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망치는 꾀
2007년 2월 25일 본문 말씀: 전도서 10:8-11
(전 10:8)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전 10:9)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하여 상할 것이요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
(전 10:10)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전 10:11)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상황들은 예상 밖의 실패를 당했던 경우들입니다. 즉 지혜가 없는 이들은 자기에게 손해가 오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땅이 우리 인간들에게 그저 만만한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심에 조심을 더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여전히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낭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편하게 땅을 보는 안목과 땅에 내뿜는 고유의 원리와 원칙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는 늘 사적인 계획에 갇히게 마련입니다. 땅의 세계 전체를 다 운영되는 그 원리를 알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상치도 못한 경우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안데스 산맥에 있는 어떤 사막은 평소에는 그저 삭막한 벌판일 뿐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10년마다 내리는 비를 맞게 되면 그 사막 전체에 빨간 칼렌드리아 꽃이 만개합니다. 사막이 졸지에 꽃 천지로 돌변하는 겁니다. 사람들에 눈에 띄지 않는 꽃 씨앗이 10년을 묵묵히 기다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막은 죽은 세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세계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땅 주인이 따로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땅 주인께서 언제가 철거시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땅 주인되시는 분의 운영방침이 작렬하는 그 대지를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게 되면 참으로 낯선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땅에 소리 지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땅은 인격적이 아니라고 알고 있고, 그냥 103가지의 원소로 된 무기질의 뭉치라고 판단합니다. 그 땅 위에서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아래서 위로 향하여 호소하고 있다는 겁니다. 억울한 죽음의 피를 머금은 채 말입니다. 가인이 몰랐던 것은 땅이 하나의 목격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땅은 하늘과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눈에는 텅텅 비어있는 공간으로 보이지만 땅에는 엄연히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운영원리가 곧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모른다는 것은 땅의 원리와 배치되어 살아간다는 식이 됩니다. 이것은 곧 예상밖의 패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은 결국 새 하늘과 새 땅과 교체되게 되어있습니다. 멸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사가 아닙니다. 땅의 주인님의 결심입니다.
따라서 왜 교체되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개인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해도 다 헛것이 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보면서, 사적인 사업의 ‘실수 줄이기’ 를 당부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신다면 전반적으로 실패의 인생을 사시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다양하게 사업을 벌려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업에도 근본적인 땅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사사로운 사업에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말씀을 차용해서는 안됩니다. 근본 원리와 마주쳐야 합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그것이 나옵니다. 새 땅에 정착하기 위해 노아 방주가 어느 지점에 도착합니다. 노아는 방주애서 정결한 짐승을 끄집어내어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함께 동승한 부정결한 짐승마저 구원의 혜택을 입게 됨을 말씀하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시고, 다시는 물로서는 이 새로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때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랍니다. 즉 악한 존재로 태어나도 계속 땅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인간과 상관없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축복의 근원을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땅의 원리를 모르고 감히 땅의 주인님이 함께 있는 나라를 대들었던 경우가 사무엘상 4장-6장에 걸쳐 나옵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부여잡고 그 덕으로 승리해 보겠다고 나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이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제사장은 전사했고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못한 이룬 승리를 언약궤 홀로 적진을 돌아다니면서 완수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상대방의 수호신을 꺽었다는 기념으로 자신네들의 신당에다 그 전리품을 안치했습니다. 그 신의 이름은 다곤십니다.
그런데 하루 밤 지나보니 그 다곤신상은 마치 여호와 앞에 절을 하듯이 엎어져 있었고, 손목과 머리 부분은 떨어져나갔고, 몸둥아리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독한 종기가 사람들 속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였습니다. 땅의 원리가 뭔지를 모르고 함부로 여호와를 건드린 대가가 곧 징벌이요 저주였던 것입니다.
가드라는 지방으로 다시 언약궤를 옮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그론으로 다시 옮기려니 이번에는 에그론 주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화를 자초할 일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죽기 살기로 원래 언약궤 주인이 나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블레셋 나라 당국자들은 땅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힘을 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와 희생을 원하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회개와 희생’이 이 땅에 지혜로 통하는 원립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이 땅을 지배하는 최종 원리입니다.
어떤 연극에 있는데, 1막에서는 청년들이 자신의 장래를 계획하는 장면이 나오고, 2막에서는, 그 희망이 무참하게 깨어져 버리고 절망하고 좌절한 광경을 보여주고, 마지막 3막에는 1막의 청년들이 자신들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장면을 보여즙니다. 이것은 2막과 3막이 시간적으로 역전되어 있는 보여주므로서 관객들은 인간의 희망이 얼마나 허망하게 끝난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시간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완벽하고 실수없는 인생을 산다할지라도 결국 천국의 문은 십자가 피만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인생성공입니까? 사적인 성공은 성공도 아닙니다. 희생으로 일관하는 피의 원리를 머금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이 땅을 걸어가는가를 배우고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전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치의 지혜(전10;16-20)이근호070311 (0) | 2013.07.04 |
---|---|
지혜와 예언(전10;12-15)이근호070304 (0) | 2013.07.04 |
격에 맞지 않는 질서(전10;5-7)이근호070218 (0) | 2013.07.04 |
악취(전11;1-3)이근호070211 (0) | 2013.07.04 |
잊혀진 영웅(전9;13-16)이근호070204 (0) | 2013.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