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와 세대
2006년 4월 23일 설교 본문: 전도서 1:3-8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에서 ‘헛되다’고 이야기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신약과 연결시키고 않고 대뜸, “그래 이왕 헛된 세상, 막가는 식으로 내 마음대로 살래”라는 쪽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이란 이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닌 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점은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타고난 성격상 이 세상이 예수 중심으로 모아진다는 것을 곱게 수긍하며 살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들의 모든 수고로움은 마치 세상을 자기 중심인 양 간주하면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시는 식으로 그 수고의 대가를 얻으려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람이나 강물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람이나 강물처럼 세상 만사가 다 사람들이 자기 소유로 삼을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은 지정된 자기 자리를 그냥 돌고 순환하는 식으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강물은 바다로, 바람은 이리저리 위치를 변경하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인간들이 도중에 나서서 낚아채는 식으로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에 좁아서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어제 동대구역 내에 정차했던, 주한미군의 탱크에 올라갔던 어린이가 감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럴 경우, 그 어린이는 부모는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대구시의 예산을 몽땅 동대구역 내의 감전사를 방지하는데 투입하고, 그리고 주한미군은 당장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은 주장일까요? 만약에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면 역 내에 정차되어 있는 탱크 위에는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린이는 아직 세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모르는채 그저 탱크 타고 싶은 자기 마음에만 충실해서 탱크가 그냥 올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은 처음과 그 중간과 끝부분 전부를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본능에 충실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장차 예수님 중심과 비교해서 ‘다 헛되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중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다 그 중심점을 증거하는 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중심점을 기어이 자기 자신 쪽으로 쏟아지게 하고자 하니 그 수고가 얼마나 헛되고 괴로운 일인지 다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전도서의 내용은 일반 세상 지혜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연관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허무를 느낍니다. 자연의 변화무쌍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대자연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과 관계성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헛됨’이란 기껏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식이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더불어 어떤 한 사마리아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냅니다. “나는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 길어오는 일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전체 인생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6명 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중입니다. 그만큼 그 여인은 자신의 수고를 그런 쪽으로 대가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바는, 결코 인간이 스스로 수고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3: 14-19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나를 사랑하여 나의 수고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을 얻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차고 넘치도록 제공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헛됨’이 ‘허무주의’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푹 잠김으로 이어지는 그런 ‘헛됨’을 전도서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면서 ‘헛되다’고 한들 하나님은 그 고백조차 가치있는 것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어이 인간의 의견을 듣고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주시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규정하신 그 규정에 준해서 세상을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 진척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대는 세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점차 철이든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보면 그 인생관은 어디까지 계속 자기 것으로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즉 30대에 속한 사람을 보고, 어느 40대에 속한 사람이 딱하듯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고 칩시다. “네가 지금 세상을 그렇게 보지만 나처럼 40대가 되어보면,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 말해도
실제로 그 30대가 40대 되는 순간에서도 전에 40대가 느낀 그 세계관을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은 결코 남에게 전이되지 않는 자기만의 고유의 세대관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시간을 느끼는 감각도 동시대에 속한 사람들 하고도 또 달리 독자적인 시간층을 따로 갖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모든 수고는 본인에게만 적합한 의미와 보람을 기대하면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남이 감히 동참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모습도 역사 예수님이 보는 세상관과 시간관이 아니기에 결국 헛되고 헛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중심점에서 본 시선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그 어떤 행위를 해도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헛됨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아하, 세상의 중심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확정된 바 되었구나”라는 사실을 접수하시면 자신의 헛됨을 즐기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행복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행복한 의미를 수립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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