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포획(지옥하나님2)

아빠와 함께 2022. 3. 15. 11:51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 - 포획

22,03,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여기 교재 17페이지에 보면, '2장, 교회와 세상의 대립성' 이라고 되어있는데, 작은 제목으로는 '차단' 이라고 되어있고 말이죠. 그러면 교재 1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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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오직 '없음'에서 시작해서 '있음'을 유발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정죄하시는 차원에서 모두를 '없음'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치 있는 것은 인간 세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명확해져 버린 상황이다. '있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분'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모든 통로는 차단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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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것'을 통한 '보이지 않는 분'의 접근 !!

여기에 "있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분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모든 통로는 차단되어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과연 있는 것을 통한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접근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겁니다.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교재 17페이지에 보면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친히 세워주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뿐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있는 것을 통한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접근은 오직 성령님만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이것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성령님만이 하신다" 라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인간은 왜 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죠.

* 비밀의 통로, 종교 !!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있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접근하면서, 여기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신(god), 즉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것을 '종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옛날 종교에는 여기에 무엇이 섞여있는고 하니, 과학과 철학,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밀이 이 종교 안에 다 담겨있다는 말이죠.

옛날에 사람들이 그린 동굴벽화가 있는데, 그게 다 종교벽화라는 겁니다. 신이 자기가 사냥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비는 장소가 동굴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동굴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 접속할 수 있는 신비의 장소인데, 즉 접신해서 자기의 요구조건을 신에게 알릴 수 있는 장소였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타미라 동굴인데, 거기에 보면 벽과 천장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는 말이죠.

* 조상들이 알았던 이야기들 !!

이야기를 좀 더 이어나가면, 이렇게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제거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늙어서 죽으니 말이죠. 그 다음에도 사람이 있는데, 역시 늙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지금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죠.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지요? 그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죽은 사람들은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보이는 인간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이들은 신을 무엇으로 본다는 겁니까?

고대인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조상들인데, 그들이 신봉했던 신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현재 보이는 것은 자기가 보이는데, 그렇다면 자기 이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누군가가 또 누군가를 있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이미 사라졌지만 우리가 모르는, 즉 그들이 아는 그 이전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이들에게서 전달을 받았을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들 이전의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신과 교제했던 언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전통이 되어서 내려오면서 종교가 된다는 것이죠.

천주교의 경우에는 이게 특히 발달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런 제도를 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조상들이 했던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조상들이 지금보다 잘난 것이 있습니까? 분명히 있는데,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했던 것을 인수인계를 받았다는 말이죠. 즉 "내가 여기 있음은 조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 조상숭배 !!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종교가 무엇인고 하니, 그들에게 종교란 것은 조상들이 믿었다는 것을 믿겠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조상숭배라는 말이죠. 굉장히 합리적인데, 그 논리가 분명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 조상들이 알고 있어. 왜냐하면 조상들은 과거를 잘 알아" 라는 것인데, 우리는 후대의 사람이기에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신을 자기가 만들지 않겠다는 것인데, 만약에 자기가 만들면 너무 건방지게 보인다는 말이죠. 너무나 개인적이고 보편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 도덕과 패턴 !!

이 종교 안에는 과학과 철학과 어떤 비밀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마치 행주를 짜듯이 짜면 거기에서 도덕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 도덕은 보이지 않는 질서인데, 즉 도덕은 인간들이 대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대자연에는 패턴이 있는데, 즉 일정한 형식이 반복된다는 것이죠. 왜 뜨개질을 할 때 보면 같은 모양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패턴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대자연에서 패턴을 뽑아낸다는 말이죠. 이게 천문학이고 과학기술이라는 겁니다.

* DNA의 전달 !!

인간 속의 단백질에서 그 패턴을 뽑아내게 되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몸은 18가지 아미노산의 조합을 통해서 수 억개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단백질을 조사해보면 아미노산으로 되어있고, 그 아미노산은 DNA와 RNA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DNA가 무엇인고 하니, 남자와 여자가 각각 자기의 자아됨을 포기하고 전달하는 것인데, 남자는 남자됨을 포기하고 여자는 여자됨을 포기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1,600미터 릴레이를 하면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닌데, 각자 맡은 구간을 달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앞사람에게 바통을 전달해주는데, 바로 그 바통이 DNA라는 말이죠.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각자의 DNA를 합쳐서 자식에게 전달해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자식 속에 자기의 DNA를 삽입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생식기능이고, 자식의 생산이라는 것이죠.

* 가정교육 !!

왜 남의 자식보다 자기 자식이 좋은고 하니까, 자기 것이 그 안에 들어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마치 서랍에 양말을 넣어놓듯이 자식 안에 자기 DNA를 넣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DNA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부모가 자식을 조사하는데, 그것을 '가정교육'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정교육은 자기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원칙, 즉 이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자식이 위반한다면 가차없이 야단을 친다는 말이죠. "네가 그러면 안 돼" 라고 말이죠. 그러면 자식이 사춘기가 되어서 반항을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 세대이고 우리는 세대는 달라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니야, 그러면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신들의 세계 !!

그러니 자식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자연질서의 패턴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모든 혈통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감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인간에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것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살아야하고 희망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뭔가 지킬 것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지킬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현재 있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조상님의 세계인데, 더 궁극적으로는 신의 세계가 아니고 '신들의 세계' 라는 겁니다.

* 육(肉) !!

방금 짧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안에 생물, 물리, 철학, 도덕, 윤리, 종교 등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 전체의 바탕은 인간의 혈통중심인데, 이 인간의 혈통을 성경에서는 한 글자로 '육(肉)'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라고 하는데, 즉 우리 인간은 육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러니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 육을 지키기 위해서 조상들의 신을 도입한다는 말이죠. 아까 유대인들을 이야기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지금도 그들은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함입니까? 그게 아니면 자기 DNA, 즉 육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로마서 11장을 보겠는데, 15절에서 20절입니다.

(롬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 죽지 아니하면 사는 것은 없다 !!

15절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라고 하는데, 사도가 맡은 직분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육의 사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렸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죽은 것에서 사는 것'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살기 위해서는 먼저 육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필수적이란 겁니다. 즉 "죽지 아니하면 사는 것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기 DNA를 죽일 리가 있습니까? 그런 일은 결코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이유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인데, 그게 인간의 본성인데, 그렇게 뭔가 남기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기가 그냥 죽는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라고 하는데, 그리고 20절에서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있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만큼은 어떻다는 겁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있는 것으로, 그렇게 방향을 거꾸로 해서 누군가가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 사무엘아, 사무엘아 !!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어린 소년이 한 명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사무엘이라는 말이죠. 이 사무엘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러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육의 이론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듣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어른이 자기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후차적인 어린아이는 먼저 선점한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후손이 조상의 말을 듣고 살아가듯이, 살아있는 사람은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사무엘 3장에 보면 이 두 가지가 다 나와있는데, 어린 사무엘은 누구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고 하니, 어른의 말을 듣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도 나와있고, 그리고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부르시는데, 이게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러분도 교회에 다니고 하지만, 그런데 실제로 주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으로 신기해하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저 같은 인간을 찾아오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기껏 종교에 불과한데, 즉 "나에게 무슨 이익을 주겠습니까?" 라고 하는, 자기 DNA를 유지하고 이 세상의 이론과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의지해서, "내 것은 내가 지키겠다" 라고 하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인간적인 육의 속성을 발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은 간단하게 '아담 안' 이라고 하는데, 즉 아담 안에 같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안다고 여기고 지우겠습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판단하고 싶어서 직접 끼어드는 것이 아니고, '구경꾼'으로 있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지금 강원도에 엄청난 산불이 났는데, 거기에 사는 주민들과 우리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냥 TV로 바라볼 뿐이라는 겁니다.

* 나는 과연 구경꾼이 될 수 있는가?

광주의 버스터미널에 가보면, 과거에는 거기에 아스팔트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혀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무너진 39층짜리 신축 아파트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무너진 아파트의 경우에, 그것을 분양받은 사람은 자기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람들은 일단 자기 단도리를 하고 나서 창문을 열고 바깥을 구경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비겁해도 일단은 구경꾼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도 우리는 역시 구경꾼이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아니고 그 나라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과연 구경꾼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구경꾼이 될 수 없는데, 그 이야기가 구약성경인 에스겔서에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스겔서 18장 1절에서 4절을 보겠습니다.

(겔 18: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What do you mean by using this proverb concerning the land of Israel saying, 'The fathers eat the sour grapes, But the children's teeth are set on edge'?
(겔 18: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 구경꾼은 없어 !!

이스라엘의 속담에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라고 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버지의 이가 시린 것이지 아들의 이가 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 속담은 틀렸다는 것인데, 즉 아버지의 이가 시리면 그 아들의 이도 시리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똑같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 즉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경꾼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1939년에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키는데, 그때의 정당이 히틀러의 나치당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독일국민들 중에서 나치당이 아닌 자들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당에 가입하지 않은 자들은 전쟁에 있어서 구경꾼이 되겠습니까? "나치당 너거들끼리 전쟁해라. 나는 나치당이 아니라서 구경만 하겠다"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안 되는데, 즉 "나는 구경꾼인데, 시키는 대로만 했다" 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 나는 죄가 없다 !!

2차대전 당시에 독일의 2인자인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나중에 붙잡혀서 예루살렘에서 전범재판을 받으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유대인들을 혐오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공무원으로서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 나는 기독교 신자고, 집에 가면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평범한 사람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6백만이 학살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만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전쟁으로 인해서 죽은 자들이 3,400만이라는 겁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말이죠.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숫자라는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올려놓았는데, 피의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이죠.

아무튼 아이히만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국가 공무원으로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는 주도자가 아니고 구경꾼이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죄는 아담이 지었고, 나는 아담의 그 DNA를 물려받았을 뿐인데, 그러니 나는 죄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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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독일계 미국인이자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1963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의 악행은 광신자들이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아렌트는 주장했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가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였다. 그 후 아이히만은 기소되어 1961년 4월 11일 공개재판이 열렸는데, 이를 참관하던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한 평론을 작성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주관했던 만큼 매우 사악하고 악마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아주 친절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공개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그동안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해, 본인은 그저 자신의 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지시한 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일관했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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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성립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모두 다 불러낸다는 겁니다. 개별적 심판을 받는데,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요한계시록 20장에도 나오는데, 각자의 행함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나는 선악과를 구경도 하지 못했어요 !!

그 어떤 인간도 이 성경말씀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나는 교회에 다닌 적이 없어요. 성경을 몰라요. 나는 불교를 믿고 있어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전혀 몰랐어요" 라고, 그렇게 제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결국에는 모두가 마지막 때는 심판대 앞에 서야만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는 선악과를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우리 조상이 따먹었어요" 라고 해도, 그리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죽였지,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그 죄값을 물으면 곤란하지요" 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이 사는 이 세계에서나 통하는 윤리와 도덕이고 합리성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이 인간들의 합리성에 부합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 그냥 주는 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

지금 주님을 일하고 계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면 되는 겁니까? 이게 같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주님을 부지런히 일하시는데, 햇빛도 주시고 공기도 주신다는 말이죠. 지금도 복음을 주시고, 성령으로 일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모르는 이야기인데요? 나에게 언질을 해주어야지요? 나는 내 할 일도 바빠요. 아침에 청소하고 밥하고 정신이 없어요. 나는 주님의 일이 구경꾼인데, 모르는 바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이히만처럼 "주는 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의 책임이 다 면제가 되는 겁니까?

주님께서는 성경을 보고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묻는 겁니까? 나치당에 등록한 사람들에게만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독일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책임이 있다는 겁니까? 어느 쪽이냐는 말이죠.

나치당에 등록을 하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모든 책임이 다 주어지는데,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와 같이 성경공부에 참석해서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내용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라고 해도, 그 모든 책임이 다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 환상 속에서 작동하는 욕망 !!

그러면 그 논리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그 이유를 말이죠. 에스겔서 18장에 보면,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지 자기는 포도를 먹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네 이가 시리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가 시리도록 조치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환상 속에서 작동하는 욕망 때문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말씀이 우리의 욕망에 자극을 주어서 작동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환상을 헤치고 나올 능력이 없다는 말이죠.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내가 말하고 있는 모든 대화는 이미 기존의 돌아다니는 대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존의 돌아다니는 대화들 중에서, 거기서 언어라는 방식으로 뽑아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대화는 어떻게 구성되는고 하니까, 현재에 있는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넓고 크게 본다는 것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은 전부가 어떠한고 하니, 자연에서 목적을 추구하면 그게 의미가 되고 환상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와 환상은, 인간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집념의 결과로서 환상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조상들부터 대대로 그렇게 해왔는데, 그러니 이 환상 속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 1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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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하는 그 반대 방향으로 접근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여전히 인간의 보편적 성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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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는 인간의 망상 !!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접근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아무리 길을 뚫어도, 주님은 그 길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시는데, 그래서 따로 길을 만들어서 접근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 쪽에서 조상 대대로 뚫은 종교라는 이름, 혹은 철학과 과학이라는 이름은, 주님이 오심으로서 환상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즉 망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런 환상과 망상은 무엇으로 끝납니까?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렇게 인간이 죽은 이유는 시간과 공간의 횡포라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고향을 떠나면 마음이 허전해지는데, 고향의 그 흙은 규소산화물(SIO2)이라는 말이죠. 그러며 다른 곳에 여행을 가도 그 땅의 질은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타지에 왔다는 느낌이 듭니까? 똑같은 흙 위에 있는데 말이죠.

* 고향은 없어 !!

자기가 살던 곳에는 자기가 남긴 의미와 추억과 있는데, 그런 과거의 시간들이 있다는 겁니다. 저기 화장터에 가면 그 이름을 고상하게 명복공원이라고 붙여놓았는데, 즉 떠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떠나는 당사자와 보내는 식구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죠. 식구들은 빨리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떠나는 당사자인 죽은 사람은 자기 고향이 어디입니까?

화장터에서 잠시 타고 돌아오는 것이 되지 않는데, 죽게 되면 살아왔던 80년의 인생이 무효가 된다는 겁니다. 즉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니 없어질 것을 가지고 아등바등 붙들고 고향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살아왔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예외가 없는데, 인간은 그동안 시간의 횡포에 시달렸는데, 그런 환상에 놀아난 것이란 말이죠.

* 시간과 공간의 횡포에서 벗어난 '예수 안' !!

인간에게 고향은 애초부터 없는데, 그냥 한 줌의 재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재에게는 고향이 있을 수 없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에게 "죽음에서 살아난다" 라고 함으로서 영원한 고향을 보장해주신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시간과 공간의 횡포에서 벗어난 '예수 안'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는 자는 죽으면 예수 안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죽어야 비로소 들어갑니까? 그것이 아니고, 죽기 이전부터 우리는 예수 안에 있으면서 땅(SIO2) 위에 있는데, 즉 기존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이죠.

예수 안에 있으면, 즉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불러주시면, 그 어린 사무엘은 기존의 엘리 제사장의 시간과 공간이 아니고,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에선 성신과 함께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사무엘은 죽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지 세계에 미리 들어왔기에 말이죠.

* 주님의 흡입 !!

그것을 여기 교재 17페이지에서는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세웠다" 라고 하는데, 주님의 영인 성령이 미리 자기 백성을 낚아채었다는 겁니다. 자기 안으로 말이죠. 멍게가 먹이를 어떻게 먹습니까? 먹이가 있으면, 자기 안으로 그만 흡입을 한다는 겁니다.

아메바를 보면 이게 더 적나라한데, 이렇게 아메바가 있고 그 주위에 먹이가 있으면 아메바의 형체가 변한다는 말이죠. 그 먹이감을 둘러싸서 자기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바깥에 있고, 두 번째는 둘러싸고, 세 번째는 안에 있다는 말이죠.

* 예수 안 !!

성령께서 일을 이렇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겁니다. 반면에 보이는 세계는, 그게 육의 세계이고 시간과 공간의 세계인데, 거기서 만든 환상, 자기가 죽을 것이면서 죽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환상, 여기에 먼저 성령이 오셔서 잠식해서 데리고 가게 되면,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수 안'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쪽에 과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윤리와 도덕이 있는데,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 종교는 조상 대대로 믿어온 것인데, 즉 보이는 쪽에서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기고 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말이죠. 그게 이쪽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이지 않는 예수 안의 세계가, 이쪽의 교회와 종교도 잠식해버리는데, 물론 가정도 잠식하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는 죄인이 되고, 그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대속의 효과, 그 사랑의 효과가 작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 안'의 세계라는 말이죠.

* 같이 삽시다 !!

그런데 육을 먼저 설명하지 않고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지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것은 건드리지 않고, 즉 자기는 자기대로 살아있으면서 주님의 혜택을 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공용, 즉 같이 살아있다고 여기게 되니 신이 나서 "교회에 나오길 참 잘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육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죽으면, 그러면 그것은 '죽는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어떻게 됩니까? 그만 사라지고 마는데, 즉 자기는 명복공원에 가서 한 줌의 흙이 되고 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한계라는 말이죠.

*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관계 !!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한 줌의 흙이 되고 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의 죄인으로서 주님의 대속에 대해서 감사하는,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의인의 관계인데, 즉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관계라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이 있다는 것인데, 이 땅에서 밥이나 먹고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성령이 오셔서 잠식을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이 그 사람에게 발생하고 있다는 말이죠.

* 그런데 왜 기쁘지 않는가?

그러면 이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데, 기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과 육 사이에 있으면서 자꾸만 연락을 취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왜 육에서 연락을 취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육의 세계에 있는 것, 그것을 '나답다' 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가치와 의미와 자존심을 유지했던 것인데, 이게 육의 세계에 있을 때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의 세계에 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기 가치와 의미는 모두 사라지고, 즉 자기는 죄인이 되어버리고, 여기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가치와 의미만 돋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우리를 굉장히 기분 나쁘게 만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 살았는데, 이렇게 되면 그만 사는 보람이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면, "아무개야" 라고 말이죠. 요즘은 사춘기 아이들에게 엄마가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나옵니까? "엄마, 저리가" 라고 하면서 밀치고는 문을 받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 DNA의 본성, 그게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이죠.

* 주님, 잠시만요 !!

그러니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아직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기 일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죽을 때 저기 화장터가 있는 명복공원에서나 만납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찾아오심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을 하는데, "정 이러시면 교회에 안 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딸은 시집을 보내야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자기 자존심은 회복하겠다는 것인데, 이런 것이 바로 환상이라는 겁니다.

* 환상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러면 지금부터 이 환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얼른 이야기를 했는데, 날아다니는 목적과 의미를, 마치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듯이 자기가 필요한 것을 골라잡았다는 말이죠. 어떤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고 하면, 그러면 그 날아다니는 것을 골라잡아서, "저 아이를 봐라. 너도 공부를 잘해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법고시 3차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리 아이도 법대를 나왔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 미치겠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자기 자식을 보고 "나는 너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데, 너는 지금 뭐라고 있어? 게임만 하나? 지금도 늦지 않았어. 도전해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은 "엄마, 쳐봐야 떨어져"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윤석열이도 9번을 쳤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이게 전부가 환상인데, 날아다니는 환상을 주워 모은다는 겁니다. 물론 필요한 것만 말이죠. 마트에 물건에 아무리 많아도 다 사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필요한 것을 자기 바구니에 담는다는 겁니다. 물론 그 기도내용은 환상 중에서 뽑은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에게 요구한다는 말이죠. 저기 갓바위에 기도하면 3개 중에 하나는 들어준다고 하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 교회가 곧 갓바위 !!

그리고 굳이 높은 곳에 있는 팔공산의 갓바위까지 힘들게 올라갈 필요도 없는데, 여기 아래에 보면 교회가 많다는 것이죠. 그러니 교회에서 비는 것이나 갓바위에서 비는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이것이 환상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잠식을 당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성령이 오셔서 잠식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자기라도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여긴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세례, 성만찬 등등, 그렇게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이 이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내어서 책임을 묻는다는 겁니다. "네가 왜 성경을 육으로 해석했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이 나오는데, 12절에서 15절입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 죽은 자들이 서서 !!

12절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죽은 자들이 죽었습니까? 살아있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죽은 자는 흙이 되어서 꼼짝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 보좌 앞에 섰는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보좌 앞에 서서 무엇을 합니까? 자기 행위대로 개인적으로 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죠.

아까 이야기했는데, "나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성경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정말 처음 듣습니다" 라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환상 속에서, 즉 날아다니는 것들 중에서 자기 대화의 재료로서 골라담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담화(Discourse)'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대화는 남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인수인계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대화가 되는데, 즉 각각의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동일해야 서로 대화가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말씀은 대화하라고 준 것이 아닌데, 오히려 대화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책을 가지고 전도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성경말씀 자체가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전도를 하면 대화가 되던가요? 대화가 안 되는데, 물론 복음을 포기하면 대화가 되는데 말이죠.

* 생명책과 행위책 !!

왜냐하면 이것이 두 권의 책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하나는 행위책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이라는 겁니다. 자기 행위에 따라서 그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데, 그것이 기록된 행위책은 누구나 다 아는 책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 행위책에 들어있는 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못에 던진다는 겁니다. 이게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각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해서 그 책임을 다 청산해주었다는 겁니다. 자기를 대신한 개인 자격으로 말이죠. 각각의 자기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아 지옥불에 가는 것을 청산해주었다는 것이죠. 이미 값을 다 치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나' 라는 개인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생명책이 있고 거기에 명단이 있는데, 그 명단에 기록된 자들은 그 전체, 그것을 예수의 인을 받았다고 하는데 말이죠. 예수님이 그 전체를 대표하는 개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즉 각 개인을 대표하는 개인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데, 즉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이것을 아는데, 자기 개인의 믿음은 전혀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구경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속했다는 겁니다. 즉 '나' 라는 개인이 '주님' 이라는 개인에 의해서 바꿔치기를 당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하시면서 불러내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인데,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통해서 먼저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 육에 속한 자들과의 대조 !!

그렇다면 성도가 맞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고맙게도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을 바라보도록 하시는데, 즉 서로 서로 대조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보이는 이 세상에 속한, 육에 속한 자들과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명예를 걸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가진 재주는 전혀 없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 즉 예수님의 이름과 명예를 가지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이 하신 일이 우리의 대화의 의미가 되고 삶의 목적이 된다는 겁니다.

* 접붙임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로마서 11장에서 그것을 '접붙임' 이라고 하는데,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이방인인 우리가 접붙임을 당했다는 말이죠. 나뭇가지를 잘라서 붙이게 되면, 이제는 과거 이방나라의 방식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방식으로 접붙임을 당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합세가 된, 즉 그 운명에 같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죠.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 성도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도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악한 사람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그렇게 연속적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반면에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접붙임을 당했기에 자기가 시도하는 착한 사람되기, 훌륭한 사람되기, 성도되기, 그러한 모든 노력과 시도가 전혀 먹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의 노력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동한 그 결과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죠. 그게 결코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고생고생을 해도 다른 인간이 되지 않는데, 교회에 가는 것도 역시 고생이란 말이죠. 다들 좀 다녀봤으니 잘 알지 싶은데, 그렇지요? (ㅋㅋ)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려고 하면 시간과 돈도 투자해야하고, 그리고 목사의 잔소리도 좀 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가 고생을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론상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성령의 기쁨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아닌가요? "고생이라고 여기는 나의 죄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조정하려고 하지만, 결국 참다가 참다가 폭발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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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말이다. 이것은 곧 포기와 버림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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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끝은 결국 환상이란 겁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되지도 않은 것을 구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구해도, 즉 기도해도, 우리는 그 내용도 모르고 그저 육적인 욕망만 좇아서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우리가 구해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그 당시 제자들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가 망가지고 사라지는 것을 우리의 DNA가 극구 반대하고 있다는 말이죠.

* 베니어합판 인생 !!

하지만 인생이란 것은 연극세트를 만드는 얇은 베니어합판인데, 모습은 있는데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들을 흉내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돌아다니는 환상을 주워 모아서 남들처럼 자기도 같은 인간이고 살만한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따지고 보면 베니어합판이란 것이죠.

연극무대의 세트를 보면 멋있어 보이는데, 제법 괜찮은 산과 들과 집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뜯어보면 어떻습니까? 저기 합천에 가면 6.25 전쟁영화 세트장이 있는데, 또한 문경에는 사극 세트장이 있고 말이죠. 그런데 막상 가보면 그게 베니어합판을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실제 동네를 만들어놓기도 하지만 말이죠.

아무튼 세트장을 보면 베니어합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니 인생은 헛방이라는 겁니다. 겉모습만 있을 뿐이지, 내용은 하나도 없고 남들 흉내를 낸다고 평생을 보낸다는 말이죠. 남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니 자기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 그러면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살았다는 겁니다.

* 포기와 버림의 원리 !!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시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우리 인간은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말이죠.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 '포기와 버림의 원리'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포기와 버림이라는 것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세계, 즉 신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그런데 이게 방향이 틀린 정도가 아니라 반대방향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길을 뚫었는데, 철학과 과학과 윤리도덕과 종교를 가지고 말이죠. 그래서 이 길로 가야, 이게 선악체계인데, 즉 선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천국에 가고 악하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 다른 노선이 아닌, 겹쳐진 노선 !!

이 원리를 가지고 줄기차게 길을 뚫었는데, 그런데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쳐들어오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의 노선과 주님의 노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첩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추구한 노선에 반대방향으로 주님은 겹쳐서 오셨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버림과 포기의 원리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성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망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니 똑같다는 겁니다. "누가 누가 더 훌륭한가? 더 착한가 더 거룩한가?" 라고 하면서 서로 시합을 벌이고 있는데, 그것도 교회 안에서 말이죠. 즉 "누가 더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열심히 하는 것은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말이죠. "니가 2시간을 기도해? 나는 5년 전에 벌써 2시간 반을 했어. 니가 성경을 백독했어? 나는 이미 2백독을 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나는 멸시가 싫어 !!

우리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남들에게 멸시받는 것인데 말이죠. 이번에 강원도 산불을 낸 인간도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평소에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멸시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멸시를 받는 것을 우리 인간은 제일 싫어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수치스럽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복음 안에서는 너희가 부끄러하지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 인간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자기 인생이 망가지더라도 복음 안에서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옷을 입지 않아 !!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옷을 입지 않는데, 둘 다 옷을 입은 것이 아니고 벗은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이 옷을 입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처음에는 분명히 옷이 없었는데, 그런데 옷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뭔가 망가졌음을,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인간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인 창세기 2장에 보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인간의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만은 내가 지켜야 하겠다" 라고 하는 야심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지킬 것이 없으면 두렵거나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이죠. 자기가 지킬 것이 없으면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주님이 말씀하신 포기와 버림의 원리는 자기 것이 있는 이상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을 통해서 자기 죄를 깨닫게 하시는데, 즉 죄로 말미암아서 그 사람을 죽은 자로 간주하신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시체라는 말이죠.

여기서 에스겔서 37장을 보겠는데, 13절입니다.

(겔 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여호와의 여호와됨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너희는 이미 죽었어. 그런데 내가 무덤을 열고 살리겠다" 라고 하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란 겁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3장 1절인데, 이미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서 빠져나왔는지를 본다는 말이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십자가 출신 동창생들 !!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 출신 동창생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시니 어떻게 됩니까?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십자가, 즉 죽음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했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이것은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가 바로 아메바처럼 주 안에서 삼킴을 당한 자인데,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기 버림과 자기 포기가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죽음보다 더한 포기는 없고 버림받음은 없다는 말이죠.

버림을 받을 대로 버림받고, 포기할 대로 포기했는데, 주님이 그 버림과 포기의 자리에서 끄집어내어 주시니, 그런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게 하신 분을 위해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인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말이죠.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바깥을 바라보면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남들을 보라는 겁니다.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이죠. 기차를 탔으면 도를 닦듯이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바깥 풍경을 보시라는 겁니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즉 반대방향으로 어떻게 휙휙 가는지를 말이죠.

어디서 말인가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참 재미가 있는데, 그래서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죠. 남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의 힘을 키우면서, 즉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그것을 구경해보라는 겁니다. 자기의 자랑거리를 어떻게 끄집어내는지를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주님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알려주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주님의 사랑의 편지로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만이 환상이 아니고 실상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실제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도 그 효과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성경말씀대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8장 24절에서 27절을 보겠습니다.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 예수님이 누구시지?

여기 25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애원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게 자기들의 인생에서 제일 큰 문제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사건이 지나고 나면 그 관심사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누구시지?" 라고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아메바처럼 삼켜짐을 당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서 먼저 예수님은 풍랑을 일으키신다는 겁니다. 가정의 풍랑, 회사의 풍랑, 그렇게 인생의 풍랑을 일으키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야, 이러다가 죽는 수가 있겠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발발 떨다가 나중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대체 주님이 누구시기에 죽음에서도 끄덕 없게 만드셨는가?" 라고, 그렇게 기쁨으로 고백으로 전환하게 된다는 겁니다.

* 비교는 지옥, 감사는 천국 !!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는데, 이게 간단한 문장이지만 아주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비교는 지옥, 감사는 천국" 이라는 겁니다. 마치 표어와도 비슷한데, 즉 "끄진 불도 다시 보자" 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미 천국에 온 것을 감사하면서 부담 없이 비교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이 나쁜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세상이 지옥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자기가 이 지옥 속에서 구원받은 자로 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닌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얼마든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강원도 산불이 우리 동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실제로 과거에 산불이 나서 그야말로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는 말이죠. 불이 여기 동네를 넘어서 이 산 저 산을 건너다녔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집값이 떨어졌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 너는 여기에 속했다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구경꾼이 아닌데, 우리는 결코 구경꾼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행위책과 생명책의 구성 속에서, "너는 여기에 속했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이 세상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는데, 이 책의 표지는 조금 음산하게 되어있지만, 그래도 안에 보면 성경말씀을 네모 칸에 넣어서 예쁘게 잘 해놓았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고린도전서 26장 22절의 말씀이 있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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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네들이 세운 그 교회가 자기네들을 구원해 주리라 여긴다. 성경책에 등장되는 초대 교회와 흡사한 환경들을 조성하고 예배 형식을 모방하면, 그 교회로 구원이 가능하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기도 방식도 제정하고, 예배도 만들고, 찬양도 해보고, 형제와의 교제도 만들고, 구제나 불우한 이웃에 대한 돌봄과 관심도 만들어낸다. 사회 정의도 부르짖고, 마음만 야무지게 먹으면 예수로부터 오는 기적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만한 모든 조건들이 빠짐없이 완비된 교회를 만들어 놓고서는, 즉각적으로 자기만의 소유물로 삼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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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자기가 세운 교회는 포기와 버림의 원칙을 적용시키지 않는데, 자기가 세운 교회가 홀라당 불에 타서 사라져도 구원을 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교회가 자기를 삼키는 아메바가 아닌데, 주님께서 오셔서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우리가 십자가의 재료가 될 때, 이미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 "절대진리가 무엇인가? 완벽함이 무엇인가? 거룩함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기도를 해도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꿇어앉아서 하고, 또한 구제를 해도 가까운 곳이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까지 간다는 겁니다.

이제는 우크라이나에도 가야 하는데, 폴란드 국경 근처에서 자원봉사라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웃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렇게 멀리 왜 가느냐는 것이죠. 그게 환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자 간호사 둘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나병촌에 와서 같이 숙식을 하면서 치료를 해주었다고 하는데, 저기 전라도의 소록도에 가면 과거에 실제로 그런 분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환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 나라에도 얼마든지 그런 이웃들이 있다는 겁니다.

* 욕망은 환상 속에서만 작동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의 욕망은 어디에서 작동하는고 하니, 환상 속에서만 작동한다는 말이죠. "야, 저게 멋있어 보인다. 저런 희생이 더 희생답다. 저런 순교가 더 순교답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인에게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게 해주고 아침을 먹게 해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 이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되는데, 그렇지요? 오너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피조물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 방금 말씀을 해드렸는데, 즉 "감사는 천국이다" 라는 말이죠. 그러니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사소한 것에라도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감사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굳이 성과를 내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버스를 기다리는데 15분만에 오면 그것도 감사, 그렇게 모든 것이 다 감사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안에서 포기와 버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하지만 감사로 이어지기에 !!

미리 말씀을 드리면, 인간의 환상은 인간의 힘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 인간들에게 멸시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은 멸시를 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래서 힘이 있어야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우리가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다 있는데,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도 힘을 가지고 남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계속해서 유발시키고 고발하면서, 그것을 감사로 이어지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풍랑이 이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자기 속마음을 다 드러낸다는 말이죠. 즉 "이러다가 우리가 죽은 수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몰랐다" 라고 하면서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게 얼마가지 않는데, 하지만 그 순간 순간 감사하게 되는, 그런 감사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전서 1장을 보겠는데, 24절과 25절입니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것도 여기 교재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게 베드로전서 1장만이 아니고 이사야서 40장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24절에서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라고 하는데, 즉 환상이고 망상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육체의 실상이라는 말이죠. 즉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인간은 죽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인간은 죽고 !!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잘 되고 남들에게 이길 것이라고 하는 망상, 바로 그 망상과 주의 말씀과 싸운다는 겁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말이죠. 십자가 안에 모든 말씀이 완성이 되어있는데, 그래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강력한 '나' 위주의 삶으로 인해서, 그래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고 자기 포기고 자기 버림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본성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죠.

* 먼저 찾아오신 주님 !!

그런데 반대방향으로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우리의 끝자락을, 미리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가보지 못한 끝을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갔다. 아버지의 저주 앞에 갔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냥 저주이고 지옥인데, 그런데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모습인데, 원 가지가 접붙임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잘라내고 주님 자신의 살과 피로 접붙이셔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실이 특별히 달라지는 게 아니고 여전히 개판이지지만, 우리는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의 진액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감사함으로 매일같이 고백하고 또한 터트리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의 흡입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유인할 수밖에 없는 교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는 교회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 속했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3,14 오후 5시에 마침.

주님과 날마다 정면충돌하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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