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 - 죄 조달처
22,04,04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법에 갇혀버린 인간 !!
오늘은 교재 2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법에 갇혀버린 인간의 신세' 라고 되어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다 어디에 가두어져있다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율법 아래에 매인 바가 되고, 또한 갇혔다고 한다는 말이죠.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But before faith came, we were kept under the law, shut up unto the faith which should afterwards be revealed.
우리가 이렇게 매여있는데, 그러니까 기독교, 천주교, 불교,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매인 상태에서, 즉 교도소 안에서 취미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요즘 젊게 보이려고 염색을 많이 하는데, 교도소 안에서도 염색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율법에 매인 바가 되면, 그 다음에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죽는다는 말이죠. 율법에 매인 바가 되면 그 결과가 죽음인데, 이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율법에 매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헌법에 매인 바가 되면, 국가에서 사형을 시키면 그 사람은 그냥 죽는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도 죽는 것으로 끝인데, 그게 인간이 만든 법의 한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율법에 매이게 되면, 이것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저주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저주로 죽으면 그게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이게 제일 큰 문제인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서 산다는 것이죠.
장례식을 할 때 보면, 흔히 "여보, 천국에 먼저 가서 잘 있어요.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 라고 하는데, 목사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겁니다. "먼저 지옥에 가 있으면, 나중에 다시 만나요"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남편이 복음에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아내도 복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데, 그러면 지옥에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뻐합니까?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저주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그냥 좀 당할 수 있는 저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몸에 살이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가까이 있는 이웃이 와서 날마다 저주를 하게 되면, 그게 진짜 밥맛이 없을 정도로 힘이 든다는 말이죠.
자기는 나름대로 마당을 청소하는데, 그런데 옆집에 별난 사람이 있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지저분하다고 잔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적질을 당하게 되면 몸이 바짝 마를 정도로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물론 몸이 뚱뚱해서 걱정인 사람은 이게 기쁜 소식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 율법의 지적질 !!
그런데 율법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지적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좀 벌었다고 교회에 와서 감사헌금을 하면, 디모데전서가 와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 라고 하고, 또한 자기 자랑거리를 좀 늘어놓으려고 하면, 이번에는 디모데후서가 와서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러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살아가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안일하게 사는 이유는 말씀을 보지 않기 때문인데, 즉 주님의 지적질을 무지해서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행복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 인간은 행복할 권한이 없어 !!
하지만 사람은 이 땅에서 행복할 권한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런 조건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매인바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갇혀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율법에 매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덤이 있던 악한 자도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그 악함을 근거로 해서 부활을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악함 부활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뒤끝이 있는데, 인간을 방치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주어서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인간을 끝까지 저주스럽게 물어뜯는다는 말이죠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는 이 책의 제목도, 그 처참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에 보면 '법에 갇힌 인간' 이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성경의 흐름과 맥'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성경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 율법과 인간의 반발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인간은 율법에 매인바가 되어있는데, 즉 인간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가는 것으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보고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율법이라는 쇠사슬이 우리 몸을 꽁꽁 묶어버리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죠.
그러니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구나. 신난다" 라고 하면 곤란한데,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 율법으로 묶어주세요.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없고, 인간 쪽에서 반발이 아주 강하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 인간의 반발이 성경의 시작인데, 성경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반발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겁니다. 인간세상이 그러하다는 것이죠.
그런 반발이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2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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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그렇다면 아담이 비록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대대로 죽음이라는 속성을 대물림해 주었지만, 그 후손들이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아서 주어진 거룩한 천상의 법을 다 준수하면 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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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반발인데, 법은 이렇게 인간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라고 하니, "그래, 이제부터 법을 지키자. 전에는 지키지 못했어도,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이 있기 때문에, 율법을 받고 난 뒤에는 율법을 요구를 이루라고 했으니, 이제는 이루어보자" 라고,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면서 나선다는 것이죠.
보통 1월이 되면 "올해는 반드시 담배를 끊는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해서 사흘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결국 피우게 된다는 말이죠. 그만큼 인간은 자기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에 보면 그런 의욕이 소용이 없는 이유가 나오는데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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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에 만드실 때는, 아예 선악을 아는 지식과는 무관한 피조물로서 만들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냥 금지령이 아니라, '선악을 아는 지식'이라는 내용 자체에 대해서 모르기를 원하는 금지령을 아담 앞에 두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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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체질이 되어버렸기에 !!
여기에 보면, 그냥 금지령이 아니라, '선악을 아는 지식' 이라는 내용 자체에 대해서 모르기를 원하는 금지령을 아담 앞에 두셨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약간 어렵지요? 그냥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자체를 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알아버렸는데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미 체질이 되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으로, 그렇게 체질화가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닌 척을 하면 됩니까? 양심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알아버렸다는 것이죠.
과거에 어떤 여자가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하면, 그러면 마음속으로는 "나는 모르는 여자다" 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겁니다. 물론 노래가사로는 되기는 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알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라고 말이죠. 이문세가 부른 노래인데, 하지만 그것은 속이 터져서 하는 소리라는 것이죠(ㅋㅋ).
물론 길에서는 모르는 척을 해도, 집에 가서는 "나를 버리고 가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를 수가 없는데, 당연히 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되돌아갈 수 없는 운명인데,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에 대해서, "저주를 받고 죽는 것이 아쉽다. 다시 돌아가야지" 라고 해도, 무슨 수로 되돌아가느냐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트라우마가 된다는 말이죠.
* 너는 내 아들이 되어라 !!
어떤 천주교 신자가 의대에 다니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만 친구가 운전하던 차에 탔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 같은 의대에 다니던 친구는 살았고 말이죠. 그러면 그 엄마는 당연히 그 아들의 친구에 대해서 분노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도 의대에 다니고 있었으니, 그 아들이 의사가 되면 자기 노후도 다 보장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엄마에게는 엄청난 자랑거리인데, 자기는 천주교 신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수시로 신부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는데, 그러면 신부는 삐딱하게 앉아서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엄마는 "아들친구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신부는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 아들친구를 사랑하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서는 얼마 있지 않아서 또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십자가라는 교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말이죠. 그러면 신부는 "그러면 실천에 옮기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자 그 엄마는 그 친구를 보고 "너는 내 아들이 되어라" 라고 해서, 자기 아들로 삼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 죄인인데, 그러니 네가 우리 아들이 못 이룬 꿈을 모두 이루어라.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어라. 그러면 나는 거기서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얻어서, 나의 이 분노의 감정이 성화가 될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성경에서 본 것이 있어서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이미 체질화가 되어서, 용서하는 척, 사랑하는 척, 즉 "이미 나는 너를 용서했다" 라고, 그렇게 아무리 척척을 해도, 그것이 오히려 더 화병이 된다는 겁니다. 천주교가 그렇게 위험한데,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분노가 올라오면 성질대로 미워하고 화를 내면 되는데, 그런데 미워하면 자기가 지옥에 갈까 싶어서, 도리어 그게 걱정이라는 겁니다.
결국 그 엄마는 성격 파탄자가 되고 마는데,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다 깨어진다는 말이죠. '밀양' 이라는 영화가 비슷한 내용인데, 교회 부흥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나서 나중에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를 틀어놓는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다 거짓말이야" 라는 것인데, 자기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주님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은 기분이 좋은데, 그리고 남이 자기를 어떻게 해도 그런 것은 그래도 용서가 되는데, 그런데 자기 자식에게 해코질을 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 본성을 숨기려고 하면 안 되는데, 우리 본성에는 선한 것이 결코 없다는 말이죠.
* 이중 인격자로서, 위선자로서 !!
그렇게 없으면 없다고 솔직하게 나오면 되는데, 그런데 있는 척을 하니까 문제라는 겁니다. 교회에서 권사가 되어서, 목사가 "선한 일을 하세요" 라고 하면, 장단을 맞추어서 '아멘' 소리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르는데, 전혀 되지도 않는 일에 대해서 아멘은 왜 하느냐는 것이죠(ㅋㅋ).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가 죽는 것은 성질이 더러워서 죽는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은 성질이 더러워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이것을 알면 얼마나 기쁜지 모르는데, 그렇지요? 50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자아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다고, 얼마나 마음 고생들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중 인격자로서, 위선자로서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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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되지 못하고 죽음으로 되돌리게 하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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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되돌리는 조건은 없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같은 방향을 갈 뿐인데, 개과천선해서 되돌아오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해주어야지, 좋게 좋게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반칙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마태복음 10장 5절과 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잃어버린 양 !!
그러니 전도를 할 때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하지 말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런 조건은 다 치우라는 말이죠. 조건이 따로 있는데, 그게 양은 양인데 무슨 양이라는 겁니까? 그게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은 잃어버린 양을 위한 것인데, 김양도 최양도 아니고 잃어버린 양이라는 겁니다(ㅋㅋ).
여기서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설정한 모든 조건들,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간에 모든 조건들 속에서 잃어버렸다는 말이죠. 종교, 돈, 건강, 믿음, 소망, 사랑 등등, 그런 것들과 전혀 무관한, 조금이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가능성이 있으면 그것은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양이 되는 조건조차도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나는 부족합니다. 정말 부족합니다" 라고 해도, 그렇게 겸손을 떠는 선한 행동은 여전히 자기의 잘남으로 남아있기에, 그것은 온전한 잃어버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도, 그렇게 되면 이게 교회에 다니는 것인지 절에 다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계속해서 더 낮아진 자리로 가면, 즉 의사가 되어서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봉사를 하면, 그러면 어느 정도는 낮아진 것인가요?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면 요양병원에 보내면 되는데, "나는 며느리로서 권사로서 도저히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서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기가 찰 노릇이라는 겁니다. 시아버지가 잃어버린 양이라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 바늘로 쑤셔라 !!
잃어버린 양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바늘을 가지고 쑤셔서 성질을 돋우면 된다는 말이죠. 진짜로 자기 의를 버린 사람은, 즉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하는 자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이 없는데, 그게 아니라면 성질이 즉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0.3초라고 하는데, 다시 후회를 하든 말든 간에 0.3초만에 곧 바로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는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없는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잃어버린 양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딜레마라는 것이죠.
잃어버린 양의 행세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하지만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은 건드리면 "나는 죄인인 줄 아는데, 왜 건드려?" 라고 하는데, 말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겁니다. 죄인이니 건드리는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자기는 죄인, 즉 성도이니 건드리면 안 된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 잃어버린 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양에게 죽임을 당해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양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사람을 건드린 게 아니라,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야곱인데, 야곱은 아무리 마음을 낮추어도 이스라엘이라는 다른 인간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직접 와서 야곱의 교만을 들추어내는데, 이미 체질화가 되어있는 야곱성향을 말이죠. 그렇게 들추어내게 되면, 그러면 누가 이기는고 하니, 야곱이 이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마저 이긴 놈이다" 라고 해서,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죠.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러면 야곱이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난 다음에 자기 이름을 보면, "내가 옛날에 사고를 참 많이 쳤구나" 라는 것이 생각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공격한 자' 라는 말이죠. 이긴다는 것은 공격을 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것을 사도행전 9장에서는 '예수님을 핍박한 자' 라고 하는데,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겁니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김 하나님을공격한자 !!
그래서 여러분의 이름을 다시 지어보면, 그 이름이 좀 긴데, '하나님을 공격한 자'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이 김 씨라고 한다면 '김 하나님을 공격한 자',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름을 일부러 그렇게 지어버린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보면, 죽은 사라의 태에서 자식이 태어났는데, 그러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요? 당연히 아주 멋있게 지을 것인데, 그런데 그 이름이 '이삭' 이라는 말이죠. 그 의미는 농담, 혹은 웃음인데, 즉 "하나님의 일에 우리 부모는 훼방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물로 주신 자식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보면서 자기 죄를 아니까, 그 자식이 얼마나 귀한 자식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바로 이 자식에게 하나님의 일이 담겨있는데, 즉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 되게 하시는구나" 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자식을 어떻게 하십니까? 좀 자라고 난 다음에 모리아 산에서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자식이 죽지 아니하면 너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을 죽일 때, 죽이는 척을 한 것이 아니고, 이게 잃어버린 양이니, 실제로 "네 자식을 죽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그 근처수풀에 대신할 양이 준비가 되어있음을 미리 안 것이 아닌데,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모르게 해야, 그게 인간의 자기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구원받을 줄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의 종교적인 감수성이라는 것이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괜찮은 종교를 선택한 것인데,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다가 "나는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야" 라는 것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마트에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는데, 그런데 막상 계산대에 가서 그만 마음이 바뀌어서 취소하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물려달라고 할 수가 있는데, 무슨 그런 구원이 다 있느냐는 말이죠.
*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대전강의에서 질문을 했는데, 전혀 답변을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기에 주의 일이 되는데, 아닌가요? (ㅋㅋ) 아무튼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는데,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이것은 사실 제가 질문을 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여기에서 답변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온 답변이 "예!" 라는 것인데, 제가 순간적으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는데 말이죠.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것을 묻는다는 겁니다. 그 정답은 "아니오!" 라는 것인데, 이 자리에서 또 다시 묻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말이죠(ㅋㅋ).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구원에 중도탈락은 없어 !!
목사들이 사기를 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중도탈락입니다"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의 일에는 중도탈락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죠.
주님은 자기 백성으로 택해놓고서 버리시는 일은 없는데, 구약의 이스라엘은 모형으로서 한 것이고, 신약 때는 그런 것이 없다 .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탈락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너의 어떤 행동과 태도도 일체 묻지 않겠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시편 103편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를 멀리 옮기셨으며" 라고 하는데, 우리의 죄를 그렇게 다 처리가 완료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확정된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를 구원에서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겠다는, 그런 차원이라는 말이죠.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그것은 아니야, 그것은 아니지" 라는 식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일이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선 "그것은 너의 욕심이야. 주의 일이 아니야" 라고 하는 차원에서 징계를 하시는데, 그게 무슨 구원의 탈락이냐는 말이죠. 그래서 사생아의 경우에는 징계가 없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징계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저에게 징계가 다 있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생자의 반대말이 친아들인데,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육적인 욕정으로 가리지 말라고, 그래서 징계를 하신다는 말이죠. 나이가 5살인데, 엄마 가슴에 손을 대고 젖을 달라고 하면, 그러면 젖을 줍니까? 주지 않는데, "이놈아, 손을 떼라" 라고 하면서 손을 치운다는 겁니다. 바로 그 치우는 것, 그게 징계라는 말이죠.
* 징계는 매일의 양식 !!
그러니 징계가 매일같이 오게 되면, 그게 매일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징계를 받는데, 그런데 왜 그게 징계로 느껴지지 않는고 하니, 믿음이 너무 좋아서, 그게 감사로 순화가 된다는 말이죠. 아닌가요? (ㅋㅋ) 그래서 징계인 줄을 모르는데, 그러니 모든 것은 일체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은 없는데, 그런 복을 하나님은 성도에게만 주신다.
결코 우리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만약에 자기 뜻대로 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백퍼센트 욕심이라는 말이죠. "이번 금요철야에서 기도했더니 응답이 되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탐욕이 여전히 살아있는 겁니다. 백퍼센트 그렇다는 말이죠.
* 인간에게, 자기 구원은 없어 !!
다시 말해서, 잃어버린 양이 될 때, 복음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이 복음으로 현실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잃어버린 양이 필요한데, 그러면 잃어버린 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입니까? 주님의 자기 일입니까? 그러면 구원은 누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자기 구원은 있습니까?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기존의 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자기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인간에게 자기 구원은 없는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뽑혀서 땡겨지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나는 구원을 받고 싶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이 된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 집으로 돌아가세요 !!
여기 교재 30페이지에 보면 마태복음 19장 말씀이 나오는데,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찾아간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부자청년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즉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온다는 말이죠.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니 이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고, 범죄한 인간이, 즉 율법 안에 갇혀있는 인간이 자기를 챙기고자 찾아왔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결과적으로 그 부자청년에게 "집으로 돌아가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지옥으로 밀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 전도하는 것도 죄 !!
교회에 와서 "어떤 집사님이 전도해서 왔습니다" 라고 하면 곤란한데, 물론 전도해서 교회까진 올 수 있는데, 구원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교회에까지 나오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해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전혀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인데(ㅋㅋ), 우리의 발걸음도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발을 다치면 걸을 수 있습니까? 걸을 수 없는데, 그러니 누구를 만나는 것도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어떤 집사님이 10명을 전도한다고 해서 10명이 다 교회에 나옵니까?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집사님이 나를 찾아온 것도 사람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고, 그 집사님은 전도를 한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죄를 지었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전도가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우리는 전도가 아주 귀하고도 고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그래서 당연히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요? 하지만 주님의 일은 고상한 일이 아니고, 그게 전도든 이런 강의든 간에, 그것이 다 죄를 짓는 일임을 알게 하심으로서, 구원에 있어서 목사든 집사든 간에, 일체 인간을 다 빼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징계를 더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낮추고 낮추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낮아진 괜찮은 사람이 되어버리니, 그것은 엉터리라는 겁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그냥 주님이 일을 시킬 뿐이라는 말이죠.
* 내 청춘을 돌려주세요 !!
여러분이 이해를 잘 했는지 여기서 테스트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번에 신천지에 다니던 어떤 사람이 당회장에게 고발장을 내었다고 하는데, "내 청춘을 돌려주세요" 라고, 쉽게 말해서, 돈을 돌려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소송이 가능합니까? 자기가 믿어놓고서는 말이죠.
이것은 남의 탓을 하면 안 되는데,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에게 속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짜임에 들통난 것에 대해서, 그 당회장을 찾아가서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당신 때문에 내가 가짜임을 알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 어제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에 !!
여기서 한 번 적어보겠는데, 먼저 1번은 "나는 어제 어떤 강에 발을 담구었다. 오늘 같은 강에 발을 담구었다" 라는 것이고, 2번은 "나는 어제 어떤 물에 발을 담구었다. 오늘 같은 물에 발을 담구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1번과 2번이 동일한 취지의 문장입니까? 이것이 저의 질문인데 말이죠.
문장이 다른데, 여기서 1번은 신앙이고 2번은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제의 강은 오늘의 강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늘의 강은 새롭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서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새로운 강을, 다른 강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강이 아니고 물이라고 하면, 그게 같은 물이고 그래서 지가 알아서 발을 담글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아는 자기 신앙이 발을 두 번 담근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썩었다는 말이죠. 어제의 믿음은 오늘의 믿음과 동일성을 갖출 수 없는데, 그게 동일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담의 동일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일하신다" 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동일성인데, 복음은 매일같이 새롭게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2번이 되면 자기가 자기를 믿는 것인데, 이것은 불신앙이란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엉터리인데,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도 받을 것이다" 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지, 주님이 살아있는 게 아니다. 주님이 살아있으려면, 그런 사람은 자기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주님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감사한다 . 즉 자기가 죽은 자로서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것을 감사하게 된다 . 그래서 자기는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
* 소유가 아닌, 흐름에 맡겨야 !!
1번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데, 그러니 어제의 믿음을 오늘까지 우려먹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제 아무리 곰탕이라고 해도, 어제의 곰탕은 맛이 없다는 겁니다. 항상 새롭게 끓여야, 그것이 정말로 곰탕답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강은 같지만, 그 물이 같은 물이 아니라는 말이죠.
1번은 물이 같지 않은데, 그런데 2번은 같은 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여서 썩어질 수밖에 없는 물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1번은 흐르는 물인데, 물이라도 똑같은 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흐름에 맡겨야만 하는데, 자기 소유에 집착하게 되면 자기도 썩고 소유도 썩고, 그렇게 같이 썩는다는 겁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네가 할 일이 없으니 매일같이 자기 부동산과 돈을 세고 있는데, 자기 통장과 건물을 챙긴다고 말이죠. 지금 이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인데(ㅋㅋ), 그런데 노인네의 욕심이, 물론 자기는 욕심이라고 여기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자기에게 그런 것과 동일한 것이 있지 않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가진 것으로 인하여 행복해지고 싶고 즐거워지고 싶다" 라고 하는 것, 이게 교회를 다니던 다니지 않던 간에 없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에게 다 있는데, 비록 부동산은 없어도 그런 것은 다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 너는 국물도 없어 !!
젊은 자식놈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초등학교 때는 이렇게 하지 않았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식은 "아버지, 저는 초등학생이 아니고 대학생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나는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라고 하면, "아버지가 너무 욕심이 많네요" 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는 "너는 국물도 없어" 라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유산을 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사라는 것,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요? 그런 세계가 바로 이 세상이란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다녀도 문제고,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역시 문제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상 남아있는 것은 문젯거리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본인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만들어주시는 주님의 부지런하심, 열심, 활동력, 바로 거기에 발만 담그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서 같이 흘러가면 된다는 것이죠.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어제의 나는 나가 아니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백세인생' 이라는 노래에 보면, 육십에도 칠십에도 팔십에서 구십에도 백세에도 저 세상에는 갈 수 없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가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러니 핑계가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 가수를 누가 시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가짜 뉴스도 돌아다니고 하는데,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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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인생] 이애란
육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간다고 전해라
칠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간다고 전해라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날 좋은시에 간다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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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백세까지 살겠다고 하는 것이 2번인데, 이 2번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활동과 징계하심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관심을 두니 나이가 들어서 내세울 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과거를, 즉 "나는 왕년에 이랬다"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말이죠. 이게 불신앙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2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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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되지 못하고 죽음으로 되돌리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뿐이다. 이는 애초부터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는 완전히 무관한 조건 하에 계속 산 생령이 되는 식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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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책임추궁 !!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첫 번째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생령, 즉 산 영으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데, 인간이 악마에게 속아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책무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내가 만든 살아있는 것을 너는 어떻게 했지? 왜 죽여버렸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에게 새 자전거를 사주었는데 바로 고장을 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매인바가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책임추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나는 분명히 너를 살아있게 만들었어. 거기에 조건이 하나 있는데,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어떻게 나옵니까? 인간을 죽이는 방법은 간단한데, 인간이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독약이었다는 말이죠.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은 제 아무리 살고자 해도 결국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문제는 의외로 간단한데, 아무리 고민거리가 많아 보여도 그 원인은 매우 간단하다는 말이죠. "아, 이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내 힘으로는 안 되는구나" 라는 겁니다.
* 영원한 저주 아래에 !!
그리고 죽어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매인바가 되면,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저주가 영원하도록 진행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같이 저주 아래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지옥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이미 확정된 사항인데, 그러니 저를 보고 인상을 쓰면서 시비를 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ㅋㅋ).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율법에 매인바가 되어서,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이런 상황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복음이 구현이 되는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기 전에 먼저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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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자아는 이미 범죄 해버린 아담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이다. 금지는 욕망을 부추긴다. 건너편에서 손짓하는 악마가 그리운 것이다. 따라서 후손들은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는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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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금지한 것을 소망한다 !!
인간이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언제 행복합니까? 금지한 것을 위반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죠. 이런 본성을 우리가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언서 9장에 보면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잠 9:17)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여기에 '마신다' 라는 생수가 놓여있는데, 이렇게 그냥 있으면 마셔도 별다른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등산을 가서 목이 매우 마르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는 물이 없고 친구는 물이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친구가 급하게 볼 일을 보러 간 사이에 몰래 마시면 얼마나 그 물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는 겁니다(ㅋㅋ).
* 몰래 먹는 떡이 맛있어 !!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 동네에 보면 떡집이 생각보다 많이 있는데, 노인네들이 많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 중에서 어느 떡집의 떡이 가장 맛이 있을까요? 넌센스 퀴즈 같지만 그렇지가 않은데, 역시 몰래 먹는 떡이 가장 맛있다는 것이죠(ㅋㅋ).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번 돈보다도 고스톱을 쳐서 딴 돈이 훨씬 더 좋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강원랜드에 왜 갑니까? 빈털터리가 될 줄 알면서도 이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간다는 말이죠. 주식투자도 그런 것인데, 그래서 회사에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사고 팔고 한다는 겁니다. 사장도 마찬가지인데, 직원들은 일을 시키고 자기는 아예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데, 그렇게 번 돈이 훨씬 더 짜릿하다는 말이죠.
* 우리는 왜 이런 지경에 놓였는가?
그러면 현실적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왜 잃어버렸는지, 우리의 힘으로는 왜 구원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도 소용이 없는데, 왜 그러하냐는 말이죠. 물론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 현실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서 제가 글을 하나 복사해왔는데, 김민기의 '강변에서' 라는 노래가사인데 말이죠.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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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서] 김민기 곡, 글, 노래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순이네 뎅그런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오른다
바람은 어두워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 오는걸까
높다란 철교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고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아이야 불밝혀라 뱃전에 불밝혀라
저 강건너 오솔길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저어라
열 여섯살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저어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아이야 불밝혀라 뱃전에 불밝혀라
저 강건너 오솔길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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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시골에서 서울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 일하러 올라왔는지 모르는데, 특히 어린 소녀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이제 저녁노을이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친 몸을 이끌고 말이죠. 그런데 16살 먹은 순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잔업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했기 때문에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여야만 한다는 말이죠. 물론 지금도 수출로 먹고 사는데, 그래야 투자를 해서 사회간접시설과 같은 것을 지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공장을 제대로 잘 돌리고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도로와 같은 것들이 반드시 제대로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순이에게 산다는 것은?
김민기는 '강변에서' 라고 노래제목을 붙였지만, 저는 '산다는 게 뭐냐?' 라고 바꾸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과 현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순이는 16살인데, 고등학생의 나이라는 겁니다. 맏딸이 되어서 자기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맏딸로서 해야하는 일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순이에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일에 찌들려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든 순이에게 말이죠. 이것을 복음과 연결을 시켜보자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피곤한 것이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요? 마치 기계처럼 돌아간다는 것이죠.
* 연약한 노동자와 악덕 자본가 !!
그렇다고 하면 이 16살 먹은 순이에게 피곤을 유발시킨 피곤 유발자가 있는데, 그러면 우리의 머리 속에는 악덕 자본가가 떠오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연약한 노동자, 그리고 악덕 자본가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16살 먹은 노동자인 순이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노동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훈련이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죠. 이 회사가 다른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계속해서 수출을 하려고 하면 노동의 질을 높여야 하는데, 즉 노동 생산성이 높아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순이의 경우는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기에 여기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고급 노동을 소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순이는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대학에서 제공해주는 고급 기술을 습득해서 회사에서 일을 해야 회사가 살고, 그렇게 회사가 살면 수출이 잘 되어서 달러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달러가 들어오면 그 상품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서, 외국에서 대량의 투자자본을 유치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회사가 운영하는 공장의 시스템이 바뀌면서, 작은 노동으로도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고, 그러면 노동자의 월급이 높아지게 되고, 그러면 순이는 이제 휴가를 받아서 유럽여행도 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 노래가사에 의하면 16살 순이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렇지요? 불쌍하고 측은하게만 여겨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16살 순이는 공부를 더 해야하는데, 그래야 노동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이죠. 노동의 질이 한정이 되어버리면, 회사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공부하기 싫으면 !!
그러니 재주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을 알아야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세상이 얼마나 참혹한지 모르는데, 동정심으로만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이 세상은 아는 것이 없으면 살 수 없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란 말이죠. 공부도 하지 않고 놀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사회악으로 바뀐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노래가사를 보면, 처음에는 측은한 마음이 드는데, 그런데 이것이 국가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결국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을 벌기 위한 역량과 재주를 키워서, 즉 남들보다 더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복음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몰래 마신 물과 훔친 떡이 더 맛이 있는데, 그런데 이게 단순한 도적질이 아니고, 경쟁이라는 이름의 정당화가 된 도적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일한 진리로 인정하는 이 세상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죠.
* 이 세상을 도적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정당화가 되고 합법화가 된 도적질을 변경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아이디어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도적질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몽땅 다 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다 도둑놈인데,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도둑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인데, 그게 진리라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아들이 취직해서 좋다고 하는데, 그러나 회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얼마짜리 노동인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입사원은 취직했다는 것을 자랑할 시간도 없는데, 위에서 주어지는 업무량을 제대로 감당해내려고 하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상도 못할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스스로 퇴근을 반납하고 밤이 새도록 업무파악을 해야하는데, 그게 6개월은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은 보너스가 없는데, 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알아서 나가라는 말이죠. 요즘은 1년의 인턴기간을 가지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회사가 살아야 직원이 산다는 겁니다.
* 똑똑한 도둑놈이 되어라 !!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해라" 라고 하는 것은 "똑똑한 도둑놈이 되어라" 라는 의미인데, 하지만 그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이죠. "인간이 참 좋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모아놓은 나라가 티벳인데, 세계에서 제일 가난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원리는 무엇인고 하니, 잘사는 놈이 대우받는 세상이라는 말이죠. 부자가 대우를 받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셨다는 말이죠. 즉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그런데 그런 천국에 불가능한 부자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는 말이죠. 심지어 금요일에는 밤을 새워서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애꿎은 커피만 박살내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모으면 목사는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데, 그것을 부흥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부흥이 될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노림수가 있어서 당연히 큰 교회에 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들이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 선지자를 원한다는 겁니다. 둘 다 짝짝쿵이 맞는데, 그저 성공하고 출세하고, 반면에 자기가 도둑놈이라는 것은 감춘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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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죄 안에 놓여 있는 인간'으로 봐서 통째로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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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물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넓게 강물로 다루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애초부터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악한지, 그런 것은 묻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아무리 착해도 도둑놈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 이제 교재 2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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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생산되는 죄는 율법의 사법성에 의거하여 저주를 초래하게 된다. 단순한 숨 끊어짐이 아니라 지옥행이다. 율법은 계속 선할 수밖에 없고 지옥에 대해서 율법은 철저하게 선을 유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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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죄의 조달처 !!
'생산되는 죄' 라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데, 인간은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생산하는 기계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율법의 사법성을 살리기 위해서, 인간을 통해서 필요한 죄를 조달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현재 우리 인간이 놓여있는 형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죄의 조달처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대기업이 되어서 모든 죄를 물으시고, 인간은 하청업체가 되어서 죄의 부품들을 대기업에게 조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 죄를 다 모아서 "아담이 이 죄의 대표자다" 라고 선포하신다는 것이죠.
이런 사실을 우리가 슬프게 보면 안 되는데, 이것을 아는 자가 곧 '잃어버린 양' 라는 겁니다. 이러한 잃어버린 양의 눈에만 복음이 띄게 되는데, 즉 십자가의 죄 용서함이 비로소 보이고, 또한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이 다 죄가 나오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나는 설교를 했으니 착한 일을 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설교한 것이 곧 죄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때,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그것을 자랑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정리를 해보면,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만나지 않고 나란히 가는데, 인간의 일은 죄의 일이고 결국 저주스러운 십자가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십자가에서 만나는데, 즉 저주스러운 죽음에서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저주를 받은 자로 보고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 세리, 창녀로 보고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7년 동안 마귀가 들린 여인, 혹은 12년 동안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여인이란 겁니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으면 불의한 청지기라고 할 수 있는데, 회사돈을 횡령하고 퇴직한 직원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런 직원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으면, 아버지 의돈을 미리 당겨서 기생들에게 탕진을 해버린 탕자라는 말이죠. 또한 국가세금을 착복한 세리장으로, 성경에 그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삭개오라는 겁니다. 그가 본의 아니게 주님에게 다 토해내었는데, "4매를 갚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얼마나 챙겼으면 그렇게 나오겠느냐는 겁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런 자들을 언급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세금을 챙겨서 착복하던 자가 있었는데, 누구입니까? 그가 바로 마태라는 말이죠. "이런 놈들이어야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아니고, 비록 우리가 멀쩡해도, 사실은 전혀 멀쩡하지도 않지만 말이죠.
* 주님의 리스트 !!
우리를 이런 자들로, 이런 리스트에 넣어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은 항상 감사라는 말이죠. 막달라 마리아는 몸을 파는 여자였는데, 물론 그게 아니라는 주장도 많이 있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몸을 팔아도 구원을 받았으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간통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죄 용서를 받았다는 말이죠.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죽어야 하는데, 주님은 무슨 근거로 살려주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간통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이, 간통한 자들보다도 더 나쁜 놈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으로 한 것도 간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교회에 가도 이런 복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김민기의 '강변에서' 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그냥 눈앞에 있는 것, 즉 "참 불쌍하다. 16살 먹은 소녀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는데, 하지만 공부가 되겠느냐는 겁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있는데 말이죠.
사람들은 이 세상을 너무나도 좁게 보기 때문에, 자기 앞에 밥 한 그릇이 놓여있으면 당연히 자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렇지요? 자기가 열심히 일했기에 먹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국가단위의 도적질이 있었다는 말이죠.
북한의 경우에는, 인민들의 밥 한 그릇에는, 똑똑한 놈들이 전 세계의 가상화폐를 해킹했기 때문인데, 그들이 과연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인간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죄인임을 아는 자가 곧 복음을 아는 자 !!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물론 성경말씀이 중요한데, 그게 기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끄집어내어서 살펴서, 복음을 아는 것이 자기의 장기가 되고 의로움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나는 너보다 성경말씀을 더 많이 안다. 그래서 훌륭하다" 라는 인식을 자기에게 스스로 새겨 넣으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더욱 더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복음을 아는 자라는 말이죠. 그러니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제발 목사에게 속아넘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말씀을 달달 외워도, 우리가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로마서 3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의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여기 10절에 나오는데, 즉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심판을 전제로 해서 주님이 하신 일은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게 해주시고, 오히려 정당화가 될 수 없음을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4,17 오후 8시에 마침.
오늘도 도둑놈이 말씀을 공부하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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