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성전의 인격화)130502-19강b -이 근호 목사
제 19강b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23페이지 중간에 『이 부정과 긍정이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에 ‘선지자의 몸=선지자의 신체’를 통해서 역사 한 가운데 등장하게 되는데』이렇게 돼 있죠. 아까 부정과 긍정이란 말 이제 이해되죠? 성전 한 군데에서 서로 상반되는 속성이 나오니까 이것이 나왔는데 인간들은 성전을 지으면서 또는 성전에 참여하는 민족이라는 그 자긍심이 있기 때문에 ‘성전은 깨지면 안 돼, 성전은 깨지면 안 돼.’라고 하는 그것이 깨져야 되겠죠.
그려서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한테 조용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알고 있던 우리 자신은 사정없이 깨어져야 되는 기능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조용한 게 아니고 그때 우리 자신도 난리가 나는 거예요. ‘안 돼, 나는 옛날처럼 살고 싶어. 옛날 애굽에 살던 그때가 좋았어.’ 이런 출애굽기에 나온 그 난리가 우리 속에서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럴 때 말씀이란 것은 그냥 문자로 있는 게 말씀이 아니고 실제로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폭발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드러난다. 드러난다는 이 말이 제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쓰느냐 하면 ‘제가 이 말씀 지킬게요. 안 지킬게요.‘ 할 필요 없이 우리가 평소에 살다보면 덩어리째로 말씀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지식적으로 말하면 융기라 할 수 있어요.
어떤 밭이 있는데 밭에서 내가 콩을 심을까, 팥을 심을까, 하고 있는데 밑에서 융기가 돼 버리면 콩을 심은들, 팥을 심은들 사과나무를 심은들 뭐를 심은들 땅 자체가 들려져 올라온다든지 반대로 내려간다면 이건 아무 의미 없죠. 우리는 ‘주님이여, 제가 말씀 지킬까요?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아, 요건 지켰는데 요건 못 지켰습니다.’ 하는 가운데 사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말씀 덩어리로 우리한테 느껴지는 겁니다. 일상에서 나는 말씀대로 산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 안에서 지금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그렇다면 이웃집에 못된 인간이 이사한 것도 이층에서 탕탕 거리는 것도, 오늘 우연히 만났는데 간질 걸렸다든지 할렐루야 회개하라 하면서 아줌마가 오든지 간에 전부 다 그런 모든 개입이 연극에 어떤 연출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딱 등장하라 할 때 엑스트라로 등장했던 겁니다. 내 인생에. 그리고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해요. 우리 자신도 하나의 엑스트라입니다.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에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전에는 내가 하나의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았더니만 나중에 보니까 크리스마스트리 중에 하나의 등불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다가 뭔가 같이 말씀이 들려오게 되면 모든 것이 말씀에 합당한 자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원된 거예요. 동원 예비군처럼. 이런 현실이 우리가 느껴질 때는 한없는 은혜가 되고 감사하죠. 나중에는 누가 와서 바늘로 탁 쑤셔버리면 풍선처럼 푹 꺼지고 쭈르륵 땅으로 곤두박질쳐서 여기도 깨지고 하죠.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했다. 그걸 선지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니는 뭐냐?’ ‘나는 천상회의에 가서 내가 본 것을 전할 뿐이다.’ ‘니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니 고소하지?’ 고소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쉬운 것도 없고 이것이 주님 말씀을 이루기 위한, 메시아가 오기 위한 과정이라면, 우리는 이걸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 속에 이 드라마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의 드라마고 소설이고 연극입니다. 인생 자체가 너, 너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냥 쭉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것이 선지자,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 자, 성전이 파괴 된다. 이것을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게 하려하니 어려워서 힘들지만 이걸 알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오류에서 2가지가 있어요. 권리 적 오류와 사실적 오류, 이건 가락 모임에서 하지 이야기 잘 안할 거예요.
성전이 깨졌습니다. 뭔가 오류가 있어요. 뭔가 성전에 문제가 있었던 거거든요. 성전을 사수해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뭔가 오해됐었습니다. 성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거죠. ‘성전이 있으면 우리는 이스라엘 되고 성전이 없으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안 된다.‘ 라는 건 오류가 됩니다. 그런데 ‘그래 잘못 생각했어. 그동안 성전을 잘못 해석했어.’ 이렇게 끝나면 안 되고 오류도 두 종류가 있어요.
권리 적 오류와 사실적 오류가 있는데 권리 적 오류란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성전이 있어야, 성전이 있다는 말은 여러분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성전 없이, 성전을 하나님께서 만들라 했잖아요. 만들라 했으면 성전 없는 하나님이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안 들죠.
직장에 있는 남편이 전화를 겁니다. ‘여보, 오늘 직장 동료들하고 갈 테니까 해물 탕 해 놔라.’ 라고 했어요. ‘해물 탕 해 놔라. 당신 해물 탕 잘하잖아. 해물 탕으로 당신 솜씨 자랑하고 칭찬 좀 하게 해 놔라.’ 했어요. 그리고 남편이 직장 동료들하고 집에 왔습니다. ‘여보, 해물 탕 해 놨다.’ 하니까 ‘우리 저녁 먹고 왔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해물 탕 하나 지적해서 요리를 지적했다는 말은 저녁을 안 먹고 갈 테니까 당신이 해물 탕 솜씨 맘껏 발휘하라. 그런 뜻으로 전화 했는데 막상 가니까 ‘우리 저녁 먹고 왔는데 그거 뭐 나중에 먹고 우리 화투나 치고 술이나 먹고 갑시다.’ 이렇게 나오면 아내가 다음부터 남편이 전화 걸어서 ‘여보 잡채 해 놔라.’해도 믿지를 못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성전을 만들라 했잖아요. 만들라 했던 그 당사자가 성전이 없다는 말은 성전 없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런 말은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걸 모순이라 하는데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여 성전은 어떤 식으로도 취소되지 않는다. 왜 만들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만들라 해놓고 나 성전 없이 너희와 상대한다. 그럴 리는 없다고 여기는 이러한 어떤 권리, 이스라엘이 생각한 권리, 그런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가 권리 적 오류라 해요.
‘나는 구원 받아야 돼, 구원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오류, 그게 바로 권리 적 오류입니다. 이 권리 적 오류는 모든 곳에 다 있어요.
난이 있는데 ‘난이 시시하다. 김 대리 이 난 버려라.’ 하고 대표이사님께서 버리라 하는데 마침 난을 갖다 준 친구가 와서 ‘이 난 왜 버리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뭡니까? 내가 기억하라고 준 난을 니가 뭔데 니 맘대로 버리느냐, 라고 나올 때 그건 말이 안 되죠. 이미 소유권이 넘어갔잖아요. 소유권이 넘어갔는데 마음대로 처분하는데 대해서는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면 말하게 돼 있어요.
아버지가 칠순을 맞이해서 자식들이 선물을 줬는데 첫째도 선물을 기쁘게 받고 둘째도 선물을 기쁘게 받았는데 셋째 아들이 선물을 주니까 ‘이건 내가 얼마 전에 샀던 거다.’ 하고 버린다면 셋째 아들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원래 칠순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왔다면 그 아버지가 자기 선물을 안 받는 것조차도 선물을 버린 당사자와 같이 기뻐해야 되겠죠. 그렇죠? 그래야 진정으로 아버지의 기쁨이 내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기분이 삐졌다는 이 말은 권리 적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자기 권리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사실적 오류라 하는 것은 사실, fact, 있는 그대로의 오류라. 있는 그대로의 오류란 권리 적 오류를 지적하는 이 사실이 세상이 지옥이다 이 말입니다. 권리라 하는 것은 주님이 누구만 주님입니까? 예수님만 주님이잖아요. 예수님만 주(主)인데 이건 주가 너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전부 다 자기가 주인 노릇하고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침에 눈 뜨면 ‘주여, 오늘도 행복하게, 오늘도 무사히’ 누구 맘대로 무사히 입니까? 우리가 아직도 권리 적으로 주인 노릇하는 오류, 이 오류가 사실적으로 이런 권리 적 오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 그게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세상이 문제가 있어도 보통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권리 적 오류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손대서 개선해 봐라. 개혁해 봐라. 안 되죠. 왜, 자기 권리만큼은 때려죽여도 구원받을 권리만큼은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한국 교회는 다 썩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다 합시다. 그러면 ‘니도 썩었나?’ ‘그래 나도 썩었다.’ 하면 될 텐데 그렇게 이야기 안 하고 ‘우리는 안 썩었다.’ 이렇게 나오면 권리 적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다 썩었다. 나도 썩었다. 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바로 사도바울이 그런 점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데 심지어 누구라 할지라도? 나라 할지라도”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 이예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본인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라도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결국 이 복음은 전하는 내 소속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전하게 하신 우리 주님의 소속이기 때문에 나의 권리적인 오류를, 내 권리적인 것을 내가 주장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나왔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 왜 이런 이야기(오류)를 했느냐 하면 성전 파괴가 일어났을 때 오류를 이미 갖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방금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럼 이 두 가지 오류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선지자의 몸, 선지자의 신체라 돼 있죠.
이 논문이 좀 어렵지만 본격적으로 어렵게 된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요.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선지자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실존적으로 자기의 몸 한계 안에서 밖을 못 벗어나요. ‘아! 배가 고프다. 그런데 니는 왜 배 안 고파?’ 이는 말이 안 되잖아요. ‘니가 배고프다고 왜 내가 배고파야 됩니까? 말이 안 되죠.
왜 우리는 한 사람이 주장했다고 다른 사람이 동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뭐가 따로 있기 때문에? 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이라 하는 이것은 ‘의미봉쇄’예요. 봉쇄라는 말은 알죠? 전쟁할 때 완전히 포위 되는 것. 의미봉쇄예요. 의미봉쇄니까 한 사람이 ‘나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밤부터 울었나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는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독수리가 울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거든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내뱉는 의미라는 것은 봉쇄된 채 나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따님하고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직장에서 고생했다고 왜 고생은 니가 하고 나한테 짜증을 내느냐, 그럼 어쩌라고? 지금 직장 상사한테 따지고 싶은 것을 우회해서 집의 가족들한테 따지잖아요. 그럼 무슨 역할을 해달라는 말입니까? 지가 기대한 직장의 자기 짜증나도 굴복하는 직장의 역할을 집에 있는 집안 식구들이 그걸 대신 해 달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럼 해줘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니가 최고다. 너는 일도 잘하는데 월급도 너무 적어. 다음에 보너스 더 줄게.’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런 말 할 수가 없죠. 직장 상사가 뭘 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로만 하면 약을 더 올리지 실제로 할 수가 있어야죠.
그럴 때는 이렇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직장 상사를 그렇게 해주는 게 아니고 엄마가 로또가 당첨이 되든지 어디서 유산을 500억 받든지 해서 ‘야, 직장 때려치워. 때려치워. 내가 살려 줄게.’ 이러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돼 버려요.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딸은 지배관계에 들어갑니다. 아까 누가 지배한다? 예수님만 지배해야 되는데 그 딸은 엄마만 믿지, 주님을 안 믿게 돼요.
그러니까 누구한테 의존한다는 것은 결국은 지배관계가 주님의 지배를 이탈하는 거예요. 왕(王)이란 것은 왕의 문제점은 진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주되심을 마귀가 시선을 틀어놓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왕 됨에 뭐가 있느냐 하면 왕 노릇이 있어요. 죄의 왕 노릇, 사망의 왕 노릇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왕입니다. 우리 대왕님 만세, 이 말은 뭡니까? ‘나 예수 안 믿어.’ 그런 뜻 이예요.
그럼 예수님한테 만세, 하면 예수님한테는 만세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왜냐 하면 만세할 거리가 없어요. 예수님이 나귀타고 왔을 때 호산나 찬양했죠? 그런데 그 많던 관중들이 그건 예수님 나귀타는 게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장차 저 분이 우리나라를 로마에서 해방하실 구체적인 실제적인 인물이라고 봤는데 그분이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호산나 했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잖아요. 누가 따랐습니까? 심지어 열두 제자도 발 끊었어요.
그러니까 열두 제자라는 그들만의 의미봉쇄에 주님이 그 의미봉쇄를 뚫고 들어온 이게 기적이라니까요. 뚫고 들어올 때 방법은 뭐냐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올 때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게 뭐냐 성령세례거든요. 성령세례 받아서만 주님은 이 의의 세계에서 죄의 세계에 들어오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성령만 준 게 아니고 성령 따라서 그 죄를 뚫고 들어오는 손길, 자비의 오른 손, 능력의 오른손, 그것도 죄를 뚫고 들어와서 ‘에이, 니는 창세전부터 택한 백성아’ 해서 잡아서 잡아당길 때 그들은 젊은 사람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하는 거예요. 그 환상을 보고 꿈을 꾼 내용이 뭐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내용입니다.
환상 본다 해서 날라 다니고 그런 게 아니고, 이건 왜 환상이고 왜 꿈이냐 하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게 아니고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예요. 주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예요. 착할 필요도 없고 헌금할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 없고 그냥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인간의 직장이라든지 재정능력이라든지 신용도, 당뇨병, 간질환 전혀 관계없어요.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아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목사 안 돼도 되고 교회 안 다녀도 되고, 세례 그 딴 거 안 받아도 되고, 오직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아요. 세상에 이런 좋은 행복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세상에 이런 좋은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기존 교회는 대체할 때 의미가 봉쇄됐는데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여기는 마귀가 들어가서 우리는 everybody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어깨동무해가면서 그리고 여기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찬송, 그리고 젊은 애들은 집단적으로 ccm,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 노래하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마치 하나된 것처럼 하는 거예요.
제가 젊을 때 대구 서문교회 다녔는데 이처럼 청년회 봉사하고 얼굴도 이쁘고 서울 말 쓰는 20대 그 아가씨가 의미가 하나 되고 한 형제라고 하던 아가씨가 돈 빌려서 도망가고. 난 돈 안 빌려줬는데, 다른 사람들은 많이 빌려줬어요. 도망가 버렸어요. 사기꾼 이예요. 의미봉쇄가 풀려버렸어요.
노인네들 모아놓고 선물 공짜로 주고 설탕 밀가루 주면서 전부 다 의미봉쇄를 다 해체시키고 의미를 하나로 되게 ‘여러분, 돈 많아도 자식이 다 가져가면 소용없습니다. 여러분 몸은 여러분이 챙겨야 합니다. 나도 이거 먹고 난 뒤에 빌빌 댔는데 나았습니다.’ 어떤 할머니 불러다가 ‘할머니 이거 잡숴보니까 내 말 맞아요?’ ‘맞습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안 아플 수밖에 없지, 진통제를 갖다 부어놓으니까. 한 이틀 먹으니까 좋거든요. 그걸 간증 시켜서 진짜 옆의 친구 할머니가 좋다는데 안 살 수가 없죠. 다 사버리는데. 할 때 휴대폰 코드 다 빼버리고. 단결합시다. 하나 됩시다.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이게 인간사에서는 안 됩니다. 의미봉쇄 됐어요.
각자, 각자 죄라는 캡슐 안에, 그 캡슐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캡슐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귀가 허락하면 둘 다 같은 죄 짓는다는 의미에서 집어 넣어줍니다. 둘 다 같은 점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독립해서 악마처럼 우리도 반들반들한 그릇으로 자립할 수 있는 그런 의지를 키우자, 그럴 때만 문 열어줘서 하나 되는 거예요. 우리끼리. 우리 단체, 그게 공동체 운동 이예요. 우리 집, 우리 구역 모임, 이런 게 교단이죠. 합동 측, 신천지, 다 마찬가지, 전부 다 우리끼리예요. 십자가마을도 우리끼리 하면 안 돼요. 세상에 십자가마을 구원한다는 대목이 안 나오잖아요.
주께서는 의미봉쇄가 안 되는 곳에 들어올 때는 오직 우리 자신의 죄를 지적할 때입니다. 마치 우리는 잉크 덩어리예요. 죄를 지적할 때 어떻게 하느냐, 우리 속에 죄를 주의 손이 닿으면 그게 피로 변하거든요. 주의 피 묻은 것을 보면서 ‘오, 피 있네.’ 보는 게 아니고 ‘피 있네.’와 죄 있네.‘와 만나야 돼요. 저 피 흘린 것은 내 죄 때문이다. 어디에? 성경에 나오더라. 내 죄로 인하여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주께서는 피 없이는 일을 하지 아니하시나니, 가 나오거든요. 피 없는 일은 없는데 악마는 반드시 피 없이 일을 하게 만들어요.
악마의 특징은 뭐냐, 죄를 출발점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이제 죄 이야기는 고만 하라는 겁니다. 얼마나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블레셋에서. 지금도 양무리 마을에 글 보면 있어요. 모든 게 죄라고 시작하더라. 문제 있다고 나오는 거예요.
피가 있으니까 죄가 있죠. 죄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분석하니까 아느냐? 피 보니까 죄가 있는 거예요.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게 교회 아닙니까?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가 생각나지 않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죠. 주님의 피는 우리 죄 때문이니까 우리한테는 죄를 항상 보여주기 위한 피의 작용일 때 의미는 피란 의미로 하나로 뭉쳐지는 겁니다. 이게 성령의 세례인데 서로가 피라는 의미로 전부 다 죄인이라는 의미로 하나로 뭉쳐질 때 그게 그 자체적으로 의미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 바깥에는 의미가 봉쇄되겠죠.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봅시다. 선지자의 몸은 의미봉쇄 됐다. 선지자 몸의 특징은 선지자가 천상회의에서 본 것은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증거 하는 것하고 증명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증명하는 것은 남을 설득시키는 것이고, 증거는 뭡니까? 믿든지 말든지, 이게 증거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것은 증명하는 자가 아니고 두 증인이죠. 두 증인인데 그 사람들이 죽는 곳이 바로 십자가 죽는 곳이죠. 그들이 죽는 곳이 십자가란 말이 뭐냐 하면 그들을 증인 노릇하게 한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힘이 그들로 하여금 증인케 하다가 어디로 되돌아간다? 그들이 죽는 자리를 십자가로 가게 한 거예요.
십자가를 증거 한다는 것은 이미 그 능력이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한테는 의미봉쇄가 안 되고 의미 합체가 돼 있어요. 그걸 세례라고 하는데 이번 주일 낮에 설교 하게 될 거예요. 세례라고 하는데 그 자체에서는 합체가 돼요. 합체! 독수리 오형제, 하면 하나가 되잖아요. 독수리 오형제가 따로 있다가 합체가 할 때는 몸집이 하나이기 때문 이예요. 몸집이 다섯 개가 되면 합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에 두 개, 세 개의 단독 신체가 있으면 안 돼요. 단독 의미가 생기면 안 됩니다. 하나의 의미.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선지자에게 몸을 의미봉쇄를 한 것은 모든 의미는 누가 장악했다? 그 시대의 선지자가 이미 장악해 버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단일성! 단일성이란 말을 쓴 것은 뭣과 대비해서 하느냐, 다양성과 대비해서 단일성 이예요. 다양성이라 하는 것은 몸이 열 개가 있으면 몸이 열 개 아닙니까? 동상이몽이라고 열 사람이 잠을 자면 전부 다 꿈이 다 달라요.
오늘 아침에 제 아내하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어제 서울 청량리에서 차를 잃어버려서 애를 먹어서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깨어보니까 아휴, 꿈이었다. 차? 요 집 앞에 있지, 얼마나 대행인지 몰라. 이런 이야기하니까 제 아내가 어제 밤에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꿈은 개꿈이니까 왜 동상이몽이 되느냐 이 말이죠. 꿈이 다 다르거든요. 이걸 다양성이라 해요. 인간은 다양성이거든요.
다양성에서 끄집어낼 때 여기 다양성은 악마가 작용합니다. 악마가 작용하게 되면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이 있지만 너희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원하는 게 있잖아. 에이고, 있어. 돈입니다. 두 번째 인기고 세 번째 권력입니다. 요 세 가지를 어디서 제공한 겁니까? 마귀가 어디서? 광야에서 예수님한테 제공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내 인생은 내가 갖추었다.’ 우겨도 마귀는 지금 웃습니다. 니가 갖고 싶은 게 따로 있어. 이걸 누가 아시느냐, 예수님도 아시거든요. 예수님이 자기 찾아온 관중들 보고 뭐라 하셨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 그 사람 지금 LA에 가 있어요. 젠틀맨, 알랑가몰라.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많은 게 제왕 이예요. 대통령은 5년만 하면 그만이지만. 싸이, 인기, 권력, 돈, 같이 가요. 다 마귀에서 나오기 때문에. 역시 돈 있는 사람이 인기 있고, 인기 있으면 돈 생기고, 그게 권력되고 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인기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 그게 얼마나 허무한지.
그러니까 악마는 올려주고 작살내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또 하고. 어쨌든 인간은 다양성이 있더라도 악마는 알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뭘 원하는가? 나처럼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죄를 원하는 거예요. 인간은 죄를 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하나님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죠.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죠. 자기 경배하는 것 좋아하죠. 자기 잘난 맛으로 살죠. 주님 잘난 맛으로 안 살거든요. 이 모든 것, 이걸 알기 때문에, 이미 여기는 공중 권세 자, 사망의 왕 노릇, 죄의 왕 노릇, 이것은 하나의 다양화 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지자라 할 때 단일성으로 오거든요.
자, 이번 논문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에 서서히 들어갑니다만 어려우니까 침착해야 돼요. 144.000, 이건 1이 아니죠? 2도 아니고 숫자가 144.000이죠. 이걸 사수 성인데 이게 뭐냐 단일성입니다. 숫자는 분명히 144.000인데 이걸 단일성으로 할 때 이걸 하나님 보시기에 무한, 셀 수도 없는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양을 따르더라.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숫자로 표현할 때 144.000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숫자는 분명히 다수성이지만 이것을 하나로 보는 겁니다. 또 예를 들면 12, 이건 숫자가 12니까 12죠. 분명히 각자, 각자 의미봉쇄가 돼서 각자 몸이 다르니까 각자 주장할 것 같은데 베드로전서에 보면 거기 쓴 편지에 보면 오직 하나 “그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었노니”
사도바울의 복음이 뭐예요? 오직 십자가 피! 히브리서에 나오죠. 피! 똑같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내가 자랑할 것은 뭐 밖에 없다?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게 없다.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구원받는 우리, 다수성이죠. 구원받는 우리들에게는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죠. 십자가라는 한분의 죽으심이 모든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얽히면 의미봉쇄가 해체되면서 그리스도 몸의 지체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사랑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전부 다 하나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 하나의 단일성은 이미 모든 인간은 지가 아무리 다양성을 주장해도 마귀한테 잡혀있는 단일성을 염두에 두고 전진을 하여 간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선지자가 왜 그렇게 그 시대에 적습니까? 예레미야도 그 당시 하나밖에 없습니까? 할 때 그 하나는 선지자 빼고 나머지가 열 명이 아니라는 뜻 이예요. 선지자가 한 명이라면 선지자 빼고 나머지도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같이 움직여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하나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증거 하는 겁니다. “날 위해서 누가 가지?” 할 때 ‘제가 가겠습니다.’ 이거는 증명하러 가는 게 아니고 증거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누가 가지?” 했던 그분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버림 받았잖아요. 그처럼 “버림받을 자리에 누가 가지?” 할 때 ‘제가 그 자리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사야와 예수님은 한 통속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 증거가, 뭣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습니까? 물어보면, 성전은 건물이죠. 성전이 깨지죠. 성전이 깨지면서 안에 인격화가 이루어진다 했잖아요? 이건 제가 이야기한 것이고, 그 당시 사람들은 성전이 깨어지면 뭐가 깨지는 겁니까? 하나님이 없죠.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안 믿죠. 해물 탕 끓어놓으라 해놓고 해물 탕 안 먹는다 하니까 말이 돼요?
성전 만들라 한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 만들라 해놓고 자기가 만든 성전을, 아까 남편은 해물 탕을 안 먹었지만 더 과격한 남편은 ‘누구야? 이 해물 탕 누가 끓였어?’ 하고 발길로 차버리는 거예요. 자기가 해물 탕 끓여놓으라 해놓고 발길로 차면 어떻게 그 남편의 말을 신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모순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전만은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안 깨질 것이고, 성전이 안 깨진다면 아무리 바벨론이고 앗수르고 아무리 막강한 군대가 오더라도 주님이 성전에 함께 있기 때문에 성전은 절대로 불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 당시 선지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짜 선지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진짜 참 선지자의 반론은 뭐였습니까? 간단했습니다. ‘나 천상회의에서 봤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맞는데 천상회의에 갔거든요. 윗분 초월! 한계를 넘어선 게 아니고 천상회의에 참석하고 오다 보니까 깨진대요.
그럼 그 이야기 듣고 또 따집니다. 유대인하고 가짜 선지자들 하고. 성전이 깨져 버리면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있다는 성전 지으라 하는 다윗 언약의 그 성전은 어디 있느냐? 어떻게 생겨나느냐? 어떻게 성전이 회복되느냐? 그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문제에 그들은 돌입하게 되겠죠. 해답은? 연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일단 나는 구원 받았다고 보고 이렇게 논리가 되면 성경 논리가 전혀 안 되게 돼 있어요.
누구한테 맡겨야 됩니까? 모든 구원의 권리는 주님 손에 있고, 이렇게 보면 모든 게 술술 풀리는데, 나는 일단 구원받고, 나는 일단 무조건 천국 가야 돼. 이런 이야깁니다. 여러분, 내 편에 예수님 계십니까? 예수님 편에 천국 있습니까? 나의 편에 천국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편에 천국 있는 거예요? 원래 성경대로 하면 예수님 편에 천국 있는데 그런 얘기하니까 내 편에 천국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가 갖게 되는 거예요. 나의 편에는 천국이 있고 싶어 하죠.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런데 천국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국에 오게 되면 여기선 나의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우발적으로 와요. 이게 두 자로 사건입니다. 바람! 바람 이야기 여러 번 했는데, 바람 같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바람 같이 임하는 겁니다. 이것은 ‘천국은 내 소유야.’ 라는 말을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죠. 천국은 내가 역시 ‘천국 오너라.’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연히 왔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놀란다고 했죠. 나 같은 인간을 왜 넣어줍니까? 이렇게 오히려 반문해야 돼요. ‘이상하다. 십자가 피를 내가 왜 믿지? 그 피를 어떤 죄도 용서 받는다는 사실이 내가 미쳤지, 내가 공부도 못하는데 그걸 내가 왜 믿지? 머리가 잘못됐나?’ 하고 너무나 놀라야 됩니다.
그래서 이 논리가, 우리가 방금 놀란다 하는 이 논리가 선지자한테는 어떻게 놀라느냐 하면 물론 선지자도 이 사실을 믿습니다마는 선지자가 놀라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만든 이 나라를, 이 성전을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뜨립니까?’ 어렵죠? 우리 생각에는 ‘그래, 너희들 니 맘대로 해,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야.’ 이렇게 생각할 텐데 선지자는 그렇지 않고 ‘주여, 이러시면 내 백성 어떻게 됩니까?’ 라고 누구를 걱정해요?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보세요. 울잖아요. 울긴 왜 웁니까? 우리 같으면 ‘잘됐다. 아이씨, 나 혼자 천상회의 참석했다. 나는 구원받는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할 텐데, 막 울면서 ‘주여 이러시면 주의 백성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한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선지자가 포함돼 있는 것이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이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본인은 구원받으면서도 저주 받는 것이 애타 하는 그 상반된 속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성전이 서서히 인격화 되는 과정에 있는 겁니다.
성전은 깨졌지만 누구만 있으면 된다? 성전은 깨졌기 때문에 연속성을 깨졌겠지만 누구는 계속 보내집니까? 선지자가 있는 이상은 성전은 선지자 속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 선지자 이름이 뭐냐, 바로 유명한 인자, 인자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예레미야라. 또?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오실 분이 왔기 때문에 나중에 곁가지는 쳐도 그만 이예요. 선지자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 필요 없어요. 정작 그림자로 오셨던 것이 실제가 나타났으니까.
무서운 영화 같은 경우에 처음부터 안 나타나요. 처음부터 긴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도끼 들고. 저벅, 저벅, 저벅, 하고 2층을 올라가요. 2층에 있는 아이는 ‘아유, 무서워라.’ 전화해도 경찰한테 전화가 연결이 안 돼요. 저벅, 저벅, 저벅 오는데 문에 보니까 도끼 든 긴 그림자가 비치니까 침대에서 오돌오돌 떨죠. 그걸 선지자가 섬뜩하게 느끼는 거예요. 선지자는 구원의 사랑의 하나님을 뭐로 느끼느냐, 섬뜩한 주님, 주님이 사전에 이만큼 무서운 분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게 선지자예요.
세례요한이 뭐라 합니까?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 얼마나 무서운 도끼가 나무 뿌리에. 그러니 이 세례요한은 털옷 입어서 빈대나 벼룩이 있어도 이거 신경 안 씁니다. 맛있는 거 뭐 먹지? 석총 해서 광야에서 등산해서 바위에 있는 것 꿀을 따서 얼굴에 묻혀서 범벅이 되고, 이런 것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고 메시아가 저벅, 저벅, 저벅, 회개하라, 뭐가 왔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심판 날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게 무서워서 지금 한 명이라도 강물에 집어넣어서 세례가 급하지, ‘오늘 몇 번이나 물렸지? 벌꿀 따먹다가.’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옷 다른 거 없나? 그런 거 신경 못 써요. 남들은 결혼하는데 나는 결혼도 못하고. 그런 거 지금 신경 쓸 수도 없어요. 나는 오시는 분의 외치는 전령이다.
그것을 전령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이게 지령입니다. 다다다다 북한에서 보내는, 청와대 폭파하라. 다다다다, 비밀스러운 것, 아무도 모르죠. 세례요한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너 누구야? Who are you?’ 물었어요. 답변 안 하니까 그들은 객관식으로 ① 니가 선지자야? ②제사장 ③ 메시아, 몇 번입니까? 세례요한은 소리, 나는 그냥 스피커, 스피커니까 지가 주체가 아니에요. 자기는 그냥 긴 그림자예요. 도끼를 들고 나무뿌리니까 사람들 발목이죠. 나무뿌리에 도끼를 찍기 위해, 찍을 때 사실 도끼로 찍는 게 아니고 물로 퍼붓는 거예요. 도끼로 발목만 찍으면 발목만 날라 가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다 죽어요. ‘다 와서 죽자, 죽자, 이런 상태로 천국 못 간다. 죽어야 산다.‘ 해서 물에 집어넣고 메가지 집어서 끌어당기고, 그럼 어떻게 됩니까? 머리 긴 여자는 어떻게 되겠어요? 폼 나겠죠. 푸아~ 머리 탁 물을 털면서 머리 뒤로 풀어헤치고. 물에 집어넣고 푸아~, 살았다. 하듯이 왜 물에 잠수시켜 놓고 끌어당기느냐 하면 세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육은 죽이고 영의 세계로 푸아~ 하고 끌어오는 것을 미리 은유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선지자! 이 사람들 월급을 따진다든지 나 결혼해야해, 이런 걸 따진다든지, 안 돼요. 왜냐 결혼해서 있는 마누라까지 하나님께서 작살냅니다. 아내한테 미안하지만 아내도 선지자, 인자가 받아야 될 계시를 위해서 죽어줘야 되고 그 다음에 자기는 그걸 보고도 울지 말아야 돼요. 회개할 뿐이지 울지 말아야 돼요. 이처럼 너희가 사랑하는 아내도 너희들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다. 그 죄가 어제 수요일 날 무슨 죄라 했습니까? 이 땅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뭐라 했습니까? 우상숭배!
너희들은 우상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다. 그러면 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어제 수요일 날에 했지만 우상이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등장한 때가 출애굽기 32장이죠. 32장에 보면 모세가 떠났다는 말은 언약이 떠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중간에 전달하는 전령이, 지령을 받은 사람이 떠나고 일부러 떠나게 해줘요. 그러면 남은 상태에서는 뭘 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만들어 내겠죠. 그 만들어 낸 여호와가 우상이라면, 그 만들 때 그 만든 취지가 뭐냐,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한 여호와를 만들어 내면 그것이 이스라엘 멸망하도록 계속 가요.
결국 성전이 있고 성전이 있더라도 전부 다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우상이라고 보면 돼요. 전부 다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선지자 몸이 선지자 신체를 통해서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의 선지자가 단일성 속에 있다 했죠? 어려운 것 많이 했기 때문에 복습하면, 이 단일성은 선지자 빼고 나머지 모든 사람이 자기 딴아 다양성이지만 다양성은 아니고 전부 다 죄의 것에 있는 다른 또 다른 다양성 1:1 이예요. 1: 여럿이 아니고 1:1
그런데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면 네 자손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진다 했죠?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입니까? 하나죠. 하난데 구원받은 사람은 여러 명이 되도록 하는 거죠. 이삭은 하나지만 이삭의 자손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듯이 하나에서 다수가 나온다고 해서 다수가 다수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에 예속된 다수이기 때문에 의미봉쇄가 아니고 그 안에서는 합체가 되죠.
마찬가지로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안 믿는 사람도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말은 상대방에 뭐 등장한다? 뱀의 후손. 장갑이 오른쪽 장갑이 왔다는 말은 반드시 이 장갑은 뭐가 있다? 이 지구상 어디엔가 왼쪽 장갑 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 지옥과 더불어서 함께 나타나고 지옥이 있는 곳에 천국이 쌍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 상반된 속성은 주님이 갖고 있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반된 속성 이예요. 자비를 베푸는 당사자가, 축복을 한 당사자가 저주를 해버려요. 그러면 저주받는 쪽에서는 저주하는 분으로 이해될 것이고, 축복 받는 쪽에서는 축복도 주고 저주도 주는 양쪽 다 주는 걸로 다 이해 되고, 그걸 설명하라 하면 설명이 안 되죠.
우리는 단일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설명이 될 수가 없고 설명할 필요 없어요. 증명할 필요 없다니까요. 증거 하면 되지 증명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성경을 어느 정도 공부해야 증명이 됩니까? 그냥 하루를 믿고 이틀 믿어도 증거 하는 용이지, 이걸 성경을 언제 알아서 다 증명해요? 안 되죠.
그리고 증거의 작용에 우리 개인의 욕심도 포함시켜서 피자를 만들기 때문에 깨끗한 것만 정답만 알아서 전하지 않게 돼요. 반드시 또 과장되게 우리 자랑거리, 자랑 질이 섞이게 되죠. 그래서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증거가 완벽한 증거라는 게 없고 증거 케 하시는 분이 그 증거를 완벽한 증거로 사용하면 그게 완벽하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 듣고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하지만 사도바울의 말을 듣는 걸 도구로 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사도바울이 완벽한 뜻은 아니고 주께서 구원하는 데는 완벽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몸이 그렇게 깨지면서 선지자의 몸이 하나의 인격화 돼 가면서 이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선지자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선지자가 안 오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마지막 문제입니다. 선지자가 안 오면? 실제로 선지자가 말라기 이후에 왔어요? 안 왔어요? 안 왔죠. 안 오면 안 오는 거예요. 안 와도 할 말 없는 거예요. 선지자가 안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그 질문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니까 걱정스러운데, 주님께서는 미래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앞당겨서 그림자와 모형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게 모형이라면 그걸 모형이라고 하시는 분이 실체가 되는 겁니다.
선지자는 이쪽에서 보면 안 온 걸로 돼 있지만 이쪽 오신 분의 입장에서는 그 마지막 선지자로 인하여 이미 더 이상 계시할 건 이제 끝나고, 마지막 판에 본인만 나타나면 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이건 파국 직전의 고요라 할까, 폭풍 이전에 잠시 조용한 것, 그게 더 겁나는 순간 이예요. 이게 말라기 하면서 거기서 생긴 것이 짐승의 나라가 유대 나라 이름으로 짐승의 나라가 드디어 아주 온실에서 차분히 만들어집니다. 왜, 짐승의 나라가 만들어져야 예수님이 그들의 속에서 헤롯의 속에서 죽임을 당해서 십자가를 완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그냥 고요한 시대에요. 개성공단하고 이래서 안 좋지만 어쨌든 계시에서는 지금 고요합니다. 누구 복음 이야기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전부 다 고요하게 교회 놀러 다니고 이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대지 말고 회개하라 나대지 마시고요. 머리 길어서 하지 마시고 증명하지 마시고 그냥 증거 되도록 우리의 죄 된 모습을 사용한다는 사실, 지금도 쉬지 않고 증거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의미상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선지자처럼 그냥 구원은 받았는데 세상 돌아볼 때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 안타까운 심정도 주께서 허락해주셨사오니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증거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