하고 아깝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동안 의미가 붙은 것이 아니고 미끄러졌다는 겁니다. 이것을 의미의 교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말이죠.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보자는 겁니다.
" 역시 나야 나 !!
인간이 범죄한 뒤에 악마와 결탁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 알고 있던 선악과를 인간이 훔쳤다는 겁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선악과가 담겨있는 자신이 선악과가 없는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긴장을 하면서 문장을 만들고 또 만들어도, 그 마지막 방향은 무엇인고 하니,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인간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모든 의미는 이것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이 계시니 좋은 곳이야" 라고 시작했다가, "천국에 내가 가니, 천국에 도착한 내가 소중해"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는 "역시 내가 가장 소중해"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돌아오게 되니, 의미가 붙을 리가 없다는 것이죠.
*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라는 단편소설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왕과 왕비, 장관, 경찰청장, 탐정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어느 날 왕비에게 편지가 배달되는데, 읽으려고 하는 순간 왕이 오니까, 왕비는 편지가 왕이 보면 안 되는 내용이라고 여기고 숨긴다는 것이죠. 마치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책을 숨기듯이 말이죠(ㅋㅋ).
그런데 그것을 같은 장소에 있던 장관이 보고 그 편지를 훔치는데, 왕비의 약점으로 붙잡고는 자기 출세를 노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편지를 자기 집에 두는데, 그러자 왕비는 경찰청장에게 부탁해서 자기 편지를 좀 찾아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찾지를 못하는데, 금고를 비롯해서 집안의 중요한 곳을 다 뒤져보지만 실패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왕비는 할 수 없이 다시 탐정에게 의뢰를 하는데, 그러자 탐정은 대번에 찾아낸다는 겁니다. 경찰청장은 편지가 중요하기에 깊숙하게 넣어두었을 것이라고 여기고 집안의 중요한 곳을 찾았지만, 탐정은 장관이 반대로 움직였을 것이라고 여기고, 집안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곳을 조사해서 찾아낸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편지를 다시 찾게 되는데,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편지의 내용은 전혀 모르는데, 그런데 편지 소유자에 의해서 각자 주체가 밝혀진다는 말이죠. 왕은 그런 편지가 있는 것도 모르고, 또한 왕비는 그 편지를 봐야하는데 그만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장관은 자기가 그 편지를 가지고 있으면 왕비를 뒤에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 편지를 훔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편지가 왕비에서 장관으로, 그리고 탐정으로, 그렇게 편지의 이동경로에 따라서 각각의 주체 자리가 서로 다르게 등장한다는 말이죠.
--------------------------------------
※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이다. 탐정 뒤팽이 어떤 귀부인이 비밀리에 찾는 편지를 경찰청장의 의뢰를 받고 찾아낸다는 줄거리다. 하지만 요즘의 추리물 만화에 나오는 트릭같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고, 심리적인 면이 강조되었으며,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라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또한 탐정에 버금가는 지능범이 등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아예 범인이 누군지 처음부터 밝히고 시작한다. 심리적인 면 때문에 이 작품의 추리를 바탕으로 논문도 여러가지 나왔다. - 나무위키
--------------------------------------
* 편지내용을 모르듯, 인간은 자기를 몰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자기가 주체라고, 즉 주인공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은 누구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사회에서는 어떻습니까? "나도 소중하고 너도 소중하다" 라고, 그렇게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이 성립합니까?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작 편지의 내용을 모르듯이,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을 하나님께 요구해야 하는지, 정작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지만, 하지만 그것을 모르면서 계속해서 찾아다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찾아준다고 해놓고 찾아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찾아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인간은 100명이 살면 그 100명이 다 어떻다는 겁니까? 그게 각자가 알 수 없는 욕망, 즉 자기를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최후의 욕망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인간들은 정작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따라서 인간들은 각각의 주체 정도가 모두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마다 각각의 주체가 다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욕망이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주체가 달라진다는 말이죠.
* 욕망이 곧 악령 !!
그러면 그 욕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악령이라는 겁니다. 욕망이 곧 악령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악령은 인간을 인간 세계 바깥으로, 즉 자기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조직 바깥으로 내보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악마의 욕망에 휘둘리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들은 악마들의 권한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인간 주체가 욕망을, 즉 욕심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인간의 주체보다 더욱 큰 욕망이 그 주체를 가지고 놀았다는 겁니다. "너는 귀하고 소중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악령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욕망이 곧 악령이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모든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즉 "나는 소중하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유지하면서 "나는 저 사람과 달라" 라고 하면서 자기 자존감을 세운다는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왕과 왕비, 장관, 경찰청장, 탐정, 그렇게 모두가 다른데, 편지의 이동경로에 따라서 다들 다르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일하게 편지에 놀아나고 있는데, 정작 편지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인간은 악령을 모르는데, 예수님만이 아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8장을 보겠는데, 28절에서 34절입니다.
(마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 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 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
(마 8: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 8: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마 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욕망의 편지를 받은 인간들 !!
여기 28절에 보면 귀신들린 자가 두 명 등장하는데, 즉 욕망이라는 편지를 두 명이 받았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왕비 한 명이 편지를 받았는데, 그런데 편지가 계속해서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왕이 왕비를 보고서 "왕비, 왜 그래? 요즘 무슨 일이 있나?" 왜 그렇게 초조해하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왕비가 뭐라고 합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만약에 왕비에게 왕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편지 때문에 초조해할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쑥 왕이 들어오니까, 왕비가 얼른 편지를 감추면서 그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티를 내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자기만의 계획이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들어와서 "무슨 일이 있어요?" 라고 하면, "아뇨, 없어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당신은 몰라도 돼" 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이게 다르지만 같은 욕망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 예수님과 악령의 만남 !!
여기 마태복음 8장에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그 근처를 돼지 떼가 지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그 돼지 떼로 들어간다는 말이죠. 두 사람에게 들어있던 악령이 많은 수의 돼지들에게 갔다는 겁니다.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돼지에게로 확장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돼지들이 바다로 뛰어들어서 몰살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34절에 보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가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예수님은 친절하게 그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당신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삽시다" 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제발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떠나주세요" 라고 했습니까?
* 악마가 노린 '조직화' !!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떠나달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악마가 노린 '조직화' 라는 말이죠. 인간은 조직화를 하게 되면, 자신의 죄책감을 조직의 이름으로 털어 버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조직화란 것은, 말 그대로 인간은 한 사람이 아니고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가다라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이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각자가 개성이 있고 서로 다르다고 우겼던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합니까? 예수님이 활동하시니 그들은 모두가 한 통속이었음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모두가 같은 악령의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이 누가복음 8장에도 나오는데, 27절입니다.
(눅 8: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여기에서는 귀신들린 자가 한 명 등장하는데, 지금 논리가 어려워도 긴장을 좀 하시고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동네에 머리에 해바라기 꽃을 꼽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보통 그런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미친 사람만 미친 겁니까? 그렇게 미쳤다고 하는 나머지 사람들도 미친 겁니까?
* 과연 누가 미친 자인가?
옛날에 대구에 '금달네(?)' 라는 유명한 미친 여자가 있었는데, 저도 비산동에 살면서 몇 번 보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하면서, 자기는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자기는 미치지 않았지만 미쳤다고 하는 사람만 찾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파도처럼 계속해서 일어나니까, 그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꺼져달라고 하는데, 즉 "우리 동네에서 나가 주세요" 라고 조직적으로 반대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다 미쳤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은 다 악령이 들린 것인데, 그러니 미쳤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주님이 주신 의미에 전혀 달라붙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이고 구원이고 간에, 전부가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모든 해석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악령이 들렸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신 사건, 그게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게 되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소중한 '나' !!
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목사님,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분도 계시는데, 달리 말하면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하게 "예,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아하, 그렇구나"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은 부정적 사고방식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쳤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중한 나' 라는 것인데, 즉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낸다는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는 누가 소중하다는 겁니까? 선악지식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 쪽인데, 즉 하나님이 자기보다 더 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악마가 시키는 대로 강제로 따먹게 되니, 이제 선악의 지식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보물이 인간에게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죠.
'인디아나존스' 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고대보물을 찾아서 탐험을 하는데, 캄보디아 밀림의 신전 속에 아주 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그 보물을 찾아 가지고 왔다고 하면, 그 보물이 있던 그 장소는 더 이상 귀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돼지를 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소중합니까? 돼지가 소중합니까? 질문하는 제가 더 나쁘지 싶은데(ㅋㅋ), 돼지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나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우리 돼지를 다치게 하지 말고, 당신은 그만 꺼져라"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 아하, 우리가 추방시켰구나 !!
그러면 성경에 왜 이런 내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진짜 모습이 인간들에게 이렇게 당하는 것인데, 그리고 그 결과가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돼지를 치는 자와 관련을 짓게 되면, 십자가가 더욱 더 깊숙이 이해가 된다는 것인데, "아하, 우리가 추방시켰구나" 라고 말이죠. 인간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것을 주님이 의도적으로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악령이 뭐라고 합니까? "교회는 나가더라도 십자가는 모른 척해라. 그냥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 교회에 가서 취미생활도 하고 생활정보나 얻어라. 그리고 점심도 얻어먹고 말이야. 그러면 일단 교회에 나왔으니 천국에는 넣어줄 거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는 친목단체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집구석에 있는 인간이나 교회에 가는 인간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목사가 주는 희망적인 설교나 들으면서, "잘 될 거야 ♬" 라는 노래처럼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사가 손을 들고 축도까지 해준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도 교인들은 이게 이단인 줄을 모르는데, 악마라는 것을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자기에게 잘 해주기 때문인데, 서로가 죽이 맞다는 겁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집에 있는 남편과 자식들까지 복을 받는다고 한다는 말이죠.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고, 그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파생상품들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가 남들보다 공부를 잘해야하고 출세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자기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죠.
* 횡재한 자들 !!
어제 낮 시간에 '횡재' 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에게서 더 이상 자랑거리가 나오게 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횡재라는 말이죠. 더 이상 자기 것을 자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므로 횡재를 하지 않게 되면, 자기 자랑말고 달리 늘어놓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횡재를 했다면, 돼지를 키우다가 불이 나서 400마리를 다 날린 것도 감사하게 되는데, 즉 "축사에 불이 나서 주님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자랑을 하지 않게 되는데, 그게 바로 횡재한 상태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게 얼마나 놀라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인간은 육인데, 그런데 어떻게 성령을 받느냐는 겁니다. 로또에 당첨된 것은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데, 참으로 신기하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말씀대로 하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실제로 횡재한 자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아까 교재 23페이지를 보았는데, 다시 보겠습니다.
-------------------------------------
**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법이 주어지기까지는 이 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율법이 주어지자, 인간은 본래의 죄성과 아울러 거기에 합당한 조치인 저주도 함께 찾아들었다.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아예 이런 방식으로 굳혀서 인간을 보려고 하셨다. -------------------------------------
* 점점 세밀해지는 율법 !!
여기에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법이 주어지기까지는 이 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아담에게 이야기한 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인데,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게 점점 더 상세하게 되는데, 아담 다음에 노아, 그 다음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다음에 모세, 그런 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원칙이 점점 더 많아지고 세밀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엇은 변화가 없는고 하니,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사법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인데, 즉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처벌이 따른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처벌로 다가오시는데, 그래서 마지막에는 불 심판과 지옥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거지가 되고, 강도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고 앞집에 살던 부자는 지옥에 갔는데, 그러면 우리가 거지로 살면 천국에 갑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그냥 거지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강도라고 해도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닌데, 평생 강도로 살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가 실수해서, 혹은 착실하게 살아서 오늘날 자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다만 주님의 멈추지 않는 활동으로 인해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를 보고 야단을 치고 나무라고 채찍질하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 것처럼 여기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 바보야, 똑바로 하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머리를 치지 말라는 것인데, 그 머리는 주님의 머리지 자기 머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팔자가 폈을 것인데" 라고 하는데, 주로 여자들이 남편을 들먹이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눈이 삐었지. 그때 왜 이런 남편을 골라 가지고 이런 생고생을 다 하노?" 라고 말이죠(ㅋㅋ).
물론 남편이 도박을 해서 집을 다 날리고 하면 그런 소리가 나올 만 하지만, 하지만 이 세상은 자기가 그렇게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력이 아니고 기만인데, 속이는 것은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소중하지도 않는데 소중하다고 하는, 그런 일념으로 남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를 속이고, 그렇게 속이는 재주 외에는 특별히 달리 다른 재주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2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 그것은 육에 갇혀 있는 채로 태어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아기가 지닌 생명이 결코 육에서 벗어난 새 생명이 아니기에 결국 기존 생명의 되풀이요 쭉 당겨 길게 늘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긴 긴 수명으로 연장시켜 봤자 죽음이 당기는 괴력을 당해낼 수가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어디까지 육이다.
-------------------------------------
* 주님은 죽음의 은인 !!
인간은 육에 갇혀있는데, 그러니 아무리 당겨도 죽음의 힘을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다들 불로초를 찾는다고 난리인데, 십자가를 능가하는 불로초는 없다는 겁니다. '생명의 은인'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요? 그런데 주님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고 죽음의 은인이란 말이죠. 즉 "주님은 우리에게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고마운 분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왜 우리 인간에게 생명의 은인은 해당사항이 없는고 하니, 우리는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의미의 교란인데, 즉 주님은 "이놈들, 죽어라" 라고 하시면서 오셨는데, 우리 인간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말도 안 되는 거짓표현을 사용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오해를 하도록 합니까? "나에게 죽은 것은 부당한 것이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그렇게 들리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 교회나 성당이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 실수한 히스기야 !!
히스기야 왕이 기도해서 몇 년을 더 살았습니까? 15년을 더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15년 전에 죽었다면, 자기 것이 몽땅 다 거들난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행복하게 죽었을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15년을 더 살게 되면서,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잘 섬기고 통치를 잘했다" 라는 것이 거짓이고 기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로 하여금 처절하게 경험하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데,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이죠. 히스기야의 기도, 그는 실수했다는 겁니다. 그는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산다고 더 낙이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처참한 죽음에 더 가까워질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할 일이 없을 때 죽으면 제일 좋다는 것이죠.
그냥 시간만 때우고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겁니다. 죽음보다 더 힘든 것이 권태로움이라는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그만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케이블 TV를 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는 말이죠. 노인네들이 공짜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면, 코로나나 더 전파시킬 뿐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 하나님은 참으로 집요하시다. 죽어 가는 인간을 가지고서도 태초부터 숨겨져 왔던 창조의 원리를 드러내는 재료로 사용하시려는 것이다. 육체에 속한 자는 율법에 속한 자라고 규정을 하셨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
* 육체에 속한 자는 율법에 속한 자 !!
여기에 보면 "육체에 속한 자는 율법에 속한 자라고 규정을 하셨다" 라고 하는데, 오늘강의는 이것을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그게 앞에서도 살펴본 갈라디아서 4장이라는 겁니다. 율법 안에 있고자 하는 자, 즉 율법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소속된 자는 육이라는 말이죠.
(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함인고 하니, '자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즉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빠져나옴", 그것이 곧 자유라는 겁니다. 자기가 알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빠져나오는 것이 자유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자유의 반대는 속박이 된다는 겁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인데, 물론 요즘은 일제압제라고 하지 않고 일제강점기라고 하는데, 이것도 의미의 교란인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요즘 그런 것이 많은데, 그래서 간호원이라고 하지 않고 간호사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원했습니까? 국민들이 원한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그러면 왜 간호원은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간호원들이 원한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소중하다" 라는 겁니다. 간호사라는 것은 의사와 동등하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존대를 받고 싶다는 것이죠. 물론 교사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공무원도 공무사도 바꿔야하지 싶은데, 하여튼 자기를 스스로 높이지 못해서 난리라는 겁니다.
그게 악령에 들려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병원에 가서 간호원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엉뚱한 주사를 엉덩이에 맞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지금 여러분은 웃고들 있지만, 만약에 자기 딸이 간호사라고 하면 쉽게 웃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죠.
* 율법에 속박이 된 인간들 !!
하지만 자유라는 것은 무시를 당하는 것에서 존대를 받는 것이 자유가 아닌데, 그러한 것은 악령이 들린 인간세상에서 조직화한 것이고, 간호원에서 간호사로 한다든지 하는 것이 말이죠. 그러니 그게 아니고 어디에 속박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디에 속박이 되었다는 겁니까? 율법에 속박이 되었다는 겁니다.
율법은 처벌권을 가지고 있는데,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이죠. 남이 처벌하지 않으면, 자기 양심이 처벌을 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윤리와 도덕, 그리고 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자유를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처벌하는데, 이제는 선과 악을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생긴 것이 윤리와 도덕이고,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처벌을 속박이라고 하시는데, 즉 갇혀있다고 보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더 센 법을 주시는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고 말이죠. 그러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른팔을 돌려서 이렇게 등뒤로 하면 왼손이 모르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되느냐는 겁니다.
*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 !!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라" 라고 하셨는데, 과연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번, 하늘을 향해서 던진다. 2번, 교회에 바친다. 3번 땅에서 제일 높은 곳에 묻어놓는다" 라고 하면, 여기서 과연 몇 번이냐는 말이죠.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이 있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여겨서, 예수님이 "너 죄 때문에 내가 죽는다" 라고 해서 십자가에 죽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진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가 보물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율법을 듣고 교회에 돈을 바쳐도, 그것은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즉 "교회에 헌금하는 것도 죄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해서 죽었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이 교회에 헌금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얼마나 했을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바치는 돈에 마음이 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교육관을 짓는다고, "장로는 천만원, 권사는 오백만원, 집사는 이백만원을 내세요" 라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장로가 천만원을 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로는 그 다음 주에 아무리 몸이 아파도 어느 교회로 갑니까? 자기가 헌금을 한 교회로 가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거기에 가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헌금을 했으니 교육관을 어떻게 잘 짓는지 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목사가 삥땅을 쳤는지도 알아보고 싶고 말이죠. 자기 딴에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고 헌금을 했는데, 목사가 그것을 제대로 사용했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선악논리인데,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잊을 수 있습니까?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헌금을 했다는 행동, 그것을 결코 잊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보물을 하늘이 아니라 땅에 쌓는 짓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도,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이런 일을 벌리셨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낸 돈에 대해서 관심이 사라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지은 죄가 자기가 낸 돈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돈을 내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돈을 가지고 교육관을 짓든지 목사 자가용을 바꾸든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그 횡재,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돈조차도 자기 돈이 아니라 애초부터 주님의 돈임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라고, 심지어는 "오른손이 범죄를 하면 찍어버려라" 라고 하심으로서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오른손이 멀쩡하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른손만이 아니고 왼손, 그리고 오른쪽 눈, 왼쪽 눈, 그야말로 온 몸이 가루가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는데, 그래서 속박인데, 즉 인간은 율법에 속박이 되었다는 겁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으면 구원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거기서부터 자유를 주신다는 말이죠.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이죠.
*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완성 !!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율법의 완성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데, 이게 예수님의 혼잣말처럼 들리지만, 요한은 놓치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성경말씀에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는 겁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러면 율법을 다 이루면 이게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 되는데, 그러니 사랑이 무엇인고 하니, "사랑이란 내게 없는 것, 내가 기대하지도 않는 것을 주시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데, 왜냐하면 서로 기대를 한다는 겁니다.
* 신상털기 !!
그래서 중매를 한다든지 선을 본다든지 하는 것이 정말이지 힘든다는 말이죠. "내가 이렇게 해주면, 과연 저 여자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간에 자기가 잘해준 것만큼 상대방에서 적절한 호응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졸지에 자기 신상만 다 털리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카페에서 서로 맞선을 보는데, 먼저 여자가 자기 소개를 다 했다는 말이죠. 자기의 직업은 무엇이고 취미는 무엇이고 가정환경은 어떻고 하면서, 그렇게 모두 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가 싱긋이 웃으면서 "오늘,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얼레리 꼴레리가 되고 마는데, 더욱이 그 다음날 남자 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여자가 너무 말이 많더라" 라고 하면, 그야말로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만다는 겁니다(ㅋㅋ).
* 지뢰밟기 !!
그런데 여자 쪽에서 그런 것까지도 미리 대비해서, 말을 아무 조심스럽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날에 남자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자가 말을 거의 하지 않더라. 그래서 나도 그냥 앉아 있다가 나왔어" 라고 나오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을 보려고 하면 걱정해야할 것이 어디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사랑이 아니고, 자기 소중함을 계속해서 지키기 위해서 괜찮은 배우자를 고르는 것인데, 즉 자기 보디가드를 구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결혼을 해도 그게 지뢰를 밟는 것이 되는데 말이죠(ㅋㅋ). 왜냐하면 상대방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은 결혼생활이란 것이 자존심과 자존심의 대결이 되고 마는데, 그래서 "우리는 결혼해서 50년이 되었습니다" 라고 해도, "그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서로 열심히 싸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서로가 밀리지 않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소중하니 말이죠.
* 속박이 아닌 자유 !!
하지만 그런 사랑은 바로 인생의 격량이고 인생의 실패인데, 그것을 주님께서는 속박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네 소중함에 네가 갇혀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자신을 배신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참된 사랑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누가 소중하다는 겁니까?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주님이 소중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속박이 아닌 자유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숨겨놓으신 비밀을 깨닫게 해주셔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속이고 우리 자신을 속이면서 기만적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속인 것에 대해서 기쁨으로 인정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3,25 오전 10시에 마침.
우리 손자 속박이는 언제 태어나지?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이한 삶 (0) | 2022.05.10 |
---|---|
죄 조달처 (0) | 2022.05.10 |
포획(지옥하나님2) (0) | 2022.03.15 |
세상과 같은 교회(지옥하나님1강) (0) | 2022.03.02 |
과거에서 선택으로 (0) | 2022.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