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 복
2006년 6월 4일 설교 본문: 전도서 2:9-11
(전 2: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전 2:10)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전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도서를 가만히 보면, 전도자가 흔히 일상적인 인간들의 즐거움과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고서는 곧 얼마 안가서 “이것도 바람잡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흘러버립니다. 따라서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 한껏 동조를 하고 동의를 했던 자들이 맥이 쏙 빠져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란 말이야 라는 식으로 나오도록 만듭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보면, 과거로부터 미래로 다가서는 식의 인생은 결국 ‘모든 수고가 다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결론 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끼어있는 것, 즉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라는 나름대로 행복감도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의 즐거움이란 자신이 손수 투자한 수고에 대해 예상한 대로의 결과가 주어질 때 생깁니다. 즉 “나는 오늘 신이 보시기에도 정당한 일을 했다. 그러니까 이런 수고의 대가가 복으로 주어지는 거야”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 즐거운 법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이 현재 고생할 만큼 결코 그런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너무 과하게 고생시킨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내가 평소에 기대한 수고에 따른 분복이나 보람을 왜 하나님쪽에서 방해하고 나서느냐 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억지와 억지로 뭉쳐지게 됩니다. 사실 인간의 이런 면에 대해서 충분히 실험하고 시도한 분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충분한 즐거움을 누리는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일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번 십자가 마을의 여름 수련회의 주제를 ‘끝을 기억하라;고 정했습니다. 보통 ‘끝’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라’ ‘예상하라’ ‘고대하라’ ‘대망하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다 미래에 대해 환상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있기에 참된 성도의 끝과 구별되지 아니합니다. 성도는 끝을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을 받아서 그 ‘끝’의 처할 상황으로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끝’은 받은 자가 과연 누구냐를 서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끝’을 기억하라]라는 식으로 주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끝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최종 결론납니다. 즉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선 인간의 ‘끝’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혹독한 저주를 받는 양상으로 끝이 난다는 점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자신들에게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라면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심판받으신 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심판을 언급하면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수고의 보람이나 분복’이 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제가 지금 하는 행동이 참 잘했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일을 팍팍 밀어줄거죠?”라는 식으로 수고의 대가를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만약 심판이 여기에 개입해 버리면 자신은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할 근거가 날아가버리니까 이것은 자신이 기대한 수고의 대가도 같이 날아가 버릴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심판을 받았기에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끝을 미리 앞당겨 알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즉 인간들이 이 땅에서 무슨 착한 일을 하든지, 무슨 악한 일을 하든지 간에 결국 끝에 가서 심판받을 재료들에 불과하다는 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수고의 대가를 고대할 것이 아니라 바람잡는 일에 불과함을 더욱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태가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미리 알려졌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끝에 서서, 즉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가서 자신의 전 인생을 보게 되면 몽땅 헛되고 헛된 과거사에 해당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면 첫 봉급의 즐거움을 누릴 때에는 십자가의 심판에서 나오는 영생의 즐거움을 놓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즐거움과 생의 보람을 느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돌아서면 곧장 무익한 일들이며 그 즐거움에 계속 이어지지 못할 수 밖에 없는 성격임을 압니다. 이것은 인간이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정당함과 의로움을 갖출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 사적인 생활과 율법 생활을 상호 엉기게 되어 있는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가 율법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자기가 행한 세세한 일조차 늘 판단해 법조항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즉 오직 하나의 행위에서만 적용되는 법이 오로지 하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 하나에 문제삼으려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다 내동댕이쳤던 바리새인들은 ‘간음’말고 다른 것으로 인해 예수님 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주님 앞에서 결코 온전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는 동시에 그것을 피한다고해서 어떤 문제 해결이 될 수가 없음을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지적 받는 상황에서 빠져 나갈 구멍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과연 인간의 행위가 이를진데 즐거움이란 주어질 만무합니다. 복도 인간의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누리는 복과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4:4-8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한 것도 없는 복’을 받았기에 성도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님을 그들만이 알고 있습니다. 과연 성도의 즐거움은 어디있을까요? 요한복음 4:36-37에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생을 아무런 대가없이 얻은자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기쁨을 전달하는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순간적인 이익을 영원한 즐거움이라고 여기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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