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
2006년 5월 28일 설교 본문: 전도서 2:3-8
(전 2: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전 2: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전 2: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전 2: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전 2: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전 2: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사람의 육체에는 원천이 있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원천은 아담의 신체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의 신체는 이미 이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충분히 즐거움과 만족을 가질 수 없는 그런 신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과연 인간이 고립적으로 자기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와같은 질문에 따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자는 평생을 통해 실험에 나서게 됩니다. 즉 ‘나의 신체’가 과연 최종적인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느냐를 파악하려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실험의 결론은 신약성경에서는 판정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3-4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광과 즐거움은 인간의 육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찾아주셔야 되는 겁니다. 만약 인간들이 자력으로 그 영광을 알려고 한다면 이는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 힘에 인간의 육체는 버텨낼 수가 없어 힘없이 굴복하고 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인류는 아담의 몸을 전수받기에 그 어떤 식으로도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을 기초로해서 욕망이 나오지만 그 욕망이란 항상 죄를 지향하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들이 죄 속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죄라는 것은 항상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즐거움은 끈기가 없습니다. 오래 가지를 못하고 곧장 다른 즐거울 것을 찾아나서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죄라는 것은 감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범위로 확산됩니다. 따라서 즐거움도 감각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즐거움 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의 영역에서는 인간을 좌절케 하고 낙심케 하는 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입맛 가운데는 술에 의해 현혹되는 맛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맛도 있습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은 늘 매혹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동네 포장마차에 가서 꽁치 대가리로 안주삼아 소주 맛을 음미하려고 할 때에, 마침 나이가 어린 자들이 우루르 들어와서는 꼼장어라든지, 곱창이라든지, 오징어 두루치기라든지 비싼 안주를 수북히 시켜놓고 술을 마시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술맛을 음미하는 즐거움은 순식간에 좌절로 변합니다.
갑자기 자기 신세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살 맛을 잃어버립니다. 술로서 사는 재미를 느끼려는 원래의 목적이 정신적으로 타인의 행위을 관찰하는 순간은 욕망의 한계선이 허물어지고 더욱 깊숙하고 먼 곳을 바라보게 하므로서 현재의 만족감에서 곧장 떠나게 만들어버립니다.
또다시 만족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 있고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만족을 향하여 달리도록 자신을 더욱 분발하도록 제촉합니다. 거기로 가는 길은 만족보다도 피곤을 낳습니다. 시달려야하고 양보해야 하고 손해봐야 하고 굴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만족이 아니라 자꾸만 자기 안에 불만족만 누적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혼자만의 즐거움이 타인에 의해서 방해받는 그런 환경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기 영역을 크게 확장하겠다는 시도는 본인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도 자기와 똑같은 목표를 향하여 경쟁을 유발하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서 시도하는 것처럼 인간들은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자기만의 만족을 오랫동안 품기 위해서 정원을 만들고, 집을 만들고, 과수원을 만들고 각종 과수와 수목들을 지어보지만 문제는 타인들에 의해서 그런 시도들도 언제가는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의 토양이나 자연환경은 인간들의 애쓰고 노력한만큼의 만족스러운 수확물을 내지를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애쓰고 노력한 만큼 토양은 다음에 더 큰 힘을 요구해야 전의 만큼의 수확을 냅니다. 그렇게 되니 농부들은 전에 예상한 만족도를 위해 자연을 보호하는 식이 아니라 자연을 수탈하는 공격적 경작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미국 몬태나 주의 늙은 농부들은 과거 자신의 젊을 때의 우유 값과 오늘날의 우유 값이 별 변동이 없다는 점에 한숨을 쉽니다. 왜냐하면 그 우유를 생산하는데 들어간 장비값은 옛날보다 훌쩍 몇 배나 뛰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젖소 두 마리 잡으면 트럭 한 대를 살 수 있었지만 지금 젖소 25마리를 팔아야 트럭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자신은 자기 앞 뜰에 재배해 놓은 아스파라가스를 반찬삼아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의 후손들은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들어있으면 영화만을 전문으로 방영하는 채널에 가입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타인의 욕망에 경쟁적으로 물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광산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리를 채광하는 광산이 파산하는 이유는, 남미 칠레에서 보다 더 값싼 구리가 채광되니 미국의 구리 광산업은 수지가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소박하게 자기만의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애를 써도 이 사회는
그것을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신체가 발산하는 욕망이 정신적으로 남을 누리고 이기는 경쟁 속에서만 일시적인 만족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많은 아내를 두었다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의 기본 욕망은 자손번식에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복제하려는 이치로 인해 남성이나 여성은 성이 다른 상대에 끌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이치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습니까! 솔로몬왕은 후비가 700명이요 빈장이 300명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합이 1000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종족번식의 욕구는 만족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이처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육체는 지금 새로운 육체로 덧입을 때까지 해결책은 없습니다. 성도는 장차 새로운 하늘의 육신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다 채우질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이 육체는 아닌 것입니다. 이 지혜를 외부의 능력, 즉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현재의 만족보다 주님으로부터 주신 선물의 귀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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