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인생의 수고(전1;12-15)이근호060430

아빠와 함께 2013. 6. 30. 11:17

인생의 수고

2006년 4월 30일                              성경 본문: 전도서 1:12-15


(전 1: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부로 고생시키십니다. 이 땅에서 평안한 삶을 애초부터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난데없는 난관들이 자꾸만 들이닥칩니다.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우리 자신들을 그냥 놔버려두고 지나가는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도 수시고 사태와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과 사태들이 사람들에게 고생스럽게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것을 자기화 시키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사건으로 일하시는데 인간들은 그 사건을 고정시켜서 자기 것으로 확정지으려고 시도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는 것은 불만과 불평 뿐입니다.


15절에 보면,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이 땅에 태어난 점을 이유로 삼아 이 세상을 자기를 위한 세상이라고 간주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한 세계 구축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의 눈에는 모든 일들이 구부러진 사건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곧고 펴고 싶어 환장하게 됩니다. 왜 세상이 자기 마음 먹은대로 안되느냐고 분노합니다. 하나하나가 마음이 안들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인간들이 자기 것이라고 확정지어 것들을 점차 닳아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도록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점차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셈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탈스러운 일입니다. 인생을 좌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고를 쉬지 않습니다.


날아다니는 사건을 자기 것을 삼고자 하지만 실은 그 잡고자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바람을 잡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스라엘 왕이 알려주는 신앙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서를 소개하는 이스라엘 왕이 갖는 신앙과 동일한 신앙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당하는 수고는 그냥 헛된 수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하나님의 일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잡혀들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사무엘상 2:6-8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의도하는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누구든지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을 잉태케 하시는데도 하나님께서 임의로 마리아를 통해서 임신케 했습니다. 사전에 마리아와 의논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나오고 난 뒤에 다니엘을 집어넣은 바벨론 왕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니엘로 하여금 사자굴에 넣은 것도 하나님이시고 다니엘로 하여금 그 사자굴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구축하는 왕국이 인간들에 의해서 조금도 방해받지도 않을뿐더러 침해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모든 사건은 다 일방적입니다.


그리고 확고한 중심점에서 나오는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간들의 자기 구축성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안심시키기 위해 갖가지 가상 현실들을 예상하고 꾸며내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위해 수시로 자신이 가진 것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게 됩니다.


이러한 셈을 통해서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는 소망을 구체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로마서 8:24-25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약 보이는 것이 탐이 나거든 더 이상 그것은 진실된 소망이라고 간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소망이라고 여기던 것도 주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항상 뭉개질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소망 뿐만아니라 믿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다가는 항상 큰 코 다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를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외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필요한 사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마구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런 사건들을 자기 소유로 흡착시키기 위해서 끌어당긴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으로 낭패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간주하는 것도 이런 허점을 갖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현재의 ‘행복감’이라는 느낌으로 늘 고정시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 즉 복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한 곳에 모이도록 부름받은 자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데 모으시는 이 사건을 우리는 소망과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을 임의대로 사자굴에 집어넣으시고, 임의대로 빼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