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선지자 신체)130613-21강a -이 근호 목사
제 21강a
226 페이지,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70이레 계시를 다니엘이 받았습니다. 다니엘이 받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70이레 계시를 이해했는가? 왜 하필이면 다니엘에게 주었는가, 그런 것을 해야 되겠죠.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인데 다니엘이 그냥 다니엘이 아니고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하나님께서 호칭하기를 “다니엘아” 하지 않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인자야”
인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를 때 호칭입니다. 에스겔도 인자라 했거든요. 그런데 앞에 있던 엘리야는 엘리야라 해놓고 이쪽에서는 왜 인자야, 부르느냐? 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이 망한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인자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 그런데 여기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요 이야기할 때 먼저 우리가 염두해 둘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선지자라 하는 이것이 본인이 다니엘이 선지자가 되고 싶다고 ‘저 할게요.’ 손들고 나오지는 안했잖아요. 요점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다니엘이 선지자 하고 싶어서 선지자 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 돼야 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신자가 되겠다는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이건 뭔가 믿음이 아니에요. 우리 생각에 ‘신자 되면 천국 가니까 아! 신자부터 먼저 되면 되겠다.’ 이건 우리 욕심이고 우리 개념이고 우리 기대고. 다니엘이 ‘나는 선지자 되면 나중에 메시아를 만나니까 선지자 돼야 되겠다.’ 이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 선지자를 선지자 되게 하는 그 위치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오늘날 너도 나도 다 천국 가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안 나와도 천국은 가고 싶어 해요. 지옥은 안 가고 싶어 하고. 그런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그냥 긍정을 하면 안 돼요. 긍정을 하게 되면 성경 해석이 벌써 처음부터 실패하는 겁니다. 이렇게 봐야 돼요. 우리가 신자 되게 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귀담아 두지 않는다는 사실, 아예 그걸 못 들은 걸로 한다는 겁니다. ‘나 이렇게 구원받아서 천국 가겠습니다. 하나님.‘ ’나 안 들을 걸로 할게. 그건 어디까지나 너 생각이야.‘
그런데 이게 다니엘에 보면 우리 생각이 아니고 우리 생각이 마귀생각 이예요. 짐승 생각 이예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것, 몇 시간을 믿어서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마귀생각인데 그게 구체화 된 것이 뭐냐, 예수님을 살해했던 유대인들의 분위기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이거는 어떤 수단을 해도 반드시 구원받아야 되겠다. 그러한 분위기가 돼 있습니다.
제가 수요일 날 설교할 때 한 예를 들었죠. 어떤 예를 들었느냐 하면 현금인출기 예를 들었잖아요. 현금인출기 예가 뭐냐 하면 현금인출기는 이게 누구 앞에서도 강도가 되던, 도둑이 되던 어린애가 되던, 누구 앞에서도 사용법대로 하게 되면 돈은 나오게 돼 있다는 겁니다. 제가 왜 현금인출기를 거론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현금인출기처럼 대하고 싶어 해요. 하나님이 사용법만 주기만 하면 그대로 할 테니까 그저 영생만 툭! 튀어나오게만, 영생만 제공하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신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사용법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규칙이 뭡니까? 원칙이 뭡니까? 고거 습득하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거 맞죠? 요걸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까 강의한 것처럼 그것이 바로 고 방법까지라도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이미 간추려놓은 거예요. 이렇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럼 우리 생각은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나무를 새로 심던지, 아니면 따먹은 것을 토하든지 해서 갖다 붙여놓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따먹었으니까 따먹은 만큼 그걸 순서를 역으로 바꾸어서 갖다 원상복귀 시키면 안 따먹은 것으로 돼서 저주가 안 올 수가 있고 축복이 될 수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우리가 갖게 돼요. 우리가 따먹었으니까 어떻게 우리 쪽에서 따먹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놓으면 그러면 ‘아무 일 없는 거죠?’라고 우리가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게 비가역적 현상이라, 물리학에서 한번 이렇게 된 것은 그걸로 없는 겁니다. 계란이 깨진 걸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계란을 안 깨진 상태로 만들 수 없고 유리컵도 마찬가지고, 한번 이렇게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원상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우리 쪽에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예요.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제가 천국 갑니까?’라는 말은 하면 안 돼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그 다음에 처분은 누구한테 맡겨야 돼요. 엎질러진 물을 가지고 어떻게 영생을 만들어 내느냐 솜씨는 우리 하나님께 달린 문제지, 우리가 스스로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자기가 조치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그게 뭔데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알려줍니다. 이제 다니엘의 위치를 알겠죠?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누구를 믿든지 괜찮은 것을 믿어서 영생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나 어떤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주어진 모든 계시는 이쪽에서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너를 데리고 너를 재료로 삼아서 인간이 못하는 영생을 내가 만들어 낼게.‘ 하는데 동원된 사람이 다니엘 이예요.
내가 교회 간다? 교회 간 게 아니에요. 교회 가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오늘 아침에 밥을 먹었다. 내가 밥을 먹은 게 아니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이신 거예요. 오늘 이렇게 옷을 얇게 입었다? 주께서 옷을 얇게 입게 하신 거예요. 전부 다 날씨를 덥게 만들어서.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영생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겁니다. 참여시킴으로 말미암아 뭐를 뜯어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요런 식으로 현금인출기 앞에서 카드 넣고 비밀번호 누르고 금액 30만 누르면 30만 원 나오고.’ 하는 이런 인간적인 방식들이 영생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마귀 짓인 것을 폭로시키면서, 그걸 떨쳐내면서 주께서는 우리를 영생을 바꿔치기 하듯이 주시는 겁니다.
제가 부산강의 하면서 언급했던 용어가 평균 人生, 평균 인생이란 말은 니체가 했거든요. 평균 人生이란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전부 다 자연스럽게 똑같은 인생이 됐어요. 인간이 얼굴은 달라도 어릴 때부터 천재, 천재하잖아요. 하다가도 나중이 되면 고만고만한 인간들이예요. 전부 다. 사랑하는 사고방식이나 생각들이나 방식이나 전부 다 일률적으로 전부 다 평균화 되고 말았어요. 이 평균 시킬 때 원칙이 뭐냐 하면 바로 힘의 소유에요. 힘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서 점수가 매겨지고 등수가 매겨져요. 그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뭐냐, 모든 것이 수학적 이예요.
제가 대전 강의할 때 느헤미야, 에스라 할 때 했거든요. 귤이 3개, 하나, 두 개, 세 개가 있다 하면 원래는 귤이 세 개 있어야 되는데 3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오죠. 할 때 귤 3개를 놓고 O, O, O =3 어린 에디슨이 이걸 시비 걸었죠. ‘선생님, 요 3과 귤 3개가 어떻게 일치되는지 한번 정리해 보세요.’ 아마 에디슨이 많이 맞았을 거예요. 3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귤 3개라는 숫자와 어떻게 일치되는지, 선생님 정리해 보세요. 선생님이 할 말이 없어요. 귤 3개가 돼 버리면 이건 평균화 돼 버려요. 평균화 되면 하나, 하나의 개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건 동일한 귤의 곱하기 3에 불과한 거예요. 동일한 것의 곱하기 3이죠. 3이 오기 전까지는 각자 개성이 있는데 귤 3개가 돼 버리니까 듣는 사람은 똑같은 귤 3개가 돼 버린 거예요.
저기 네 사람 간다 하잖아요. 네 사람 가니까 저기 어떤 사람이 가는지 모르고 그냥 네 사람 가버리면 듣는 사람은 네 사람을 상상해요. 실제로 네 사람은 가는데, 네 사람 가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당신은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까?’ 라고 물으면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나예요. 내가 가는데 세 사람이 따라 왔지, 나는 나라니까요. 다른 사람 다 물어봐도 나는 나지. ‘나는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 안 해요. ‘니 세 사람이 죽든 말든 나는 몰라. 난 나만 있으면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어.’ 그런 나예요. 그런 나밖에 모르는 1이 4에 묶여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는 나무가 하나의 나무가 될 수 없고 아담은 한 명이 아니에요. 아담은 모든 인류의 숫자를 총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한 아담 안에서, 하나라 하는 것은 총괄 개념인데 왜 총괄개념이냐 하면 아담 한 사람으로 범죄 하여 모든 사람이 죄진 것처럼 예수님의 하나의 의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의인 되는 거예요. 이게 총괄개념이라는 거예요. 이 총괄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 144.000으로 표현한 겁니다. 숫자가 아니에요. 143999 +1이 아니라니까요. 사람을 숫자로 번역하지 마세요. 그러면 전혀 성경적 해석이 거기서 담기지 않습니다. 144.000은 결국은 하나에요. 하나! 같이 움직인다니까요. 143999명인데 한 명 더 들어왔다. 이런 거 없어요. 이게 한 명 있어도 144.000이고 두 명 있어도 144.000 이예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있죠. 두 증인이 총괄개념이라니까요. 이 두 증인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스가랴에 나오는 총괄개념이거든요. 그래서 두 증인이라 하면 모든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1000년 왕국 할 때 1000도 마찬가지 개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숫자 때문에 하나님의 질이 죽어버려요. 그러면 인간은 자꾸 숫자로 노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평균화 되었고 평균화 된 것을 숫자로 표현했다 이 말이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면 ‘어릴 때부터 귀염 받고’ 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월급 얼마 받느냐 이 말이야 내 말은.’ 자기 딸보고 ‘남자 친구 사귄다면서?’ ‘네’ ‘어떤 남자인데?’ ‘내 남자 친구는 어릴 때부터 귀염 받고.’ 그거 말고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돼?‘ 그걸 묻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몸은 튼튼해?‘ 이렇게 말고 ’키가 몇 센티인데?‘ 키 몇 센티로 모두 서로서로를 측정하는 평균화 된 세상에서 인간의 질은 숫자로 모든 걸 표시를 하는 시대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가운데서 그들은 규칙만 어기니까 이 세상을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아주 토속적인 용어를 쓴다면 이 세상은 무슨 판이냐, 노름판입니다. 왜 노름판이냐 하면 노름판에서의 정의로움이라는 건 규칙과 방법만 절차만 옳으면 결과가 어쨌든 그 노름판은 정의가 넘치는, 공평이 넘치는 노름판이 되는 겁니다. 패 내고 화투칠 때 화투 하나 하고 맞춰서 한 장 내고 똑같은 절차와 방법을 같이 했기 때문에 장땡이 나오든 광 땡이 나오든 그건 몽땅 가져가도 누가 입 떼면 안 돼요. 그게 천국입니까? 그런데 그게 정의로운 사회거든요. 가장 정의로운 사회가 노름판이 최고로 정의로운 사회에요. 물론 뒤에 비추고 그러면 안 되고, 그야말로 그 사람이 누구든지 봐서 뭘 쥐고 있다는 걸 알아맞추는 그런 기술로 봤다 한다면 가장 정의로운 거예요. 가장 공평하죠. 그러니까 노름판에서 누가 돈이 있다고 교만하면 안 돼요. 그날 운이 안 땅겨서 그래요. 로또죠.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로또 추첨할 때 네 가지 관을 통해서 숫자가 달린 공이 들어오잖아요. 그렇게 되면 투명한 유리관 속에서 숫자, 28번, 26번이 충돌한다고요. 충돌하면서 15번 튕겨 나오면 15번, 또 튕겨서 6번이 나오면 6번이 되잖아요. 우리 인생이라는 게 뭐냐 하면 그냥 홀로 사는 게 아니고 이놈한테 튕기다가 저놈한테 부딪히고 튕기고 부딪히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이혼하고 이러다 나온 게 16번, 27번, 5번이고 그런 거예요.
결국 로또 판에 보면 우리는 개성이라는 게 없고 다만 쥐고 있는 것은 나한테 담당한 숫자만 있는 것, 그냥 숫자 하나 쥐고 있는데 그 숫자를 하나님께서 죽인다는 겁니다. 왜, 아담이란 총괄개념에 포함되기 때문에 니가 26번이 됐든 75번이 됐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죽을 인간 같으면 ‘주께서 죽이시는군요.‘ 라고 알고 수용하면 그게 신자인데, 영생 얻는데,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천국 갈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아담 안에 갇혀 있다는 그 사실을 거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니까 거부는 마귀가 시켜야 거부하지, 지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마귀가 하나님보고 ’하나님, 그 따위 소리 하지 마.‘ 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서 마귀 목소리 나와서 ’하나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완전히 개콘의 김 기리가 하는 대사처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됩니다. 한 사람 범죄 했다고 다 죽이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특히 누가 그 소리 하느냐 하면 목사들이 그런 소리 하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 이 한 노력만큼 복주십니다.’ 거기다가 주님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 같이” 이렇게 나오면 목사가 나서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교회 장사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겠죠.
다니엘 다시 이야기합시다.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는 인자라는 말로 다니엘과 교체하는 겁니다. 삽질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조폭이라서 다니엘을 삽질해서 파묻어요. 다니엘 하나 파묻어야 인자라는 싹이 피어납니다. 다니엘을 흙으로 파묻어요. 식목일 이예요. 심어 놓으면 다니엘은 죽고 거기서 뭐가 피어나오느냐 하면 인자라는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되죠. 이게 ‘아이쿠, 다니엘 안 됐다.’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다니엘 이예요. 성령 받은 우리를 다니엘로 그렇게 만들어요.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게 있던가요? 이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전혀 되지를 않습니다.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구원받았기 때문에 뜻대로 안 돼요. 우리의 뜻은 마귀 뜻이거든요. 마귀의 뜻을 이루어보면 이건 지옥 가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래서 마귀 뜻이기 때문에 절대로 마귀와 반대편으로 데려가 주기 때문에 이쪽 편의 마귀 뜻대로 안 해주시는 그런 것을 고마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걸 굉장히 감사히 여겨야 돼요.
주님이 이렇게 관여하지 않으면 항상 우리는 우리 뜻대로 되기를 고수하고 고집할 수밖에 없어요.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내 뜻만 되면 우리는 만반의 웃을 준비가 돼 있어요. 월드컵도 대한민국이 나가야 되지, 7승도 류 현진이가 돼야 되지, 전부 다 자기 뜻대로 다 돼야 돼요. 세상의 모든 게. 자기가 응원하는 롯데 자이언츠가 꼭 이겨야 되고, 남의 자식은 전부 다 대학 떨어져도 자기 자식은 좋은데 가야 되고, 졸음운전해서 고속도로에서 차 박을 때 그것도 나와 상관없는 사돈의 팔촌하고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죽어야 되고 나와 관계있는 사람은 졸음운전하다 죽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돼야만 하는 그 고집, 그게 우리뿐만 아이고 다니엘도 마찬가지에요.
그 다니엘에 대해서 주께서 삽질하는 거예요. 조폭이 파는 게 아니고 다니엘 본인이 들어 갈 구덩이를 본인이 파는데 사자 굴에 들어가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못 들어가서 환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니엘 세 친구는 어디 들어갑니까? 사자보다 무서운 불 속에 들어가요. 인간의 세포가 단백질로 돼 있기 때문에 200도 이상 올라가 버리면 세포가 제 기능을 못해서 혼미해집니다. 녹아버려요. 그래서 화상 입잖아요. 그런데 풀무 불이거든요. 200도가 아니고 풀무 불같으면 얼마나 올라가느냐 하면 1000도 내지 1500도, 도자기 구울 때 바람을 불어넣어서 공기를 집어넣는데 옛날 사람 가야 사람들 보면 산소를 주입하니까 이건 철도 물처럼 녹아내리는데 우리의 세포 분자 구조가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만큼 뭐냐 하면 다니엘에게 준 계시가 죽음보다 세다는 뜻 이예요. 그런데 남이 하면 우리는 박수만 치면 되지, 막상 주님의 약속이 우리 죽음보다 세다는 것을 우리를 가지고 측정한다, 실험하겠다고 나서면 아! 이거는 기겁할 문제입니다. 지금도 실험 가능합니다. 주님의 영생이 우리 죽음보다 더 세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하면 돼요. 일단 단동에 가서 요한복음 쪽 복음을 성경을 몸에 감고 단동 건너서 신의주로 해서 북한에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면 미친놈이라 해서 붙잡아서 공개하거든요. 북한 경찰서가 뭡니까? 안전 보위 국에 가서 빠따로 ‘이래도 예수 믿을 건가?’ 해서 맞아서 완전히 바보가 되는 거예요. 바보로 만들면 입에서 시키는 대로 하거든요. ‘예수는 없다. 북한 인민 공화국이 천국이다.’ 이런 소리 방송국에 가서 하면 돼요. 어디 그렇게 해보시렵니까? 하도 많이 맞아서 정신 착란 돼서. 선교할 때는 성령께서 선교한다 해서 얻어맞아서 이제는 김일성 만세, 하면서 방송에 나오고. 그것도 마귀시험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왜냐 하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실험은 우리가 나서서 실험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여러분 사시는 장소에서 매일같이 딸하고 아들하고 남편하고 매일같이 죽는 실험을 해주십니다. 내가 잔뜩 기대했던 딸에게 실망하고 내가 잔뜩 기대했던 남편이 실망케 할 때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살면 뭐 하노.’라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그때 뭡니까? 주께서 살려주니까 사는 것이지, 내가 산다고 해서 누구 믿을 놈 누가 있습니까? 언제 가족을 우리가 믿었어요? 믿는다고 해서 믿게 하지는 않는 거잖아요. 가족이, 남남인데.
그럴 때 역시 믿을 구석은 내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주님이 다니엘 하는 그 과정에 우리를 참여시킨다는 이 변함없는 사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내가 살짝 문제 하나 던져볼게요. 변함없음, 글자 읽으라고 쓴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의 구원은, 영생은 변함이 없음을 확정 시켜주는 계시가 다니엘에게 주어졌겠습니까? 안 주어졌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께서 한번 주신 구원은 취소되거나 폐기처분 안 된다는 그 내용이 다니엘에게 주어졌겠어요? 안 주어졌겠어요? 당연히 주어졌죠.
그래서 다니엘을 人子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예수님도 인자 같은 이로 나오시고. 예수님은 자기를 뭐라 합니까? 人子라 했잖아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나는 人子라고 하시면서 나를 믿으라 하셨죠. 人子를 믿으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다니엘에게 주어진 계시대로, 그 내용대로 그걸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내가 왔다 이 말이거든요. 다니엘에게는 구름 타고 오잖아요. 내가 바로 구름 타고 올 인자 같은 이가 바로 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음성을 들을 때 그걸 듣고 우리가 믿게 되면 다니엘에게 주신 안에 있는 계시가 어떤 계시기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우리는 우리밖에 모르고 돈밖에 모르고 자기 자식만 중요하고 세상만 좋아하고, 다 내 뜻대로 이렇게 나만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그래도 변함없이 영생을 받는데 지장이 없는 그 내용이냐 하는 것은 먼저 우리 이전에 다니엘이 받은 계시 안에 그게 담겨 있다 이 말입니다.
다니엘에 보면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이야기가 다니엘 12장에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12장 1절에 보면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구원이 뭐냐 하면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이렇게 돼 있죠?
이게 다니엘에게 준 계시 안에 포함돼 있잖아요.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아까 조폭처럼 삽질해서 땅에 묻히잖아요. 그럼 땅에 묻힌 인간이 땅에 묻혀서 스스로 움직여서 땅을 팝니까? 묻혔는데, 그래서 땅을 파헤치고 무사히 일어나니까 이렇게 다시 살아난 거예요? 킬링이란 영화에 보면 묻었는데 손으로 파고 나와서 살아나는 게 있어요. 그건 영화고.
우리는 죽은 자가 꼼지락 거리면서 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그 말은 여기서 ‘죽었다.’ 이 말은 죽어서 무덤 속에 있는 것도 죽음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았다 해서 하루하루 밥 먹고 산다는 이것도 사실은 무덤 속에 이미 파묻혀 있는 상태에요. 우리는 손가락을 움직이지만 주께서는 그걸 움직이는 걸로 보는 게 아니고 죽은 걸로 보는 거예요.
다니엘에 있어서 구원은 이미 다니엘이 죽었다고 칠 때 죽은 자를 어떻게 영생으로 이끌어 내느냐 하는 솜씨는 다니엘을 찾아오신, 다니엘 선지자를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메시아의, 인자 같으신 분의 솜씨입니다. 능력 이예요.
그러면 다니엘이 꼼지락 거리고 자기 힘으로 도 닦고 해서도 구원 안 되는 이유가 뭐냐, 다니엘 주변에 뭘 배치를 해요, 짐승의 나라를 배치해 버립니다. 다니엘을 흙에다 묻는 게 아니고 콘크리트에다 묻어요. 흙도 파기 힘든데 철근 콘크리트에 묻어버리면 다니엘이 백날 놓으려 해도 짐승의 나라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죠.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짐승의 나라가 한번 타설한 것이 아니고 엎친 데다가 또 덮쳐서 또 짐승이 덮치고 또 엎치고,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로마가 마지막 콘크리트 작업 이예요. 어느 인간이 여기서 지가 마징거제트도 아니고 지가 아이언 맨도 아니고 거기를 뚫고 나오겠습니까?
짐승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말은 결국 바벨론이거든요. 짐승이라 했다는 말은 ‘짐승아, 니가 할 수 있는 능력 다 발휘해서 인자, 나 위에 덮쳐라.’ 그게 십자가의 죽으심이죠. 콘크리트 네 겹이 덮쳐버리면 아무도 누구도 일어날 수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거기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건져 낼 때 그게 능력이거든요. 뭐냐 하면 인자라고 했을 때 처음에 창세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야기가 끝났어요. 너는 버림받아야 되고, 그 버림받은 너를 내가 건져줌으로서 사랑이라는 것을 성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깁니다. 사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준 이가 어찌 우리를 콘크리트에서 건져내지 못하겠느냐?
그러니까 니거 뭐를 했느냐 하지 말고 주님이 어디에 덮쳐 있는가를 보라. 주님이 덮쳐 있는 것을 깨고 나온다면 니가 어떠한 콘크리트 타설에 갇혀있더라도 죽은 예수를 살리신 영이 너희에게 임하면 죽을 너희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 그게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는 결론이 나와 있지만 구약의 다니엘 같은 경우에 그 환경이 이미 마련돼 있어요. 장차 오실 인자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 그 모양새를 다니엘이 미리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 흉내를, 히브리서에서는 모형이라 하죠. 그 모형과 그림자를 그냥 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 제가 방금 모형, 그림자라 했습니다. 그림자! 그림자의 특징이 있어요. 그림자라 하는 것은 이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잖아요. 실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움직이죠. 그럼 물어봅니다. 그림자가 움직이면 실체가 따라갑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소리해도 예수님은 아브라함 말 안 들어요.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그림자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그림자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의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주님을 보여주는 그림자라면 주님이 우리 말 듣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간에 주께서 잠시 장소를 이동한 거예요. 주님은 한 발짝 이동했는데 우리는 죽는다고 난리 났어요. 주님은 잠시 몸을 움직였는데 우리는 부부싸움하고 난리 났어요. 못살겠다고 갑자기 안 다니던 새벽기도까지 나와서 데모하고 항의하고 합니다.
기도 대신 이렇게 하면 모르겠어요. 아예 글씨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대법원이나 검찰청 앞에 서서 있잖아요. 피켓 들고 하는 그게 더 노골적인데. ‘주여!’ 이러지 말고 차라리 ‘나의 피부암을 낫게 해주세요.’ 이런 거 써서. 이거 동영상 올려야 되는데. 그게 노골적 이예요. ‘주여 선교회비 다 대겠습니다. 선교사님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위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바른 소리 하지 말고 간단하게 이거 해달라고. 간단하게 몇 자만 쓰면 되는데. 뭐 그렇게 주께서 다 아시는데 빙빙 돌려 이야기한다고 지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를 리가 있습니까? 주께서 아시는데, 중심을 보시는데. 새벽기도 한다고 감사헌금 강단에 올리고, 그거 한다고 돈 받고 기도 응답해주시겠어요? 목사만 좋아하지 주님은 전혀 안 좋아하시는데.
다니엘 같은 경우에 그냥 삽질해서 사자 굴에 들어가야 된다니까요. 언제 다니엘이 ‘주여 사자 굴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죽음 속에 가야 하기 때문에 다니엘도 그 시대에 부합되는, 그 시대의 짐승에 부합되는, 그 시대 계명은 그 시대 짐승이 창안한 거잖아요.
“누구든지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불에 들어간다.” 라는 것을 다니엘 세 친구한테 이미 법령으로 왔죠? 법령이 뭡니까? 그 시대에 마귀가 만든 것이고 그 시대의 마귀에 대해서 주님은 좋다고 ‘내가 잡혀 먹혀줄게. 잡아먹어라.’라고 머리를 내민 거예요. 그걸 다니엘은 그 시대에 머리를 내민 거예요.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래.’ 기도하면 벌한다. 창문 활짝 열고 보란 듯이 하니까 중앙일보 사진 찍고 난리 났어요. 고위 관리자가 지금 법을 어긴다 해서 찰칵, 찰칵, 찍고 전부 다 난리 났어요. 보란 듯이 창문을 열고 기도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복음 전할 때 가만히 숨어서 하지 않았어요. 공개적으로 했어요. ‘아예 날 잡아 먹어라.’ 이 말이거든요. 날 잡아먹어서 짐승이 짐승 값을 해라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성도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좋은 친한 친구 사이도, 뭐 초등학교 30년 친구고 30년 지기고 돈 빌려준 관계고 백날 해도 졸지에 원수 돼 버려요. 그렇게 원수 될 때는 고마운 줄 알고 원수 안 되거든 ‘이거 뭔가 내가 복음을 잘못 전했나. 내가 어설프게 내 쪽에서 뭔가 연기를 했는가.’ 이건 때가 안 돼서 그렇고 때가 되면 주께서 주변에서 삽질하게 만듭니다. 아예 파묻게 만들어 버려요.
다니엘에 있어서 이겁니다. 이런 명제가 돼요. 선지자는 유일자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선지자 본인도 자기가 유일자 되기를 원치 않아요. 하나밖에 없는 걸 원치 않습니다. 왜 이 질문을 하느냐 하면 구약의 언약에 있어서 반드시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혜택을 입는 원리예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게 되면 저주 받는다.”
그러면 노골적으로 ‘아브라함 당신 꺼져.’ 이렇게 저주한다고 저주 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아내 사래를 그것도 누이동생이라 하니까 어떻게 저 여인을 자기사람으로 하고 싶어서 동침하지도 않고 동침할 뻔 했는데 그쪽 동네 여자가 전부 다 태가 닫혀 버리는, 아비멜렉 추장 이야깁니다.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죠. 그래서 우리 인간이 이해가 안 되는 게 이렇게 뭔가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그 이후부터는 범죄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는 게 맞는데, 할 뻔했는데, 할 뻔했는데, 뭐가 등장합니까? 형벌이 먼저 주어졌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그냥 이용할 뿐 이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사람을 건드리면 너희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를 그 아비멜렉 추장 집에서는 미리 맛보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억울하죠.
학교 선생님이 컨닝 하면 때린다, 이래야 되는데 미리 때려놓고 컨닝 하면 때린다. 이러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이게 불합리해요. 미리 때려 놓고, ‘선생님 컨닝 안 했잖아요.’ 하니까 ‘그래도 컨닝 할 기회가 되면 컨닝 할 마음이 있잖아?’ 하니까 ‘저는 없어요.’ ‘그럼 한번 피해 볼까?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러면 하죠.’ ‘그러니까 봐라. 그러니까 내가 미리 때렸지.’
제가 말하는 것은 선지자 아브라함, 이삭, 이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본인 인생이라는 게 없다는 거예요. 누가 압수해 갔어요. 압수해 갔다는 것도 말이 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애초부터 압수당한 인생으로 살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자기 인생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면서 살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게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도 같은 계열의 사람이니 다 마찬가지죠. 우리 인생이란 없고 주께서 주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 인생으로 몰려가는 겁니다.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하니까 여러분도 이해되시겠죠.
그리고 나서 226페이지 봅시다. 글 내용은 어렵지만 제가 이렇게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하려고 했으니까 여기 인자라는 말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잖아요. 인자라고 호칭하게 된다 했고, 227페이지 위에 보면 『‘인자’와의 대비가 다니엘의 신체 안에서 성립되는데 이 대비는 곧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작용의 차이를 드러낸다.』
여기 다니엘의 신체라고 했는데 방금 제가 강의한 대로 하면 다니엘은 뭡니까? 언약적인 의미에서 유일자, 다른 사람은 보여주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이 말은 다니엘과 하나님이 함께 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가 어패가 있다고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누굴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같이 했죠. 그 이름이 나중에 야곱에서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 야곱은 죽고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에 튀어나오죠.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야곱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 것처럼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했죠. 그러면 이스라엘(야곱) 위에 오르락내리락 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다니엘이 경험해야 될 인생은 누구 인생입니까? 예수님 인생이죠. 차이가 있다면 야곱은 야곱 시대에 맞게 이스라엘 쪽이고 예수님은 예수님 시대에 맞게 예수님인데 그 차이가 그렇게 나야 될 이유가 야곱이었을 때는 철근 콘크리트이고 예수님 당시 콘크리트가 질이 달라요. 왜냐 하면 예수님 때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악마란 악마는 다 튀어나와요. 악마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전부 다 예수님 위에 다 덮쳐버려요.
어릴 때 이런 장난하잖아요. 동생한테 이불 덮어씌우고 또 덮어씌우고 하면 ‘아휴, 답답하다.’ 하면 그때 겨우 어린 동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을 덮쳤던 모든 짐승의 위력은 이건 사람 힘으로 도저히 못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될 이유는 거기서 짐승의 모든 힘은 거기 다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럼 죽여 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 성도를 방치하는 세상이 아니에요. 그것이 십자가를 보게 되면 그게 다 들어와요.
사도바울은 그 속에 사는 존재를 한 자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육이라 했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야구 선수나 축구 선수나 관계없어요. 무조건 모든 인간은 육 이예요. 육이니까 영이 없어요. 육 이예요. 영, 육 , 혼 백날 해도 전부 다 육 이예요. 육은 죽고 영으로 살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의 바람이 와야 되고 바람이 불어서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나라 못 본다는 이야깁니다. 니고데모야, 하늘나라 니 몰라. 베드로도 ‘제가 육을 바치겠습니다.’ 육을 바쳐도 하늘나라 못 가요. 합쳐서 이야기하면 못 가요. 아니 안 가야 돼요. 가서는 안 되는 곳 이예요.
결국 우리가 갈 곳은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곳에 가요. 지금 예수 믿는 우리가 가는 곳은. 창기가 들어가면 안 되고 강도가 거기 가면 안 돼요. 강도가 거기 강도 짓 할 일 있습니까? 창녀가 가면 안 돼요. 거지? 거지가 거기 왜 갑니까? 가면 안 돼요. 못 가는 인간들 이예요. 못 가는 인간들인데 갔다는 것은 이게 평균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성취시켰다는 걸 담보로 할 수 있는, ‘언약은 성취되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증거물로서 가야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광고판에 있는 재료, 이렇게 보면 됩니다. 광고판에 그리스도는 부활했다. 요 판대기, 요 베니아 판, 요게 우리에요. 재료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요 광고판을 뭐라 하느냐 하면 교회라고 합니다.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요게 하나의 실제적인 덩치로 있는 게 아니고 사건이라는 회오리바람 이예요. 미국의 남부 지방에 토네이도 알죠? 자, 토네이도가 어디 있습니까? 토네이도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말 됩니다. 미국 남부지방에서 일어납니다. 현재 토네이도가 어디 있어요? 없죠. 일어날 경우에만 반짝 있다가 소멸되는 겁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내가 교회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의 사건이 교회 되게 해요. 매일같이 교회 되게 해요. 매일같이 살려내잖아요. 어떤 때는 사흘 간 밥 안 줘서 죽게 만들다가 사흘 뒤에 밥 줘서 살게 하죠. 그러니까 어쨌든 저쨌든 살려내게 해요. 어떤 때는 암에 걸려서 죽는다 해서 이미 식물인간이 됐는데 또 이상한 특효약 줘서 살게 하잖아요.
광고판,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살려내는 겁니다. 그 광고판의 선배가 누구냐,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신장개업하는 가게에서 얼마나 흔들었겠어요? 제 다리만 보지 마시고요, 얼마나 흔들어 댔겠어요? 힘 다 빠졌어요. 그렇게 흔들게 만드는 계시가 70이레입니다. 그것은 70이레는 포장지, 껍데기만 줬고, 박하사탕 있잖아요. 박하사탕 포장지만 줬고 알맹이는 신약 때 십자가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다니엘은 포장지만 들고 춤을 춘 거예요. 알맹이는 그 안에 무르익었어요. 다니엘은 있어야 다니엘 중심에 짐승이라는 토치카가 같이 형성되게 돼 있어요.
이것을 지난번에 했지만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특정 공간을 점령하고 있었죠? 가나안 땅, 이건 실체가 있죠. 이게 멸망했습니다.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토네이도로 바뀝니다. 사건으로 바뀌어 버려요. 실체가 흩어져 버린다. 이사야, 예레미야 보면. 흩어지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벨론이라는 짐승의 나라에 점박이처럼 흩어져 버리고, 다른 사람 많은 숫자는 이집트, 애굽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위로 가고 다 가버려요.
흩어져 있는 것을 인자야, 하고 에스겔에게 계시를 주니까 흩어져 있는 것이 요렇게 같이 뭉쳐지죠. 뭉쳐져도 나중에 늙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70년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기 이전에 이게 실체가 사건으로 만들면서 이 짐승이 이제는 실체로서 부각이 되는 거예요. 실체는 사건 돼 버리고 그 회오리바람이 이쪽에 부니까 그 사건이 이스라엘 포로 잡힌 걸 붙잡으니까 이쪽이 짐승이라는 실체로 부각이 돼 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를 성도가 살고 있는 그 지경이 바로 짐승의 세계에요. 이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이걸 바벨론! 그것도 그냥 바벨론이 아니고 더러운 여자 바벨론, 또는 큰 성 바벨론. 구약에서 음녀라 하는 것은 언약적인 남편을 공격하는 게 음녀에요. 언약적인 남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냥 봐서는 고요한 세상이지만 언약을 언약 적으로 따져보면 이 세상은 언약을 모독하는,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그런 정신으로 우리는 물들어 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물들어 있어요. 십자가 보다 더 좋은 게 많고 더 원하는 게 많고 백화점에 명품 가방과 옷이 좋지, 십자가 복음은 좋아하지를 안 해, 복음을 그렇게 외쳐도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야! 옷 좋다. 주식 값 올라갔다. 땅 값 올라갔다. 이렇게 하죠. 이런 걸 더 좋아하죠.
그러니까 우리의 육은 거기 이미 짐승과 아무 충돌이 없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내통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을 매일같이 삽질로 묻고 다시 거기서 살려낼 때 그 위력은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70이레 계시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 담겨있는 70이레를 파헤쳐 보면 거기서 무슨 복음이 나오는가, 그건 10분 쉬고 계속해 봅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