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예언
2007년 3월 4일 본문 말씀: 전도서 10:12-15
(전 10:12)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전 10:13)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전 10:14)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전 10:15)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성경은 철두철미하게 지혜자와 우매자를 구분짓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철저하게 한곳에 따로 모으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들도 철저하게 따로 모으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매가 지혜자가 한 곳에 섞이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남들로부터 ‘우매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칭 지혜자처럼 행세하고 움직이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혜자로 인정해주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지혜자라고 간주하고 싶은 것이 또한 인간들입니다. 당연히 우매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도배를 하고 나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적하고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규정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말씀을 총동원한다고 자아를 위장할 수는 있어도 자기 본성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우매자와 지혜자를 구분짓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래 일’을 들고 나옵니다.
즉 참으로 지혜자라면 자신의 장래 일을 미리 언급해보라는 겁니다. 맞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매자가 어떤 예언을 하도 장래일을 이미 장악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예언과 튀틀리는 일들을 배치시키면 결국 우매자는 그 어리석음이 들통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정 기준에 대해서 지혜자 쪽에 속하는 사람들도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이기에 자기 장래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치 앞도 대비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지혜자들도 어리석은 자들과 다를 바 없는게 아닐까요? 지혜자와 하나님과 서로 통하는 ‘예언’이란 일반적인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예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18:20-21에 보면,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전혀 장래 일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면 알 수 있는 것이 예언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는 예언’과 ‘인간이 스스로 조작해낸 예언’인지를 인간이 어떤 식으로 판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이단치고 ‘이단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지 않는 이단은 없고, 대부분의 이단들도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기 마련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과연 신약 때의 주님이 인정하시는 예언자들의 예언 내용의 핵심과 중심을 파악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이름’이 하신 일에 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 즉 하나님이 일하심의 특징은 오로지 ‘주의 이름’만을 높이는 식으로 전개되는 겁니다.
빌립보서 2:8-11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심의 일관성은 십자가 지신 그 분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사 다른 인간들과 피조물의 이름으로 하여금 그 주님의 이름 아래 굴복케하시는데 있습니다. 즉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 어떤 일을 하신다할지라도 이 원칙에서 벗어남이 없으십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인간의 이름에 의미를 둔다면 이것은 저주받은 거짓 예언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적이 없는 거짓 계시입니다. 우매자와 지혜자는 궁극적으로 이 기준에 의해서 확정지어집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위하지 않는 일을 하지를 않는 법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서 인간들의 마음들은 하나라 단결되었습니다. 자기 이름의 영광과 명예로움을 위하여 자기 이름을 하늘까지 끌어올리자 라는 의견에 대해서 반대가 없었습니다.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기에 의사소통도 원활했습니다.
그런 인간 이름의 높음을 통해 다시는 흩어짐을 면하자는 내부 결속까지 다진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은 그런 아이디어들을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정면으로 충돌시켜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결속되고 단결되어도 인간 이름이 아닌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하나 되는데 있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주의 이름’이 담겨있는 언약궤 앞에서 여리성사람들은 자기네들의 가치성을 계속 붙잡고자 했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용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시온성이 영원하고 다윗성이 영원한 것은 다윗이나 여타의 인간의 이름이 영원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에 의해서 세워지는 언약 안에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요소는 인간의 이름에서는 나올 수가 없고 ‘주의 이름’에게만 나오게 마련입니다.
신약에 와서 주님이 등장하게 되자, ‘주의 이름’ 앞에 놓여진 ‘인간의 이름’이 어떻게 끝장나느냐가 확연해졌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과 심판과 저주였습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즉 주님의 죽음이 역사 속에서 규정되면서 인간의 역사는 그 죽음에 의해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는 예수님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로서 인간이 따로 생각해둔 역사라는 시나리오는 다 소용없는 짓이 되었기에 그 시나리오를 채울 예언같은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는 원인을 본인이 스스로 알아채는 식으로 미래를 예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주님 앞에서 인간의 이름이 부정당했다면 미래라는 것도 인간이 예상한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미래일 뿐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면 비로소 참된 예언자들이 이 역사속에 등장합니다. 그들이 어떤 은사를 받게 되는데 은사란 원인이 자기 쪽에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고 오직 성령에게만 둘 수 있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 사건에 의한 예언을 한데 모아보면 다음같이 같은 결론에 도달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마땅히 버려도 괜찮을 만큼 주님의 미래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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