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격에 맞지 않는 질서(전10;5-7)이근호070218

아빠와 함께 2013. 7. 4. 11:03

 

격에 맞지 않는 질서
2007년 2월 18일                                    본문 말씀: 전도서 10:5-7

 (전 10:5)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전 10:6)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전 10:7)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이 세상의 주권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자들이라고 믿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력이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간주해야 이 세상의 정치적 움직임과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연결고리가 수립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2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연결고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정의로운 하나님에 의해서 지명된 자들이 주권자들이기에 필히 그들은 늘 정의로움만을 실행할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받은 자체로 인해 정의로움을 기대해도 좋음으로 통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정의로움의 기준이 참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맞지 않는 처지에서 인간들은 한결같이 ‘정의로운 주권자’를 찾고, 고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서 주권자의 불의함을 가지고 과연 하나님이 정의로움에 의심을 가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폐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폐단’이란 ‘이래서는 안되는데 왜 그런 일이 발생되느냐’라는 불확실성을 솔직하게 드러낸 표현입니다. 불의가 노골적으로 펼쳐지는 그 현장에 우리들이 한 가운데 놓여 있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단순히 불의함에 대해서 격분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은 뭘하시는 분이시기에 이런 불의를 방치하느냐’에 대한 은근한 불만같은 것도 감출 길이 없을 겁니다.

그냥 외부에서 관람하는 입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 불의한 세력들로 인해 큰 낭패에 직면한 당사자로서 피해를 보고 있다면 말입니다. 결국 정의로운 하나님과 불의한 세상과 잘 코드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엄연히 살아있는 마당에 불의가 큰 소리치는 것이 전혀 격에 맞지 않다는 것을 절감할 것입니다.

1930년대에 독일에 본 회퍼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소에서 죽게 됩니다. 그 사람은 말하기를, ‘미친놈이 차를 몰고 있는데 가만히 하나님께 기도만 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틀러가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평소에 사회 정의를 외치든 얼마나 많은 목사나 신부들이 그 히틀러에 반대했습니까? 반대하기는커녕 더 충성스럽게 아부하지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몰라서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모든 권세자는 하나님이 세웠기에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는 대단한 믿음 때문에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본인이 살아남는데 있어 유리한 조건만이 잠정적으로 진리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어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권자들을 세우신 것만이 정의로운 하나님의 정의로운 조치가 아니라 지금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본인들 자체도 정의로운 하나님이 세우신 정의로운 조치요 정의로운 뜻이라고 간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정의로움이란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나라에 독재자가 나타나 자신에게 직언하는 자들은 다 몰살시키고 그 대신 자기 일가친척이나 외척이나 혹은 자기에게 충성을 서약한 아부하는 자들만 등용하여 그 자리를 채울 때에 그 자리에 새로 등용된 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자=평소에 너무나 정의롭기에 권세자로 세움받았음’이라는 공식을 내세울 것이 뻔합니다. 서로가 보는 자리에서 서로 반대되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심’이 등장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지혜는 배후에 들러 친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해서 불의한 세상과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상호모순없이 연결이 가능한 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밝혀주십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인간 자체가 이미 불의한 입장에서 왜곡된 하나님의 정의를 거론한다고 말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 올라간 새에 산 밑에서 대기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우상입니다. 엉뚱한 하나님 상이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제로 벌릴 때에 마침 모세는 산에서 40일만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내려오면서 모세는 십계명이라는 돌판을 가차없이 깨트려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백성들에게 여전히 아예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 이외의 종족으로 간주하는 행위입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무서운 저주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가를 연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형제끼리 서로 찔려죽이는 형벌이 가해졌습니다.

그러고 난 뒤, 모든 생명책에 있는 자기 이름을 대신 담보로 잡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합니다. 이것은 바로 용서 받을 자들은 왜 자신이 용서 없이는 저주밖에 주어질 수가 없는 처지에 있는지 철저하게 실감해야만 하는 절차사전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용서란 자신이 죄인임을 절감하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됨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아무리 용서를 말해도 별 의미없습니다. 로마서 8:1의 말씀처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을 때, 무엇이 ‘정죄’에 해당되는 현실인지 그 현실은 실현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다 이러합니다. 만약에 홍길동, 영희, 철수가 숨졌다면, 하나하나 따로 죽음이 새삼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이미 죽음이 잠재적으로 들어있다가 죽음이 그들의 사망을 통해 현실화된 사태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이미 우리 모든 인간들은 정죄받아 죽어 마땅함을 전제로 했음을 알리는 계시입니다.

이처럼 불의한 주권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불의한 주권자가 있더라도 우리는 억울해 할 일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용서가 막히거나 제공되지 못하거나 취소되지 않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더 큰 감사와 고마움과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상식적인 정의감이 십자가 복음을 훼손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