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예상외의 일)130620-22강a -이 근호 목사
229페이지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 이렇게 돼 있는데 여기『다니엘은 인간이다.』라고 돼 있죠. 말 하나 마나 아닙니까? 다니엘은 인간이고 다니엘이 괴물도 아니고, 제가 이 말을 쓴 이유가 다니엘은 인간이다 하는 것은 다니엘은 다른 사람과 다른 선지자다. 그런 뜻이거든요. 다니엘은 선지자다, 라는 말하고 다니엘은 인간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육이다.』돼 있죠.
다니엘은 인간이다. 그 다음에 육이다. 이렇게 돼 있을 때 그 뒤에 『따라서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해명한다.』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집사님이 이 책이 어렵다 하니까 설명을 하나하나 해야 되겠는데요. 왜 우리 본인이 신자 돼야 됩니까? 이런 질문, 왜 우리가 신자 돼야 되죠? 그냥 인간으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뭔가 안 되고 신자가 되어야 구원 받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뭐 문제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냥 인간으로 살면 안 되고 신자가 돼야 된다는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건 본디 우리 모습이 아니다. 창조했던 그 자리는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다니엘이 등장했습니다. 그럼 다니엘은 우리하고 달라요. 그분은 선지자입니다. 그분이 선지자란 말은 그분과 우리 일상적인 우리와 다니엘과 차이점이 뭐냐 다니엘 뒤에는 어떤 분이 계셔요. 다니엘을 선지자 되게 만든 분이 연결돼 있고, 인간은 육으로 다 툭툭 끊어져서 개별자, 지밖에 모르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이다. 다니엘이다. 역사로 해명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해명한다는 말은 인간이 신과 통한다. 신과 통할 때 그 방법이 어떤 방법으로 신과 통할 수 있습니까? 그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신과 통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돼요. 역사적으로 모든 역사의 핵심은 뭐냐 하면 ‘신과 통하기’입니다. 서양의 역사, 동양의 역사, 모든 역사.
역사를 공부해 보면 그 원천을 뿌리를 캐보면 시시하게 왕이 인간하고 상대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다 지보다 못한 거니까, 지는 갑이고 을이니까 시시하다 하고 남아 있는 건 신만 남아있는 거예요. 천지자연의 가뭄과 비와 이런 모든 걸 관장하는 신, 신과 통하면 드디어 인생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미지의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신만 알면 드디어 유토피아가 돼요. 조 용필이가 노래 불렀던 ‘미지의 세계로~♬’ 이런 가사가 있어요. 옛날부터 왕들과 소위 고위직들은 신과 통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할 때 옆에서 다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그 중에 첫 째는 꿈, ‘왕이여 꿈꾸죠?’ ‘꿈꾸지.’ ‘그 꿈이 신의 계시입니다.’ 요렇게 알랑방귀를 뀌는 인간이 많이 있어요. 왜 꿈을 신의 계시라고 간주했느냐 하면 해몽은 누구 담당이다? 자기 담당이잖아요. 해몽 해주고 자기는 고위직에 앉는 거예요. 그게 다니엘을 보면 느부갓네살 옆에 많잖아요. 박사들 있죠. 도사들 이런 사람들. 왕은 신과 통하고 싶고 왕이 신과 통해버리면 국민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잖아요. 그럼 부조, 부조는 돌출된 조각을 말하는데 부조에 앗수르를 대항한 것처럼 자기의 전쟁의 기념한 글이나 시들을 해놨어요. 해 놓을 때 꼭 거기 붙는 게 뭐냐 하면 ‘위대하신 신의 능력으로 내가 승리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건 뭐냐 하면 나는 신을 통하기 때문에 내 자체가 곧 신의 뜻이다. 내가 내뱉는 말은 곧 신의 법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기 때문에 내가 나가는 전쟁은 승리케 하셔서 이 나라가 이렇게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나, 이 왕을 볼 때는 뭐처럼 섬겨라? 신을 섬기듯이 섬겨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궁금해 하는 영혼불멸이니까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는 것도 유일하게 통로가 있는데 통로가 바로 내 말을 듣는 것은 곧 너희들은 신의 말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좋은 나라에 올 것이다. 라는 거예요. 아직도 이런 나라 가까이 있죠? 휴전선 너머에 유훈통치 하는데, 정신세계를 장악하는 거.
그리고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우리나라 민족들은 단군의 자손이라 하는데, 단군이라 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단군은 우랄알타이 원어에 의하면 무당입니다. 무당이 곧 뭐냐 하면 왕 이예요. 왕이 무당이고 무당이 왕입니다. 이 말은 일반 사람들이 신과 통하지 아니하면 왕으로 간주를 안 해줍니다. 항상 대통령이든 지도자든 신기한 기적들이 있어야 돼요. 그걸 두 자로 신화라 합니다. 신화는 꿈, 이렇게 내려오는 전설이죠. 신화가 부족국가에서 전통적인 도시국가, 또는 씨족문화에서 도시국가가 확립되면 여기는 왕이 신과 통하는 사람 되고, 그렇다면 왕에 의해서 지배권이 행사하게 되면 그게 법전이 되고 법전이 뭐냐, 이게 신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도시가 정착되려면 농경시대가 돼야 돼요. 농경시대가 되면 제일 중요한 건 물을 대는 관개시설입니다. 관개시설이 되어 물을 잘 대면 노동을 투입한 것보다 잉여, 많은 곡식이 축적이 됩니다. 그러면 창고 져야 되죠. 그러면 곡식 축적한 거 계산하니까 수확이 발달하죠. 관개시설하게 되면 토목측정이 필요하죠. 그리고 그것을 일괄적으로 물 댈 때 지시, 명령, 통합하는 체제가 있어야 되는데 그 우두머리의 지시에 따라줘야 돼요.
유목생활은 자기 양 자기가 알아서 키우면 되지만, 농사라 하는 것은 같이 힘을 합쳐야 돼요. 힘을 합치려면 누가 지도자가 있어서 지시, 명령을 해줘야 되거든요. 그걸 옛날에 누가 했느냐 하면 왕이 한 겁니다. 그래서 도시국가가 생기면 왕은 자동적으로 누가 왕이 되기 마련이고, 그 왕은 가뭄과 비등을 관장하면서 신과 통할 때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는 겁니다. 괜히 독재가 아니에요. 그러면 힘은 어떻게 직결됩니까? 왕에게 직결되겠죠.
여러분들이 힘이 생기면 힘 가지고 뭐 할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돈 힘이나 권력이나 하여튼 힘이 세다, 그러면 그거 가지고 힘을 그냥 묵혀둡니까? 아니면 어디에 쓸 겁니까? 주변에 있는 힘들을 강탈하는데, 약탈하는데 사용되죠.
성경에 나와 있는,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전쟁은 이게 출발점이 힘 있는 데서부터 그 힘을 약탈하는데다 집어넣는 겁니다. 농사가 잘되니까 돈이 많아져서 돈으로 놀고 있는 용병들을 고용을 해요. 그 용병들이 하는 주특기가 뭐냐 하면 전쟁하는 겁니다. 전쟁하고 월급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용병 가지고 뭐하는 겁니까? 그냥 수비하려고 합니까? 방어하려고 용병을 사요? 그 힘은 주체할 수 없는 힘은 주변의 있는 힘을 약탈하고 강탈해야 이게 권력의 속성입니다. 약탈해서 본 국가에 더욱 더 모든 전리품들이 집약이 되는 그런 식으로 활용이 돼요.
저는 컴퓨터 게임이나 고스톱을 안 하는데 컴퓨터 게임할 때 사이버 머니(money)라 합니까? 돈 많은 사람이 그거 가지고 뭐하던가요? 계속해서 남의 사이버 머니를 강탈하는데 사용되죠. 그걸 현찰로 바꿀 수도 있고. 게임하다 보면 강한 자에게는 주춤하고 꼭 약한 것들에게는 있는 것도 다 뺏어요. 사이버게임에서 반드시 그래요. 이게 뭐냐, 힘 가진 속성 이예요. 모든 속성이 그렇습니다.
집사님이 회사 잘되면 나중에 옆 회사 인수 다할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돼 있어요. 힘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속성이 있어요. 힘은 남아도는 힘은 약탈을 해야 힘이 힘 값을 해요. 거기에 약자로 누가 치느냐, 이스라엘과 유다가 치고 그 치면서 당하기만 하는 게 누구냐,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
그래서 주의 이름이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고 발끈하죠. 발끈하면 인간의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고 주의 방법으로 그 강대국이 폭삭 망해버립니다. ‘어디 누굴 건드려? 어디 감히 인간이 신의 이름을 건드려?’ 그쪽도 신의 이름이니까. 그러니까 우상 신과 신의 전쟁에서 항상 여호와가 승리하게끔 하기 위해서 자기백성들을 약한 자로, 누구나 넘볼 수 있는 약자로 만들죠.
여러분, 강아지 키우면 힘 센 강아지, 큰 강아지가 꼭 삽살개 같은 개가 있으면 꼭 시비 걸잖아요. 뒷다리를 물든지. 이것이 악마의 본성입니다. 이게 육 이예요. 이게 역사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왕이 처음에 신과 내통할 때 주변에서 어떻게 하느냐, 첫 번째 꿈이라 했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왕만 내통하면 재미없잖아요. 어떻게 하느냐, 모든 사람도 다 같이 왕이 통하는 신과 통하면 왕은 더 신이 나겠죠. 왜, 자기는 우두머리니까. 그때 나온 것이 뭐냐 오감만족 이예요. 이건 옆에 있는 무당들이 다 해요. 신기한 거 보시면 신의 뜻입니다. 짜릿한 걸 느끼시면 그것도 신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약, 또는 엑스타지한 쾌락, 여기에 창남, 그리고 창녀들이 여기에 동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뭐도 준비 돼 있느냐 하면 대마초 같은 것도 준비 돼 있어요. 그리고 아주 자극적인 향도 준비 돼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찌들고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과 권태로움이 쌓인다. 이런 장소는 주로 산 높은 데 있어요. 높은 곳이니까 옛날에 앗수르 신화에 보면 신은 항상 높은 곳, 하늘에 신이 있어요. 높은 곳에 있으면 신과 접촉하기가 쉽잖아요. 여기 있는 것보다는 태백산이나 설악산에 가면 뭔가 도를 닦는 것 같은.
높은 데서 일탈을 맛볼 수 있죠. 거기 가면 오감만족을 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다 준비 돼 있습니다. 마약, 그리고 아름다운 남자들, 그걸 미동이라 해요. 아름다운 남자들, 그러니까 보통 열 살, 스무 살 먹은 젊은 20대 아이돌, 똥배 말고 초콜릿 복근이 있는 애들이 준비 돼 있고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미녀들, 쭉쭉 빵빵 아가씨들이 준비 돼 있고, 이건 그리스 로마도 나오고 모든 민족이 다 있어요. 구약에도 나와 있잖아요. 나와 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뭐냐, 손님을 받아서 신이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준비된, 이게 얼마나 신이 자비로운 신이예요? 일상에서 일탈을 해서 스트레스 받는 그들을 위해서 가끔씩 풀어주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참 하나님의 자비는 그런 쪽이야,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자비.
신과 어떻게 접촉하느냐, 그 방법을 했고, 처음에는 뭡니까? 왕 중심에 꿈 해몽이라든지, 신기한 거, 이게 더 확산되게 되면 이건 왕만 신과 내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왕이 신과 통하는 즐거움을 모든 백성에게 허락하기 위해서 높은 산에 산당이란 걸 져서 거기에서 무슨 만족했습니까? 오감만족! 눈으로 보는 것, 코로 맡는 것, 느끼는 것, 귀로 듣는 것, 이런 오감만족을 통해서 신과 접촉했다는 희열을 맛보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신과 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라는 everybody 하나님을 공히. 누구나 그 나라는 공히 그 신과 통하는 나라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질서가 잡히게 되는 겁니다. 도민을 벌해도 신의 이름으로 벌하고 상을 줘도 신의 이름으로 상을 주면 그 백성들은 납득이 되는 겁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됩니까? 오감만족에서 더 나가면 그게 뭐냐, 법이 또 나와요. 첫 번째는 왕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기적들, 꿈과 해몽, 이것이 신과 통하는 방법이라면 두 번째는 오감만족 이예요. 쉽게 말하면 부흥회, 박수도 해병대 박수로 치고 오감만족, 세 번째는 법인데 신이 통하는 자가 내리는 법, 함무라비 법전 같은 겁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BC1700년경에 수메르가 망하고 그 다음에 아카드란 나라가 있었고 다음에 메소포타미아, 그 다음에 고 바벨론 나오고, 고 바벨론이 망하면서 앗수르가 등장해서 앗수르가 망한 것이 BC600년경이죠. 그 뒤에 신 바벨론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메대 바사, 페르시아 나오고 페르시아는 이란이죠. 페르시아 다음에 헬라, 처음에 이라크, 에덴동산이 있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에덴동산 있던 자리를 계속 갈아치우기 하듯이 계속 누가 점령을 하는 거예요. 바벨탑 있던 그 장소를. 계속 그 중심으로 국가를 하면서 성경의 계시는 그런 역사적 모판위에서 성경의 계시가 기록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심점은 세상 나라에서는 힘이 구심점이 되지만 정작 성경의 주인공, 주체가 누굽니까? 이건 애굽에서 올라온 아주 작은 나라, 성경에 보면 너희들이 숫자가 많지 않다. 의도적으로 숫자가 많지 않아요. 숫자가 적은 작은 나라, 작은 나라 수도 이름은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는 도성이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중심이란 말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나중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살렘의 나라라 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위로 올라가 버려요. 위로 올라가면서 밑에는 필요 없잖아요. 필요 없으니까 불태워버린 거예요. 강대국이 와서 예루살렘을 불태워버리니까 전에 저희들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언약궤 있던 곳이고.’ 이렇게 주장했던 그것이 사실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어떤 특정 공간과 특정 장소나 특정 법을 인간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소유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여호와를 특정 지점과 특정 공간 특정 법으로 이걸 계속 잡으려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신과 통하는 거니까. 아주 신기한 거니까. 그러니까 법궤를 만들면 법궤를 가지고 이용하려고 했고, 모세가 놋 뱀을 만드니까 놋 뱀을 섬기려고 했고, 기드온이 에봇을 입고 승리하니까 기드온에게 에봇을 입혀서 왕으로 삼으려 했고, 하여튼 눈에 띄는 이걸 고정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고정시켜서 국가적인 역사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놋 뱀도 불타 버리고 언약궤도 불타 버리고 거기에 있던 모든 것도 다 불타 버렸죠.
이제 신약에 와도 마찬가지에요. 신약에 와도 예수님이 마셨다는 성배, 다빈치코드에 나오잖아요. 성배 찾아 성배 했고, 동방교회 독일인가 어느 성당 거기 가면 예수님이 입었던 옷 조각 하나, 독일 어디에 가면 예수님이 찼던 창이 있고, 독일 쾰른 대성당에 가면 동방박사 유해가 거기 나오고, 스페인에 어디 가면 예수님의 어떤 유물도 있다 하고, 완전히 예수님을 분양한 모양이라. 아파트처럼 다 분양한 모양이라.
전부 다 그걸 쥐고 옛날 16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소원이 뭐냐 하면 그곳 한 바퀴 순례 도는 게 소원 이예요. 그 순례 돌면서 도로가 발달된 겁니다. 그리고 그 순례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이 뭐냐, 십자가 전쟁입니다. 귀족들이 돈을 아낌없이 제공한 것이 순례 코스가 이게 돈이 돼요. 순례 코스가 있는 그곳이 게스트 하우스에요. 모텔, 그게 장사가 된다니까요.
예루살렘을 누가 점거하느냐에 따라서 관광업계에 호황을 누리게 돼 있어요. 국가가 나서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줌으로 말미암아 종교, 교회로 봐서는 신앙심이 고조되니까 좋고, 귀족들은 장사가 되니까 좋고 투자한 밑천을 뽑아낸다는 걸로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예루살렘에 뭐가 있겠어요? 솔로몬이 썼다던 황금, 솔로몬이 썼던 그 많은 거, 그런 것들을 하나만 건져도 국보급 이예요. 그리고 한 때 바티칸이 뭐가 됩니까?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수의 있잖아요. 그것 가지고 진품이니 가품이니 난리 죽이고 막상 동네사람 동원해서 조사해서 가짜로 드러났지만.
질문: 도로가 발달된 것은 예수님 오시기 위해서 신약과 구약 중간 세대… 답변: 로마 때 로마의 평화가 일단 성립됐습니다. 그 뒤에 로마가 국교가 되면서 유명한 곳마다 성당을 지어놓고 그곳이 순례 코스가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더 발달되죠. 역사적으로 말하면 로마에게만 했던 기독교가 이제 프랑스나 독일 같은 경우에 왕이 곧 교회 수장이 되면서 칼 대제 같은 사람, 기독교화란 말이 자기 통치 이데올로기였어요. 기독교를 옹호하는 겁니다. 왜, 신과 지상과 통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누가 있는데? 자기가 있으니까. 그래서 자꾸 기독교를 권장할 수밖에 없고 거기에 대한 인프라가 구성돼야 돼요. 사회 간접 자본이 형성되어서 곳곳마다 성지 순례를 간 겁니다. 결국 …의 전쟁은 뭐냐 하면 그 중요한 성자인데 성자가 죽어도 그 죽은 것에서도 기대를 하기 때문에 왜, 성자는 죽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주면 복을 받으니까, 성자 죽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유럽에서는 영주들이 싸움을 벌이고 돈도 대주고, 서양역사가 그렇게 흘러갑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신과 어떻게 통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신과 어떻게 통할 수 있느냐 이 말 이예요.
그럼 다니엘은 뭐예요? 다니엘에 등장한 존재의 이유는 뭐냐 하면 다니엘은 지난 시간에 언급했습니다마는 요것만 생각하면 돼요. 다니엘 존재 이유가 뭡니까? 누가 물어보면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다니엘은 언약이다. 하나님의 약속 이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겁니다. 다니엘은 뭐 우리 같은 인간이고 볼품없는데 다니엘을 칭칭 감고 있는 게 언약 이예요. 왜냐 하면 다니엘 이름이 뭐라 했습니까? 人子(인자)니까 요 인자는 새 언약을 완성할 분이 인자로 오시거든요. 언약을 완성하러 인자로 오신다는 말은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성취하시면서 나타나거든 그분이 메시아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이 인자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것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오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메시아는 그냥 홀라당 오시는 게 아니고 미리 선지자를 보내고 오는데 선지자와 메시아가 연결돼 있어요. 이 연결 사슬이 뭐냐,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 언약이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성도는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옛날 다니엘이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 합류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언약 적으로 합류가 돼 있어서 이 언약이란 것은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할 때 통하는 게 있잖아요. 터널이 만들어 지면 우주인들이 기어가서 밥 먹고 오고 다시 와서 연구하고 하잖아요. 끊어지면 안 되잖아요. 끊어지면 ‘내 우주선이 날라 간다.’ 하고 밥도 못 먹잖아요. 주님하고 우리하고 우주 도킹이 되는 거예요. 이 도킹 관계를 뭐라고요? 언약 적 관계에요. 언약 적 관계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이게 쏟아져 내려오는 겁니다. 우당탕탕 하면서 쏟아져 내려와요.
냉커피 할 때 얼음조각 넣을 때 소리가 요란하잖아요. 우당탕탕 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라는 몸에다 주님의 얼음조각이 들어온 거예요. 얼음조각을 넣고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우리 이름은 없어요. 우리가 인자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이름이던지 이 근호든 누구든 그건 묻지도 않아요. 주님의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주의 이름!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위 돌에다 새 이름, 자기 이름을 새겨요. 우리는 일종의 문신을 갖고 있는 겁니다. 언약 적인 문신, 언약 적 문신은 문신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께서 이렇게 오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다른 데 보면 이걸 인치심이라 돼 했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그걸 성령의 인치심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소나 말의 주인이 내 것이라고 표시하기 위해서 낙인을 찍었죠. 불쌍하죠. 벌겋게 달군 것으로 지지직 찍었죠. 옛날 개척시대 보면 노예를 낙인찍잖아요. 그 낙인이 바로 예수님의 인치심인데 그 인 치신 144.000에 해당되는 사람만 표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우리만 인 친 게 아니고 우리 말고 다른 사람도 낙인이 있어요. 짐승의 인, 666이란 짐승의 숫자도 있는 거예요. 이것은 666 숫자. 바코드가 문제가 아니라 노는 기능, 평소에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나 지향점이 달라요. 그 자체가 이미 다른 데 도킹 됐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하고 종노릇하는 것은 666, 이건 있으나 마나 딱 보면 전부 다 마귀의 아들들처럼 살아요. 그저 자기 공로만 내세우고 자기 의만 죽자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우리는 날마다 우리 모가지 쳐야 돼요. 날마다 우리 모가지 쳐야 됩니다. 지 모가지 안치고 나서면 안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가지 쳐서 목 없는 미녀, 모가지 쳐야 돼요. 항상 우리는 얼굴 있으면 안 돼요. 우리의 표정? 우리의 표정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표정 자체는 주님이 박아 놓은 그 표정이 표정이지, 우리 표정은 아무 씨잘 데 없는 표정입니다.
우리가 울잖아요. 주께서는 뭐라 합니다. ‘니가 왜 우나? 니가 무슨 권리로 우나? 니가 울 쨉도 못 되는 게 왜 우느냐, 왜 찔찔 짜느냐? 니가 왜 우는데?’ 말이죠. 우리는 울 권리도 없고 울 자격도 없어요. 집에서 가만히 울어보세요. 귀신인지 알고… 강아지는 밥 안 줄 때는 그때는 깽깽거리죠. 왜냐 하면 우리는 육신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다루어질 때만 울든지 웃든지 해야 되지,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생각해서 상상해서 울 입장도 못 됩니다.
요번에 수련회 때 전도서 할 거예요. 전도서 특징이 뭐냐 하면 울지 마라, 예요. Don't cry to me argentina 에요. 아르젠티나, 날 위해서 울지 마라. 울 일도 없어요. 그저 웃고 살아라, 이 말 이예요. 니가 뭔데 우나, 니가 이 세상 무슨 관계있다고 우느냐, 니가 운다는 것은 내 꺼 따로 챙기겠다는 뜻이거든요. 그걸 왜 챙깁니까? 반칙이지.
언약이라 하는 것은 결국 들어오게 되면 뭔 뜻이냐 하면 이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전부 다 새로 시작해요. 항상 매일같이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의 표정은 모가지 날라 가고 아침에 눈 뜨면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늘 새로 시작하는데 내가 하는 새로운 시작점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시작점에서 우리를 매일같이 새롭게 시작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예상한 게 아니고, 예상 못할 시작점을 또 다시 하루하루 과오로서 주시는 겁니다.
시작점을 잘 몰랐던 예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비유가 나오죠. 포도원비유가 아침 10시에 온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 생각에 모든 것의 시작점은 언제입니까? 아침 10시부터예요. 자기는 자기의 시작점에 주님이 동의한 줄 알았죠. 10시까지 왔기 때문에 자기는 계산하는 거예요. 10시, 11시, 12시,… 아르바이트 7시간 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먼저 온 사람을 임금 주는 게 아니고 일부러 제일 나중 온 사람부터 하죠. 나중에 온 사람은 마지막으로 와서 1시간 일 했잖아요. 1시간 일하고 요새는 돈 만원 받았다 칩시다. 1시간에 만원이니까 첫 번째 온 사람은 계산하는 거예요. 한 시간에 만원, 오늘 7만원, 이렇게 생각했는데 제일 먼저 온 사람을 얼마 줬습니까? 달랑 만원 줬잖아요. 똑같이 줬죠. 똑같음이 그 사람한테는 불평등한 하나님으로 비취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잘못된 겁니까? 시작점이 잘못된 거예요. 언약을 모르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왔잖아요. 그럼 11시까지 일했잖아요. 11시부터 새로 언약이 투입됐다고 보세요. 또 1시간 일했잖아요. 결국 똑같이 돼야 돼요. 결국은 우리는 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무익했는데 주께서 천국이라는 곳은 노동의 양만큼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라 하는 곳은 줄 필요도 없는 인간에게 그냥 무상으로 준다는 것을 가지고 1시간 일함으로서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 쪽에서 시작점을 잡을 수 없고 시작점이 어디 있다? 저쪽, 주님의 천국에서부터 라디오 안테나처럼 죽죽죽 뻗어져 나온 거예요. 그래서 나의 가슴을 톡! 건드리니까 찌지직! 전기가 오죠. 톡 건드리면 톡 건드린 그것이 파이프가 연결돼 있고 그 위에서부터 오는 그 천국의 내용물이 얼음조각 내려오듯이 두르르 쏟아지죠. 쏟아져서 주님의 천국의 모습이 마구 쏟아지니까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고백을 매일같이 언약에 의해서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다니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다니엘이 꿈을 예상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하루, 하루의 삶은 본인이 과거에 있던 익히 아는 것을 무산시킵니다. 내가 이 정도 은혜 받았으니까 앞으로 내일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모든 예산은 다 부정당해요. 이것은 다니엘을 끌어가는 것은 과거에서 미는 식이 아니라, 미래에서 당겨주는 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어려운 거 한번 해볼까요? 예수님이 출생했잖아요.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았죠. 그리고 성장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강림하시죠.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사건의 순서죠. 여기서 시간이 정지된다면 이 시간은 인간이 자기 자력에 의해서 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가죠.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은 이거예요. 내가 언젠가 어느 동네에서 어느 집에서 태어났다. 자기 출생.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다. 초등학교. 나는 중학교 어디 나왔고 고등학교 어디 나왔고 대학교 어디 나왔고 유학까지 갔다 왔다. 이렇게 되게 되면 요 시간에 흐르는 주체는 누굽니까? 오직 자기밖에 없죠. 그러면 자기의 시간에서 요 안에서는 자기의 존재가 지속성을 갖고 있죠. 그걸 존재의 지속성. 존재의 지속성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이 시간관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느끼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집사님 느끼는 시간이 달라요. 왜, 집사님 나름대로의 자기 실존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려면 거기에 맞추어서 집사님이 느끼는 시간이 따로 형성돼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주체의 연속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간도 각자, 각자 자기 시간, 또는 자기 역사관이 따로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올린 글인가, 종속된 세월이란 글을 십자가마을에 올렸죠. 종속된 세월이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인생, 돌아볼 수 있는 자기 인생, 자기 역사가 있는 이상 그게 돌아보든가, 찔러보든가, 어떻게 하든 그 자체가 이미 근심 걱정을 유발하는 거예요. 나의 역사, 나의 인생이 있다는 그 자체가 주님께 종속을, 언약을 일단 끊어놓고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게 의미가 없는데 우리는 자꾸 기대를 하게 돼요. 그리워하게 되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그 영화처럼,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겠지만~♬ 어느 영화처럼.’ 이게 자기가 영화를 찍고 있고 자기가 그 영화의 주인공 돼 있으니까 이게 자기한테 근심 걱정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는 언약 적으로 하게 되면 주님의 시간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는 강림이나 초림이나 재림이나 이거는 동시성 이예요. 왜, 언제 오시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실 분이 그분이라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분이라면 오시는 분도 그분 이예요. 그분이 오신다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언제 오시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이 언제 올까를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 해놓고 안 믿고 자기 역사, 시간대에다 주님이 참여하기를 고대하기 때문에 이런 기다림은 그야말로 기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의 기다림 이예요. 에이, 씨 2019년보다 1999년도 9월에 온다더니 에이, 씨, 안 믿는다. 자기 시나리오를 짜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천지고 구천지고 전부 다 한국교회가 자기 시간을 딱딱 마작 하듯이 숫자 맞춰서 다 해놓고 그 다음에 주님이 어느 때 오는가, 그걸 기다리는 거예요.
주님이 미쳤습니까? 개인 시간대에 참여하게. 어떻게 오는가? 그걸 피해서 오죠. 그걸 도적같이 오신다. 그걸 피해서 오는 거예요. 요새 도적같이 오신다 해서 가스관에 페인트칠해서 잡히는 수도 있다마는…ㅎ 우리가 예상한 것은 다 피해버려요. 우리가 오라고 기대한 건 다 피하는 이유가 그 우리가 계산한 것은 우리의 시간대, 나의 역사를 그냥 쥐고 있는 거기 때문에 그렇게 돼 버리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합세하는 거기 때문에 구원자체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생했다 하잖아요. 고생할 것 같으면 출애굽이 필요가 없어요. 왜, 고생할 것 같으면 고생의 원인이 뭡니까? 바로가 압제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껏 바로 자리에다 히브리인 대통령 뽑아 세우면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자기 백성이 고통이 없을 거 아닙니까? 멸절 시켜버리죠. 히브리인들이 관리자가 되고 그동안 애먹였던 애굽인들을 아예 노예로 부려버리면 그렇게 신나는 반전이 어디 있어요? 멋있지 않습니까? 구박주고 꿀밤 주고 ‘니가 우리가 이런 팔자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우리 여호와 하나님 덕분이야.’ 이러면 신날 건데 주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뭐라 합니까? ‘잊어라, 니는 따로 할 일이 있다. 나가자.’ 이러는 거예요.
나가자, 하니까 막상 주님의 원수가 누구였습니까? 고통스럽다고 주님께 부르짖던 그 인간들이 자꾸 어디로 돌아가려 해요? 자기의 시간대가 형성되었던 애굽 없이는 자기 추억도 없거든요. 자기 추억이 기다리고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애굽에서 옆집에 사는 아가씨하고 사귀었다면 사귄 머슴아가 출애굽 돼서 광야로 나갔다면 걔는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을 거예요. 왜, 자기 사랑하는 여인이 지금도 자기 돌아오기를 기다리니까. 나오면서 작별인사도 못하고 왔기 때문에. 아마 몰래 탈영해서 다시 애굽으로 갔을 거예요. 내가 천국 안 가면 안 갔지 너와 헤어질 수는 없다. 위대한 사랑의 승리 아닙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거기다 제가 집어넣어야 한 것은 사랑하는 애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주께서는 처음부터 출애굽 이예요. 처음부터 뭔가 강제로 이렇게 분리시키는, 찢어버리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우리는 옛날 추억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고수하고 그 안에서 진정 나다운 내가 거기서만 있으리라고 우리는 굳게 생각하는데 주께서는 찢어지니까 결국은 우리가 들통 난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우상 이예요.
우리는 백설 공주, 신데렐라를 보면서 얼마나 거기에 맞춤 남자가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어요? 일부러 신발도 한번 던져 놓고, 왜 신발 찾아오는 왕자가 있나 해서, 신발 찾아오는 자가 나중에 꼽추이면 기겁을 할 텐데.ㅎ
모든 우리가 못 다한 한, 이 땅에서 그리워했는데 성취되지 못한 그 한을 드라마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고 하잖아요. 잘사는 집안에 아버지 죽고 난 뒤에 한꺼번에 몽땅 망해서 다 이혼하고 하는 드라마 있잖아요. 오로라 공주라고. 그걸 보면 우리가 드라마 같은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걸 가상세계. 우리는 결국 우리자신이 뭐다? 가상세계 주인공이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작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자신의 허깨비가 돼요. 그걸 성경에서는 안개라 해요. 우리 자신이 있다가도 없는 안개 같은 존재, 평생 꿈만 꾸다가 그야말로 꿈처럼 죽어버리면 처음에는 울고불고 하다가 몇 개월 지나버리면 엄마 죽었다고 좋다고, 아빠 죽었다고 좋다고 유산 갈라먹기 싸움한다고 그 모습이 훤히 보인다 이 말이죠. 잊어진 존재예요. 결국은 우리는 유명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다 잊혀지는, 나는 김대중 대통령 아직도 죽은지도 몰라. 기억도 안 나. 다 잊어진 존재예요. 사람이 기억할 때는 필요할 경우에만 기억에 남지, 필요 없는 것은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너를 거기서부터 구출해줄게, 라는 약속이 언약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구출해줄게!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분명하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구출해줄게. 니가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구출해줄게.’ 이게 구원입니다. 구출되기 전에는 우리는 철저하게 안 됨이 먼저 전제가 돼야 돼요. 나는 절대로 안 된다.
어제 수요일 날 뭐라 설교했습니까? 우리는 창녀라는 것, 세상으로부터 탈출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세상하고 잘 통하고 세상과 친밀하고 입만 열면 유행가고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와 닿는지, 예수님은 변호 안 되고 같은 사람 앞에서는 변호하고 싶고 서로 통하는 게 있어.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을뿐더러 본인이 벗어나지 않으려고 해요.
만약에 이 땅에서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만약 천국 가세요. 해도 천국에도 축구 없어요. 축구 없는 나라 같으면 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축구 없는 나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야구 없는 나라 무슨 재미로 살아요? 박지성이하고 누가 결혼하면 그 재미로 사는데, 이 땅에서 연애 인 씹는 재미로 사는데 연애 인 없는 천국 같으면 무슨 낙으로 삽니까?
그만큼 우리 성경이라 하는 것은 얕잡아 보지 마세요. 철저하게 우리를 있는 대로 다 들추어내면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기독교가 무슨 기독교가 됐느냐 하면 여러분, 클래식 반대말이 뭐죠? 대중가요죠. 지금은 대중문화가 주류가 됐는데, 기독교가 뭐냐 하면 요새는 대중 기독교예요. 세상적인 즐거움을 용납해주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 모임으로서 서로 낯짝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그러니까 대중 기독교는 힘 있고 돈 있고 이런 사람들이 중요하죠. 하나의 쇠를 모으는 지남철이 되겠죠.
그러면 언약에서는 다니엘이 중심이죠. 그러면 다니엘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뭐죠? 지금 다니엘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타입 이예요. 다니엘에 언약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대우를 받는 이유가 다니엘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 땅에서 분리돼야 될 세계에서 언약으로 이렇게 주입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커피에다 얼음을 넣잖아요. 다니엘을 입 벌려 놓고 하늘나라 얼음 조각을 막 집어넣으니까 기존 세계에서 꿈을 꾸던 이런 짐승의 사람들한테는 이게 납득이 됩니까? 안 됩니까? 전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니까 다니엘 주변에 누가 모이겠어요? 안 모이겠어요? 모여들지를 않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다니엘이 있으면 다니엘 속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70년 포로생활을 집어넣어요. 70년 포로생활을 다니엘 속에 한꺼번에 집어넣으면 70년 동안 이스라엘이 포로생활 해야 될 이유가 들어오는 셈이 되죠. ‘야, 다니엘아.’ ‘예’ 70년 포로생활 하는 이유가 들어와야 돼요. 그들은 당연하게 죄죠. 죄면서 죄가 성경의 모든 죄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 죄가 뭐냐 하면 우상숭배예요.
우상숭배! 자, 마지막에 좀 어려운 거 나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우상숭배가 죄가 되죠. 그러나 우상숭배의 죄는 우상숭배 하는 사람은 자기가 우상숭배 했다고 전혀 생각을 못합니다. 자기가 우상숭배 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우상숭배를 그만두죠. 저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본 거예요. 최선을 다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지, 예수 믿는 게 우상숭배라는 생각을 도저히 안 하겠죠. 이처럼 이스라엘, 유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죄 지으면서도 포로생활하면서도 당체 뭐가 죄인지 모르는 거예요. 뭐가 죄인지 모르는데 다니엘이 다니엘 속에 70년 포로생활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다니엘이 차후 적으로 왜 우리는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할 정도로 우상숭배 자이냐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니엘을 둘러 싼 이 세력이 무슨 세력이냐 하면 짐승의 세력이거든요. 결국 그동안 짐승의 세력 속에 유다 나라가 이렇게 주먹이 있다면 편 손으로 주먹을 덮잖아요. 주먹이 앙꼬라면 진 빵으로 덮듯이 다니엘과 세 친구를 짐승이 덮어버리면 요 안에서 70년 포로 잡힌 이유가 나옵니다.
이유가 뭐냐, 이 바깥의 덮인 것을 짐승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알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유다 사람들은 이걸 몰랐던 거예요. 이스라엘 유지하는 권력자들이 그게 짐승에 의해서 파견된 짐승의 일꾼이란 사실을 본인들이 몰라서 같이 한 통속돼서 놀아난 거예요. 유일하게 안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미가야. 선지자는 막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왕하고 싸우는 거예요. ‘왕이여,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왕이여 화내십니다.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라고 했지만 힘이 없어. 약해. 에이, 죽어버려. 사가랴 같은 사람은 억울하게 죽잖아요. 아벨의 피에서 사가랴의 피까지 너희가 담당한다. 많은 선지자를 보냈지만 미가야 같은 경우는 하늘나라 이야기한다고 뺨까지 맞고요. 마가야는 400명이 다 동의하는데 니가 뭔데 아니오, 냐, 이게 어디서 왕을 힘들게 하고 니가 뭔데 우리를 거짓 선지자로 만들고, 니가 뭔데. 이런 식으로 모독을 받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에잇 때려지고 나 안 하련다.’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오늘날 목사님?, ‘나 이거 안 할래.‘ 하고 접어야 돼요. 도저히 해도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내가 미쳤어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이야기 몇 마디 하다가 에이, 씨 내가 괜히 말 꺼냈어. 이런 감이 와야 돼요. 그냥 통장만 하지 말고. 감을 느껴야 돼요. 이게 포함될 때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냥 같은 인정 많은 이웃이 아니고 짐승, 새로운 감각, 언약 적 감각이 있어야 돼요. 짐승에 의해서 만두피가 앙꼬 싸듯이 싼 거예요.
그럴 때 여기서 짐승인 것을 드러내는 짐승에 포로 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조국이었고 이제는 그 짐승을 내 때, 다니엘 때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짐승의 속성답게 낱낱이 밝혀내는 작업을 다니엘을 통해서 폭발하듯이 퍼지면서 짐승의 구멍이 뚫리죠. 사자 굴에 집어넣으니까 기어 나오고 불 속에 집어넣으니까 기어 나오고, 뭔가 짐승의 세력에 누수가 생기는, 펑크가 나는, 야! 그 구멍 하나, 하나가 세상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는 구원의 출구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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