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41 - 과거에서 선택으로
22,02,0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9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오늘은 이 책을 다 떼도록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이 책의 핵심 부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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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책 속에는 있는 우리가 바깥으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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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가 아닌 사건으로 !!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성경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현실로 반영될 때는, 성경책 속의 우리는 존재가 아닌 사건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성경책은 종이로 만든 사물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체가 존재고, 또한 우리, 즉 '나'는 이미 존재로 시작해서 성경책이라는 존재를 대하게 되면, 그러면 '나' 라는 존재가 바라는 대로 둘러서 도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이미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으니 어렵게 해보겠는데, 우리, 즉 '나' 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과거에 익숙했던 것에, 즉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이 성경책을 보면서 새로운 추가적 의미를 담게 되면, 그러면 우리 존재가 과거에서 미래로 나가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있던 나가 미래에도 있는 나가 된다" 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성경책을 보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 라는 존재가 사건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존재는 처음부터 하나님밖에 없었는데, 즉 인간 존재는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은 창조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에서 나온 하나의 사건이고, 그 사건은 다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것은 아니야" 라고 시비를 걸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무한이 아니고 유한인데,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태어났다" 라는 것은 "내가 없을 때 있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 있을 때 있지 않았는데, 각자의 생년월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없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에도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는 유한한 존재다" 라는 것인데, 그런 유한한 존재가 알아봤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지식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알아도 그것은 유한한 지식에 불과한데, 그리고 해와 달과 별도 우리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이 왜 있는지,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도저히 답변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한 내용이기도 한데, 즉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무엇을 했는가?" 라고 했을 때, 욥은 그야말로 할 말이 없었다는 말이죠.
(욥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욥 38: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욥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무한성과 유한성, 그리고 사건 !!
이것을 '무한성 앞에 개방된 유한성'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한계가 없는 분 앞에 노출된 한계가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무한한 분이 계시니 이것은 존재가 되고, 여기서 존재라는 것은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있고, 그 앞에 노출된 유한성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어진다는 것인데, 즉 "있었는데 없어졌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압축시키면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유한성을 계속해서 더하면, 즉 "유한성+ 유한성+유한성+유한성 …", 그렇게 계속해서 해나가면 그것이 과연 무한성이 될까요? 결코 되지 않는데, 그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수학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런 수학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 수학에서는 "1, 2, 3 …" 라고 해서 이것을 '무한대(∞)' 라고 표시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1옆에 2가 있고, 2옆에 3이 있고, 그렇게 아무리 무한대로 가더라도 그게 자기 자리에서 점프가 됩니까? 안 되는데, 그만 그만한 것들끼리 순서가 있게 모아져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수학에서는 무한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진짜 무한으로는 점프가 되지를 않으니, 그것을 '가무한(假無限)' 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 인데, 그래서 가짜 무한이라는 것이죠.
* 지식의 지평선 !!
이것을 문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인식의 지평선', 혹은 '지식의 지평선'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지평선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분명히 지평선은 있는데, 손에 닿일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가보면 어떻다는 겁니까?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나고, 둘 발짝 다가서면 두 발짝 물러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백지영의 노래에도 나오는데 말이죠(ㅋㅋ).
분명히 있는데 다가설 수가 없는, 즉 무한은 무한인데 우리와 같은 차원에 있는 무한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점프를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죠. 바로 옆에 있기는 있는데, 우리보다는 더 추가된 것이 있는 그 무엇이란 겁니다.
그래서 이게 수학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는 것이죠.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집합시켜서 만든 무한수학의 한계를 말이죠. 그래서 현대수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수학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수학자체에서는 증명할 수가 없다" 라고 하는데, 그게 수학에서 이야기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인간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즉 유한한 인간의 생각일 수가 있는데, 이런 논리조차도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유한한 인간세계의 무한은 가짜 무한인데, 그런 무한으로 점프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한한 유한, 여기에 누가 뛰어드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여기에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온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빠져나간 것도 역시나 중요한데, 들어온 것도 신기하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산물이라는 말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서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는데, 이 과거가 자꾸만 솟구쳐 올라온다는 겁니다. "복음을 들을 때는 기쁜데 돌아서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과거가 계속해서 역류해서 솟아 올라와서 그렇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과거가 지금 현재를 명령한다고 할 수 있는데, 과거는 익히 아는 것인데, 그게 지금을 명령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네가 과거에 경험한 대로 가지 않으면 너는 미래에 망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과거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렇게 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는 자꾸만 우리는 보고 "그러니 제대로 생각해서 행동해.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 과거에서 선택으로 !!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나옵니까?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과거에서 선택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과거에서 익히 아는 것 위에 있는데, 그래서 과거에서 '+알파(α)'만 하면 미래가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선택은 그것이 아니고, 포괄적 선택, 최종적 선택이 과거를 결정지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너를 선택했다" 라는 그 선택의 품속으로 말이죠. 그러면 과거에서 미래로 갈 때는 누구의 선택이 작용하는고 하니, 익히 아는 것이니, 그렇게 익히 알고 있다는 자기의 소심한 선택이 여기서 가동이 된다는 겁니다. "똑바로 선택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일 망해" 라고 말이죠.
그게 자기의 선택인데, 그러나 주님의 선택은 무엇인고 하니, "망해도 괜찮아. 왜냐하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이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선택이냐? 하나님의 예정된 선책이냐?" 라고 하는 싸움으로 간다는 말이죠. 그게 여기 교재에 나와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먼저 여기서 누가복음 23장 32절을 보겠습니다.
(눅 23: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이 땅에서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반면에 인간들은 유한성뿐이니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여기에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그 존재가 사건에 뛰어드셨는데,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만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빠져나가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사건으로 오셔서 여러 가지 사건을 남기시고, 즉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고 하셨는데, 그리고 빠져나갈 때도 사건으로 빠져나가신다는 말이죠.
* 십자가 사건 !!
그러면 왜 사건으로 오셨는고 하니, 그것은 인간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예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과거에서 미래를 예상하게 되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는 말이죠. 과거에서 미래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존재인 인간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버린다는 것이죠.
왜 지금이 겁이 나고 무서운고 하니, 과거가 자꾸만 솟아올라와서 그렇다는 겁니다. 즉 과거가 자기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이죠. "네가 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 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복음의 경우에는 선택이 마중을 나오는데, 그러면 그때는 잠시 기뻐하다가, 돌아서면 다시 과거가 통솔을 하는데, 즉 정신적으로 지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는 왜 자꾸만 낯선 길로 가려고 하지? 왜 모험을 하려고 하지? 그냥 아는 방식으로 하지, 나대려고 하지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런 사건은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것인데, 즉 "지금 내가 존재하니 내일도 존재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무한이 유한으로 들어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주님이 빠져나오시는 유일한 사건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이 빠져나가시는 다른 구멍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 또 다른 두 행악자 !!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누가복음 23장 32절을 언급했는데, 거기에 보면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또 다른 두 행악자' 라고, 즉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예수님만이 아니고 두 명이 더 있다는 말이죠.
사건을 구성함에 있어서 십자가가 두 개가 더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렇게 있으면, 오른쪽이나 왼쪽에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있고, 그리고 양쪽에 십자가가 하나씩 더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과거는 하나님의 선택 안으로 빨려 들어갔음을, 그렇게 사건화를 시켜서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 행악자, 즉 두 명의 강도가 자기를 무엇으로 봅니까? 당연히 존재로 보는데, 그것을 "사람은 자기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 미래를 지향하면서 살아간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 나는 재수가 없어서 !!
여기에 강도가 두 명인데,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어느 쪽인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다만 구원받지 않은 그 강도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나는 강도짓을 하다가 재수가 없어서 그만 체포가 되었다. 그러니 예수 당신이 나를 이 십자가에서 풀어주게 되면, 그러면 나는 당신을 섬기겠다. 메시야로 인정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자기 존재의 유한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과거와 미래의 틀 안에서 살아가게 때문에,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래에 자기는 체포되지 않고 죄가 사면된 강도가 되겠다고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떳떳한 시민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죠. 당국에서 봐주던지, 누군가가 와서 기적적으로 건져주던지, 아무튼 그런 미래상을 꿈꾼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도 '나'가 되고 미래의 '나'도 '나'가 된다는 말이죠. 사건으로서의 '나'가 아니고 존재로서의 '나', 즉 '나' 여기 있음과 미래에도 그대로 있음의 '나', 그런 '나'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구원받지 않은 강도인데, 그것을 십자가 옆에 배치를 해놓았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 라는 존재는 시간, 즉 과거 속에 있다는 의식을 미래까지 계속해서 밀어 부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다니기 이전이던 이후이던 간에 "나는 여전히 나이고 싶다" 라는 것인데, 계속해서 '나' 라는 존재로 남고 싶다는 말이죠.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미리 예상하고, 그래서 내일 더 잘 되기 위해서 오늘 선택을 하겠다는 것인데, 즉 "선택권이 있는 나가 되고 싶다" 라는 겁니다.
* 나는 강도이어야 한다 !!
그게 구원을 받지 못한 강도인데, 그런데 예수님의 다른 옆에 있는 또 다른 강도는 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의 과거를 아는데, 자기는 강도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강도는 갑자기 자기의 미래를 끊어버리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생각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여기서 강도는 무엇을 알았는고 하니, 과거에 자기가 강도였다는 것이 자기가 예상한 미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나는 강도이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강도는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고 하니, 강도로 살았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선택이라면, 즉 무한한 분의 선택이라면 자기는 강도이어야 하고, 강도가 아닌 다른 삶은 자기에게는 일절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죠.
* 두 종류로 쪼개는 십자가 !!
지금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의 양쪽에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요소가 있는고 하니, 한 쪽은 천국, 다른 한 쪽은 지옥으로 나오는 요소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선택이 이미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인간 속에 와서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게 되는데, 그러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는 자기를 여전히 존재로 여기게 되고, 반면에 구원을 받은 자는 자기가 살아온 것이 있다가도 없어지는, 즉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 십자가를 통해서 빠져나오신 무한하신 분, 그분이 자기를 강도가 되게 했다고 하는 선택에 둔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그 강도는 출발은 이 땅에서 강도로 했지만, 장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낙원, 즉 천국의 요소가 이 강도에게 과거로부터 삽입이 되었다고 하면, 이 사람의 경우에는 "강도이어야 구원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예정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게 선택이라는 겁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주님과 구원을 받은 자와의 관련성 !!
이것이 바로 주님과 구원을 받은 자와의 관련성인데, 오직 주님만이 선택을 하시는데, 그러니 주님만이 존재가 되고, 그러면 그 강도의 경우에는, 그의 그 짧은 인생이라는 것은 주님의 존재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았던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즉 존재 앞에서의 있다가도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처음에 했던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성경책 속에 있는 우리는 바깥으로 나올 때는 존재가 아닌 사건으로 나온다" 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책 속에 계시는 그분만이 존재이고, 나머지는 그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사건들로 피조세계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구원을 받은 자들로 인해서 증명이 된다는 것이죠.
지금부터 이 논리를 꾸준하게 설명을 해보겠는데, 쉽게 하기 위해서 결론부터 먼저 해보면, 첫째는 '이 세상의 갈라짐' 이라는 겁니다. 마치 강도가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지듯이 말이죠. 우리의 존재는 유한성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당연한데, 즉 사라짐인데, 그리고 다른 노선으로의 나타남인데, 이것이 부활이라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는 갈라짐인데, 왼쪽과 오른쪽으로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효과로 인해서 두 개의 다른 십자가로 갈라진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어야 십자가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갈라짐, 혹은 쪼개짐인데, 이것이 내부로 들어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창세기 15장 10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 내부의 쪼개짐 !!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부를 쪼갠다는 겁니다. 강도의 경우에 그냥 두 명이 있는 것은 일반적인 갈라짐이고,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의 경우에는 내부로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과거의 인물과 선택된 인물로 내부가 쪼개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내부에는 참된 존재이신 주님이 들어오시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사건이 되면서 존재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이것을 반대로 보는데, 즉 "'나' 라는 존재에 사건이 들어왔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사실 이게 같은 뜻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내가 여기에 있으면, 주님이 성령의 사건으로 들어오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오직 주님만이 존재가 되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사건화가 된다" 라고, 주님이 우리를 사건화를 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내부를 쪼개는데, 그런데 우리 내부를 누가 통과합니까? 내부를 누군가가 점령을 하는데, 여기 창세기 15장 17절 후반부에 보면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타는 횃불이 내부를 통과한다는 말이죠.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 내부를 장악한 횃불 !!
이제부터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내부를 장악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의 내부를 하나님의 선택이 장악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강도인데, 그의 내부를 하나님의 점령했다는 겁니다. 그게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선택인데, 그게 구체적인 인물이 된 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 사람의 내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보기를 즐거워했고, 또한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는 말이죠.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지금부터 이 횃불 이야기를 좀 하겠는데, 장황하게 들려도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하는데, 이게 우리의 내부문제라는 겁니다. 이 내부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다시 하겠는데, 이게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인간은 왜 고민을 하고 염려를 할까요?
지금 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와 같은 것이 아니고, 불교의 경우에는 외부의 환경이 그렇다고 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외부가 아닌 우리의 내부라는 말이죠. 이제부터 그 내부를 살펴보고자 한다는 겁니다.
* '과거' 때문에 !!
그러면 우리는 왜 걱정을 하고 불안해하고 근심을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과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시간은 유한성인데, 즉 우리의 기억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우리는 과거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근심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새로움인데, 이 새로움이 바로 선택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같은 의미인데, 과거에 없던 새로움이 마중을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시간에 얽매이다가 보니, "이러면 곤란해"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시간이 그렇게 우리를 옥죄이면서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는 것이죠. "내가 이러다가 진짜로 망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시편에 보면 "야곱아, 너는 왜 불안해하는가?"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미래에 주어질 새로움이 마중을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물론 우리 생각에는 주님이 미리 주시면 참 좋겠는데, 하지만 주님은 미리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간 속에서 실컷 고민하고 불안에 떨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마중을 나가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과거의 유한성 속에서 얼마나 엉터리로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구원받은 강도의 경우에도,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고 하면 다른 강도와 똑같이 자기 인생을 비난했을 텐데, 그렇지요? 자기가 강도가 된 것은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도 다른 강도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예수님을 보고 비방을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23장을 다시 보겠는데, 39절에서 42절입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구원받은 강도의 뻔뻔함 !!
그러니 십자가라는 것은 무한하신 분, 즉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왔다가 빠져나가는, 영화로 말하면 마지막 장면이라는 겁니다. 그런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인간을 둘로 나누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누게 되면, 구원받은 쪽의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빠져나가는 과정이 자기의 과거를 덮쳐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과거조차도 새로움이 되기 위한 재료로 사용이 되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강도가 매우 뻔뻔한데, 자기가 죄인이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주님의 나라에 넣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튀어나온 여분의 것일까요? 자기는 과거에 강도였고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그러니 과거와는 단절된 다른 생각이 강도의 입을 통해서 튀어나왔다는 겁니다. 자기 과거와는 무관하게 말이죠. 이렇게 노선이 있으면 그 노선으로 계속 간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인데, 그런데 그만 다른 노선이 와서 이 구원받은 강도를 침입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낯선 요소라는 말이죠.
* 자살은 왜 하는가?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고 하니,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왜 합니까? 자기 과거 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말이죠. 100퍼센트인데, 그래서 한 살 먹은 아이는 자살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 쌓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이면 몰라도, 자기가 스스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베트남에 천주교가 들어와서 탄압을 하니, 베트남 승려가 기분이 나쁘다고 하면서 석유를 몸에 부어서 분신자살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분신자살을 하는 것과, 남들이 와서 자기에게 화염방사기를 쏴서 죽이는 것하고, 과연 어느 것이 기분이 더 나쁘겠느냐는 말이죠.
죽더라도 자기가 결정해서 죽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과거에 자기는 불교승려인데, 즉 불교가 진리라고 우기던 과거가 있다는 겁니다. 그 과거의 연속성으로 미래를 무엇을 보는고 하니, 자기는 불교와 함께 죽겠노라고, 그렇게 자기 과거에 근거해서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죠. 자살로서 불교가 진리임을 증명하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적들이 와서 화염방사기로 자기를 쏘면, 그러면 무엇이 날아갑니까? 자기 과거가 진리라는 것이 날아가는 것에 대해서 분통이 터지게 되는데, 그래서 자살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너를 죽여줄까?" 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수덕사 여승의 경우에, 자기가 머리를 미는 것은 굉장히 고상하고 거룩한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잘 때 남이 와서 자기의 머리를 밀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모욕적인데, 기분이 매우 더럽다는 겁니다.
"나는 스스로 수치스런 존재라도 좋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벌레와 같은 존재야. 그러니 나는 여자로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을 내 스스로 잘라서, 나는 그야말로 낮아졌음을 보여주어야겠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옆에서 그만 "어이, 내가 밀어줄 게" 라고 하면, 그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수치스럽다는 것도 자기가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자기의 작은 선택이라도 미래까지 유지되어야 폼이 난다는 말이죠. 그게 자살의 이유인데, 자기 과거 때문에 죽는다는 겁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살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지 않는 것이 아닌데, 정작 자기는 살고 싶지만 누가 죽입니까? 주님의 선택이 죽인다는 것이죠.
인간은 어차피 유한적 존재로서 있다가 없어지는 사건에 불과한데, 그래서 자기는 더 살고 싶어도 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인간 쪼개기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여기 내부에서 불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 불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존의 인간을 심판하심으로서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은 강도가 십자가에서 풀려난 것이 아닌데, 예수님과 같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반면에 다른 강도는, 자기가 강도이든 아니든 간에, 의사이든 검사이든 간에, 그 사람은 버림을 받은 자에 속한다는 말이죠. 구원받은 강도는 그것을 마지막 때에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 심판주 !!
십자가의 의미는 나누어지는 것인데, 즉 분류라는 말이죠. 그것을 '쪼개기'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주님께서 내부에까지 파고 들어가신다는 겁니다. 그 내부 깊숙이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쪼갤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불로서, 즉 심판주로서 모든 것을 심판해버리는 분으로 등장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왜 어려운고 하니, 지금부터 그것을 여러분이 감당해주셔야 하는데 말이죠. 여기서 에스겔서를 보겠는데, 1장 3절에서 10절입니다.
(겔 1: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겔 1: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겔 1: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겔 1:6)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겔 1: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겔 1:8)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겔 1: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4가지 생물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얼굴모양이 사람, 사자, 소, 독수리라는 겁니다. 이것은 전부 다 인간들이 만든 우상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특히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니 인간들이 땅에서 무엇을 만들고 있었습니까?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여기에 보면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라고 하는데, 그게 소라는 겁니다. 즉 소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이렇게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이것들이 모두 우상의 모습이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신을 규정할 때 그렇게 이미지화를 시켰다는 것이죠.
* 불로서 나타나신 하나님 !!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는 것이 누구의 형상인고 하니, 이게 하나님의 보좌이니 일단은 비워놓고,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는 사면의 천사들의 얼굴이 바로 이런 얼굴들이란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기능이 있는데, 이것들이 움직이면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11절에서 14절입니다.
(겔 1:11)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겔 1:12)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겔 1:13)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겔 1:14)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여기 13절에 보면,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떨기나무가 아니고, 떨기나무 가운데의 불로서 나타나셨다는 말이죠.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그리고 신명기 4장에도 보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불인데, 히브리서에도 그렇고 말이죠. 그리고 시내산 꼭대기에서도 불로서 나타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니 산 위에 불이 붙어있었다는 것이죠.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출 24: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 사람, 사자, 소, 독수리, 그리고 천사들 !!
이것을 종합해서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더러운 이 땅에 나타났을 때는 무엇을 의식하는고 하니, 우상, 즉 거짓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래서 천사들로 하여금 이것을 의식한 기능자로서 활동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사람, 사자, 소, 독수리는 인간들 쪽에서 신을 만들 때 참고사항이 될 수가 있는 짐승들인데,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그것이 사면이니 사방인데, 즉 이 세상 끝까지 공간적인 누락이 없는 기능들로 전부를 다 차지할 수 있도록, 그들의 우상모습을 불로서 박살내고 소멸시키는 기능으로서 천사들의 모습이 장착되어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말이죠.
여기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좌는 움직이는 보좌인데, 즉 일이 벌어지는 보좌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서운데, 번개가 치고 불이 붙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15장에 보면, 그 쪼개진 제물 사이로 횃불이 지나간다는 겁니다. 유한한 인간들이 사람, 사자, 소, 독수리와 같은 유한한 모습으로, 그렇게 밖에 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 신을 섬긴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니엘서 7장을 보겠는데, 3에서 8절입니다.
(단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단 7: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단 7: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단 7: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단 7: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단 7: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짐승이 넷인데, 그것으로 끝인데, 다섯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동서남북, 그렇게 4마리의 짐승이 인간들이 살고 있는 땅의 규격을 다 덮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떠한고 하니,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다는 말이죠. 하이브리드인데, 즉 혼합체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곰과 같고, 세 번째는 표범과 같고, 그리고 네 번째는 아주 특이하게 생겼는데 뿔이 달렸다는 말이죠.
그것이 에스겔서에서는 사람, 사자, 소, 독수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인간은 지혜롭고, 사자는 용맹하고,
소는 자비롭고, 독수리는 빠르면서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초월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기 32장에서 소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묘사했는데, 자비롭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우상을 섬긴다면, 그 우상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 우상을 작살내는 기능자들을 내가 일대일로 만나게 해주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천사들이라는 겁니다. 보좌의 모습이 천사들의 기능인데, 그리고 그 보좌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보좌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사면에 천사들이 둘러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좌에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움직여" 라고 명령이 떨어지면, 에스겔서 1장에 보면 바퀴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래서 즉시 그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 사면에 있는 것이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모양으로 있는 천사들이, 그 천사들이 그런 기능으로 다가간다는 겁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사자는 사자로, 소는 소로, 독수리는 독수리로 박살을 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어차피 이 땅은 짐승의 나라이고, 그 짐승은 우상을 섬긴다는 겁니다.
* 너희는 죄에 속해있어 !!
어제 낮 시간에 선과 악을 이야기했는데, 선과 악이 연결된 개념으로 보이지만 연결된 것은 아니고,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선과 악의 바깥에 세워놓고, 왜냐하면 선악의 지식을 따먹어서 그러한데, 그래서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악에 속해있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선과 악을 아니, 악에서 조금씩 선으로 나아가서, 자기 의와 거룩을 달성하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종교라는 말이죠.
자기가 왜 가난한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것, 즉 악을 선으로 바꾸면 된다는 말이죠. 즉 "과거에는 악했지만 미래에는 선할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 또 시간요소가 개입되어서 작동한다는 것이죠.
* 제사장의 등장 !!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모든 것이 더럽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더러운 것은 무엇을 해도 더러운 것으로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 더러움이 천국에 가는 일은 없는데,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제사장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준비해서, 비록 더럽지만 제사장의 제사행위를 보시면서 그 더러움을 눈감아주시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피흘림이 없으니 죄사함이 없다" 라는 것인데, 제물의 흘리는 피를 보고 봐주시겠다는 말이죠.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제사장이 제사장의 기능을 제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제사장이 자꾸 죽는데, 그것은 제사장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NIV) And almost all things are by the law purged with blood; and without shedding of blood is no remission.(KJV) And according to the Law, [one may] almost [say], all things ar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NASB)
그렇게 죽는 제사장이 두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앞으로 올 제사장은 완료된, 죽지 않는 제사장이, 즉 영원한 제사장을 깔아둔다는 말이죠. 이 제사장이 하늘과 땅에 걸쳐서 멈추어져 있는 형식으로는 되지 않는데, 그러면 영원한 제사장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제사장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제사장은 인간의 몸, 즉 아담에게서 나온 제사장인데, 이것이 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제사장이 왜 죽는고 하니, 그것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을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에서 선택해서 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 멜기세덱 족보의 영원한 제사장 !!
이 지상의 제사장은 그 족보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레위족보인데, 그런데 히브리서에 의하면 하늘에서 온 제사장은 멜기세덱 족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영원한 족보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영원한 족보는 멈추어져 있으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러면 이 지상에서 유한한 인간이 갔다가 내려오고 갔다가 내려오는, 그런 인간들 중에서 나온 제사장의 제사방법,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한의 극한이고, 그것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러면 영원한 제사장 직분에 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이 영원한 제사장을 인간들 속으로, 이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겁니다. 울면서 통곡까지 하게 하시면서 말이죠. 그렇게 보내니 무엇이 가짜였음이 드러나는고 하니, 인간들 속에서 나온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효과가 없음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피 흘려 죽은 자의 유언 !!
이런 제사장 중심에 있어서, 예수님이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유언을 한다고 되어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여기서는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는데, 그래도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 16절을 보겠습니다.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여기 17절에 보면,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들 중에서 뽑은 제사장이 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언약이 아니기 때문에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분이 남긴 유언, 즉 살아있을 때가 완결이 아니고, 죽었을 때 비로소 완료가 된다는 말이죠. 죽어야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을 때 어떻게 죽었다는 겁니까? 피를 흘려서 죽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사함이 없다는 말이죠.
* 하나님은 왜 선악과나무를 심으셨는가?
다시 해보면, 인간은 선과 악에 있어서 인간은 악에서 선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데, 그래서 악이 절대적 악이 되려면 누군가가 부추겨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절대적 선한 분이 악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서, 그 악이 하나님을 공격한 절대적 악이었음이, 그런 무게감이 드러날 때, 비로소 선과 악의 의미가 완성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나무는 누가 만들어서, 그것도 에덴동산 중앙에다가 심었습니까?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것에 대해서는 완성을 보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의 완성은 절대악을 유발시키고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짐승이란 것, 즉 인간들의 우상숭배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일어나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데, 마지막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모든 것이 십자가에 반대하는 쪽으로 상황이 바뀌어질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이죠.
(살후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왜냐하면 그렇게 됨으로서 넘어올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이 세상이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인간들이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라, 즉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이 증명이 된다는 말이죠.
* 쪼개짐 !!
지금 '쪼개짐'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처음에는 인간들의 세상, 그 존재가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먼저 그 나누어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야곱이 요셉을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손을 어긋맞게 해서 했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했는고 하니, 시간적으로 보면 므낫세가 먼저 태어나고 그 다음이 에브라임이라는 겁니다.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그런데 주님은 어떻다는 겁니까? 에브라임이 먼저이고 므낫세가 나중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형이 먼저이고 동생이 나중이라는, 즉 인간들의 '과거, 현재, 미래' 라고 하는 시간굴레를 뒤엎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미래가 과거를 덮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미리 마중을 나온다는 것인데, 그게 쪼개짐이고 나누어짐이라는 말이죠.
선악과에 관련해서, 교재 19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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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인간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너무 일찍 일하시는 셈이 되고, 구원을 고대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너무 늦게 일하시는 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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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심판, 늦은 구원 !!
이게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라는 이 책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지 싶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보면 무슨 말인지 감은 오지 싶은데, 그렇지요? 굳이 여기서 설명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왜 처음부터 인간을 구원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왜 선악과를 따먹은 그날에 아담을 구원하지 않고, 왜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렇게 마지막까지 시간을 끌면서 심판을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왜 우리나라에 복음이 강감찬 장군이나 세종대왕 때는 들어오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물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함인데, 하지만 그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섭섭하다는 겁니다. 물론 심판을 없애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복음을 좀 빨리빨리 전파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복음도 모르는 입장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면, 그런 하나님은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이게 같은 말인데, 구원을 너무 늦게 해주셔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가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저기 먼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고 말이죠. 너무나 늦게 복음이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느냐고 하면서 따지고 싶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에 우크라이나에 출장을 갔는데 그만 전쟁이 일어나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로 알았는데, 3년 뒤에 남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 남편이 반가울까요? 가슴을 칠까요? "왜 이제 왔어요?" 라고 하면서 남편의 가슴을 친다는 겁니다.
* 하나님, 매사가 다 섭섭합니다 !!
그러니 심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일찍이고, 구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늦다는 말이죠.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시간요소가 인간에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시간 요소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니, 매사가 다 섭섭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너무 일찍 구원을 해주셨는데, 다른 말로 하면, 너무나도 일찍 교체작업에 나서셨다는 말이죠. 주님은 처음부터 교체작업에 나서셨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너희가 알아서 악에서 탈출해서 선으로 와라" 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준비하셨다는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심판을 하십니까?" 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그런 인간과 전혀 의논하지 않고 다른 노선, 즉 여자의 후손을 가지고 주님은 이미 일찍 교체작업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짜증을 내려면, 주님의 최후심판이 너무 늦다는 것에 대해서 짜증을 내어야 한다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새로운 금지영역 !!
인간은 금지의 선을 넘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금지를 넘었다는 겁니다. 허들 하나는 넘었는데, 그러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라" 라는 것은 넘었습니까? 넘지 않았는데, 주님이 그것을 치워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악마와 더불어 있으면 새로운 무엇이 발생되는고 하니, 새로운 금지영역이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계속해서 금지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금지의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금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스스로 이 금지영역을 넘어섰습니까? 넘어서지 않았습니까? 넘어서지를 않았는데,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
그러면 그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신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닌데, 로마서 8장 11절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하는데, 즉 성령이 오셔서 살리신다는 말이죠.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살리심이 없다고 하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쪼개진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단절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 다시 하면 !!
다시 하겠는데, 인간의 모든 존재세계는 나누어짐에 있는데, 왼쪽 강도와 오른쪽 강도로 나누어지듯이 그렇게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누어지고 쪼개지는데,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신자다" 라고 우기는 우리 속을 쪼개게 되는데,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네 속에 신자라고 할 수 있는 선택과 행함의 요소가 들어있는가?" 라는 것이죠.
그렇게 쪼개서 ⓐ우리 내부를 횃불이 통과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불은 심판의 기능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라지는 것, 즉 죽는 것인데,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우리 안에 사라지게 하신 분에 의해서 다시 나타남이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부활이라는 말이죠.
* 주님과 함께 죽고 또한 살고 !!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했던 그 코스대로 우리를 가게 해주시는데, 그렇다면 구원받은 강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왔습니까? 그대로 달려서 죽었습니까? 그대로 죽었다는 겁니다.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파티장에 신나게 놀러간 것이 아니고, 두 분이 다 죽었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사라짐인데, 즉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횃불의 기능이 심판의 기능이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죽는다고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신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우리는 참여시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죽는 순간 '과거, 현재, 미래' 라고 하는 시간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예정된 선택의 효과인데, 즉 나누어진 것을 깨어지게 하고, 또한 사라지고 하고, 그리고는 나타나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 흐름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28장과 29절을 보겠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주님의 일대기가 덮침으로서 !!
28절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하는데, 선의 자리에 강도를 넣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강도를 이루느니라" 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신 자를 부르기 위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평생 강도짓을 하게 하셨는데, 그게 바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29절에 보면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 맏아들만이 유일한 형상이고, 우리의 형상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이 그대로 우리에게 발린다는 것이죠. 마치 꿀이 흘러내려서 발리듯이, 그렇게 우리의 내부를 흘러내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경로를 그대로 끌려가게 되는데,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에 의해서 말이죠. 즉 주님의 일대기가 우리를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는 증거가 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들도 흉내를 내서 이러한 소설을 쓸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인데,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했습니까? 다른 것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압축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그분이 너희들에게 의해서 죽었는데, 하나님이 사흘만에 살리셨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죽었다가 살아났다" 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우상에 대한, 즉 모든 종교에 대한 부정이라는 말이죠.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지옥의 하나님 !!
오늘로서 이 교재를 끝내겠는데, 다음 번에 할 교재가 무엇인고 하니,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서 지옥을 경험했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백성들을 생산해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그 책에서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이미 때렸기 때문에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는 것인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이 된다는 말이죠. 한 번 죽은 놈이기에 다시 죽이지 않겠다는 것인데,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월절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 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유월절의 의미가 '넘어간다' 라는 것인데, 백신접종을 하면 패스를 하듯이 말이죠. 즉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넘어가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주님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발 좀 죽어라" 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사라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라져야 나타남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사람도 죽고 하나님 본인도 이 땅에서 죽는다는 것인데, 즉 "우리 모두 다 죽자"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너무나도 마땅한데, 하지만 인간들은 자꾸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서 어떻게 나옵니까? 과거에 엄연하게 자기가 살아있었기에, 그렇게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가 망하는 것인데, 하지만 망해봤자 죽는 것이란 말이죠. 이게 인간이 가진 유한성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이는 것은 누가 죽여준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죽여주시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존심이 있어서, 남이 죽이는 죽음은 싫고 자기가 알아서 한강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망해도 자기가 알아서 망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과거가 솟구쳐 올라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 이제 총정리를 하면 !!
이제 총정리를 하고 마치겠는데, 과거라는 것은 시간의식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인간의 시간의식은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에서 출발하게 만든다는 말이죠. 즉 '나 있음' 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과거인데, 하지만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들 때 인간이 있었습니까? 없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있음입니까? 없음입니까? 없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없는 자기가 1960년이든 70년이든, 그때 태어나게 한 것은 누가 한 겁니까? 자기는 모르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고집을 부린다는 겁니다. 자꾸만 있다고 여기고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냥 없어지면 소용이 없고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서 사라져야 하는데, 그게 주님의 창세 전에 예정된 선택이라는 겁니다.
그런 자의 고백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저를 만드시고 선택하시고 키워주셨기에, 주의 나라가 임할 때 기억해주세요" 라고, 그 주도권을 주님에게 돌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그야말로 기적인데,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에게는 놀랍게도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금지된 선을 누군가가 넘어오셨는데, 선택된 자는 그분을 알아본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고 특징이란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가 주인공이나 통솔자가 아님을 아는데,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말씀이 지배하는 세계 !!
그것이 말씀이 지배하고 있는 자인데,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해골이 어떻게 해서 살겠느냐?" 라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물었는데, 그러자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고하라" 라고 했고, 에스겔이 그대로 하니 마른 뼈들이 살아났는데, 그리고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말이죠.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러니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바탕은 존재가 아닌 말씀이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성도의 근본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께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로 증명이 되었고 십자가로서 증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기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과거에 발목잡힌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시고, 그 자체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음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2,28 오후 3시에 마침.
과거 없는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하셔서, 오늘도 감사케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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