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영웅
2007년 2월 4일 본문 말씀: 전도서 9:13-16
(전 9:13)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전 9:14)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전 9: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전 9: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이 세상은 지혜로 지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미 만들어진 이 세상의 돌아감 속에서 항상 지혜가 들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귀한 지혜가 사람들에게 전혀 귀한 것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기껏 찾고자 하는 지혜는 항상 상식적으로 말해서 ‘귀한 것’과 결부되어 있기에 이는 곧 ‘돈’으로 환산되는 종류의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창조하신 지혜는 지상의 귀금속과 견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죄많은 인간들의 안목으로는 아예 찾을 수 없는 대상물로 처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즉 인간들이 귀히 여겨서 귀한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들의 능력으로 발견되지 못하는 식으로 숨어있기에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마치 금광맥을 발견하고, 원유를 발견한 이상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지혜이기에 인간들에게 그저 주어도 그저 버릴 정도로 무시당하는 지혜로 취급받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능력으로 발견할 수 없다는데 어떻게 지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서 오는 능력과 더불어 아예 인간 내부에 잠입하는 형식으로 지혜가 자리잡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비록 지혜는 알지만 그 지혜를 인간의 힘으로 붙잡을 수 없기에 항상 자신의 주도권을 지혜에게 양도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지혜, 혹은 지혜를 아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천덕꾸러기로 취급 당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를 알지만 이 지혜가 돈으로 환원되지 않기에 여전히 가난은 그 사람에게 운명처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소규모 도시의 작은 힘을 갈보고 쳐들어온 막대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의 침공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는 와중에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로 그 성을 점령당하지 않고 적을 퇴각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지난 그 이후에는 그 지혜자의 지혜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조차도 지혜자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공적으로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다 그 사람의 운명에 초점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이 세상에서 어떤 처우를 받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겠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즉 지혜가 있는 자는 이와같은 대우를 늘 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은혜를 입고, 혜택을 입어도 그 사람이 가진 재산적으로 보탬이 될 위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존재로 전락되는 겁니다.
요셉의 경우를 봐도 그러합니다. 형들이 요셉의 혜택을 입고 보디발이 사환 요셉에게 많은 혜택을 입었고, 바로왕을 보좌하는 고관대작들이 요셉에게 혜택을 입었지만 모두다 요셉의 처지가 자기들이 원하고 바라는 목표에 부적절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찮게 취급 당합니다. 요셉의 이러한 서러움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서러움을 미리 보여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이미 담겨 있는 자라면 요셉이나, 가난한 지혜자처럼 서럽게 무시당할 각오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내 안에 지혜가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 알게 아니겠습니까.
지혜에 대해서 잠언에서 뭉텅이로 나옵니다. 잠언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잠언 31:3에는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도 역시 지혜입니다. 남자가 되어서 사업하는데 힘쓸 힘을 연약한 여자를 때리는데 사용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남편이 평소에 절대로 자기 아내를 때리지 않은 일에 대해서 그 아내가 과연 그 남편에게 고마워할까요? 이건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는 비록 성경 지혜대로 행사했다고 해서 아내로부터 어떤 칭찬이나 고마움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순수한 지혜라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이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았다고 여기면 반드시 반대급부를 고대하게 됩니다. 주변의 칭찬은 은근히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그런 소원은 달성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잠언 13:24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하에서 제일 귀한 자식을 자기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이미 들어가서 자신의 행위를 장악한 사람 같으면 그 어떤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혜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기에 능력으로 작용되는 겁니까? 잠언에서 지혜를 ‘생명나무’ 혹은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는 새생명이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지혜로 살아야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생명되는 지혜가 들어있는 사람은 결국 지혜를 뿜어내게 마련이다는 겁니다.
비록 가난하든지 혹은 남이 나의 지혜를 안 알아줄 공산이 크다고 해서 결코 지혜를 멈추는 그런 지혜자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돈으로 환원되는 것만을 귀하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 23:4에 보면, “부자되기를 힘쓰지 말라”라는 말씀이 나오고, 잠언 16: 8에 보면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잠언 28:5에서는 “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라는 지혜도 나옵니다. 결국 잠언 1:7의 말씀이 맞는 겁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미련한 자, 즉 이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은 지혜의 참된 가치를 멸시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미 생명이라는 지혜를 얻은 성도는 그런 세상들의 곡해와 편파적 평가에 인생을 걸지 말고 소신껏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들의 더러운 본성을 눌려주면서 오로지 생명의 지혜만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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