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2007년 1월 28일 본문 말씀: 전도서 9:11-12
(전 9: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전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사실 인간을 본디 초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으로 인해 자꾸만 자신을 멋진 존재로 착각하며 삽니다. 일단 자신을 대단하고 위대한 존재로 간주하고서는 그런 관점을 견지하고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듭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본래의 심성에 동조하시지 않으시고 정신적으로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드십니다. 성경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충성이란 사실 자신의 목숨을 더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신이나 자기보다 더 우월한 존재에 대해서 충성이라는 성의를 표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백날 충성해도 그 충성하는 자기 자신에게 그 어떤 이득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신에게 자기 묵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경우는, 신으로부터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제공받는다는 유리한 조건이 성립될 때만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종의 시장경제에서 통하는 ‘맞교환’이지요. 일반적으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도 맞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돈’이라는 관계의 바탕에는, 서로의 자식들을 상대방 가문의 소속으로 맞교환시켰다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수립된 관계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버릇이 그대로 하나님에게도 이어집니다.
즉 “신이시여, 나에게 있는 제일 중요한 것을 당신에게 바칠터이나 당신이 나에게 귀한 것을 제공할 의무를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확정지어지기를 바랍니다”하는 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당연히 악마적 발상이지요.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뭉개버립니다. 그 인간이 자랑하는 고유의 가치를 일체 쳐주기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만사는 모두 하나님의 원하는대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 안에 ‘인간의 원함’이 파고들 여지는 전혀 남겨 놓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철저하게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들면서 하나님은 그 성도를 다루시고 부리십니다.
그 방식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빠르다고해서 먼저 도착하고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오해하는 신의 뜻으로서의 ‘우연’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알아야 될 차례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우연적으로 일하시는 아니라 차라리 우발적으로 일하십니다.
우연과 우발을 구분 지을 필요성이 꼭 생긴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지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필연을 전제로하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그 반대개념이라고 여깁니다. 필연이란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의 그물구조로 보는 겁니다. 원인없는 결과없고, 결과없는 원인도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연이란 원인과 결과를 사슬고리를 못할 때 성립하는 개념이기에 언젠 가는 다시 원인과 결과로 되돌아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는 개념입니다. 거기에 비해 우발이란, 또 다시 원인과 결과의 연결사슬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
예를 들면, 번개가 치는 것도 먹구름이 모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나이가 식당에 들어간 것은 그 원인이 본인이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개의 상호다른 원인과 결과의 계열이 수립됩니다. .
그런데 마침 이 두 개의 '원인-결과' 계열이 서로 만나서 그 배고픈 사나이가 그 자리에서 번개에 맞았다고 합시다. 이것을 '우연한' 결과라고 하는 겁니다. 반면에 하필이면 딴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번개 맞는가 하는 것을 두 번 다시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재분석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즉 우발이 되게 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다시 따질 여지가 전혀 없이 되어버립니다. 또 다른 예, 성령의 거듭남을 '우연'과 '우발성'으로 구분해서 설명드리자면, 어떤 인간이 거듭나기 위해서 기도원을 1000번을 찾아갔는데, 확률적으로 우연히 그 중에 한 번에 성령과 맞아떨어져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연, 그 자체의 가치를 간직하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단적 사도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원인-결과'의 계열을 만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굳어지면 소위 ‘체험적인 성령 신학’으로 될 공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살아왔는데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은 우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차후라도 그 어떤 '원인-결과'의 계열에도 연결시킬 방도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되었는가?“라는데서 어떤 규정된 해답을 자기로부터는 나올 수가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된 사람은 모든 다시 필연적 구조로 되돌아갈 '우연적 논리'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전히 자아조차도 가치가 망실되고 뭉개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면 우발적이지만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가치가 살아있는 식으로 신의 뜻을 생각하면 우연적인 것이 됩니다. 이 우연적인 발상을 견지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를 붙잡게 됩니다.
즉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노동에 대한 성과를 합당하게 제공하지만 자신이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구하면 그 겸손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논리입니다.
바로 이런 논리가 예수님을 또다시 못박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자신을 뭉갤 생각은 안하고 십자가 앞에서는 자신의 고유 가치를 얻고자 합니다. 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인가를 모르면서, 기어이 자기는 남에게 살인한 적이 없다고 우길 것이 뻔합니다.
참으로 미움이 살인으로 이어지려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됨을 알 경우입니다. 즉 예수님이 죽게 되심에는 본인과 다른 여타의 인간들의 미움에 의해서 발생된 일임이 거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필연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만나게 됩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일 하셔서 그 십자가를 임의로 오직 택한 자에게만 새겨넣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예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의 운명을 확정지으신 그 필연성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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