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웃음(전2;1-2)이근호060514

아빠와 함께 2013. 6. 30. 11:38

 

웃음

2006년 5월 14일                                 설교 본문: 전도서 2:1-2


(전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전 2: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웃음이 미친 짓이고, 즐거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은 웃음과 즐거움을 얻기 위함입니다. 만약 웃음이 미친 짓이고 즐거움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과연 사람 사는 이유와 목적이 어디 있는지 남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이 들어오는 시점은 말씀이 들어오는 시점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깨고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그 전까지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상식이 얼마나 성경 말씀과 틀리는가를 분명히 지적하시면서 침투해 들어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웃음에 관한 우리의 상식이 너무 틀립니다.

 

찬송가 234장 2절 가사에 보면,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 임금 다윗 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을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니엘’, 혹은 ‘다윗 왕’ 혹은 ‘엘리야’ 그리고 3절 가사에 나오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이 모든 분들은 신앙적으로 사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온갖 경우가 생기면, 이들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현재 자신이 무가치한 일을 골라서 가며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웃음이란 바로 자신이 가치가 확인인데서 오는 상쾌함의 표현입니다.


웃음이란 자신이 계획한대로 곧장 이루어졌음을 자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지어놓고서는 그것을 위장한 노력의 결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목적해서 벌리시는 일이지, 인간이 자기 목적을 달성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웃음과 기쁨과 즐거움을 제거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시편 2:2-4에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무산시키고 자신들의 웃음과 기쁨을 영원토록 지속시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을 공격하시는 겁니다. 잠언 1:26에 보면,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웃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신약에서 주님께서 즐거워하시는 경우는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신 천국 혼인잔치에 우리를 참여시킬 때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6:20-26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 세계에 대한 전복을 의미합니다. 혼인 잔치가 이미 배설해 있기에 세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천국 잔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식이 됩니다. 누가복음 14:16-24에 보면,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쁨이란 인간들이 자기 인생 목적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만의 기쁨이 우리 자신에게 주입될 때 발생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배설하는 잔치에 자기 장가가는 기쁨으로 인하여 천국의 기쁨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 있기에 주님은 그런 세상적인 기쁨을 공격하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이야기이요 다른 이야기는,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는 잃어버린 탕자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이란, 지옥 갈 자를 다시 건져내시는 그 기쁨을 두고 말합니다.


또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기에 하나님은 그 세계가 인간들의 웃음에 의해서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말하기를,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목적에 가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 13)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목적이 침투하여 우리의 기존의 상식을 무너뜨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