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간의 깊이)130704-23강a -이 근호 목사
230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결코 바벨론 제국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다. 도리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역사적 제국이다. 그런데 왜 70년 포로기간이 지나면 자신들은 앞으로 이 역사적 제국이 아닌 비역사적 제국에 복속되어 지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 나라와 관련된 채 이 지상에서 지혜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지혜 자잖아요. 그럼 지혜 자가 살 나라가 지혜자만 모이는 집합한 나라가 돼야 되는데 그 나라는 이 지구상, 역사상에 없어요. 없기 때문에 지혜 자는 역사상에 있는 나라한테 도움을 받으면서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문장이. 보호는 받아요, 이 나라, 국가가 인간을 보호하잖아요. 하지만 지혜 자, 요즘으로 말하면 성도, 성도는 이 대한민국한테 보호는 받지만 거기서 분류가 돼서 지혜 자나 성도끼리만 모인 나라에 따로 거기에 나중에 흡수당해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뽑아내는 작업, 진공청소기처럼 뽑아내는 작업이 바로 다니엘한테 70이레라는 계시로 주어진 겁니다.
방금 한 것은 별로 어렵지 않죠. 그러면 이제 안 오신 분 있어서 어려운 것부터 한번 후딱 해봅시다. 질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없죠. 인간이 인간을 낳죠. 낳는다는 말은 그 자식에 대한 모델을 내가 설계하거나 결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애는 코가 두 개 있는 애를 만들어봐야지, 낳아봐야지.’ 이게 안 되거든요. 낳는다는 것은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의 매개가 될 뿐, 내가 어떻게 자식에 대해서 수습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냥 쑥 빠지는 거니까.
그러면 인간은 누가 만들었어요? 지금 이 문제가 이 세상 어느 인간도 답변할 인간이 없다니까. 인간이 왜 뒤통수에 코가 없고 왜 앞에 코가 있는데요? 누가 왜 코가 앞에 있도록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들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는 것은 이건 답변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답변 없는 쪽을 전부 다 뭉둥거려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모르겠다는 뜻 이예요. 다른 말로 하면 왜 내가 이렇게 귀가 요렇게 안 달리고 이렇게 달려있는지, 나는 요렇게 달린 사람이고 싶은데 난 이렇게 달려있는지, 왜 인간을 설계할 때 인간을 어떻게 요렇게 설계하도록 해서 요렇게 만들어 났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원숭이 엉덩이는 벌건데 왜 우리는 왜 안 벌거냐. 이 말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른 동물과 비교한 대목이 나와요. 거기서 배필 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적정한 배필 자가 없죠. 그래서 나중에 아담 몸에서 또 하나의 인간을 창조해내시잖아요. 그 아담 몸에서 하와가 나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한 힌트를 여기다가 담아놓은 겁니다. 아담이 기존에 이미 나와 있는 제품들, 원숭이, 코끼리에서 자기가 살고 싶은 여인, 당기는 여인은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없다.’가 돼요. ‘없다.‘를 먼저 하나님께서 분명히 해요. 있나? 없나? 없습니다. 없지? 그러면 나중에 아내가 생기잖아요. 있잖아요. 있으면 없다 ➩ 있다가 있을 때 아담이 이 없다, 에서 있다, 로 넘어가는 여기에 아담이 여기서 자기가 어떤 권한이나 자기 의견을 손들고 ’제 아내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여가 안 되죠.
결국은 관여가 안 된다는 말은 인간은 뭐냐, 인간은 질의, 질문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있음에 대해서! 심지어 그 있음에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내가있음에, ‘나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왜 나는 남자입니까? 나는 왜 여자입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하나님께 우리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은 뭐냐 하면 신은 결국 이거예요. 천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가 신이 아니라 용납 안 됨, 그런데 누구는? 인간으로서는 용납 안 되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그분, ‘왜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그분, 그분 앞에 서면 나는 욥처럼 입이 100개라도 할 말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 짓게 만들고 망하게 했더라도 그것조차도 ‘왜 이렇게 죄 짓게 했습니까? 망하게 했습니까?‘란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그 어떤 분이 바로 하나님이세요. 이게 뭐냐 지혜입니다. 이게 다니엘이 받았던 지혜에요.
그럼 문제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또는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거기에 대한 것을 인간이 개입 못 하죠. 인간이 개입을 못하면 이 없다, 에서 있다. 에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지혜가 들어가죠. 요 지혜를 시간적인 표현으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70이레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주제가 뭐냐, 70이레에 담긴 의미 아닙니까? 70이레가 뭐냐, 이건데 없다, 에서 있다, 로 넘어가는데 있어서는 인간의 지혜는 차단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가는데 하나님의 지혜 중에 지혜를 표현하는 게 뭐냐 하면 70이레, 라고 표현한 거예요.
70이레의 그 핵심은 이미 우리는 압니다.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 이예요. 70이레는 며칠이냐가 아니라 몇 년이냐가 아니라 70이레 정답은 누구다? 예수님이 70이레에요. 예수님이 70이레라 하면 논리가 너무 뛰어버렸어요. 연결이 안 되잖아요. 논리가 너무 뛰니까, 우리가 없어야 되는데 현재 없어야 되는데 우리가 있잖아요. 그러면 없는 사람이 ‘날 왜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라고 할 자격은 못 되죠. 왜 애초부터 없으니까. 없는 인간이 입 다물고 있어. 하면 할 말 없어요. 없었으니까.
있어 놓고 ‘왜 이렇게 했습니까?’ 말은 안 돼요. 그러면 없다, 에서 있다, 사이에는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인간이 개입이 차단됐는데 어쨌든 없는데서 있었으니까 인간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누가 개입한 건 분명하잖아요. 그럼 누가 개입했는가? 이것이 보통 하나님이 개입했다. 이러면 그건 하나 마라 소리고, 그게 뭐냐 다니엘에 보면 지혜가 개입된 거예요.
지혜가 개입되게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현재 다니엘 세 친구는 현재 바벨론 사람은 아니잖아요. 바벨론 나라는 역사적 나라잖아요.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는 어느 나라라 했습니까? 처음에 역사적 나라가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죠. 그러면 그 나라는 이 지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 나라가 없다는 말은 그 나라에 소속된 다니엘도 이 세상에서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가 그 천국에 들어가는 이런 나라가 되려면 여기서 다니엘 개인이 내세우는 어떤 의견이나 사상이나 협력 같은 것은 빠져야 되겠죠. 그럼 순전히 하나님의 지혜만이 현재 다니엘을 천국에 집어넣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뭐가 주어졌습니까? 70이레 계시가 주어졌잖아요. 그럼 70이레 주어진 이 계시는 우리는 정답을 알죠. 예수님이라는 걸 아는데, 지금 예수님이 어떻게 나오느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지워버리자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남는 게 뭐냐, 70이레 밖에 없죠. 70이레 밖에 없다면 방금 이야기한 바벨론, 묵시의 나라 천국이죠. 바벨론, 천국, 다니엘과 세 친구, 이 전체를 표현할 때 뭐로 바꾸느냐 하면 70이레니까 이건 시간적 표현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시간적 표현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 이 말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귀가 이렇게 달려있는데 내 생각에는 귀가 요렇게 달려있으면 좋겠다는 고런 아이디어로서 인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왜 귀가 요렇게 안 달리고 왜 귀가 이렇게 달렸는가, 이유가 뭡니까?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죠. 요럴 수도 있고 사각형일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인데 왜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서 아까 처음 질문이 뭡니까?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죠. 낳을 수는 있지만 창조는 된다? 안 된다? 안 되죠. 왜 창조는 본이 있어야 되고 설계도면이 있어야 되죠. 설계 도면을 우리 같으면 귀가 요렇게 달리도록 하면 애가 요렇게 나옵니까? 안 되죠.
결국 인간은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낳은 도구는 될 수 있지만 창조는 안 되죠. 그럼 인간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그건 인간은 그런 질문할 자격도 없고 거기에 대한 해답도 알 도리가 없죠.
어쨌든 있다는 게 중요한데 이 있음에 우선해서 먼저 있다는 게 뭐냐, 지혜가 먼저 있고 지혜에 합당한 지혜인, 요새 말하면 성도가 있게 되는 겁니다. 요거는 이해가 되시겠죠? 다니엘이 천국 가고 싶다,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왜냐 하면 다니엘은 바벨론 사람이거든요. 이스라엘 사람이고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기 때문에 천국이라 하는 것은, 천국 설계도를 누가 했습니까? 다니엘이 만들었습니까? 제 논리를 잘 따라오세요. 나라는 인간이 내가 설계 안 했잖아요. 그런데 있잖아요. 내가 설계 안 해도 있잖아요. 그럼 천국 없을 때 누가 설계 했습니까? 우리가 안 했잖아요. 그런데 천국은 있잖아요. 그렇다면 천국 있는 본설계도는 우리 선에서 이미 떠나버렸다 이 말이죠. 떠나버린 것을 다니엘에서는 그걸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 지혜가 표현을 어떻게 봤다? 70이레로 봤다 이 말이죠. 이제 70이레 파악을 해야 되는데 파헤쳐 보면 천국은 70이레 주인공이 천국을 만들었고 그 방법과 원리와 그 모든 규칙과 질서도 70이레 속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 숨어있는 것을 이제 밝혀보자 이 말 이예요.
그런데 70이레라 하는 것은 시간적 표현이다 말이죠. 어떻게 시간적 표현에서 존재가 나오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시간적 표현, 오늘 며칠이지? 오늘 7월 4일, 아! 7월 4일 너무너무 맛있다. 말이 안 된다니까. 7월 4일이 왜 맛있어요? 7월 4일은 7월 4일이지, 그게 음식도 아니고 왜 맛있어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70이레라 하는 것은 70 ☓ 이레= 70이레다. 그게 왜 예수님인지,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란 어떤 존재를 말하고, 70이레는 시간적 표현인데, 어떻게 시간적 표현이 존재와 어떻게 등식(=)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모든 70이레 해석은 예수님이라고 안 나오고 70을 인간들이 이미 아는 방법으로 하는 거예요. 70☓7=490일이라 해서 이걸 역사 속에서 490년 자료를 만들어요. 자료를 만들어서 요리 재보고, 요리 재보고, 요리 재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다윗처럼 사람보고 침대 만드는 게 아니고 침대 만들어 놓고 사람이 만약에 키가 크면 발목을 잘라버리고, 키가 안 되면 잡아당겨서 키를 맞추고, 이렇게 죽인 거예요. 그건 사람 죽이는 일종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그런 잔인한 짓을 했어요. 다윗이 그렇게 잔인한 짓을 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해요.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주 잔인하게 저주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 왜 언약 밖이 잔인하냐 하면 언약 밖에 있으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잔인하다는 말도 성립이 안 돼요. 돌멩이 보고 찼다고 해서 돌멩이보고 잔인하게 군다, 소리 안 하잖아요. 언약 밖에는 인간이 아닙니다.
두 번째 아담과 연관되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취급을 안 해요.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언약에서 살아야 사는 거고, 언약 밖에서 사는 이건 죽은 걸로 간주합니다. 언약 안에 있을 때만 있음으로 간주하고 언약 밖에 있는 것은 있으나 마라 그건 없는 걸로 취급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있음을 증언하지 못하면 그건 영원한 지옥에서 주님한테 벌 받았다는 식으로만 존재해야 될 운명입니다. 성경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70이레에서 시간을 예수님으로 할 때는 어떻게 논리가 이어지는가, 잇는 방법이 뭐냐, 잇는 방법을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문제만 던져놓고 해답을 안 주면 안 되잖아요. 늦게 오셨으니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다니엘 세 친구는 바벨론 제국에 보호는 받지만 바벨론 제국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죠. 그럼 다니엘 세 친구는 어디에 소속돼 있습니까? 지금 없는 나라에요. 지금은 없는데 장차 올 나라에 소속돼 있잖아요. 그렇죠?
그럼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보호한다는 것이 밥이나 먹여주는 게 보호하는 게 아니고, 바벨론 제국에서 싹이 나와야 돼요.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올라오는 게 지혜라는 거, 자꾸 제가 지혜라는 말을 하니까 ‘목사님, 다니엘에서 왜 지혜라는 말을 강조하느냐.’ 하는데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잖아요. 꿈꿀 때 누굴 찾습니까? 야, 여기 지혜로운 자 없나? 똑똑한 자를 찾는 게 아니고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 찾을 때 등장한 사람이 누굽니까? 다니엘이잖아요. 이건 마치 바로 때 요셉과 똑같은 거예요. 다니엘이 똑똑해서 아이큐 높아서 안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려주니까 아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다니엘은 누가 봐도 바벨론 제국의 관료이고 고급 관원 이예요. 하지만 하나님 안목에서 보면 니는 바벨론 제국과 함께 멸망할 짐승의 나라와 멸망할 그런 구성원은 아닌 거예요. 내가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뽑아낼 때 그 뽑아내는 방식이 바로 그게 지혜라면 결국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갈 나라는 어느 나라다? 지혜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지혜의 나라를 70이레로 표현한 거예요. 지혜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구성원은 어떻게 되고 조직은 어떻게 되고 주인공은 누구며 언제 오며 그게 올 때 주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며 이 모든 것이 70이레라는 시간적 표현 안에 이미 포함돼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겹쳐져 있는 그러한 것을 바게트라 합니까? 빵이 여러 겹으로 돼 있는데 페스츄리를 그걸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보려고 하는 겁니다. 벗기면 또 튀어나오고 또 나오니까 그런 식으로 중첩된 것을 벗겨보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언약적인 내용이 풀풀 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70이레와 그리고 예수님 사이에 (70이레=예수님)이 되기 위해서 70이레가 언약으로 넘어가서 예수님한테 구름다리처럼 언약으로 전달돼야 됩니다. 70이레와 언약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맹세가 어느 나라를 나타나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유발시켰죠. 애굽에 있던 나라, 나라가 없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투입되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겼습니다. 그 나라의 모든 움직임은 언약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만약에 히브리인들이 단지 애굽 나라의 압제가 고통스럽다면 이스라엘 나라가 그 나라에서 구태여 나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올 필요가 없죠. 차라리 차기 대통령으로 모세를 그 다음 바로 왕으로 등극시키면 이건 히브리 인들은 휘 바람 불죠. 압제와 서러움에서 이제는 해방되어서 이 나라를 누가 접수한다? 우리 히브리인들이 접수했으니까 이제 만만세 부르면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압제와 한 맺힘을 생각한다면.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한 맺힘에 대해서 절대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한 맺힘을 이용을 해서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뚝 끊게는 만들지만 그렇게 하시는 동기는 자기 백성에게도 숨겨져 있는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 이예요. 주의 이름이 그들을 친히 강제로 끌고 가야 비로소 그들은 점점 눈이 열려서 ‘아유, 우리가 생각지도 않는 엉뚱한 나라로 끌려가는구나.’ 라고 알지, 미리 짐작해서 알아채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사기 알죠? 사사기에서 사사들이 등장하잖아요. 이거는 우후죽순으로 등장해요. 사사가 하나 끝나면 등장하는 게 아니고 사사기는 일종의 의병 같아요. 저쪽에서 한번 터지면 이쪽에서 터지고 각 지파마다 의로운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사기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사기에서 이렇게 압제하는 이방나라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용병을 일으키는데 사사기 특징이 목적이 없어요. 이렇게 우리가 해방했으니까 두 번 다시 타락하지 않도록 확실한 방침을 정하자, 하는 이런 게 없어요.
그들이 고통을 당하매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줬다. 그래서 사사가 있을 동안에는 태평했더라. 그런데 사사가 죽고 난 뒤에 그들은 다시 바알을 섬겼다.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어떤 대비책, 방비책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 같으면 안 그렇잖아요. 어떻게 대책이 안 세워진다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범죄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강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공간의 깊이’라고 하는 거예요. 원근법이라는 거 아시죠? 2차적 평면인데 화면은 3차원적으로 깊이가 있는 것, 지오토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태리의 르네상스 이전에 지오토란 이런 사람은 최초의 원근법을 창안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그린 이태리의 르네상스 그림을 보면 공간의 깊이를 주었습니다. 점점 더 사실적으로 그렸거든요.
공간의 깊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막상 여기서 보면 별로 안 보이는데 현장에 가보면 세상에 주변에 이런 환경, 이런 환경이 있구나, 하는 걸 아는 거예요. 그냥 문에서 보면 그냥 밝음인데 들어와서 보면 전등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걸 알잖아요. 막상 들어와 보면 나름대로의 다양성과 깊이가 새롭게 부각되잖아요.
사사기에서 계속해서 공간의 깊이를 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죄를 지어줘야 돼요. 죄를 지어서 결국에는 그들 입에서 ‘우리도 왕이 필요합니다. 왕 없으니까 맨날 똑같이 반복하니까 우리는 왕만 있으면 우리도 안정되겠습니다.’라는 말, 그런 자기도 모르는 본심이 그게 나와 줘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왕을 주는 언약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게 접촉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사울 같은 왕과 ‘사울은 아니야,’ 하고 쳐부수는 준비된 하나님의 숨겨진 하나님의 왕, 누굽니까? 소년 다윗.
질문: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잖아요? 왕을 세우시는 것을 원치 않지만 왕이라는 표현은 이미 준비된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들이 왕을 원하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아직까지 자기들이 뭘 원하는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준비된 환경과 사사기처럼 반복할 때마다 점점 더 죄가 깊어지는데(제 사사기 강의에 나와요.) 그 깊이가 삽을 가지고 점점 더 죄의 깊이가, 공간의 깊이가 더욱 더 많이 파들어 갑니다. 나중에는 베냐민 자파까지 작살납니다. 지파 하나까지 없어도 괜찮다 하는 식으로 점점 더 죄가 깊이를 더하면서 결국은 그 깊이에서 만난 게 뭐냐, 하나님의 왕 됨을 싫어하는 어두운 힘이 벌써 이스라엘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복돼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과 진짜 왕이 이 지상에서 마주칠 때 진짜 준비 된 왕이 얼마나 수난을 당하는지, 얼마나 핍박받고 무시당하는지를 이쪽에 있는 왕 같은 어두움과 대비하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제가 공간의 깊이라고 한 겁니다. 그걸 표현할 때 언약을 가지고 투입하면서 역사적으로 정립해 나가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언약 이야기했는데 70이레에서 언약을 하면서 언약대로 하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있어야 됩니다. 있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70이레 나올 때는 있는 나라가 뭐가 되느냐, 멸망했으니까 없죠. 없고 바벨론 나라에, 짐승의 나라에 흡수 통합되죠.
어제 수요일 날 제가 말했잖아요. 음녀, 다른 민족은 다 같이 우상을 섬겨도 음녀라는 소리를 안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섬기니까 대번에 하나님께서 ‘에이, 음탕한 여인, 음행한 여인.’ 이라고 표현한 것은 음녀라고 표현하면서 음녀라고 표현하면서 음녀에 대한 합당한 모든 징벌과 저주를 먼저 누구한테 쏟아 붓는다?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음녀가 나중에 어디로 발산되느냐, 온 지구상 모든 나라가 음녀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때 온 세상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그것을 미리 이스라엘 안에서 미리 맛보여주는 이것이 뭐냐, 언약 적 취지다 이 말입니다.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미리 맛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 심정을. 음행한 여인에게 나는 이렇게 무섭게 군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음녀라는 개념 규정과 더불어서 나라가 산산조각, 수류탄이 구슬 안에 터지면 알이 날라 가서 사람들이 맞아 죽잖아요. 완전히 나라가 폭발해 버립니다. 용광로 터지듯이. 폭발해 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징벌, 그것도 남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 백성을 그렇게 만들 때, 이 모습은 장차 온 세계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온 나라가 음행이고 음녀죠. 음행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 포도주를 거절할 사람이 아무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건 음녀가 주기 때문에. 음녀가 주는 포도주를 안마시게 되면 그건 그 나라의 소속이 안 돼요.
직장인들하고 노래방에 가서 지가 노래 안 부른다고 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오기는 왜 왔습니까? 집에 일찍 가지. ‘난 노래 못 해요.’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이마에 넥타이 묶고 소주병에 숟가락 넣어서 마이크 삼고 템버린으로 훌라~훌라 춤 한번 추고 할 때 ‘나 노래 못해요.’ 하면서 찬송가 부르면 분위기 다 깨지잖아요. 음녀가 주는 잔을 안 마실 위인이 없어요. 다 마시는데 중요한 것은 다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자본주의 이 세상이 왜 음녀냐 하는 거예요. 그게 더 중요한 문제에요. ‘난 안 해야지.’ 하는데 지가 뭘 알아야 안 하지요. 지가 뭔지도 모르는데 아는 척 하면서 ‘나는 이건 안 해야지.’ ‘뭘 안 하는데?’ ‘몰라.’ 이러면 안 되잖아요.
이 세상 자체를 음녀를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음녀라고 한 겁니다. 그때 그게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언약이야 말로 그야말로 엑스레이 촬영기, 단층 촬영기, 모든 내막이 다 드러나요. 예수의 십자가가 뭡니까? 모든 인간은 이미 다 죽은 것이라고 돼 있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라. 십자가가 엑스레이 사진과 같아서 우리 모든 본색을 다 드러내잖아요.
이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폭발해 버립니다. 폭발하고 난 뒤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주어진 계시가 뭐냐, 70이레잖아요. 70이레니까 이건 뭐냐 하면 70☓이레거든요. 더하기는 양으로 표현되지만 곱하기는 질로 표현돼요. 원래 더하기 곱하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기하학에서 나왔습니다. ☐ 하나 + ☐, 그럼 이걸 기하학으로 표현하면 요 덩어리가 합해서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곱하기라 하는 것은 ☐+☐ 가 아니고 곱하기는 이렇게 되거든요. 사각형에서 면적을 낼 때 (가로) 3☓ 2 (세로)=6이잖아요. 그런데 더하기는 선적으로 이렇게 평행으로 나가지만 곱하기는 그 전체를 두고 이걸 면적으로 나타내고, 선은 1차원적이지만 면적은 평면이니까 2차원이죠. 차원을 달리애요. 전선 안에 개미가 있다면 개미가 요기 1마리, 요기 2마리 요기 3마리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개미가 흩어져 있을 때는 더하기가 아니고 곱하기를 해야 돼요. 곱하기 6마리, 이거는 2마리,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70이레는 이레가 70번이나 더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레 자체에 담겨있는 내용을 70이라는 걸로 표현을 해준다. 쏘아댄다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말 어렵게 하면 어렵게 한 걸로 무시를 받을 수 있는데 쉽게 하면, 제가 지난번에 했잖아요. 권사님께서 내가 환갑이 됐다고 남방 하나 사줬다고 했죠? 사실 남방만 사준 게 아니고 요 티도 사주셨어요. 두 개 사주셨는데 그 다음에 요거 받으려면 60년 기다려야 돼요. 그럴 때는 뭐냐 하면 60년마다 오는 텀 이예요.
그런데 70이레는 62+7+1이잖아요. 요 1이레를 중축으로 1이레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년 6월 달에 요 티를 입어버리면 전에 준 게 60년 만에 준 게 아니고 내년에 내가 또 이 티를 입으면 이게 1년마다 준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냐 1년도 아니고 60년도 아니고 이레마다 주거든요. 이레마다 준다는 말은 이레 안에 70을 규정하는 질(성질)이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70이레를 재삼 규정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모든 제사가 끝나고 죄 용서가 일어나는 요 내용을 지난 모든 인류 역사 속에 틈틈이 거기 다 이미 통치했다는 뜻입니다. 반복을 했다. 반복을!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때렸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라는 거예요. 다윗도 말합니다. ‘이건 내 전쟁이 아니고 이건 주의 이름의 전쟁이다.’ 신약에서 누가 주의 이름이죠? 예수님 아닙니까? 이건 예수님이 개입한 전쟁이지 내가 한 게 아니고 나는 목격자죠. 연극에서 지나가는 행인 1, 행인 2, 다 말이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잖아요. 그때 우연히 지나가다 베드로, 요한이 그걸 봤잖아요. ‘니가 나에게 돈을 원하는 모양인데 나는 너한테 돈은 안 준다. 너한테 줄 것은 돈이 아니고 오직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했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사람들이 ‘야, 이건 베드로, 요한의 경건이 능력이 되어서 그 능력이 그 사람한테 임해서 그 사람이 놀랍게도 걸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베드로, 요한의 말이 ‘이것은 우리의 경건의 능력이 아니고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예수님께로 난 믿음이, 능력이 저 사람을 낫게 했습니다.’ 3장 16절, 그러면 당신은 뭐요? 하니까 ‘우리는 목격자입니다.’ 하는 거예요. 목격자니까 연극으로 하면 지나가는 행인 1, 행인 2가 되는 거예요.
목격자 되는 것도 대단해요. 왜냐 하면 사람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에이, 주님이 하셨어.’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은 이게 얼마나 복 받은 거예요? ‘그 사람 부도났어. 그 사람 예수님이 부도나게 한 거야.’ 이걸 아주 쉽게 한다는 거. 이게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진짜 사단이 하나 떨어지는 능력이 대단한 능력이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그 사람 주님이 그렇게 해서 예수 믿게 하시려고 그 일을 벌였습니다.’라는 말을 아주 자신만만한 게 아니고 본인이 그걸 아니까.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인 완성 상태가 개입했을 때 그걸 62년으로 보지 말고 1년으로 보지 말고 그걸 뭐로 보자? 이레로 보자. 이레로 볼 때 이레의 반복, 1이레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단군이 2천 몇 년 같으면 이레가 3560이레냐? 그래야 되지 않느냐? 이레라는 표현자체가 시원적(始原的)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시원적 의미, 시원이라 하는 것은 태초란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묵시, 역사를 가지고 노는, 묵시의 특징은 역사를 찌른다는 겁니다. 수술할 수 있다. 역사라는 양을 질로 세 토막으로 낼 수 있는 권한이 묵시한테 있는 겁니다. 묵시의 칼로 세 토막을 나누되 그 내는 토막은 그냥 토막 잘라서 양적으로 자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때, 예수님이 이 지상에 하실 일을 인간의 전체 역사를 마치 도마처럼, 마치 샐러드 할 때 채소 마늘 다지면 긴 도마처럼 여겨서 그 도마 위에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사건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서 70이레라는 표현 속에 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 제 말입니다. 그게 내 논문의 핵심 이예요. 점점 더 이제 구체화로 들어가야 되겠죠.
70☓7=490, 가브리엘이 다니엘 보고 ‘다니엘아, 490년 되면 다시 메시아 온다.’ 이렇게 한 게 아니고 7을 뭐로 바꿨습니까? 70을 70이레로 바꾼 거예요. 이레니까 이레가 무엇이냐? 1이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가 중요하겠죠. 1이레! 1이레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1이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을 1이레라 해버리면 여기 단위 자체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면 7+62+1 할 때 7, 62, 이 모든 여기에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전부 다 개입이 된다 이 말입니다.
문제는 7과 62로 토막을 낼 때 그 토막 내는 그 토막도 예수님의 1이레로 완성한 그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중요한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토막을 내는 겁니다. 70이레가 인류사 전체냐 하는 것은 당장은 모르지만 토막을 내는 토막을 보면 이 70이레가 인류사 전체를 소급해서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인류사 전체가 어떻게 70년이냐?‘ 라고 한다면 그건 나올 논리가 없어요. 그런데 70이레를 해놓고 7과 62와 1을 토막을 내잖아요. 토막 내는데 개입한 취지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70이레가 전체적으로 전제 인류 역사를 다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토막 낼 때 토막 내는 취지가 뭐냐, 이게 제 논문에는 이렇게 돼 있거든요. 70이레 해놓고 이것을 7+62+1 해서 마치 도마에다 상어, 그걸 경상도 말로 상애, 상어를 돔배기, 톰배기, 돔배기 하나 주세요. 못 들었어요? 상어 돔배기는 주로 경상도에서 제사 음식에 들어가요. 어쨌든 이걸 상어라 하지 말고 단무지라 합시다. 단무지를 이렇게 세 토막 내잖아요. 표현을 이렇게 하지만 이게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2층으로 돼 있어요. 7이레 층, 62이레 층, 1이레 층,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거는 삼단 색깔로 된 시루떡, 이처럼 표현을 한 거예요.
그러면 7이레가 내용이 성경에 보면 성전을 다시 짓는 게 7이레죠. 이건 이스라엘 역사가 밑바닥에 깔리게 돼요. 그 다음에 62이레는 뭐였습니까? 그 지어진 성전이 완전히 작살이 나는 거예요. 누구한테? 이방민족한테 박살이 나니까 누가 승리한 거예요? 이방민족이 승리한 거예요. 이건 이방민족이 승리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이방민족들이 이유도 모르는 채 원인도 모르는 채 무조건 뭘 공격한다? 성전 자체를 공격하게 돼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공격은 요한계시록에 한두 번 나온 게 아니잖아요. 구약에 있는 소선지서 보면 전부 다 모든 게 이스라엘 공격하도록 돼 있죠. 실제로 역사책에 보면 이스라엘 공격,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지금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다윗의 나라, 솔로몬 나라가 실제로 있지 않은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왜 고고학에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고고학에 흔적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처참하게 망가졌다는, 망가져도 너무너무 망가진 거예요.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안 될 정도로. 하지만 다윗이란 그런 것은 나온 파편 조각이 나온 것에 보면 다윗이란 이름이 다른 나라 고고학 발굴에 보면 이름이 나와 있어요. 이스라엘, 유명한 하비루란 이름도 나와 있고, 있어요. 있지만 성경처럼 이렇게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는 없어요. 왜, 약소국가는 역사도 시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라 하는 것은 강자가 쓰는 강자 드라마거든요. 왜 니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기 때문에 거기에서 약자라 하는 것은 그냥 있으나 마나한 겁니다. 앗수르 그 위에 수메르 왕국 위에 제일 먼저 제국이 수르 제국, 메소포타미아 지금의 바그다드, 이라크 나라가 메소포타미아, 강사이란 뜻이거든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거기 인류 최초의 문명국가입니다. 거기서 수메르 나왔죠. 그 다음에 고 바벨론 나왔죠. 그 다음에 앗수르가 나왔는데 앗수르 제국이 1000년이 넘어요. 그러다가 60년 경에 신 바벨론 나와서 망하잖아요. 그 앗수르 제국 전문에 보면 거기에 북쪽 나라 북 이스라엘 왕이 자기한테 조공 바치고 한 것을 아예 부조 조각으로 새겨놓았어요. 그게 영국 대형 박물관에 있다고 하는 사진을 봤어요.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나라는 별 볼일 없는 나라에요. 실제로도 이스라엘 나라는 이게 무역 로 가운데 있는 게 아니고 비껴나 있기 때문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성경만 떠들고 있어요. 성경만 마치 온 세상이 이스라엘 중심인 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계시라는 것은 숨어있는 거예요. 마치 어른들이 보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토끼 잡으려고 구멍에 빠졌는데 별 희한한 세계가 다 있는 거예요. 거기 가 보니까 고양이는 사라져버렸는데 고양이 웃음은 나오고, 별 희한한 아이디어가 다 나와요.
그처럼 우연히 이렇게 언약이란 구멍에 빠져보니까 언약의 세계가 이 성경 안의 세계라. 그 구멍에 안 빠졌으면 이스라엘은 그냥 별 볼일 없는 나라인데, 역사책에 별로 안 나오는데 언약 속에 들어가니까 그 다음부터 다윗 솔로몬이 그렇게 중요하고 세상 중심은 모든 중심축은 그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런 말 하는 게 제가 참 힘들어요. 왜냐 하면 기존에 우리가 배웠던 그 개념과 너무 다르기 때문인데, 듣기만 해보세요. 세상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들이 성전과, 성전 앞에 설 때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실제로 살아있는 모세한테 직접 십계명을 넘긴 그 하나님 앞에서 저들은 언약조차 없는 저주받은 족속이었다는 것을 성전 앞에서 그들은 밝혀지고, 그것은 성전만 없애버리면 자기 나라가 진짜 대단한 나라가 되기 때문에 배후 악마에 의해서 어찌 심성이 이스라엘이 자기만 특혜를 받았다는 자기만 잘난 체 하는 그 나라를 이상하게 없애고 싶은 그러한 충동으로 주변의 나라들이 들끓었다,‘ 라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에요.
막상 본 자에게 물어보면 이스라엘? ‘뭐 있었나?’ 이렇게 되는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너희들이 성전 없애려고 환장을 했어. 환장을 했어.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나라는 성전과 맞대봄으로써 이방나라의 악마적 속성을 보여주고, 1이레는 뭐냐, 이 악마의 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없애는 이 전체가 하나고, 이것도 똑같은 길이(7이레, 62이레)로 1이레가 돼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성전을 미끼로 던져 놓고 성전 쳤다고 그걸 핑계로 해서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작살내는 분이 예수님이 예수님 되신 공생애, 그럴 때 묵시의 나라가 묵시답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렇게(층으로) 돼 있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차곡차곡 내려 보면 7+62+1도 되고 이것을 합쳐서 70이레라고 한다는 겁니다. 꼭 장난 같죠? 꼭 꾸며낸 것 같죠? 조작된 것 같고, 이러한 시작은 뭐부터 시작됐죠? 다니엘이 비록 바벨론의 고급 관료지만 결코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 짐승의 나라에 일원이 될 수 없도록 강제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줬다는 데서 이미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그 계시에 대해서 다니엘 본인이 원했다든지, 요구한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자’라고 부르면서 다니엘로 하여금 70이레 계시를 줌으로 말미암아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결국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오지도 않은 나라, 그것은 바로 인자가 구름타고 와서 만든 영원한 제국, 영원히 망하지 않는 이 바벨론 제국을 엎어놓고 돌멩이로 쳐서 태산을 만드는 그 묵시의 세계, 그 묵시의 세계가 다니엘에 담긴 내용이고 그것을 과연 다니엘의 계시가 그렇다는 걸 확정지려 오시는 분이 바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고, 십자가에서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할 때 도대체 그게 다 이루었다는 내용이 뭐냐 말이죠.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해봅시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