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지혜(전1;16-18)이근호060507

아빠와 함께 2013. 6. 30. 11:26

 

지혜

2006년 5월 7일                            설교 본문: 전도서 1:16-18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사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찌르는 고통이요 근심이라는 것을 안다면 무엇 때문에 더 공부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인간의 지식욕구는 자기 힘으로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고 근심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자연스럽게 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는 기관차처럼 인간들은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멈춤이 없습니다. 보다 더 명확하고 확실한 진리가 자신의 마음을 더욱 더 가볍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다 부질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과 진리가 엉터리라서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 인간은 뭔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진리와 관해서 인간은 어디서 고장 났는지를 요한복음 18:36-38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는 이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는 반드시 진리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빌라도는 악한 역할을 통해서 ‘진리 만들기’에 가담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 나라를 나라답게 하기 위한 통용되는 진리체제가 따로 있고, 또한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그 쪽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진리체제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물음은 이 땅에서 통용되는 진리에서 수립된 것입니다. 즉 빌라도는 지금 이 세상의 왕입니다. 자신의 왕됨을 포기하지 않은채 그 위대함을 그대로 견지하면서 예수님의 세계까지 탐을 낸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필히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세계에서만 통하는 진리는 이 세상 진리체제와 충돌을 야기하는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왕은 모든 인간 가운데 최고로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의 자질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1천 번제를 드린 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웃 나라의 여왕도 솔로몬의 지혜가 현란할 지경이라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솔로몬왕의 지혜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나오는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기 아들에 관한 재판입니다. 시작은 여인 두 사람이 각각 아들을 낳았지만 남아 있는 아들은 현재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둘인데 자식은 하나이다? 분명 둘 중의 하나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그 아들의 진짜 어머니는 두 창기 중의 누구일까요?


솔로몬이 행사하는 지혜는 그냥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에게 출처가 있음을 보이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솔로몬 밖에 있는 겁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밖에 있음을 알고 밖에 찾습니다. 그 밖이라는 것은 바로 그 여인 중의 하나입니다. 진실은 둘 중 하나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까요?


그것은 진실이 밖으로 나올 때는 반드시 ‘자기 위대함 포기’라는 모습으로 비진리와 차별화를 드러낸다는 겁니다. 즉 비진리는 반드시 ‘자기 위대함’을 추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잃은 여인은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기 비참함을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기 비참함을 보충할 요량을 본능적으로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 방에 같이 잠을 자던 남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바꿔치기 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비참을 다소나마 가리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난 뒤에 한 행동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런 인간의 시도를 오히려 까발리는 양상으로 진리를  드러나게 됩니다.


솔로몬은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두 여인의 말을 다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밖으로 나올 때 제대로 ‘자기 희생’으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솔로몬은 가졌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그는 선지자입니다.


요한복음 8:32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리가 과연 어떻게 작용해서 인간을 자유케 한단 말입니까? 그 앞의 사건을 보면 어떤 여인이 일단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갇혀 있는 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여인을 정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인은 그 율법의 정죄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사람을 거뜬히 구출하는 그런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진리란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지유로울 수 없는 자를 자유케 하시는 일을 감행하기 위해서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공하신 결과로 남은 것은 바로 십자가의 보혈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자신의 처지의 비참함을 메우기 위해서 남은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삼는 인간들의 본능적인 태도와 정 반대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란 ‘자신의 위대함을 성사시킬 모든 것’입니다. 일종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기 포기가 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악마가 심어진 진리를 가지고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반복적으로 살해하는 살해행위라고 보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대하는 것이 더욱 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