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짐승과 주의 이름)130418-18강a -이 근호 목사
제 18강a 오늘은 218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바다에 자리 잡은 무질서의 세력』요걸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이라고 해요. 그런데 짐승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 세상에 짐승이라는 게 없잖아요. 흔히 말하는 소나 돼지 가축들은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이라는 것이 눈에 안 보입니다. 왜냐, 네 생물이 어느 동네 삽니까? 안 살죠.
그러면 한번 따져 봅시다. 성경에 짐승이 있고 네 생물이 있다 하는데 네 생물, 짐승, 지금 이게 이 세상에 없는 존재 아닙니까? 없죠. 큰 성, 음녀, 이런 건 없는 거죠. 없는 존재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 세상에 여기 지우개가 있다면, 여기 지우개가 있잖아요. ‘지우개가 무엇이냐’ 지우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왜냐 하면 지우개는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런데 네 생물이나 짐승은 이 세상에 없다 이 말이죠. 음녀 이런 건 없다 이 말이죠. 성경에는 나오는 용어지만 이 세상에는 없다 말이죠.
‘지우개는 이렇습니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데 ’네 생물은 이겁니다.‘ 라고 보여줄 수가 있느냐? 없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역사적인 내용을 역사에 없는 것을 이렇게 일치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예를 들어서 알랑가몰라, 하는 어떤 꽃이 있다 합시다. 어떤 사람이 ’알랑가몰라 꽃이 있습니다. 그 꽃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알랑가몰라 하는 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그게 나왔을 때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냥 무시해야 돼요. 그런 식으로 지어내면 누구나 다 지어내거든요.
백합은 이렇게 생겼다. 하면 아! 백합은 알아요. 왜, 백합은 이 세상에 있으니까. 현재 우리가 어디 살고 있습니까? 역사적 이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그럼 우리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있는 것처럼 같이 있는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서 ‘이거 아십니까? 봤습니다. 경험했습니다.’ 가 되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런 게 없어요. 인간은 짐승하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하고 사는 거예요.
머리가 7개, 뿔이 10개, 이런 짐승 어느 나라에서 키웁니까? 이거 아프리카에 있어요? 없죠. 없을 때는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안 돼요. 없는데. 왜냐 하면 그걸 답변을 하려면 이미 그런 게 현재 역사 속에, 세상 속에 있는 걸 가지고 이걸 설명해야 되는데, 이 세상에 없는데 저걸 어떻게 설명해요? 논리 간단한 논리예요.
예를 들면 목사님 셋째 딸이 이쁩니까? 나한테 물으면 셋째 딸이 없는데 뭘 이뻐요? 없는데. 항상 성경에서 짐승이 나올 때는 뭐냐 하면 현재 니가 살고 세상에서는 짐승을 설명할 게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깁니다. 이 세상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없는 짐승을 끄집어냈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문제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너희들은 너희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 낮에 제가 설교했잖아요. 죄인은 악한 세상을 개선할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은 자기 죄를 개선할 수가 없다. 씻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죄인이 죄를 씻겠다고 나선 방법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예요.
연탄장수가 손이 시커먼 손 가지고 자기 얼굴을 아무리 문질러서 검둥이를 벗겨내고 벗겨내도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더 얼굴에 검둥이가 묻잖아요. 이건 당연한 거잖아요. 죄인이 지가 죄를 알아서 죄를 씻어낸다? 그럼 애초부터 죄인이 아니어야죠. 아, 이러면 되겠네. 연탄장수가 흰 장갑 끼우면 되겠네. 흰 장갑을 어디서 나왔겠어요? 흰 장갑 끼면 겉에는 가렸지만 속에 뒤집어보면 이미 까만 게 묻어서 시커멓잖아요. 낀다는 자체도 속에는 이미 시커멓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니까요.
어떤 방법도 물에 빠져가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운동화 끈을 스스로 잡아당겨서 자신을 물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이건 모순 이예요. 이걸 끄집어내서 이렇게 하게 되면 둘이 동그라미가 돼서 한쪽은 들어내고 한쪽은 끄집어당기는 게 되는 거예요. 뱀이 뱀을 물어버리면, 뱀이 자기 꼬리를 물어버리면 나중에 입만 남고 없어져 버리니까 그런 식으로 돼 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용어들은 이것은 인간은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럼 어디 있느냐? 없다. 없는데 짐승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너희들의 몸통은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몸통이 짐승이라면 인간들이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사실 짐승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이나 종교, 전부 다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는 그 몸통에서 삐져나온 것이 하나님이라는 개념, 메시아 개념이고 그런 개념 이예요. 인간이 메시아를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것이 유대인이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대인은 이단이었어요. 유대인이 이단일 것 같으면 유대인이 모든 민족의 최고점에 있는 그거마저 이단이라면 이 세상에 짐승 밖으로 나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자기한테 계시를 준 그 천사에게 절을 하죠. ‘아휴, 천사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고 절을 하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나보고 하지 마라, 나도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은 중심 되는 내용이 따로 있다는 거죠. 천사가 이야기한 그것을 사도요한이 안다고 해서 계시를 준 진짜 몸통은 근원적인 의미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를 보냈다는 말은 천사가 여러 가지 남겨진 모든 것을 다 끌어서 결국 누구하고 연결시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주신 그 계시와 연결시켜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계시는 이미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이미 다 보여줬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게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6월 6일 날 특강에 할 이야긴데 7절에 보면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애곡하리니” 라고 돼 있죠. 그러니 이 모든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이 창에 찔려 죽었을 때 이미 예수님 입장에서는 계시는 완성 이예요. 계시의 완성! 이미 끝나버렸어요. 이게 중심 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에게 준 건 뭡니까? 요 예수님 몸에서 이뤄진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일어난 일들을 묵시적 용어를 하나, 하나 명찰을 붙이는 거예요. 요거는 백합, 요거는 튤립, 요건 장미, 명찰을 명패로 붙이면 그 모든 명패가 다~ 모이면 뭐가 되느냐, 전부 다 그건 꽃이었다. 꽃! 꽃인데 꽃은 없어요. 없는데 튤립이 있고 장미가 있고 히야신스가 있고 해바라기가 있을 뿐이죠.
꽃은 어디 있습니까? 꽃은 없고, 난이 있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일반적인 백합, 장미는 무엇을 봉사하는 것이다? 꽃이라는 숨어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숨어있는 영적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이런, 이런 모든 역사적 상황에다 묵시적인 명찰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요거는 네 짐승, 요거는 짐승, 요거는 음녀, 요거는 진노의 포도주, 요거는 해를 입은 여인, 전부 다 명찰을 붙이는 거예요.
그럼 명찰을 다 떼버리면 결국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들이 세상의 사건과 사건이 유발하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그것도 그 사건 이예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서 보면 영생 받을 자 따로 있습니까? 전부가 다 영생 얻습니까? 따로 있죠. 따로 있는데 권세를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아들에게만 줬죠. 그러면 영생 얻을 자는 따로 있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권세는 따로 있지 않고 모든 이(all)에게 다 적용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침례교회가 틀렸죠. 침례교회는 뭐라 합니까? 영생은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 있는데 본인들이 안 믿기 때문에 영생을 못 받고 믿는 사람만 영생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 작은 차이가 작은 차이가 아니고 요한복음 예수님이 하신 17장 2절 같은 말씀에 딱 준해 버리면 그런 것들이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어 버려요. 영생 줄 자는 따로 있고 하지만 안 믿는 사람까지 누가 다스리고? 예수님이 다스리고, 왜, 안 믿는 사람, 짐승까지, 악마까지 다스리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생 주시기로 하신, 아버지께서 따로 영생 받아야 될 사람을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영생을 몰아주기 위해서 안 믿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까지 예수님이 다스리는 권세를 준 거예요.
요 17장 2절의 말씀 이걸 확대하면 요한계시록 돼 버리는 겁니다. 이제 아시겠죠?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일에다가 역사이니까 묵시적 명패를 붙이니까 명패를 딱, 딱 뗄 때마다 뭐로 바뀌느냐 하면 묵시 명패를 뗄 때마다 역사 문패로 바뀌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내가 생각해도 참 쉽네요. 예수님께서 책을 일곱 인으로 봉인을 한 거예요. 봉인이라 하는 것은 옛날에 로마 시대 때 편지 할 때 함부로 열지 말라고 납이나 양초 같은 걸 녹여서 도장을 콱 찍어놔요. 그러면 주인만 열게 단추 떼듯이 녹여서 탁 떼면 내용이 보이거든요. 이걸 7번 봉인돼 있다는 거예요.
봉인된 것은 묵시거든요. 묵시를 떼면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역사로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묵시라 하는 것은 이미 요한복음 17장 2절에 이미 결론 났죠? 아버지께서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영생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생이 가면 안 돼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 따로 있어요. 그 사람한테 몰리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임의로 주관해 주십니다. 모든 사태를 일으켜서 ‘너희들에게만 영생이 돌아간다.’ 하고 영생 주기 위해서 모든 일들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참, 예수님께 감사 안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 위에도 그것이 역사적 모든 상황이 묵시적으로 보면 우리 성도한테 영생 주기 위해서 그러한 묵시적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묵시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전부 역사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성령으로 보게 되면 역사적 상황도 묵시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뭐냐, 문제는 여기서 들어가야 되죠.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기에 짐승의 오야봉이 나옵니다. 짐승의 오야봉이 뭐냐 옛 뱀이 아니고 용이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짐승이 뭐냐 할 때는 이렇게 하시면 쉬워요. 그 용이 노리는 게 뭐냐를 보면 됩니다. 용이 노리는 게 뭐냐? 지금 역사적 사건 끄집어내지 맙시다. 왜냐 하면 묵시는 단회 적이지만 역사는 묵시에 따라서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역사적 사건을 콕 집어서 ‘요게 짐승이다.’ 이렇게 하지를 못해요. 시대마다, 시간 마다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짐승은 짐승답게 그리스도 종은 그리스도를 담게 돼 있기 때문에 딱 하나 집어서 ‘요게 짐승이야, 요게 음녀야.’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 되고, 무슨 역할을 하느냐를 물어야 돼요. 짐승은 오늘날 어떤 역할로 나타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질문을 그렇게 해야 맞다고요. 그래서 좀 어렵지만 여러분들, 참고 들어보세요. 짐승의 역할이란 뭐냐, 용의 역할이란 뭐냐, 옛 뱀의 역할이란 뭐냐, 할 때 그들은 노리는 게 있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게 없으면 인간은 도저히 짐승을 간파해 낼 수 없어요. 그냥 미지의 X가 돼 버려요.
이 세상 움직이는 몸통이 뭐냐, 눈에 나타나는 것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뭐냐, 모르죠. 성경에서는 짐승이라고 하는데, 짐승이 어떤 식으로 하는지를 우리는 감을 못 잡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니까 짐승은 해를 뒤집어 쓴 여인을 공격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여인이 무슨 여인이냐, 보통 여인이 아니고 뭘 낳아요. 태양을 뒤집어썼는데 그 여인이 이 지상에 뭔가 남기는 게 있어요. 그렇다면 해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묵시적 용어잖아요. 해를 뒤집어쓴다. 뜨거워서 보통 시장 아줌마는 난로도 뜨거워서 안 되잖아요.
해를 쓴 여인이 역사와 유일하게 매치가 되는 역사적 사건을 남깁니다. 역사적 사건! 숨어있는 묵시가 역사적 사건을 남기게 되면 그 사건이 곧 이 땅에 있는 묵시적인 흔적이 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 남자, 아들을 낳아요.
역사적 사건에 의하면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사람은 여자입니다. 마리아라는 여자죠.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시작됩니다. 여자와 여성이 달라요. 남자가 아내를 만났을 때 한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우리나라 결혼제도에 보면 일부일처제라 한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그런데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고 여성을 원했던 겁니다. 여성을 원했기 때문에 한 여자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해요. 남자가. 왜냐 하면 처음의 남자는 자기의 결핍된 것을 찾는 본능이 있습니다. 남자가 남자로서 만족하면 되는데 자기 앞에 여자가 지나가니까 첫 번째 저 사람은 왜 나 같은 남자가 아닌가. 두 번째 나는 왜 내 안에 저 여자 요소가 없느냐. 내 몸에서 여자의 요소가 빠져있는 것은 곧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어느 가정에서 딸, 딸, 딸, 딸이 셋 있는데, 자식, 자식, 자식, 하면 이걸로 충분한데 딸, 딸, 딸, 하니까 딸이 세 명이니까 이건 뭐가 없다는 뜻 이예요? 아들이 없다는 뜻 이예요. 세상에서 왜 한 몸 안에 남자, 여자 다 갖추면 될 문제를 왜 남자 아니면 여자고, 왜 여자 아니면 남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정신과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거든요.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원래 나눠진 게 아니고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잔데, 인간 속에 여자,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남자 여자 다 같이 알 때만 그게 사람이다, 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사람은 갖게 된다는 겁니다.
남자고 그냥 살고 여자도 그냥 살면 되는데 나한테 여자라는 요소까지 알면 아마 지금보다 내가 더욱 더 포괄적인 더 많은 걸 아는 우수한 사람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누락됐죠. 누락됐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라도 여자의 것을 나와 합체해서 남자로 있던 내가 여자로 더불어서 이상적인 하나의 제대로 된 모델 같은 사람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뭔가 미흡하게 되면.
그러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국은 남자는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고 원래 남자에서 나왔던 남자와 결합될 그 여성을 원하는 거예요. 원래 남자를 남자답게 만들었던 그 남성과 관련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은 남자가 아니고 남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니까 나하고 한 집에 사는 여자가 여자이어서는 안 되고 여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남자니까 쭈그려 있을게.’ 이러는 게 아니고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의 원형을 찾아가야 돼, 나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는 내게 걸 맞는 여성이 돼야 돼.’ 그러니까 아내하고 결혼하고 난 뒤에 만날 아내한테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니는 왜 내가 그리워하는 여자가 못 되는 거야.’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이 그리워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인데?’ 남편이 ‘그건 모르지.’ ‘왜?‘ ’니 밖에 모르니까.‘ 그럼 몇 명을 더 사귀어야 돼요? 몇 명을 사귀어도 안 되죠. 100명을 사귀고 101명 째 누가 또 등장하니까 쉽게 말해서 여자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여자는 사귀어도 여성의 전부가 담겨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아니고 분명히 아내라고 사귀면 여성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봐도 지가 원하는 자기가 기대하는 자기가 충족될 그 여성의 전부는 아니야. 그래서 또 찾고 또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싶어 하고 여자는 한 남자만! 된장을 한번 찍어 맛 봐도 된장 맛을 아는 것처럼 한 남자와 살아봐도 남자라 하는 것은 이렇다는 것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니는 남자가 돼서 왜 이런 식이냐’고 다구치고 남자는 ‘다른 여자 또 찾아봐?’ 이런 식이 된다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여성과 한 여인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성은 분명히 단어는 하나지만 그 단어는 추상적인 하나를 말합니다. 통합적인 것. 전체를 다 부여하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이 여인은 뭡니까? 이 여인은 하나의 개인이 되겠죠. 그리고 개인이 갖고 있는 주체는 큰 주체, 여성이라는 주체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남자들은 이렇게 보고, 여성들은 남자 하나만 봐도 전체 남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은 남자하고 한번 살아보면 이제는 남자에 대해서 더 이상 같이 살 마음이 ‘아휴, 살아봐도 그놈이 그놈이고…“ 그래서 여자는 남편을 통해서 남성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뽑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 되고, 신발 똑바로 신어야 되고, 잔소리해서 남자는 이러면 안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온갖 잔소리를 해서 한 남자를 철판구이처럼 달달 볶아서 비빔밥 하면서 참기름 부어서 이리저리 달달 볶는 거예요. 그러니 남자들은 기겁을 해서 다른 여자 찾아다니고, 또 술집에 가서 화장 짙게 한 마담을 낭만을 위해서 쌍화차 사주고 거기 가 있고.
참, 학자들은 아직까지 몰라요. 왜 남자, 여자 구분돼 있는지 아직도 몰라요. 모든 갈등은 여기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거죠. 왜, 여자는 남자가 아닌 이상 온전한 여자가 아니고, 여자도 본인이 남자가 아닌 이상은 온전한 남자가 아니고, 둘이 합쳐야 되는데, 합쳐 봐야 둘 다 실망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머릿속에는 ‘온전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온전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라고 찾아다니고.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이 문제를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뱀의 후손과 그 다음에 뭡니까? 여자의 후손! 참~ 신기하죠. 아까 요한계시록 12장 이야기했죠. 우리 역사적으로 봐서는 여자의 적은 남자요, 남자의 적은 여자인 줄 알고 있잖아요. 왜냐, 남자, 여자, 성은 두 개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로 보잖아요.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남자는 여자하고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줄 아는데, 여기에 뭐가 비집고 들어왔습니까? 뱀이라는 제 3의 존재가 끼어들었다 말이죠. 이게 뭐냐, 제 3의 존재가 여기는 뱀이라고 돼 있잖아요. 창세기는 뱀,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짐승, 옛 뱀, 용으로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제 3의 요소를 아기 예수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뭐냐, ‘아! 우리 인간 사이에 뱀이 들어왔구나, 그럼 뱀만 처치하면 되겠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뱀의 후손만 색출하면 되겠네.‘ 하잖아요. 막상 뱀을 찾는 방법은 뭐냐 하면 뱀은 노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여자가 낳은 아들을 노립니다. 그래서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뱀도 숨어있다고요.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 하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도 몰랐어요. 유대인도 모르고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니까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알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제쳐 버리면 남는 것은 인간과 인간들의 토론과 의견과 생각과 사상, 그것만 있으면 돼요. 우리 바르게 살아서 착하게 삽시다. 나쁘게 살면 뱀 됩니다. 나쁜 놈, 뱀. 이러지, 진짜 뱀이라 하는 것은 누가 나타나야 돼요? 예수님이 나타나야 뱀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을 사람들이 메시아인지 못 알아본다는 것은 곧 뱀을 뱀으로 못 알아본다 이 말입니다. 뱀을 뱀으로! 뱀이 어디 성폭행범만 뱀이고 연쇄살인범이나 뱀인지 알지, 본인이 뱀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의 몸통이 뱀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짐승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녀갔잖아요. 다녀가고 난 뒤에 이 역사라 하는 것은 묵시에 의해서 비로소 파악이 되는데 그 인봉, 그걸 편지 봉투 떼듯이 그걸 뗄 사람이 없는 기라. 그걸 떼 줘야, 그 명찰을 떼 줘야 묵시로만 돼 있던 그것이 묵시가 역사적인 사역으로 폭발하듯이 벌어지니까 그것을 어린양께서 딱 떼는 순간, 그게 언제냐고 묻지 마세요. 묵시한테는 언제냐고 묻는 게 아닙니다. 다만 계시가 주어지는 순간이라 이렇게 보면 돼요. 존재론적으로 이미 이 세상은 묵시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이 세상이 묵시의 세계고, 짐승이 지배하는 세계고, 그 짐승이 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7교회에 성령이 보낸 편지라고 항상 성령이 나와요. 성령이 와야,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았다. 모든 게 성령으로 시작돼요. 성령으로! 그걸 뗄 때 묵시적 상황은 역사적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걸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림으로 설명을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전체가 몸통이고 머리가 있는데 요 머리를 제가 점선으로 하겠습니다. 요게 뭐냐, 짐승 이예요. 악마예요. 악마가 세상을 이렇게 역사를 이끌어 온 겁니다. 저보고 언제 이렇게 되느냐고 묻지 마세요. 묵시 세계는 언제라고 없어요. 존재는 언제란 말이 없습니다. 이 근호가 몇 년도 몇 월 달 이 근호냐, 이걸 묻는 게 이상하잖아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어제도 이 근호일 것이고, 내일도 이 근호 일 것이고, 이렇게 이름이라 하는 것은 시간에 구애를 안 받아요.
주의 이름을 누가 공격한다? 짐승이 공격함으로서 비로소 짐승은 짐승의 합당한 이름을 얻는 겁니다. 짐승이 이름을 얻는다는 말은 짐승은 언제부터 짐승이냐고 그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항상 주의 이름이었어요. 그 주의 이름을 짐승은 항상 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때부터이잖아요? 라고 물으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건 잘못된 질문 이예요.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 아기 예수 전과 후라는 게 역사적으로는 안 되고, 아기 예수가 옴으로서 계시! 그동안 덮여 있었던 커튼이 벗겨지는 겁니다.
생일이 되었다. 며칠 전에 제 딸 생일이었는데 케이크를 보자기로 덮어 놓고 화상통화를 하는 거예요. ‘생일 축하 합니다.’ 하고 내가 노래 부르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보자기 속에는 아직까지 뭐가 있어요? 케이크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팍 펼칠 때 처음부터 보자기 안에 케이크가 있었던 거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주가 되는 게 아니고 묵시적 세계에서는, 다만 아기 예수가 태어남으로서 이제는 보자기가 벗겨지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등장하는 게 뭐냐 짐승의 세계! 몸통은 짐승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주님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모르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인식론적으로 비로소 세상을 다시 보게 합니다. 야! 세상은 전부가 우리 예수님 잊어버리고 우리끼리 살자하는, 다시 말해서 영생 작정된 자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짐승이고 뱀이고 악마고 간에 다 주님께서 이렇게 부린 거예요.
애들 인형극 있죠. 랄라라~♪♬ 랄라라~♪♬ 랄라라~♪♬ 무대에서 쥬리엔드루스가 인형극을 하게 되면 애들이 그걸 보고 얼마나 이뻐합니까? 양치기 소녀 노래 나오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딴따라라 딴따~♪♬ 딴따라라 딴따~♪♬, 하면 마귀가 설치고 여기는 핍박해라, 하면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한테는 돌 던지라, 하면 돌에 맞아 죽고. 이게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처음부터.
왜냐 하면 역사에 있는 인간들은 시간을 느끼지만 짐승은 시간을 몰라요. 처음부터 이건 몸통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악마는 누구와 싸웠습니까? 주님하고 싸웠기 때문에. 짐승은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진짜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하는 걸 제일 싫어했어요. 자기 집인데, 지 동네인데, 지 동네에 진짜 묵시가 들어와 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와 버렸죠. 왔으니까 이거는 입을 막아야 되니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범하잖아요. ‘실례하지만 메시아가 나타난 데가 어디죠?’ 물어서 가는 길에 입을 막기 위해서 동방박사를 살해하려 했는데 여기에 묵시적 존재, 천사가 나타나서 동방박사보고 딴 길로 새라 해서 샜잖아요. 그러니 성도라고 다 살려주는 게 아니고 동방박사는 살려주고 어떤 사람은 알면서도 그냥 죽는 사람도 있고 스데반 집사처럼, 사도처럼, 그냥 순교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베들레헴에 아기 태어나니까 와서 두 살 밑에 애들을 죽이고 예수님 가족을 또 잡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지만 천사가 와서 다시 어디로 빼돌립니까? 애굽으로 빼돌리죠. 그러면 이러한 모든 역사적 상황을 고고학으로 발굴하면 그게 나올 수 있어요? 예수님은 언제 애굽으로 갈 수 있는데 그걸 발굴해도 뭐는 안 나온다? 이 세상은 짐승이 그렇게 했다. 짐승이 그렇게 했다가 아니고 헤롯이란 역사적 인물이 괜히 성질나서 지 부하 부려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오지, 숨어있는 묵시적 존재, 짐승이 있었다. 헤드라인에 뉴스 시간에 드디어 짐승은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다 말이죠.
인간은 아무리 해석해도 역사에서 시작해서 역사로 돌아가 버립니다. 왜 원인 결과를 거기서 찾아내려고 하니까. 오늘 지금까지 강의한 것의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할 때는 뭐로 한다? 묵시로 해석해야 되고 그 묵시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을 무조건 방해하려고 사람들은 어떤 갖은 수단을 동원하면서 역사적 해석을 그냥 역사적 해석으로, ‘묵시는 몰라도 돼, 너희들은 짐승 이름은 몰라도 돼.’ 이렇게 가려서 요 안에만 갇히게 하는 겁니다.
또 성경에 짐승이란 말이 나오면 역사적으로 되돌아오는 용어로서 ‘짐승은 이게 짐승입니다.’ 해서 짐승은 네로 황제, 짐승은 네로를 숫자로 풀이하면 666이고, 이런 식으로 요새 짐승은 적그리스도 교황을 말하는 것이고 이렇게 역사적 상황에서 역사적 상황으로 해서 자기가 짐승에 속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만드는, 이런 해석들을 그동안 역사적 해석이라 해서 교회마다 다 내세웠습니다.
어느 인간이 ‘내가 짐승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자는 그동안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일곱 교회가 다 망했던 사실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회가 망함으로서 교회가 돼요. 왜냐 하면 교회가 망해야 사람들은 교회를 안 믿게 되잖아요. 만약에 교회가 안 망하게 되면 그 교회는 뭐냐 몸통, 짐승의 하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상에 작은 짐승, 땅의 짐승이 나와요. 요게 요새 말하면 교회라는 겁니다. 땅의 짐승은 역할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꾸 성경에 나오는 짐승을 예수의 십자가 복음과 관련시키지 않고 자기들 교회 단체를 괴롭히면 이게 짐승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신천지, 통일교, 전부 다 모든 기존의 장로교, 합동 측, 통합 측, 침례교 감리교, 다 마찬가지예요.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일 수 있고 다 마찬가지거든요.
날 건드리면 무조건 짐승인 거예요. 그런 해석!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석하지 마시고요. 내가 짐승인 걸 드러내는 것이 영생받기로 작정한 주님의 작정입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동안 우리는 내가 짐승에게 고개 숙이고 짐승에게 아부했고 내가 만든 건 귀하고 남들이 만든 건 안 귀하고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나 위주로 살아갔다는 자체가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려는 짐승의 성격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죄인이 죄를 해석 못하듯이 짐승이 무슨 짐승을 해석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짐승이 해석한 짐승이 짐승이겠습니까? 짐승이 해석한 짐승이 곧 그게 짐승입니다. 짐승이 세 번 들어갔어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간에 그건 다 영생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침착한 배려입니다. 염려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 역사적으로 만약에 그걸 십자가 복음을 모르고 그냥 역사적으로 구원을 원하는 건 항상 순간적인 결정, 순간적인 어떤 생각을 하는데 균형이라는 것은 순간적인 균형 이예요. 곧장 내려갑니다. 돌멩이를 올려서 산등성이에 올려놓으면 산등성이가 뾰족해서 다 올라와서 까딱까딱하다가 내려가듯이 인간은 영원히 자기가 하는 일을 굴려서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다시 쭉~~ 내려가서 힘들게 올려놓으면 또 내려가고 또 올려놓으면 또 내려가고. 톰 존슨이 그런 노래 불렀죠.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조영남이 불렀나.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
딸 서울대학 나왔다고 그렇게 했더니만 우리 아는 친척이 있는데 시집을 안 가요. 또 고민이라. 세상에 그러면 모든 것이 영생 주기로 돼 있는 세상을 가지고 우리는 내가 잘 돼야 될 세상으로 하니까 이게 바로 짐승이 원하고 원했던 바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영생 얻으면 땡인데, 최고인데, 왜냐 하면 이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영생만 되게 당겨주세요.’ 우리가 지금 주님하고 협의할 입장이 안 돼요. 주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권세는 영생 줄 자에게 영생 주기 위해서 그러한 작업에 왜 되도 않은 우리가 거기다 티끌을 뿌리고 침을 뱉고 해요? 우리가 뭔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러니 나에 무리하지 맙시다. 자기 성공, 출세에 무리하는데 억지를 부리는 인생은 해서는 안 되죠. 억지 부리지 맙시다. 이래도 영생, 저래도 영생, 세상은 짐승에 따라서 이 십자가 복음을 될 수 있는 대로 안 들리는 곳, 안 듣게, 모르는 척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기 세력, 자기 교단 만들고, 전부 다 교회를 믿게 만들고 교단을 믿게 만들고, 자기 신앙의 연조를 믿게 만들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이 영생과 십자가 온다, 그걸 믿게 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 그렇게 해야 돼요. 깨끗하게 정리가 돼요.
그 다음 진도 나갑시다. 219페이지, 드디어 70이레 나옵니다. “발생적 성전 관과 주체“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문장 하나, 하나가 만만치 않아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 원래 시간이라 하는 것은 몸통에서 나오게 돼 있는데 성전이 몸통입니까? 몸통입니다. 왜 몸통이냐, 성전에는 누가 계시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15장 11절 한번 봅시다. 전에부터 이걸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벼렀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11절 끝에 보면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이렇게 돼 있죠? 이 오른손이 왜 나오느냐 말이죠. 그냥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면 우리는 아멘, 받을 건데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면 예, 주께서 하실 능력 있습니다.‘ 이렇게 할 텐데 이 오른손이 왜 나오느냐. 주께서 왼손으로 하셨다. 하면 ’에이, 주님 아니야.‘ 우리들이 그럴 사람들이예요? ’에이, 주님 오른쪽으로 하지 왼쪽으로 합니까?‘ 그걸 따질 사람들이예요? 주께서 하셨다 하면 엎어져서 오른손으로 하든지 왼손으로 하든지 오른손으로 비비든 왼손으로 비비면 됩니다. 만반의 마음 준비 했는데.
여기서 오른손으로 돼 있다 말이죠. 오른손이 왜 나오느냐? 성경에서 오른손이 왜 나왔어요? 저는 이 이야기를 하는 신학자를 지금까지 본적이 없어요. 전부 다 모르니까 그냥 모른척하고 있는 거예요. 모르니까!
이 오른손의 비밀을 한번 풀어봅시다. 왜 주님이 왼손이라 하면 왜 안 되느냐? 주님이 오른손 있고 왼손 있다는 이게 희한한 거죠. 주석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오른손을 능력의 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왼손이 능력이 전혀 없고 2급 장애자로 깁스 돼 있어요? 지금 이걸 어떻게 설명돼야 하느냐, 이렇게 설명됩니다.
여기 오른손이 등장한 시기가 애굽의 군사들을 홍해에다 빠뜨리는 대목이죠. 그렇다면 여기서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빠져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이 구원 문제가 이게 보류가 돼요. 다시 말해서 콩고물 달라,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이 말이죠. 여호와는 사실 용사시니, 하고 지금 싸우는데 싸울 때 여기에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그 다음에 뭡니까? 원수를 부수죠? 이제 풀렸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는 우리 구원문제는 지금 하나님 앞에 뒤로 밀리는 거예요. 딱 접고 이건 생각도 하지 말고, 주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원수를 통해서 주님의 주님 됨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걸 생각 못한 것은 성급함에 ‘저 어떻게 구원해요?’ 우리는 구원을 놓고 우리의 구원방법만 자꾸 챙기려고 하다 보니까 주님의 오른손은 뒷전이었어요. 오른손이 하든지 왼손이 하든지 우리는 건져주기만 하면 아무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은 안중에도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하고 주님이 달라요.
하나님하고 주의 이름이 다릅니다. 주의 이름은 전쟁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예요. 주의 이름이 없는데 하나님? 이건 마귀가 만든 하나님 이예요. 없어요. 반드시 주의 이름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렇게 되지, “아버지를 본 사람은 나를 알아 볼 건데” 이게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도 아버지를 몰라요. 왜, 그건 예수님만이 아버지기 때문에, 우리들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아버지란 관계는 이게 언약 관계 속에 들어와야 아버지지, 그냥 무턱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다고 아버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은 구원은 뒷전 이예요. 주의 이름은 언제 등장하느냐? 원수를 발각시키면서 같이 쌍으로 등장하는 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은 뭐냐, 하나님이 벌리는 주의 심판에 부산물 이예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게. 우리는 원래 구원 안 받아야 돼요. 구원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나온 부산물에 뭐냐 심판과 더불어 구원입니다. ‘날 어떻게 구원시켜 주시렵니까? 하나님, 이건 애초부터 우리가 물을 수 없는 질문이고, 질문해서도 안 돼요. ’그저 주님이 주님 되시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원수를 드러내면서 구원을 해주는 거예요.
뭐냐 하면 우리가 원수의 포켓 안에 있는 동전이거든요. 동전인데 주님께서 경찰이 돼서 ‘요놈 도둑놈’ 하고 멱살 쥐고 바짝 들어서 거꾸로 흔드니까 주머니에서 동전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 동전이 우리에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도둑놈이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 다음에 세간을 늑탈할 때 이미 하늘나라가 그렇게 진행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구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주의 주되심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그 주되심은 원수가 나타나야 주가 되지, 원수 없으면 주가 안 돼요. 우리 구원하려고 주가 아니고 원수가 나타날 때 하는데 그 원수는 바로 원수를 잡았다는 걸 표현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예요. 왜 오른편의 주의 자리가 그 자리가 오른편 자리거든요. 이 주의 자리 앉으려면 원수를 쳤다는 흔적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원래부터 오른편이 주의 자리 되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묵시적으로 시간 관계없이 처음부터 그건 오른편이 주의 자리 되기 위해서 원수가 등장했고 여기서 주의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 원수를 쳐부수므로 말미암아 이 원수를 친 것은 주의 이름,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주님 되시는 분이 원수를 치므로 그 부산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17절에 보면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그래서 홍해바다는 건너편이 없고 홍해바다는 막혀 있는 것이다. 주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홍해바다는 막혀 있는 것이지, 어디 건너편을 내다봐요? 그냥 벽인데요. 그 벽은 악마고 그 악마를 주의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 죽이실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주님 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덕분에 구원되면 안 되고요, 주님의 오른손의 능력과 함께 있을 때만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