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이름과 존재와 기능)130523-20강a -이 근호 목사
제 20강a
지난 시간에 주의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주의 이름이란 것이 성경에 나오는 제일 어려운 개념이 주의 이름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다시 말씀 드리면 주의 이름하고 여호와하고 하나님하고 차이가 어떻게 나느냐, 상당히 난해한 문제죠. 한번 적어볼게요.
여기 주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그건 무엇을 겨냥하느냐 하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람의 이름이 있죠. 주의 이름이 주어지게 되면 이것은 사람의 이름을 전제로 해서 주의 이름이 주어져요. 그러면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그럴 때 이름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어떤 존재, 어떤 사람도 당신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름이라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이 말은 어떤 존재도 구원시킬 수 없다는 이 말은 이름이라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어떤 존재, 어떤 인물을 대표해서 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말을 할 때 다른 이름으로 하지 말고, 어떤 누구도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쉽게 하면 되는데,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되지 못한다. 이름을 이렇게 어렵게 집어넣느냐 하면 그것은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구원한다면 되지, 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은 없다고 이렇게 자꾸 둘둘 돌려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에게는 이름이 눈에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사람이 눈에 보이고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 뭐냐고 먼저 사람보고 묻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안 보이니까 사람들은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아, 없어, 없어. 한 때 있었지, 예수란 분은 한 때 있었지만 돌아가셨어. 없어.’ 없다는데 사도는 뭐라 합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 없다.
그러니까 인간은 존재가 먼저고 그 다음에 그 존재에 부합해서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하나님은 뭐가 먼저입니까? 존재는 뒤에 숨어있고 뭐가 등장합니까? 이름이 등장하면서 그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내가 내 이름이 있는데 내가 여기 이름 걸고 내가 있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있는 분은 내가 아니고 바로 내가 부르는 주님이 나보다 더 확실하게 계신 분입니다. 그런 뜻 이예요.
그렇다면 자기가 인간이 죽습니다. 죽으면 자기가 없어지잖아요. 죽어도 예수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이름이 죽는 거예요? 나의 이름이 죽는 거죠. 나의 존재가 죽는다고 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이미 이름과 이름을 비교했으면 이름 노선으로 들어가야지, 내 존재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나는 여기 만져지는데 하나님 보고 싶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는 여기 거울 보면 보이는데 주님도 얼굴 좀 보여주시면 확실히 믿겠습니다. 이런 것은 노선이 존재에서 존재로 마주친다는 뜻이고, 성경에서는 그것을 거부해 버리고, 너라는 존재는 일단 너의 이름으로 옮기고 그 이름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해서 이름에서 이름으로 연결시켜 버리는 거예요. 존재에서 존재로 연결하는 게 아니고, 복잡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단순하죠.
그래서 왜 주의 이름이냐 하면 사람은 자꾸 눈에 보이고 거울 앞에 아침마다 나타나는 자기 자신을 세상 천하없어도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게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예수를 10년 믿어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면 ‘예수라는 게 과연 있겠어? 하지만 생각하는 나는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계속해서 존재에서 머물고 있으니까 그걸 주님께서는 존재하고 이름을 이렇게 붙여놓고 떼버리는 거예요. 떼놓고 네 이름이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너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일단 아시니까 더 나아갑시다. 존재에서 이름으로 나가고 이름이 X, 지워지면서 누구 이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 물론 내 이름으로는 구원 안 되고요. 누구 이름?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이 나오면 여기서 X치고 그 다음에 여기 다른 이름이 나오면서 이름이 사도를 통해서 알려줬으니까 그 다음에 점선으로 어떤 존재가 되겠죠. 그럼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봅시다. 사람이 이름을 가졌다 할 때에 누굽니까? 윤 창중 그 사람이 기자회견할 때 아주 중요한 말 했죠? 뭐냐 하면 ‘내 이름을 걸고 양심과 도덕적으로 남한테 책잡힐 짓을 지금까지는 한 적이 없다. 그냥 허리만 한번 툭 쳤을 뿐이고.’ 거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 이름을 걸고? 내 이름을 걸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한테 이름이 있다는 건 자기를 대표하는 거예요. 그래서 남이 욕을 하게 되면 욕을 해봐야 물리적으로 파가 별로 느끼지를 못해요. 욕설 해봐야 음파라 해야 아프지는 않은데 괜히 기분 나빠. 그것은 사람은 몸을 대표해서 뭣이 장착돼 있느냐 하면 내 이름의 명예와 관련돼 있어요. 그리고 자식들에게 뭐라 합니까? ‘얘야 니 어디 나가도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니는 우리 집안의 자식이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지? 그러니까 우리 집안이 책잡히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안이 보통 집안인가? 경주 이씨 학수공파인데 절대로 우리 족보를 더럽히면 안 된다.’ 이렇게 나오겠죠.
그러니까 이 이름을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름 괄호 열고 기능입니다. 중요한 게 나와요. 이름이 기능입니다. 이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모든 일을 할 때에 그냥 몸으로 일하라면 짐승과 똑같은 거예요. 배고프다. 먹자, 이거는 개돼지와 똑같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달라요. 사람을 개돼지처럼 먹을까 말까, 하는 가운데도 뭘 염두에 둡니까? 자기의 이름을 고려해서 ‘야, 이거 먹으면 안 되겠다. 이런 짓하면 안 돼, 이건 내 이름이 손상돼.’ 이름은 모든 기능의 집합체로서 자기를 대표하죠.
그렇다면 이름의 기능이라면 여기서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뀌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죠. 이름만 달랑 바뀌면 끝났습니까? 아니죠. 야곱으로 살던 시절이 이제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바뀐 이름으로 사는데, 그걸 방금 배웠습니다. 이름은 뭐가 들어있다? 기능! 이스라엘 같은 기능으로 살아가는데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또 예가 아브람으로 시작했던 인생이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아브람은 고귀한 자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많은 자식을 낳은 아버지, 이름이 바뀌니까 그냥 이름만 달랑 바뀌고 ‘니가 알아서 해라.’ 이런 거 없어요. 이름이 바뀌게 하신 분이 누구죠? 주님이죠. 주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바뀐 이름에 부합되도록 인생을 끌어가죠. 이제는 아브람이 아니고 계속 아브라함으로 살아야 돼요.
아브라함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줍니다. 이삭을 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얻었다고 생각할 때 자, 물어봅시다. 아브람이 이삭을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이죠. 하나님께서 그걸 시험하는 거예요. 아브람 자격으로 자식을 얻은 것인지, 아브라함 자격으로 자식을 얻은 것인지,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삭을 어떻게 하라 합니까? 세상에, 무슨 산? 모리아 산으로 가서 누구 손으로? 아버지의 손으로 아들을 살해하죠.
고 기능이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신 숨어있는 이름의 기능입니다. 주의 기능 이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로마서 8장 이야깁니다. 롬8:32-34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구도 너희를 이제부터는 죄 있다고 정죄할 수가 없다. 환난, 핍박, 곤고, 걱정하지 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 로마서 8장이 그걸로 마감되잖아요.
다시 한 번 봅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가지면 자기 소유가 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이름을 덜렁 줘놓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된 아들을 잡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장차 오실 아버지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버리는 그 행위를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미리 아브라함 가정에 일어나게 조치를 해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누굴 믿어야 돼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본인을 믿어야 돼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짓게 하신 그분을 믿어야 돼요? 그분을 믿어야 되죠.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굴 보기를 기다렸다 했습니까? 세상에 아브라함이 2천 년 뒤에 오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습니다.
아까 낮에 차타고 오는데 어떤 분이 전화해서 물어요. ‘목사님,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그 대목으로 이제부터 오늘 강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상당히 궁금하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이 알게 된 게 아닙니다. 변화 산에서 모세 나타났죠. 엘리야 나타났죠. 거기 나타나서 예수님하고 이야기한 멘트의 주제가 뭐였습니까?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시작 했는데, 초막 셋을 짓는 것은, 지가 사는 것은 주의 이름의 기능에 합하지 않아요. 그러면 엘리야와 모세는 주의 이름에서 이름이 기능이니까 그 기능에 합해야 이름이 합당한 이름이 되니까 그래야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습니다. 그 기능에 합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변화 산에서 이야기를 했죠.
그걸 누가 뭐래도 뭐냐, 두 자로 크게 쓸게요. 별세!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걸 볼 때 우리는 생각해요. 엘리야 구원받았잖아, 모세가 변화 산에 나타났으면 하늘나라인데 이미 그들은 포함이 됐잖아요. 구원이 됐으면 됐지, 왜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또 별세해야 되죠? 본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가 있잖아요? 됐잖아요. 자기 챙길 거 다 챙겼는데 왜 또 예수님이 나머지 기능에 대해서 왜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나머지 기능이 없다면 그들은 구원돼요? 안 돼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남아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 죽음이죠. 별세니까. 그 다음에 봅시다. 십자가 죽게 되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죽는데 왜 그들이 구원받죠? 생각 한번 해봅시다. 윤 집사님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왜 내가 구원받죠?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철학에서 개별자라 해요.
개별자라 하는 것은 부부가 잠을 같이 자도 동상이몽이죠. 절대로 내가 이빨 아프다고 아내가 같이 이빨 아프지 않아요. 아픈 척 해주죠. 미안스러워서. 하지만 절대로 아프지 않죠.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넘어가는 어떤 고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우리 뻔히 아는 이야깁니다. …그런 거 없어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죄에 오염돼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죄가 어디 바이러스입니까? 오염되게. 죄가 매개체가 안 되잖아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 하나 따져보니까 이런 논리의 허점이 있고 해결할 문제가 이렇게 많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자, 윤 집사님이 십자가 졌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지 않습니다. 왜, 개별자기 때문에. 신체가 달라요. 아무리 감동을 줘도 내가 감동 받았다고 우겨도 같은 감동인지 아닌지를 생각이 같은지를 판정할 수 있는 판정이 없어요.
부부간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해, 일방적인 해석 이예요. 진짜 그 사람의 심정을 다른 사람은 침투가 안 돼요. 침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대전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서로가 뜻이 안 되는 걸 억지로 된다고 일방적으로 맞출 때 거기에 동원되는 게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다 잊어버렸죠? 한 자인데. 한 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의견이 일치될 때, 뭐죠? 돈! 그렇죠, 돈이죠.
그러니까 콩나물 장사 아줌마가 이거 사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나쁘다. 할 때 말로 ‘아유, 콩나물 싱싱합니다.’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하면 안 돼요. 돈 주고 그걸 콩나물 사게 되면 내가 가져가는 콩나물의 가치와 돈의 가치가 일치 된다고 합의 본 거예요.
교회에서 봅시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예, 사랑합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까?’ ‘감사합니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 교인들이 헌금을 한 푼도 안 낸다. 그럴 때 목사는 속이 불이 나죠. 입술로 백날 좋아하고 사랑하고 믿는다 하면 뭐하느냐 말이죠. 돈을 내놔야 믿겠다는 거죠. 돈을 내놓으면 믿겠다. 돈을 많이 내면 많이 사랑한 것이고, 돈을 적게 내놓으면 적게 사랑한다. 왜냐 하면 사람이 돈 내기 싫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럴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때 병원에 갈 사람이 기도원에서 기도해서 낫겠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결국 뭡니까? 어느 것이 헐하게 치느냐 하는 문제예요. 결국 얼른 계산해도 병원에 만약에 1000만 원 든다면 기도해서 만약에 공짜로 받아 버리면 기도원에 감사헌금 10만원 내면 되잖아요. 그러면 100배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렇다면 목사가 교인들보고 닦달내면서 ‘사랑하면 말로만 하지 말고 돈 내라, 돈. 돈이 안 되면 부역으로’ 부역이란 교회 봉사하는 거죠. 부역하든지 아니면 돈 내든지 부동산 담보하든지, 뭔가 이렇게 실질적으로 보여야 알지, 말로는 누가 못하느냐? 사랑한다. 믿습니다. 복음 너무 좋습니다. 목사들의 설교 하면서 화나는 거예요. 말로 하지 말고 돈 내라, 돈 주면 믿겠습니다. 돈 안 내면 말로다 때우려고 하는 얍삽한 짓으로 그렇게 알겠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문제 아직까지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질문의 핵심은 뭐냐 하면 어떻게 개별자에 전달되느냐? 방법은 엘리야도 궁금하고 모세도 궁금했던 거예요.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별세라 했죠? 그런 아까 이야기한 존재는 숨어있다. 눈에 안 보이고 숨어있지만 숨어있는 분과 연결된 사도가 전한 바에 의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3절에 나오죠. 천당 지옥 볼 생각하지 마라, 니 코 앞에 있다. 나를 천국에 데리고 가라 하지도 마라, 내가 지옥에 가서 지옥 보고 믿겠다 하는 것도 하지 마라, 구원은 니 코 앞에 있으니 그게 뭐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 했습니다. 말씀에서!
말씀에서 믿음이 주어지고 주어진 그것을 믿게 되면, 주의 이름을 믿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된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따져보면 쉬운데 문제는 사람들이 뭘 놓쳐요? 이름에 뭐가 있다? 기능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기능 있다는 걸 빼버리니까 뭘 믿느냐 하면 내가 주의 이름, 예수죠. 예수! ㅇ에다 ㅖ, ㅅ에다 ㅜ, 내가 불렀잖아요. 구원해 주세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기능은 주의 기능입니까? 자기 기능 이예요? 자기가 ㅇ, ㅖ, ㅅ, ㅜ, 발음하는 그 자기 존재니까 자기 이름이죠. 자기 이름이 입을 벌려서 음파를 파장해서 낸 자기 기능을 자기가 회수해서 자기가 믿는다고 이렇게 억지로 우기는 것밖에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이거는 반복하는 거예요.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이러면 방언이 터진다니까.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 이거 한번 100번 해보세요. 성질 급한 사람은 빨리 방언 터지고 느려 터진 사람은 이거 1000번 해야 터져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 빨리 해보라 하면 방언 다 터지게 돼 있어요. 이거는 누구의 기능입니까? 내 이름의 기능이지, 주의 이름의 기능이 아니죠.
그러면 주의 이름의 기능이 뭐냐, 궁금하다 말이죠. 자, 그건 제가 이야기하기 전에 모세와 엘리야가 한 이야기 한 걸 들어봅시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보고 무슨 기능을 기대했습니까? ‘주님이여 언제 별세하십니까?’ 주님이 별세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은 있다? 없다? 없다. 왜냐 하면 언약은, 모든 말씀은 어디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다 이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면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러면 십자가 이루어지는 그 기능이 결국은 예수님의 기능이 다 이루었다가 언제쯤입니까? 아까 부활하심이라 하시는데 부활은 아니에요. 부활할 때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부활은 사흘 뒤에 기다리잖아요. 사흘 뒤에 기다리다가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어디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 돌아가실 때 다 이루어졌죠. 그러니까 부활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기능의 연장이라고 보면 되지, 십자가로는 모자라고 추가적으로 십자가로는 구원이 안 되고 부활을 추가해야 구원됐다, 이렇게 돼 버리면 사도의 복음하고 달라요.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뭐라 합니까? 구원의 능력은 뭐에 있다 했습니까? 십자가에 있다 했죠. 십자가 +부활에 있는 게 아니에요. 교인들은 자기 이름을 유지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하고 주의 이름을 거론하잖아요. 그런데 자기 이름을, 이름이니까 자기 기능 이예요. 자기가 하는 벌이는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화화면 보듯이 저 대목은 예수님 요단강 세례, 저 대목은 예수님이 병 고친 것, 저 대목은 예수님 십자가 죽은 것, 저 대목은 부활, 저 대목은 승천, 내가 몽땅 이걸 다 봤으니까 내가 다 흡수하면 이걸 흡수한 지식으로 나는 구원받는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누구 기능 이예요? 주의 기능이 아니고 누구 기능입니까? 자기가 저쪽에 다가서는 자기 기능이죠. 그래서 간증집회가 위험한 거예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그것을 믿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다 하는 그 사실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만약에 예수를 5년 전에 믿었다면, 오늘의 예수는 없고 만날 뭐로 되돌아가요? 5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는 그때로 되돌아가서 마치 믿음이 잠재적으로 계속 연속되는 양 그렇게 돼 버려요. 그것은 자기 이름의 명예와 관련돼 있어요. 영광과 관련돼 있습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첫 귀절 알죠?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뭐라 돼 있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이 거룩하잖아요. 이게 누가 가르쳐준 기도입니까?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죠. 그러면 그 앞에 주님께서 무슨 기도를 책망했습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를 책망했죠. 이방인 기도, 바리새인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기도하면서 지금 눈치 보는 기도죠. 옷을 길게 하고 폼 내고 구제하면서 보란 듯이 구제하고 금식하면서 흉측한 얼굴을 하고 그리고 이방인의 기도는 달라고, 이거 필요하고, 이거 필요하고, 필요하고, 필요하고 이거 필요합니다. 라고 했잖아요. 그런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이야기했죠. “뭘 달라고 해?” 너희에게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아는데 내가 아는 리스트 항목과 니가 있어야 된다는 항목은 결국은 이름 싸움 이예요. 내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주여 이런, 이런 거 필요합니다. 하는 건 우리 쪽에서 쏴대는 기도고, 주님 보시기에 너는 이런, 이런 게 필요하다고 쏴대는 기도는 누구 기도입니까? 주의 이름에서 나온 기도잖아요. 이 방향성이 달라요.
그리고 난 뒤에 무슨 기도? 주기도문 할 때 기도를 뭐라 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용서죠. “나에게 죄 진 자를 내가 용서함 같이” 이 자상의 주제가 뭡니까? 죄라는 용어 나오죠. 그 다음에 용서 나오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는 기도는 뭐다? 내 죄를 용서하심을 제가 믿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받는 기도죠. 기도 간단하죠?
애 공부도 잘하게 해주시고 지금 부동산 값이 내려가니 기도해주시고 교회도 부흥되게 해주시고 선교 잘하게 해달라는 이런 저런 기도, 교회 헌금 없는데 더 채워주시라고 이런 기도, 이 지역의 아파트를 처음부터 우리 교회 교인으로 만들어주소서. 여리고성 작전, 이런 거, 그런 기도 필요 없죠? 그런 기도를 하세요. 또 그런 기도하시고 싶은 걸 참지 마시고, 다 하시고 이 몽땅 이런 죄를 주여 내 이런 모든 기도는 이 교회 내가 담임 목사고 내가 여기 다닌다는 자존심과 관련된 것에서 터져 나온 이방인적 기도인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애가 아픈데 기도 안 할 부모는 나쁜 부모입니다. 기도하세요. 주님이여, 지금 남의 애보다 내 애가 급합니다. 낫게 하옵소서. 하지만 이게 나의 애기 때문에 지금 다급하게 기도하는 것을 이 죄를 주께서 용서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되죠.
이 기능의 문제에서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주님의 기능은 뭐냐,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윤 집사님 오늘 죄송합니다만 또 예를 들겠습니다. 윤 집사님 죽으면 내가 죽은 자입니까? 말이 안 되죠. 그분이 올해 97세인데 돌아가셨습니다. 커피 바리스타로 빡세게 견디가 97세에 돌아가실 걸 가지고 말이야. 남의 이야기예요. 나 안 죽었거든요. 누가 죽든 나는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만약에 내가 산다면 그것은 내가 산다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주님이 살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죽어있어야 돼요.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았다 하는, 구원받았다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는 안 죽었다 이거예요. 죽은 십자가는 안 죽은 거예요. 말이 이상하죠.
예수님이 죽은 그 사건은 죽었다는 그 사건은 안 죽은 거예요.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러면 죽은 십자가가 안 죽은 사건 되려면 누가 죽어야 돼요? 십자가를 죽게 한 그 세상은 십자가 죽는 순간 죽어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죽은 세상 중에 일부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뭐만 도드라지게 남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모든 인간의 역사룰 덮는 묵시적 사건으로만 영원히 살아있다. 이게 생명나무죠. 생명나무는 살아있고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살았다 하나 사실은 죽은 자로다. 선악과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잖아요. “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처음부터 이미 죽어있었어요. 먹을 때부터 이미 죽어있었어요. 아직 안 죽었는데? 그게 죽어있는 모습 이예요. 그것은 바로 이쪽이 죽었다는 말은 그걸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분만 살은 거예요.
그게 뭐냐 주의 이름은 살아있고, 결국 이스라엘 역사라는 게 뭡니까? 주의 이름은 여전히 살아있고 살았다고 하는 인간의 이름은 주의 이름 앞에서 다 죽어 마땅하고 그 양면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라 할 때 모세는 죽은 자예요. 모세가 죽은 자기 때문에 지가 모세가 칼 들고 왕처럼 설쳐대면 안 돼요. 모세는 죽은 자기 때문에 팔을 누가 듭니까? 주께서 팔을 들게 하시면 승리하고, 주께서 팔을 내리게 하시면 패배하는 거예요. 결국 이 세상은 누구 천지다? 주의 이름의 천지지, 모세 이름의, 여호수아 이름의 천지가 아니다 이 말이죠. 옆의 장로 둘이 받쳐봐야 힘 빠지면 내려가게 돼 있어요.
인간이 받쳐준다는 것은 이번 전쟁은 모세가 지팡이 든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이번 전쟁은 너희들에게 속한 전쟁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이건 홍해도 마찬가지죠. 일부러 막다른 골목에 집어넣었을 때 그들은 대책이 없죠. 대책이 없다는 말은 뭐냐, 처음부터 인간의 이름은 대책이 없는 존재예요. 처음부터! 꼭 홍해 가까이 서서 울어야 ‘나 대책이 없네.’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매일같이 막혀있는 인생이잖아요.
그런데 막혀있는 인생을 막혀있는 인생으로 드러내는 그 순간이 뭐냐 하면 살려주는 자리가 그 자리예요. 이것은 십자가에 갔을 때 우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망했다고 본 거예요. 제자들도 망했다고 생각하고 도망치고 만 거예요. ‘끝났어, 끝났어. 예수님은 죽어 끝났어.’ 그런데 그 끝난 그 지점이 뭐냐 하면 유일하게 천국과 통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강도 있었죠. 강도가 있을 때 한 쪽 강도는 끝났다고 본 거예요. ‘니나 나나 다 같이 죽는 마당에 여기서 무슨 구원을 기대해?’ 그런데 옆의 강도는 뭐라 했습니까? 끝났다고 여기는 지점이 비로소 구원되는 지점에 온 거예요. 그동안 강도짓 하면서 빙빙 돌다가 세상에 온갖 남은 잘살고 나는 못산다고 빼앗아서 도둑질해서 살다가 기어이 온 자리가 뭐냐 하면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주의 이름이 완성을 하는 자리예요. 다 이루었다는 자리예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세 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십 자 가!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그러면 이 말, 십자가라는 의미는? 우리는 항상 죽어있어야 되고, 주님은 죽어있는 나를 항상 오늘도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짊어짐은 항상 주의 생명이 들어온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죽음에 넘기우고. 죽음에 넘기운 우리를 날마다 주의 성령께서 살려 내시는 거예요.
그럼 이런 기능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어떤 이름과? 바로 내 이름으로 뭘 할 때, 내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죄라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 내가 참 이런 죄 짓고 산다는 것은 이건 남의 덕에 사는 것이지, 내 덕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옴팍 느낄 때 다시 한 번 주님께 감사가 되죠. 이런 인간도 주께서 오늘도 살려주시니 아이고, 참 뻔뻔스러운 이 고마움을 어떻게 말로 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지점에 가야 돼요? 결국은 성령께서 나온 지점이 성령께서 어디서 나왔습니까? 성령께서 본격적으로 나온 지점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나오셨죠. 오순절 날. 성령께서 나오실 때 주님께서 오순절 날 미리 이야기를 했어요.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내가 다른 보혜사를 보낼 텐데” 그 다른 보혜사가 하는 기능이 뭐라 했습니까? 책망이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같은 이야기죠. 사실은 =로 다 같은 겁니다. 죄=의=심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할 때 자기 딴아 이분은 죄인이고 심판하는 본인은 의롭다 해서 그들이 심판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인간의 심판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 누구다? 바로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해요. 신학에서는. 주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은 개개인마다 다양성이지만 객관성은 개개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부 다 하나로 묶어버리는 공통점을 이야기하죠. 객관적 사역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책망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뭐였다? 죄에 대해서 우리는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죄를 이렇게, 이렇게 이바구 했습니다. 한 죄, 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했던 의, 심판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심판하려고 했던 죄, 심판에서 제일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심판한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용서했잖아요. 용서를 했는데 누가 용납을 안 해요? 본인이 본인을 용납을 안 해요. ‘이 바보야, 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서 되겠느냐, 그런 생각을 갖다니 이 나쁜 놈아.’ 매일 지가 지보고 자꾸 쥐 박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님 어떻습니까? 제가 착하게 살려고 애는 쓰고 있죠?’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그게 주님께 귀염 받는 게 아니고 주님을 화나게 만들죠.
니가 니를 쥐 박는 그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너가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너를 용서했다는 말이죠. 그게 너보고 용서한 것이 아니고 너의 그 자리, 그 자리가 주의 이름의 자리가 너의 이름을 교체해서 들어간 자리거든요. 그 교체해 간 자리에 꼭 고 3이 서울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고3 교뵥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아요. 총장이 부릅니다. ‘니 도대체 학교가 어느 학교야? 고등학생이야? 대학생이야?’ ‘대학생입니다.’ ‘그런데 교복을 왜 입나?’ ‘이게 교복이 옷이 맞네요.’
어떤 나이 90이 넘은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꿈이 군대 빠따 맞는 거래요. 이건 구라죠. 90되면 군대도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 군에 갔다 온 남자들이 나이 70 넘어도 80이 돼도 그 악몽에 시달립니다. 이미 제대를 했잖아요. 제대했는데 몸은 어디서 당깁니까? 계속 군데에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군대 이야기가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평생 갑니다.
그 잡아당기는 습성이 뭡니까? 선악적인 거. 요 못된 놈, 예수 믿고 은혜 받아놓고 왜 나쁜 짓을 해.‘ 자기가 자기를 자꾸 때려요. 지가 벌주고. 교회 늦게 왔다고 헌금 만 원 더하고, 성가대 빠졌다고 2만원 더하고, 그렇게 하면 지 마음이 좀 약간 위로가 되고, 뭔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저는 교회 일찍 나온 교인들 보면 ’무슨 일 있나? 평소에 하던 대로 하지, 11시 15분에 나오지, 뭐 하러 11시 맞춰서 나오지? 우리교인들은 11시 10분, 20분에 옵니다. 설교 들으려 하면 와요. 앞에 몇 사람 오지도 않았어요. 저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제가 지도자가 아니잖아요.
지도자가 누가 지도자입니까? 마태복음 23장, 그리스도만이 지도자기 때문에 나는 내 본분만 할 뿐이지,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냥 가르치는 게 아니고 친히 가르치기 때문에 제 3자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끼어들면 이건 교주입니다. 끼어들면 그건 이단 이예요. 나를 거쳐서 구원 받아라 이 소리거든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니까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나는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 진 적이 있다? 없다? 사도바울 본인이 진적이 없대요. 이 만희 씨는 자기가 뭔데 나섭니까? 보혜사 되려면 누가 보혜사 돼야 됩니까? 사도바울 본인이 보혜사 돼야 돼요. 그러니 일반 교회들도 교주를 위해 속한 사람과 그냥 곧 죽고 싶어서 환장한 봉사하는 사람과 구분 좀 해야 돼요.
지금 문제 아직 해결 안 됐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죠. 그러면 다시 이야기합시다. 부부가 같이 잠을 자도 이쪽 꿈이 이쪽 꿈으로 넘어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으셔도 내 죄는 그대로 있어요. 부활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단절돼 있어요. 단절돼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죄인도 아닌데 죄인으로서 죽으셨죠. 죽으셨을 때 주께서 다 이뤘다 했거든요.
그럼 이 죽음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다 이루었다‘ 가 들어있죠. 그러면 유월절 날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집집마다 케이크 돌렸습니까? 봉투 돌렸습니까? 뭐 했어요? 집집마다 뭐 공통적으로 돌린 게 있죠. 자,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해봅시다. 어떤 집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그 사람이 죽음의 사자로부터 벗어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문제, 문설주에 피를 바를 때 피를 한 겹 발랐습니까? 두 겹 발랐습니까? 어떤 사람이 두 겹 발랐다. 세 겹 발랐어요? 안 그러면 한 겹 바르고 두 겹 발랐습니까? 피를 어떻게 발랐기에 구원 받았죠? 피를 바르는데 문설주에 피가 튀어서 만약에 피가 바르다가 분주하다 보니까 옆에까지 튀었다. 그러면 그 사람 구원 못 받습니까?
제가 낸 질문의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의 기능성이 들어가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죠. 여러분 지저스를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예수란 한글을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상관없죠. 그렇다면 예수라는 것은 한국말로 번역된 거고 지저스는 영어 아닙니까? 그러면 영어로 믿어야 되겠어요? 아니죠.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그 어떤 틀, 그 시스템, 제도를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없다? 없죠.
그러면 없다는 말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렇게 믿어야 돼, 누굴 모델로 삼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그 사람이 모델 되면 모두 그 사람 기능을 따라하면 그만이니까. ‘이봐, 3번을 해야 돼, 피를 이렇게 안팎으로 3번을 하라니까.’ 이러면 만약에 2번 한 사람은 탈락이죠. 3번 하려고 하니까 피가 모자라서 2번 바른 사람은 탈락 이예요.
그렇다면 뭐냐, 우리의 기능이, 우리의 어떤 행함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구원은 피를 발랐다는 그 의미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피를 어떻게 바르던 간에 피를 바르는 그러한 일을 시키신 거죠. 그러면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게 해서 구원하죠.
그것을 에베소 2장 8절에서는 이 믿음은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죠. 그럼 너희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면 피는 무엇과 비교해야 됩니까? 나에게서 나온 믿음을 우리는 잊어야 돼요? 잊지 말아야 돼요? 잊지 말아야죠. 나에게서 나온 믿음을 잊지 말아야 되죠. 왜냐 하면 우리는 고 3이 대학 합격해도 고 3의 흉내를 내거든요. 군에 제대해도 맨날 꿈속에 군대 꿈을 꾸잖아요.
그러니까 새롭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무엇을 잊으면 안 됩니까? 옛날 식 같으면 이런 식으로 나는 예수 믿었고, 이런 식으로 기도했고, 이런 식으로 했다는 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그걸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매일같이 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성공공부 참석했다. 7시 반이다. 그런데 오늘 7시 40분에 왔다. 성경공부는 그런 것 없으니까 놔두고, 오늘 교회 11시 예배인데 10년 동안 새벽기도 한번 안 빠진 인간이 오늘 오다가 차가 펑크 나서 11시 반에 왔다. ‘이번 주는 내가 벌 받을 각오해야 돼, 나란 인간은 안 돼, 이렇게 하나님이 지키라 했는데 펑크 난 것 어쩔 수 없어. 봐줘야 되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이 느껴지면서 하나님,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그 생각은 이미 잠재의식 속에 뭐가 포함돼 있다? 이건 주님의 구원의 바탕에 뭐를 집어넣겠다? 내가 고 3 때 하던 더러운 버릇을 이미 은연중에 그걸 섞어서 마치 그걸 성령이 주신 선물인 믿음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해 왔다는 것을 그 순간에 드러나게 합니다.
그 순간을 뭐라 하느냐 하면 사건입니다. 요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길게 서론을 했습니다. 그 순간이 사건 이예요. 무슨 사건? 믿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야, 내 식대로 믿음을 유지한다는 이게 그야말로 내 식이구나. 내 이름에서 나온 기능에 불과한 거구나, 이런 식으로 서로 위로하고, 내가 믿음 있다는 거, 오늘밤 죽어도, 주께서 오셔도 천당 갈 거야.’ 라고 내 나름대로 근거를 이렇게 자꾸 수집하고자 하는 그 작당, 그것이 내속에 주의 은혜로 믿습니다. 말만 수천 번 했지, 사실은 약간만 껍데기 벗겨버리면 ‘주여 내가 섭섭지 않게 헌금 했잖아요. 십일조도 다 했잖아요. 다른 사람 십일조 안 해도 나는 했잖아요. 그래서 감사헌금도 종종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섭섭하죠.’ 이런 요소들이 고3 때 했던, 예수 믿기 전에 했던 행동이 그대로 깔려있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면 이제 결론 나왔어요. 그러면 피가 뭡니까? 피를 2번 바르느냐, 3번 바르느냐, 가 아니라 일괄적으로 피를 바라보게 하죠. 자, 문설주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럼 누가 봅니까? 죽음의 천사가 와서 피를 보죠. 죽음의 천사만 봐서는 안 된다. 누가 봐야 돼요? 그 피를 발랐던 그 사람도 자기가 양 잡을 때 자기 솜씨, 기능을 보면 안 되고 어렇게 잡았던 안 드는 칼로 잡았던 간에 일단 피를 내서 서로가 시선이 다 어디에 모여야 됩니까? 피에 모이죠. 그걸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라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했죠.
사도바울이 맨날 피, 피, 피만 이야기했습니까? 부활도 이야기했죠. 성령 은사 이야기했죠. 헌금 이야기했죠. 너희들은 한가할 때 모였다가 예루살렘 헌금 하자 했죠. 그 다음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 했죠. 무시로 기도하라 했죠. 남편 사랑하기를 어떻게 하라 아내 사랑하기를 어떻게 사랑하라 이야기 다 했잖아요. 아버지는 주 안에서 사랑하라 다 이야기했잖아요. 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본인은 뭐라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그 모든 것을 다 하면서도 자기 행한 것에다 마지막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뭡니까? 여기서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한? 십자가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나는 전도했고, 헌금 이야기할 때도 헌금하면 구원받습니다, 복 받는다, 가 아니라 헌금함으로써 여러분들이 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헌금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피로 구원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죠. 모든 것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보면 주께서 죽으시던 날 밤에 떡을 떼시며 “내가 올 때까지 예수님 죽으심을 기념하게 하라.” 성령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우리가 중간에 있으면 바께쓰를 가지고 주의 피를 팍 부어버리면 우리는 평소에 밥도 먹고 오늘도 회사 운영도 하는데 머리가 뭐가 부어집니까? 피가 옴팍 덮을 때 오늘 회사 운영한 걸 믿고 구원받습니까? 덮어진 피 믿고 구원받습니까? 피보고 구원받는 거예요.
내기 기도해서 병이 얼마나 나았고 내가 기도해서 온 식구 다 전도했고 초대교회 일어났던 떡을 떼고 병고치고 독을 먹어도 상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기적, 그 모든 기적은 예수님이 한 자로 이야기했죠.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오직 요나의 기적, 뭡니까? 십자가뿐인데 고 3 시절이 그리워서 이걸 병원에 가서 나을까, 기도해서 나을까, 한번 실험을 해볼까.
실험을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악마에게서 나왔죠. 어디서 했습니까? 악마가 예수님 보고 뭐라 했습니까? 니가 말씀대로 산다니까 말씀대로 사나 한번 보자. 뛰어내려 봐라, 그러면 시편 91편에 나오죠. 천사가 와서 니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 답변은 뭐였습니까? “확 뛰어내려볼까.” 하지 않고 실험인데, 주님이 진짜 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누굴 상대로 실험한다? 주님을 상대로 실험해 보는 거예요.
실험해서 결과가 좋게 나오면 나 예수 믿고 오늘밤 죽어도 천당 가는 것이고, 기도해서 안 되면 나는 오늘밤 죽으면 지옥 가는 것이고, 그런 마음을 누가 주었습니까? 광야에서 누가 심어줬습니까? 악마가 심어줬죠. 왜 심어줬습니까? 뭘 보지 못하도록? 우리 머릿속에 뒤집어 쓴 십자가 피! 주의 이름에서 나온 기능을 못 보고 그걸 어디로 환원시킵니까? 내가 뭘 했다. 니는 얼마나 했지? 교회 나가서 지 신앙 자랑 질 할 수 있는 니 솜씨, 니 기도 얼마나 했지? 나 40일, 나 50일, 뭔가 내 자존심, 내 이름의 명예를 내세울 그런 것들과의 경쟁과 비교,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교회가 저쪽 교회와 비교, 너 집단 몇 명이야? 교인 몇 명이야. 헌금 얼마 나와? 이 모든 것이 헌금이 많이 나오면 교인 수가 많으니까 이건 실험을 해봐서 이건 아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쪽이고 저쪽에는 안 있다는 거죠.
그러면 그런 식으로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곳에는 불신 세계밖에 없어요. 왜, 불신자가 더 많으니까. 바로 사도바울이 전해준 십자가 복음, 이 복음만이 일괄적으로 어린양의 피처럼 우리에게 다 보여줄 때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는 딱 피 흘리신 분이 교회를 이렇게 교회는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마귀 이야기했잖아요. 왜 마귀를 자꾸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마귀가 노리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그만 쳐다보고, 이젠 몇 번 쳐다봤으니까 이제 니 이름, 주의 이름 덕분에 니 이름도 좀 크게 빛내서, 니 빛내면 주의 영광이고, 이렇게 전하면 하늘나라 확장되고 좋지 않으냐, 그러니까 니 이름도 좀 챙기라는 우리의 본성에 부합되는 속삭임이 주어져요.
그러나 우리의 주의 이름은 항상 어떤 일을 통하든지 바로 우리가 딴 데 날 쳐다보고 싶어 하는 본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한 주님의 전략입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