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악마의 제안 2004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4. 14. 18:59
2020-04-12 16:32:18조회 : 127         
악마의 제안 시편 18:17 20041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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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25.♡.150.26)20-04-14 15:48 
20200413a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13절부터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하늘 위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상을 향하여 반응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존재하신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이 온순한 모습이 아니고 화를 내시는 모습으로 소개돼있습니다.

18편 7절에 보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화낸다, 이걸 진노지요. 하나님께서 지상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다. 화를 내는 이유는, 지상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전쟁이 되겠어요. 무엇이 하나님 뜻에 부합되고 무엇이 하나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가? 그것을 구분하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지상에서는 참이 아니고 거짓이 이기죠. 거짓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편을 들고 있는 겁니다. 진리 편에 서서 화를 내시는 거죠. 여기 10절에 보면, 그룹 천사들까지 동원하셔서 흑암과 공중에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고 밝아야 될 세상이 천사들이 방문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둡게 보시는 겁니다. 어두움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 전체가 깜깜한 어둠이라면 광채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 쪽에만 빛나는 광채가 비추겠지요.

그 광채와 어둠 사이에 고요하게 빛이 오는 게 아니고 13절에 보면, 우박과 숯불, 숯불이란 태운다는 것, 다 태워죽이겠다는 하나님의 의사표시겠지요. 우박도 마찬가지고. 때리고 태운다. 하나님은 폭력적이라고 이해하면 돼요. 이 세상이 죄악이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잔인한 하나님, 사정 봐주지 않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이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근거가 뭐냐? 다윗에 의하면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뭘 위배했느냐? 언약을 무시해버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했다. 이렇게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니까. 약속에 위배되는 언약을 무시한 거예요. 그러면 이 언약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되겠지요. 처음에 언약과 연속성을 갖는 것과 언약과 불연속성, 언약과 단절된 무엇인지 그것만 아시면 간단하게 문제는 풀립니다.

언약과 우호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생명나무에요. 그 이유가 언약을 믿으면 복을 받으니까, 언약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으니까. 잠언서 8장에 보면, 언약을 하나님, 나를 아는 자가 생명나무라 했으니까. 언약을 안다는 것은 곧 생명나무에요. 그러면 언약을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 되느냐 하면, 바로 선악체계, 또는 선악의식, 선악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 결과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죽음이죠. 저주고, 진노고, 지옥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성경에 우리가 시편 18편을 봤는데 사람이 성경을 펼치게 되면 성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머리 집어넣고 막 성경 속으로 들어갑니까? 그거는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성경이란 자체가 에너지 장으로 돼있어요.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에너지가 있는데 그 에너지 때문에 이 덩치 큰 물체가 성경책이 반발이 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책으로 못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성경책이 있다면 인간은 여기 있겠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쉽게 하도록 애는 쓰겠습니다만. 인간이 어떤 대상을 보는 것, 나무, 산, 사람, 개, 고양이, 또는 책, 탁자, 꽃, 화장지 등 이런 대상을 볼 때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내 자리에 보탬이 된다는 의식, 내 자리가 공고하게 된다는 요구를 가지고 사물을 보게 돼요.

만약에 길 가다 더러운 것이 있다면 피해가지요. 왜 피해갑니까? 사물을 보는 순간 내 자리에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피해가게 돼있어요. 행동으로 나타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자리라 하는 것은 자기 자리를 보존하고 키우는 그러한 본능에 의해서 요구에 의해서 사물을 대하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사물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내 자리에 보탬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보는 거예요.

이 자리를 어떤 학자는 현존재라 이야기하는데 어쨌든 이 자리를 통해서 볼 때 이 보는 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걸 이해한다고 해요. 만약에 성경책이 있는데 나는 성경책 안 본다고 하면 어떤 경우냐 하면, 이 인간의 자리가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사물을 본다고 했는데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이야기해서 인간이 자기 자리를 스스로 개방한다고 이야기해요.

현존재, 인간이란 존재를 자기를 개방하게 돼있어요. 열어놓으면서 받을 것은 받고, 거부할 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걸 개방하면서 나름대로 무엇이 발휘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한,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나와서 자기로 돌아오는 자기에게로 소환되는 일종에 신적 계시, 그러니까 계시, 희망사항 같은 것을 발산하게 돼있어요. 계시 발산. 인간은 그것을 개방한다. 인간은 자기를 열어놓으면서 무조건 내가 잘되기 위해서 계시를 개방하는 거예요.

개방하면서 여러 가지, 코끼리나 탁자나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개념을 정리하게 되고, 이걸 합치면 해석이 돼요. 이게 세계 해석이에요. 세상에 대한 해석. 세상 해석을 구성해서 세계에 대한 자아는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보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성경을 볼 때 의도를 가지고 본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성경 있네, 나는 펼쳤네, 끝. 이게 아니고 내가 열어놓았는데 내 자리를 보다 활성화시키고 확대시키는 용도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성경에서 한 수 배울 게 있을까, 성경에서 도움 되는 게 있을까 싶어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자, 성경을 보기 전에 인간의 자리는 아까 계시라고 했지요. 본인이 뭐냐 하면, 본인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의 특징은 소멸일까요, 영원함일까요? 영원함이죠. 누가 영원하다? 여기 살아있는 내가 영원히 살아있기를 욕구를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성경을 하나의 물체로 보고 나한테 어떤 이익이 되는 정보가 있는지 그냥 본다 이 말이에요.

만약에 성경 안에 못 들어가는데 들어갔다 칩시다. 이건 마치 뭐냐 하면, 거울 면은 나를 반사하는 거예요. 거울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나를 비추면 그만이란 말이죠. 그런데 성경 세계가 따로 있어요. 만약에 성경 안에 들어간다 하면 내 자리를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성경 속으로 안 들어가면 성경책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필요한 것만 끄집어내면 되겠지요.

그게 아니고 성경 속 안으로 들어가면 성경 속에 뭐가 준비돼있느냐 하면, 현재 나라는 현존재, 나라는 이 인간이란 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보시기에 멀쩡하다, 멀쩡하지 않다, 어느 쪽이에요? 멀쩡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괜찮게 만들었지만 그 다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까 했지요. 선악체계, 선악적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생명나무와 관련 없는 언약의 혜택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언약을 위반했을 때 저주와 죽음이 온다 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줬잖아요. 노아언약을 위반했을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현존재가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어요.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노아 홍수 때 어디 갔습니까? 죽었지요. 왜 죽입니까? 언약이 등장했기 때문에.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언약에 위배되는 사람은 다 죽게 되고 하나님의 저주와 폭력적인 조치를 당하고 그들에게 아주 잔인한 하나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선악체계, 중요한 겁니다.

다시 합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 안 들어가고 그냥 이용하려고 하면 나한테 필요한 것, 정보나 얻을까 싶어서 채택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멀쩡해요. 아무 문제없고 나는 영원히 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영원하고 싶고 나는 신이 되고 싶어. 이유는 몰랐지. 그러나 성경 안에 들어가 보니까 여기는 성경 안의 세계, 성경 속의 세계가 따로 있어요.

성경 속의 세계를 들어가 보니까 멀쩡하다고 여긴 내가 멀쩡한 게 아니고 내가 영원한 신이 되고 신격화 되고 신이 되고 싶도록 누군가 제안을 한 자가 있어요. 누가 제안한 걸게요? 우리에게 신이 되게 해준다고 제안한 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뱀, 악마가 제안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악마와 한 편이지요. 악마의 앞잡이고 악마의 존재를 증거하는 증인이지요.

성경 세계 속에 들어가 보니까 악마와 한 편이 되어서 그 사고방식이 선악적 체계, 선악적 사고방식으로 나 좋으라고 나의 영원함, 악마가 제안한 것이 신격화, 신이 되는 것이니까 내가 신이라고 해줄게, 라고 악마가 그렇게 제안한 사실이 성경 세계 속에 들어가 보니까 비로소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생명나무와는 완전히 빠이빠이 됐어요. 못 가요. 갈 수가 없어요. 행여나 또 갈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켰어요. 끝났어요.

그러면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어느 날 빛을 보고 성경을 보았다. 여기 보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많이 하여서 내가 전에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를 때는 내가 어둠의 존재였는데 빛을 보고 성경 말씀대로 살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변화를 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 이것이 선악체계일까요, 생명체계일까? 이 사고방식이 선악체계지요. 이것은 악마의 제안입니다.

악마가 메시아를 제안해요. 선악체제에 인간들이 이해되는 식으로 메시아, 그러니까 예수를 채택한 거예요. 빛이 되던 예수님이 되던 그 나오는 결과가 뭐냐 하면, 바로 나로 하여금 구원해주겠다, 신이 되게 해주겠다, 라는 것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내가 성경 속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 바깥에 뭔가 필요한 게 있을까 싶을 때는 이것이 하나님 뜻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성경 속에 들어가 보니까 이런 종교적인 것, 내가 하나님의 말씀 지켜서 지금은 내가 더러운 인간인데 깨끗한 인간 되어서 천국 간다는 이 의식이 이 체계, 이 사고방식이 악마가 천국 못 가도록 가로막기 위해서 하는 악마가 만든 신앙, 악마가 만든 기독교, 종교라는 사실을 성경 속에 들어가 보면 알아요. 성경을 참고로 한 게 아니고 들어가 보면 안다고.

예를 들면 로마서 7장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게 나오는데, 물어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성령 받았지요. 지금 여기에 자기가 구원받고 자기가 천국 가고 싶고 자기가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내가 전에는 말씀대로 못 살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말씀대로 살았다, 할 때 이 성령 받은 사람과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 바울과 생각이 같아야 돼요, 달라야 돼요? 같아야 되지요.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내 안에 악이 있다. 자, 내 속의 선이 이길까요, 악이 이길까요? 할 때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뭐라 합니까? 자기 내부의 악이 이기죠. 어찌 된 겁니까, 도대체.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자기 속의 선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악이 이긴다고 했는데 뭐 빛을 받아서 말씀 지켜서 전에는 나쁜 짓 많이 했는데 이제는 착한 일만 한다고 생각하는 성령 받은 사람과 달라도 어떻게 이렇게 달라요? 누가 말이 옳아요? 사도 바울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귀신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람인데 왜 말이 달라요?

내가 그대로 선악체계 아래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지요. 그러면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잘 키웠다고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보내주시고 상급 주신다, 라는 사고방식(이게 선악이에요)일 때 이 사람은 어디에 주목하겠어요? 예수님한테 주목하겠어요, 변화되는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는 거예요.

만약에 그동안 악을 버리고 차곡차곡 선을 쌓았으면 선한 그것을 절대로 안 다치고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 그걸 끌어안겠지요. 사도 바울은 자랑을 뭐로 한다고 했어요? 자기가 선한 것을 자랑한다 했어요, 아니면 십자가를 자랑한다 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선과 악을, 악을 떼어내고 선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체제 다 뜯어내야 한다고. 선악적으로 나를 주시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뜯어내야 되지요.

뜯어내게 되면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물론 뜯어낼 때 아파요. 왜냐하면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이걸 다 뜯어내니까 아프잖아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했단 말이죠. 성령 받기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나는 착한 의인이다, 점점 더 의인으로 변화된다. 그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여전히 선악체제 악마가 제시한 메시아, 악마가 제시한 기독교란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관심사가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잘 되는가에 있어요. 이게 뭐냐? 자기 개방성이란 말이죠. 절대적인 자기 자리를 개방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 보면서 성경에서 내가 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 속으론 못 들어가고. 똥이 있다. 피하지요. 왜? 더러워서 피하지요.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서 피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더럽다면? 선악체계를 알고 있는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똥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본인을 치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걸 뜯어낼 때 진짜 이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사람은 뜯기는 게 아파요. 누구든지 아파요. 누가 나를 욕하면 아프잖아요. 뜯기는 가운데 점차 뭐가 등장하겠습니까? 변화되기를 십자가가 들어있다. 내 죄를 사해준 십자가가 보이지 시작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합니까, 아니면 자기가 그동안 착하게 살려고 변화한 걸 자랑하겠어요?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에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런데 만약에 진짜 안에 십자가가 없다면, 십자가 없이 성령을 거론하고 빛을 거론하고 하나님의 윤리도덕을 거론한다면 이걸 뜯어내면 십자가 대신 안에 진짜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선악체계가 들어있지요. 여기서 등장한 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자기 의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지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자리를 개방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자리에 이름을 붙인다면 자기 이름이 되는 거예요.

이건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 인간들이 바벨탑을 왜 쌓았느냐 하면, 자기 이름을 하늘에 높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자리를 포기 못해요.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자기 부정이 안 된다고. 그런데 로마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바로 자기 의를 위해서 그동안 하나님 율법을 이용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따져봅시다. 그러면 성령이 하신 일이 뭡니까? 성령이 하신 일이 없는 나의 일을 채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게 성령의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고 바깥의 너는 죄 지은 죄인이다. 이 관계를 보여주는 게 성령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언약이 없이 그냥 선악체제를 고집하는 사람은 성령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전에 나쁜 짓, 나쁜 생각 많이 했는데 지금은 착한 생각하도록 성령께서 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하는 것은 성령을 몰라서 자기 의를 채우는데 우리는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점점 더 나의 의를 채우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을 거기다 끌어당기는 겁니다.

무슨 성령이 선악체계를 그대로 옹호하는 이런 성령은 없어요. 성령이 소개하는 것은 언약의 완성, 십자가의 효과에 관한 겁니다.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를 모르는 자체가 성령을 안 받았다는 뜻이고,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한다 했습니까? 자기의 선악과, 변화된 이것 자랑합니까? 아니죠. 성령 받으면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러면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바깥에 둘러쳐있는 나 자신의 일생에 공들였던 십자가만 드높이기 위해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죄 씻음의 주님의 공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근본적으로 모든 원인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그래요. 또 성경 속으로 들어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을 그냥 참고도서로 내가 구원받는데 도움 되는 것으로 보지 말고 아예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잔 말이죠.

성경 속에 들어가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본 다 사람은 다 이해해요. 성경 속엔 뭐가 있느냐?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이방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심어줬어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 그 말도 맞지만 더 적극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면 이방인들은 사랑하지 않고 발로 차는 거예요. 이방인의 특징은 뭐냐? 거부하는 거예요. 배척하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여하는 거예요. 주를 알지 못하는 민족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지어다.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란 말이죠. 주의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 저주를 퍼부으소서.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이방인이죠. 이방인이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권리도 없고 구원받을 이유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버림받는 게 마땅해요. 그래서 이방인 앞에 뭐가 붙느냐? ‘개 같은’ 이방인이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거예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만약에 십자가의 성령이 와서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은 지 구원받은 걸 자랑하겠어요, 안 그러면 구원받고 난 뒤에 자기가 개 같은 입장이었음을 자인하는 겁니까? 나는 개 같은 자인데 어찌 저를 구원합니까,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이 사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주님의 공로가 들어가요. 주님의 사랑이 들어간다고.

주님의 사랑, 공로가 들어간다면 아까 성경 속에 들어간다면 이방인들은 어떤 체계 속에 있습니까? 선악체계지요. 선악체계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나는 선하고 싶어, 의롭고 싶어. 나는 착하고 싶어. 나는 악하긴 싫어. 왜? 악한 것은 저주를 받고 선한 것은 복을 받으니까 난 복 받고 싶어. 복 받으면 난 안 죽어도 되잖아. 소멸 안 해도 되잖아. 저주 안 받아도 되잖아. 지옥 안 가도 되잖아. 그러니까 나는 어쨌든 간에 저주 안 받고 벌 안 받고 그런 사람 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악을 버릴 거야.

이 사고방식 자체가 선악체계에요. 이게 악마가 집어넣어준 거라고.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이미 그건 생명이 아니에요. 생명체계는 언약에만 있고 언약 바깥에는 생명체계가 없어요. 생명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갇혀있는 겁니다. 갇혀있을 때 나는 선하다, 나는 착하다, 나는 구원받았다, 할 때 결국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세 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메아리. 자기가 자기한테 이야기하는 되고 싶은 것을 그냥 계속 쏟아내면 그게 갇혀진 공간에서는 음파가 갔다가 천정에 마주쳐서 다시 증폭된 음파로 내 귀에 들리거든요. 왕왕 들리는 거예요. 내가 내뱉은 소리를 내가 메아리로 듣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들이 하는 신앙생활이에요. 소위 그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이 이런 겁니다. 착하도록 변화돼야 된다. 옛날에는 나빴지만 점점 더 좋아진다. 이게 바로 악마가 쳐놓은 악마가 지배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자기가 요구하는 그 소리를 그냥 되풀이해서 듣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시편 18편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인간에 진노하시고 화를 내시고 숯불 내려주시고 우박 내려주시고 아예 망하라고 하시는가? 이게 전쟁을 하는데 거짓된 것이 참 진리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 편을 드는 거예요. 언약은 참은 뭐가 있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요. 언약은 현재 시편에서 누구에게 오냐 하면, 다윗에게 언약을 준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렇게 돼있어요. 1절, 2절에서 지금 전쟁 중에 있으니까. 전쟁 중에서 다윗 편을 들고 있는 겁니다.

전쟁이란 고요할 땐 전쟁이 아니지요. 뭔가 달려드니까 전쟁을 하는 것 아닙니까. 달려드는 거짓에 대해서 무엇이 거짓인지 이걸 알아야지요. 선악체계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제가 거짓을 고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출발이 선악체계부터 시작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출발은 뭐다? 악마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생각은 악마의 생각이에요. 이게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돼요.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잖아. 그거는 현재 우리 인간이 그런 소리할 입장이 안 되지요. 이미 생명나무 가는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전의 상태로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지금 우리 모습은 악마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선악체계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선악체계 자체가 뭐가 없다? 생명이 없는 거예요. 선악체계의 조건이 뭡니까? 선악체계 안에 있으면 네가 뭐가 된다?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이다, 신이 되고 싶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신이 뭐냐? 종교인데요.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품성, 본성을 드러내요. 그 본성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은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나서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아버지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바로 종교의식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너무 황당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프로이트란 정신분석학의 시조가 말하기를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나서 아버지를 죽여요. 죽이고 난 뒤에 미안하잖아요. 미안하니까 죄책감에 죽은 아버지에 제사 드리는 희생제물 드리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보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라고 보느냐 하면, 모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 인간이나 애들에게 묻기를 너, 커서 뭐 될래, 할 때 뭐 된다 합니까? 강다니엘? 이게 그에겐 아버지에요. 탐이 난 자리에요. 또는 애들한테는 방탄소년단? 또는 손흥민? 바둑 두는 사람한테는 박정환? 그리고 나는 대통령 될래. 대통령? 너, 누가 제일 좋아?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지? 교회에서는 목사님? 직장에서는 사장님, 회장님?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아버지 자리가 육신의 아버지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자리가 하나의 자기의, 아까도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하나의 대상이 있다고. 대상의 자리가 자기의 존재라는 개방이 되게 되면 대상의 자리가 해석의 자리가 되고 그게 욕구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탐내지 않는 인간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탐을 내는데 탐낼 때 탑, Top of the world 세계 제일 꼭대기를 인간은 탐을 내게 돼있어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아버지의 자리에요. 신의 자리. 나만 신이고 싶은데 나보다 더 신처럼 갖고 있는 절대 권력이 애들 눈에 보이는 거예요.

만약에 피겨를 하는 아이가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누가 피겨 제일 잘했습니까? 김연아지요. 그럼 김연아가 신이 되는 거예요. 트롯 영웅이 누굽니까? 임영웅. 트롯하는 사람에겐 영웅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존재에 보람을 주고 인간에게 사는 기대와 희망을 제공하는 게 신이란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본인이 원하는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차지하게 되면 신이니까 신이, 이게 어딜 내 자릴 탐내, 하고 화내겠지요. 화내니까 탐을 낸 본인이 좀 미안스럽지요. 이렇게 봅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어떤 보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희망이 있어야 살거든요. 인간이 희망이 없으면 못 살잖아요. 어떤 목표가 있단 말이죠.

아버지가 어떤 점에서 좋으냐 하면, 나에게 일정한 내게 목표를 제공한 점에선 아버지께 감사해요. 그러나 인간이 나에게 목표를 준 건 하나의 모델에 된 것엔 감사한데 감사로 끝나게 아니란 말이죠. 인간은 기어이 아버지가 갖고 있는 그 자리가 탐이 나서 그 아버지를 뺏어버린단 말이죠.

이게 원래 아버지 자리인데 뺏었으니까 여기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내 자리가 아닌데 아버지 자린데 뺏었으니까 미안함이 죄책감이 되는 거예요. 죄책감이면 용서를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방법은 뭐냐? 내가 제사를 드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팼다가 미안해서 희생제물 드리고. 이게 종교라는 겁니다. 이 말은 교회 기독교, 불교만 종교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은 다 종교적이란 뜻이에요.

결국 오늘 제목이 [악마의 제안]인데 악마의 제안이 뭐냐 하면,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신이 되기 위해선 내가 아버지 자리에 앉는데 중간에 실패하거나 좌절하거나 잘리면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무조건 신이 되기 위한 나는 영원해야 돼요. 중간에 끊어지면 안 돼요. 소멸되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되고 죽을 뻔한 건 돼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을 많이 죽을 뻔까지 희생했더니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줬다. 뭐 이러면 괜찮은데 진짜 죽어서 죄인 되어 가버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간당간당하게 뭔가 남아있어야 돼요. 아직도 나는 약한 가는 줄처럼 모든 걸 상실한다 할지라도 상실한 것이지 아예 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인간은 아예 끊어졌어요. 하나님과 이어지질 않았어요. 악마와 든든하게 이어졌지요. 악마와 이어져놓고 자꾸 악마가 거짓말하는 게 뭐냐? 너는 신과 이어져있다고 하니까 하나님과 끊어진 입장에서 자기는 나쁜 악마와 이어질 리가 없어. 아직도 내가 부족하고 죄인이고 지옥 가도 마땅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어떤 연결점이 있을 거라고 자꾸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에게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본심이 있으니까 이 선함은 곧 하나님이 선하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선한 품성과 나의 선한 품성과 서로 이어져있으니까 이건 끊어져도 아주 끊어진 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근근이 자기의 신적인 영원함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그 대목을 읽어볼게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묻습니다. 구스인, 흑인이죠. 흑인 피부가 백인 됩니까? 안 되지요. 표범이 반점이 변할 수 있습니까? 표범의 반점이 바뀌면 그게 송아지지 표범이겠어요? 절대로 안 돼요. 절대로 안 되는데 만약에 그것이 변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 말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흑인입니다.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사진 찍을 때도 흑인이에요. 그런데 뉴욕의 맨해튼에서 사진 찍을 때도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에요. 북극에 가서 찍어도 그 눈 많은 곳에서도 흑인이에요. 배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본인이 이미 범죄 하고 이미 저주받았고 하나님의 생명나무에서 끊어진 상태라는 점은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변하지 않는 것을 변하게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게 교체가 돼야 돼요. 그 교체가 뭐냐? 대신 죽으심인데 죽어야 돼요. 같이 죽는 분에 의해서 우리가 죄인이 의인 되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만 할 수 있느냐? 예레미야에서는 바로 주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누굴 보내는 거예요. 생명나무 자체가 언약 완성 자체로 우리에게 보내는 겁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욱 더 착해지는 게 성령이 온 게 아니고요. 그분이 내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성령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선악체계의 못된 버릇으로서 자꾸 나는 착해져야 돼, 착하게 변화돼야 돼, 라는 것을 전부 다 뜯어내는 겁니다. 참 뜯어내니 아프지요. 아까도 했잖아요. 인간이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뜯어내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아프지만 왜 뜯어내시느냐 말이죠. 그래야 내 안에 진짜 십자가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나는 신이다. 그 악마가 들어있는지 보자는 거예요. 십자가 들어있으면 아프지만 뜯기고 난 뒤에는 다시 한 번 십자가 드러낸 것에 대해서 주께서 일방적인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거고.

만약에 십자가도 없으면서도 주님도 없으면서도 마치 주님이 있는 양 예수님이 들어있다고 우기는 그런 사람은 뜯어내게 되면 진짜 죽기 살기로 못 뜯어내도록 강력하게 거부하고 결국 그 안에는 마귀가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버립니다. 뜯어낸다고 했는데 뜯어내는 방법이 오늘 시편 18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작살내버립니다.

진도 나가겠습니다. 시편 18편에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해서 14절에 보면,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부셔버린 거예요. 하늘 있고 물 있고 땅 있는데 물을 통과해서 물 밑에 있는 땅을 다 박살내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은 물 밑에 있는 터가 나타나는데 15절에,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꾸지람이에요, 꾸지람, 나무라는 거예요. 이 땅을 향하여.

16절에 보면,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거예요. 그럼 건짐 받았다는 것은, 이 땅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 땅의 모든 자가 흑인, 그러니까 선악체계에 있는 죄인이라고 봅시다. 마땅한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 거예요.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끄집어내줄 때 진짜 우리가 착실히 살아서 끄집어내주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 아까 했지요. 뭐만 자랑한다 했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다시 할까요. 내 속에 악이 있고 선이 있다. 누가 이긴다? 악이 이겨요. 선하고 싶지요. 선악체계니까. 그런데 악이 이기는데 어떻게 해. 율법을 통해서 악이 아니라 하는 것도 악으로 드러나는데 어떻게 해.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잠자고 있는 악도 거기서 자극을 받아서 완전히 악이 활개를 치고 율법을 위반하는 식으로 우리 몸은 이미 그런 몸이 돼버린 거예요. 죄가 활성화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개방성으로 돼있는 우리 몸이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짓을 했고 오늘날 교회들이 계속해서 바리새인 짓을 하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인간들의 신이 되고 싶은 그런 충동, 아까 했지요. 바벨탑,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신이 되고픈 악마의 충동에 의해서 교회 나와서 지가 애써 믿고 막 빛 받고 성령 받았다 하면서 지가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십자가를 자랑해야지요. 딴소리하면 안 돼요. 당신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 얼마나 쉬워요. 딴소리할 필요 없다니까요. 십자가만 사도 바울이 자랑한다면 본인도 그것만 자랑하면 되잖아요.

부부 싸움할 때 꼭 이런 식이에요. 둘이 말다툼하다가 남편이 조용한 게 좋다 싶어서 빨리 상황을 종결시키려고,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그러면 아내가 거기서 멈춥니까? “뭐가 잘못됐는데, 뭐가 미안한데?”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아니, 뭐가 잘못됐는데? 당신은 나를 기분 더럽게 했어. 나를 아주 우습게 봤어. 뭐가 잘못됐는데?”

도대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자꾸 “주님이여,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너, 내가 호구로 보이지. 뭐가 잘못됐는데?” “어릴 때 엄마 말 안 듣고.” “그거는 옛날에 이야기했잖아. 뭐가 잘못됐는데?” 잘못된 걸 몰라요. 내가 선과 악으로 싸인 이런 생각이 있다는 자체가 잘못됐는데 내가 착하도록 변화되겠다.

이게 잘못됐는데 그게 잘못된 줄 알아야 십자가에 꽂힌 사람이거든요. 나는 뭘 해도 개고 아무리 착해도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마땅히 그렇습니다.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죄인입니다. 이러고 변화되더라도 더욱 더 죄인 되도록 변화됐다고 하면 되는데 그래도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면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 받아서 점점 착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싸움이 방금 시편 18편에서 싸움이 결국 무슨 싸움이냐 하면,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싸움이에요. 바리새인은 모든 인간들의 대표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죽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고방식, 어떤 선악체계로 그들은 자기 의를 고집하고 있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거든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누구라 했습니까? 악마라 했잖아요. 악마가 남의 이야기고 딴 데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악마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을 계속 유지하게 한 게 악마에요. 우리는 악마의 앞잡이고요.

사람들은 생각해요. 점점 더 착해진다 할 때는 높아지는 거죠. 착한 하나님은 위에 있고 나는 착해지려고 노력하니까 저 높은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신 것이 아니고 제일 낮은 곳에 계셔요. 십자가에 있다고. 그러면 만나려면 내가 점점 더 죄인 돼야 돼요.

죄를 더 지으란 말이 아니에요. 더 지으나 안 지으나 살아가는 자체가 죄기 때문에 그러니까 선악 쪽에서 악을 더 지어서 죄인 되는 게 아니고 선악체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내게는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그 자체가 주님 십자가를 모독하는 죄가 된다고 깨닫는 것, 이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만 주님과 만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25.♡.150.26)20-04-14 15:49 
20200413b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선악체계와 생명체계를 생각해 볼 때 이 대자연을 움직일 때 선악체계로 움직여지느냐, 아니면 생명체계로 움직여지는지 따져보면 쉬워요. 예를 들어서 내가 윤리적으로 산다. 그러면 달의 궤도 바뀝니까? 내가 바르게 산다. 그러면 해의 궤도가 바뀔까요? 달이 어두워지고 밝고 별이 떨어지고 새로 생기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르게 산다, 선악적으로 옳게 산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대자연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연관성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악체계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대자연이 인간의 선악체계에 동조하거나 연계된 협조는 없다는 거죠. 그럼 뭐냐? 대자연과 우리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은 선악체계 말고 생명체계로 나아가게 되면 비로소 대자연과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되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됩니다. 과학적으론 도무지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없어요. 내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늘의 별이 갑자기 밝아지거나 어두워질 리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옛날 고대시대에 비가 오지 아니하면 임금이 자기 아들 바쳐서 비 내리게 하겠다고 억지를 쓰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체계지요.

왜냐하면 임금, 왕, 이 사람들은 메시아가 아니에요. 메시아는 대자연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분이거든요. 인간이 속한 대자연과 하나님나라가 뜻이 하나로 움직이도록 해주는 것이 중간에 메시아에요. 메시아는 다른 말로 기름 부은 자. 기름 부은 자 메시아가 이렇게 하나님 마음과 지상의 마음을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하나님 약속대로 실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라기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 말라기 4장 6절에,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구약 마지막이 땅을 치는 것, 하나님의 폭력,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요. 구약 마지막이.

그러면 그전에 대책은 뭐냐? 대책은 엘리야가 오는 거예요. 엘리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엘리야에요. 예수님은 선지자의 완성이니까. 세례요한도 엘리야로 왔지만 온전한 엘리야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엘리야는 예수님이 됩니다. 그 엘리야는 모세가 명한 율례와 법도를 다 지킬 수 있는 분이 되어야 이 대자연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로마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화해 또는 화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 말을 요즘 상황으로 바꿔 말하면, “모든 인간이 코로나에 걸렸으매” 그러니까 직업이라든지 남녀 성별 관계없이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다 병에 걸린다 이 말이거든요. 모든 사람이 죄라는 바이러스에 걸렸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저 사람보다 착합니다, 저 사람보다 죄가 많습니다. 나는 N번방에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과 인간의 차별할 수 있는 여지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선악체계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선악체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이란 화해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대자연이 화해한다는 것은 버스를 같이 해서 같이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제가 지난 어느 설교에서 경리사원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리사원이 자기 처지가 덫에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해결점이 없을 때에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느냐 할 때 욥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달과 내가 경리사원으로 있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야 된다. 해와 달과 별과 모든 것은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거죠.

그런데 해와 달과 별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자기만 억울한 것 같아. 맨날 억울한 것 같고 자기만 이 세상에서 고생 제일 많이 한 것 같고 자기는 고생 안 해야 될 존재가 하나님께서 뭔가 실수를 해서 자기한테만 구박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달의 표면은 곰보처럼 분화구가 많아요. 그렇다고 달의 은토끼가 불평하던가요. 나를 왜 이렇게 분화구고 화산이 터졌습니까, 이런 식으로 불평 안 하지요. 달은 달대로 별은 별대로 지구는 지구대로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화목의 뜻을 담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큼은 악마의 제안을 받고 선악과 따먹어서 선악에 대해서 지가 안다고 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반발하고 불만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불평과 불만, 반항기 어떻게 되겠습니까? 없애야 되겠지요. 죽여 버려야 되겠지요. 전부 다 제거돼야 되겠지요. 제거하는 방법은 인간을 죽이면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고맙게도 하루씩, 하루씩 죽어가게 만듭니다. 없애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반항하겠지만 그래도 없애버립니다.

인간이 두 개 겹쳐있다고 봅시다. 한 인간이 있고 뒤에 점선으로 돼있는 다른 분이 계시다고 봅시다. 인간은 점선으로 돼있기 때문에 다른 분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나라는 존재가 너무 강해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현존재가 있어서 자기 자리가 있다고. 타고나면서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어떤 여망이 있다는데 여망, 기대는 누구의 자리를 탐낸다 했어요?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는 거예요. 이게 종교적이에요.

탐을 내면서 미안해하고 미안해하면서 또 탐내고. 감사하면서 또 미안해하고. 그러면서 아버지 자리를 포기 안 하려하고. 항상 목표가 거기 가서 자기보다 강한 것을 탐내지요. 어떤 사람 소원이 부장 자리가 탐이 난다. 자기에겐 아버지가 되겠지요. 어느 날 부장 되었다. 끝입니까? 부장 다음에 임원이 또 자기 아버지가 되는데. 임원 다음에 사장, 회장, 끝도 없어요. 인간의 욕망이란 계속 아버지 자리가 새롭게 생겨나면서 그게 탐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신이 되더라도 멈추질 않아요. 악마가 제안한 것의 한계가 되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에 너무 집착하고 사력을 다하여 자기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을 지키려다보니까 뒤에 계신 주님의 존재를 느끼질 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뒤에 계신 분이 이쪽을 밀어버리죠. 무가치하다고 앞에 있는 것을 밀어버리는 겁니다.

밀어버릴 때 이게 만약에 주님 앞에 달이 있고 별이 있고 해가 있다면 달을 밀고 해를 밀고 별을 민다면 그들은 아무 소리 안 하지요. 그런데 유독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밀어버리면 인간만이 자꾸 불평, 불만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대구강의에서도 그런 것 한 적 있는데.

로마서 8장 17절에 보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후사요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는데 왜 영광 받기 위해서 고난 받아야 됩니까?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영광을 주려면 곱게 주지 왜 고난이란 걸 거쳐 가야 되느냐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목표가 내가 신이 되는 게 목표가 아니고 내 뒤에 고난 받은 분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고난 받게 하는 겁니다. 내가 신이 되는 것은 악마의 제안이에요. 하나님께선 우리가 신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주가 되는 걸 목표로 하지 내가 주의 자리에 앉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악마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가짜 예수를 그 자리에 심어놓는다든지 나를 예수님 자리에다 걸쳐놓겠다는 악마의 요구에 우리는 부응해서 내 잘난 맛에 내가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점점 좋아지는 것으로 변화된다. 그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걸 떠밀고 없애기 위해서 대자연을 동원해서 우리로 하여금 허무한데 굴복케 해버려요.

19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허무한데 굴복한다는 것은 허무가 우리보다 더 세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가 허무해야 된다는 말이죠. 허무하다고 해서 우리가 신자가 아닌 게 아니고 마땅하게 허무한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주님한테 있음을 아는 성령 받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썩어짐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썩어짐이 당연하다는 뜻이고, 당연하다 할 때 그냥 당연하다하지 말고 이유를 알아야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만이 옳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앞에 뭐가 붙어야 돼요? 그냥 주님만이 옳습니다, 하면 주님만이 옳다고 주장한 나도 옳아져버리잖아요. 이런 건 아니란 말이죠. 이러면 생명체계가 아니고 선악체계에요.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나는 아니고, 이게 있어야 돼요. “나는 아니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나는 아니란 말은, 나는 악마로부터 출발했고 선악체계로부터 출발했는데 그것은 틀려먹었다, 아니란 뜻에서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아니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그러면 나는 아니라고 할 때 그러면 우리가 흉내 낼 수 있잖아요. “주님, 저는 아니고요 주님만이 옳습니다.” 하면 주님 뭐라고 합니까? “네가 왜 아닌데? 잘난 네가 왜 아니라고 하는데. 혹시 네가 이런 꼼수를 쓰는 게 아닐까?”

나는 아니고 주님만이 옳다고 하면 혹시 나는 이 고백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가, 라는 구원받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연출하고 연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만한 것이 인간이거든요. 나는 아니고 나는 부인돼야 되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하는 식으로 결국 내가 나를 건지려고 하는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인간이.

그러면 달은, 그러면 해는, 별은 운명은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이런 수작부리는 나는 달과 별과 해에 대해선 모르겠고 그건 내 소관 아니고.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성경에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다시 봅시다. 시편 18편에서 이야기하는 여기에 다윗 하나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총동원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 신기한 이야기지요. 성경을 보게 되면 참 신기해요. 18편 8절에 보면, 그 입에서 불이 나오고 불의 숯이 피고 그리고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고 천사들도 동원되고 바람까지 불고. 15절에 아까 이야기했듯이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여기 17절에 보면,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그러니까 원수가 나보다 더 세니까 나는 어떤 노력을 해도 원수 바깥으로 못 빠져나오고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사태를 왜 이런 식으로 봐야 되느냔 말이죠. 아까 이야기한대로 성경을 이용하려하지 말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세요. 시편 18편 속에 들어갑시다. 속에 들어가게 되면 바깥에서 보면 내가 여기 있고 해 있고 별 있고 달이 있다. 산이 있고 짐승이 뛰어놀고 같은 사람들이 있다. 건물이 있다. 집에 오면 자식들 있고 친구들 있고 교회 있고. 끝이잖아요.

제가 물을 테니 보시길 바랍니다. 자, 우리가 그냥 보게 되면 달, 별 있고 자연 있고 나 있고 친구 있지요. 그럼 묻습니다. 여기에 나의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악마가 어디 있어요? 악마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성경을 보면서 성경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성경을 그냥 대상으로 보니까 성경에서 악마라 하니까 도대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가 구상한 세계 속에는 악마는 없어요.

악마 같은 인간은 있겠지. 나를 해롭게 하는 건 있겠지만 악마가 없다니까요. 하나님의 원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상해. 성경에는 원수가 어디 있다는데 내가 본 성경은 이 세상은 악마가 없고. 뭐가 잘못된 거야? 본인이 잘못됐지요. 본인이 잘못된 거예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느 정도 어려우냐?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워요. 거울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 잘난 모습만 보이겠지만 거울 속에 들어갔다면 하나님의 진노 안에 들어간 거죠. 하나님 세계 안에 들어간 겁니다.

물어봅시다. 천국은 내 세계입니까, 주님 세계입니까? 주님 세계지요. 내 세계 아니지요. 그러면 천국 가기 전에 내가 만든 현실은 내 세계에요, 주님 세계에요? 이게 주님 세계 되려면 악마가 있어야 되고, 내 세계라면 악마가 없어야 돼요. 주님의 원수가 없어야 된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악마를 못 느끼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게 필요한 것만 챙기니까 이게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곳이죠.

따라서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 말이죠. 성경 속으로 들어가면 천국은 내 세계가 아니고 주님의 세계기 때문에 천국 가기 전에 내 세계는 박살나야 되지요. 나를 위한 세계, 내가 잘났다고 나를 칭찬해주는 세계는 천국 가기 전에 박살나야 되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한 겁니다. 그게 코스에요. 정 코스입니다.

박살나는데 내가 내 가슴을 칠까요? 아니요. 대자연이 나를 쳐줍니다. 대자연 배후는 천사가 있고 천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고. 그중에 하나가 신종 코로나에요. 내 세계에서 신종 코로나는 없었어요. 작년까지 신종 코로나 없었습니다. 중국의 우한에 나타날 때까지는 신종 코로나 몰랐어요. 어떤 과학자도 몰랐어요. 그래서 과학자들이 한계가 있는 거예요. 있는 것만 알지 없는 것은 모르는 거예요. 그러던 것이 점령하니까 내 세계 속에서 신종 코로나에 대해서 그렇게 반항하고 고함지르고 못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시편 18편에 들어가 있다면, 신종 코로나가 됐던 아까 같이 우박이 내리든 그리고 하늘에서 불 심판이 내리든 그것은 너무나 당연지사에요. 너무나 자연스러워요. 이 세상에 별이 빛을 잃고 달이 빛을 잃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니고 성경 내용대로 한다면 당연히 일어날 일입니다.

아담 때문에 같이 망했다는 겁니다. 우린 모르는데 별이 알려주고 달이 알려주고 신종 코로나가 알려주는 거예요. 너, 문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악체계에 있다는 자체가 망했다는 거예요.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위주로 개인적 위주로 하나님을 거론하고 예수님을 거론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싶네요.

여기에 17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여기 경리사원이 있었고 달이 떴다고 합시다. 지금 이 사람은 반항하고 반발하지요. 달은 반발하지 않습니다. 달은 자기가 무너지고 빛을 잃고 망한다는 것을 이미 알아요.

피조세계는 아담이 범죄 함으로 아담이 악마의 말을 들음으로 이 우주 자체가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것을 달도 별도 알고 코스모스도 알고 날은 날에게 지식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다 정보를 알고 있어요. 인간만 악마에 찌들어 모를 뿐이지 다른 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이 왔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첫째, 망해야 마땅함. 두 번째, 그 원인은 바로 주의 원수가 그런 짓했음. 세 번째, 나는 주의 원수를 내 힘으로 이길 수 있다, 없다? 없다. 정신 차리세요. 집중하세요. 나에겐 주의 원수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편 18편 17절의 말씀이에요. 못 이기는 거예요. 이길 수 없어요.

그리고 네 번째가 중요합니다. 악마한테 이길 수 없잖아요. 악마한테는 못 이기는데 아직까지 밥은 먹고 산다. 그럼 이건 어디서 온 겁니까? 주님의 은혜에요. 주님의 선물이고 주님이 살려줌이에요. 주님한테 고맙지요. 우리가 자기 자신이 이 정도로 무능함을 알아야 모든 것이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잘난 맛에 살게 되면 주님께 돌아갈 모든 영광과 찬양을 본인 잘난 맛에 살아간다니까요. 주님을 증거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 구원받았다는 본인 자신을 맨날 집착하고 그걸 증거 하다보니까 그게 뭐냐 하면, 악마의 술책이고 악마의 전략이거든요. 왜? 주님의 공로를 가리기 위해서 지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이 화나면 화내세요. 오히려 화 안 나면 안 내면 돼요. 주의 원수, 악마한테는 못 이깁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8편 17절에 의해서 우린 못 이겨요.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재앙의 날에, 그러니까 해와 달과 모든 것의 초점이 하나님께서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이 세상을 아주 망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세상이 망하는 거예요. 간단하지요. 쉽지요.

노아 홍수 때 언약이 왔다. 언약이 왜 왔겠습니까? 이 세상 망하려고 온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언약이죠.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 망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망할 수순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입니다.

19절에 보면,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구원 앞에 붙는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구원을 빨간 걸로 쓸게요. 구원 앞에는 이게 나와요. 주님의 기쁨. 이미 우리는 악마한테 못 이깁니다. 악마한테 못 이기는 것을 변명이나 핑계대면 안 돼요. 우리는 조상부터 못 이기기 때문에 못 이긴 거예요. 망해야 되는 것 맞아요.

그런데 구원, 다른 말로 구출이지요. 구출이란 무엇이 들어와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기쁨이 들어와야 구출이 돼요. 주님의 기쁨이란 나의 기쁨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내가 기뻐하는 것은 구원받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쁨이 쓰레기 같은 내 안에 들어와서 주님의 기쁨이 드러나니까 그것이 나의 기쁨으로 보이는 것이지 내가 만약에 기뻐한다면 처음부터 노리는 바가 있어요.

“나 비록 죄인이지만 구원돼야 돼.”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죄인 되었으면 망해야 되지요. 어떻게 죄인 되었는데 구원돼야 돼. 어떻게 이 공식이 성립됩니까? 이 공식은 성립 안 돼요. 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죽었으면 몰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죄의 값은 저주인데 저주받아야 되지 어떻게 저주받아야 될 인간이 구원을 기대합니까?

이 죄란 분명히 생명체제가 아니고 선악체제에서 나오는 악마의 발상이란 말이죠. “죄인 되었지만 뭔가 봐줄 거야.” 이런 것 있잖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죄인 되었으면 죽어야 되는데, 그렇다면 아까 공부한 걸 다시 해봅시다.

죄인 되었으면 죽어야 되는데 인간이 주님의 기쁨으로 기뻐하지 않고 내 구원받은 걸 기뻐한다면 처음부터 뭔가 내가 안 죽고 내가 죽어야 돼, 지옥 가야 돼, 그런 생각은 그냥 폼으로 위선적으로 내뱉은 말이고 사실은 인간이 뭘 노리고 있다? 아까 신의 자리, 영원한 구원받을 자리를 은근히 노렸는데, “하나님께서 주의 원수를 이기고 십자가로써 구원해준데.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이 그렇게 착한 분인 줄 알았어.”

이렇게 돼버리면 이거는 처음부터 노렸던 내 노림수가 통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돼요. 이것은 나의 노림수에 대한 나의 찬양입니다. 나의 의도에 대한 찬양이에요. 마치 악마가 집어준 체계, 논리적 시스템이 맞아떨어졌다고 지가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의 모든 시스템, 사고의 프레임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악마가 집어넣어준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논리는 악마가 준 거예요. 악마가 준 프레임이에요. 체제, 시스템이란 말이죠. 그 시스템에서 하나님께선 화를 내지만 언제까지 화내겠어. 봐줄 것은 봐줄 거야, 라고 악마가 부추긴 겁니다. 그러한 꼼수에 우리 주님이 놀아나지 않습니다. 내가 언젠가는 잘된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는 자체가 전적으로 내가 죄인 건 아니야.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것은 너무 심한 거야. 선악과 따먹어도 다시 구원될 날 있을 거야. 선악과 따먹어도 생명나무 따먹을 거야.

지가 지 마음대로 지어낸 있지도 않은 이론을 끄집어내서 언젠가 생명나무 따먹는다는 것은 악마의 수작이고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는 길 막았잖아요. 인간이 스스로 그러고 싶은 거예요. 왜? 악마의 마음이니까. 인간은 악마로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했지요. 악마의 마음이 죄인이지만 구원될 거야, 라고 기대하니까 종교가 발생된 거예요. 그 종교가 뭐냐? 신이 누리는 좋은 자리를 내가 뺏고 싶은 거예요. 라이벌로 여기면서.

주님의 기뻐하심으로. 주께서 나를 보고 기뻐하신 거예요. 19절에. 그러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데 기뻐해주시는 그 고마움에 화들짝 놀랐다고 할까요, 충격이라 할까요, 이것은 예상 못한 일이죠. 악마에 눌려서 맨날 하는 일이 하나님께 반발하고 불평하는 일밖에 안 하는데 그런 인간을 버려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줬기 때문에 자기가 윤리적으로 얼마나 착하냐, 그런데도 신경 쓸 여유가 없지요. 오직 천하의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찬미할 뿐입니다.

여기 20절에,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여기서 나란 다윗이지만 동시에 뭐가 되느냐? 장차오실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이것도 약간 설명이 필요한데 구약의 다윗 입장이나 오늘날 우리 입장이나 똑같아요. 아까 그림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고 점선으로 주님이 함께 있어요. 우리는 육신에 있어요. 주님도 육신에 있지만 같은 육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9장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 했으니까 같은 육신이 아닙니다. 전혀 달라요. 우리가 주님 만나면 죽듯이 다르단 말이죠.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다윗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보기에는 다윗 본인 이야기인데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 본인의 이야기를 앞당겨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다윗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도 구원받아야 돼요. 예수님도 죽었잖아요. 이 땅에 오게 되면 예수님도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예수님을 구원했습니다. 그게 성립돼야 그 계통으로만 그 방식으로만 우리가 구원돼요.

죽어야 구원되지요. 죽을 뻔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아이고, 혼났다. 이래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정말 죽어야 정말 부활돼요. 그럼 우리가 자살할까요? 자살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체계 자체가 이미 죽음이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체가 이미 죽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몸을 챙겨서 나를 악한 사람 말고 선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시도, 내가 선한 사람 꼭 되고 말리라. 그래서 그 선의 극치, 신이 되고 말리라. 점점 신에 가까이 가고 있다. 나는 기분 좋다. 이 자체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이 자체가 죽은 모습이다.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선하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은 코로나 때문에 보조금 주는데 사십만 원 갖고 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의료보험료 구만 오천 원 냈다고 못 받을 때 기분 좋다. 그것도 못 받느냐. 이게 기분 좋아할 문제 아니잖아요. 왜 나는 마땅히 돈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될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게 뭐냐? 남보다 내가 선하다는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 드는데 남보다 선하다는 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그 선악프레임, 그 시스템 안에서 놀고 있다는 자체가 악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비행기에서 낙하산 지고 뛰어내릴 때 초짜는 혼자 뛰어내리는 게 아닙니다.

이벤트 성으로 뒤에는 진짜 낙하전문가가 있고, 행글라이더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뛰어내리지요. 뛰어내릴 때 뒷사람이 낙하산 펴주고 다 해줘요. 그러면 내가 낙하산 핀다고 설치면 자칫하면 뒷사람이 분리될 수가 있어요. 분리되면 나 혼자 죽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딱 붙어서 할 때는 선악체계 자체를 우리 힘으로 못 떼어내요. 원수가 우리보다 세기 때문에 이 사고방식에서는 우리 힘으로 안 떨어져나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자체를 죄라고 지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잘난 나 말고 주님의 덕분으로 주님께서는 보조금 사십만 원을 안 주게 하셨다. 또는 주게 하셨다. 하루하루 살게 하셨다. 이런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기쁨이에요. 주님께서 일 해놓고 주님이 한 상을 우리 상으로 넘겨주는 겁니다. 한 몸이기 때문에.

21절에,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다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전부 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선악체계 자체가 죄기 때문에 스스로 선악체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벗어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구약에 시편 18편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24절) 누가? 하나님께서.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강의 오래하면 잊어버리니까. 언약이 통한다는 말은 생명나무와 통하지요. 이제 이 논리가 들어올 거예요. 언약에 위반되어서 하나님이 진노한다는 것은 생명나무가 아니고 선악체계지요. 그러나 인간의 시작은 무엇으로부터 합니까? 인간의 시작은 생명으로부터 못하지요. 쫓겨났으니까.

선악체계로 시작하니까 인간이고 모든 피조물은 자연적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어요. 후패할 수밖에 없어요.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어요. 저주 아래 있어요. 보조금 받으나 안 받으나 사는 게 힘들어요. 신종 코로나 물러가면 더 센 게 와요. 사는 게 힘들어요. 죽지 못한 게 한이 맺힐 정도로 힘들어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어떻게 얻느냐 하면,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어떤 분이 오셔서 여기 있는 선악체계를 다 이루고 난 뒤에 율법을 다 이루고 난 뒤에 생명나무로 가요. 왜? 생명나무를 만드신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의를 다하기 위해선 예수님은 여기서 필히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 했으니까, 필히 죽어야 되는데 어떤 죽음이냐 하면, 죄 없이 죽는 거예요. 의인인 채 돌아가신 거예요.

의인이 돌아가시니까 언약의 원리는 의에 대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생명나무의 원칙이기 때문에 살려주시는데 여기에 예수님과 같이 한 통속이 된 성령을 통해서 하나 된 사람은 선악체계에서 같이 통과하다보니까 그 사람도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지만 남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한테 전가되는 선물로서의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예수님이 곧 누구 이야기냐? 우리가 받은 선물, 혜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5절 봅시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슬리심을 보이시리니” 이렇게 할 때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슬림이 보이죠. 주님 살아 계시지요.

그럼 앞에 시편 18편에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이며, 13절에 뇌성과 우박을 내리시고, 15절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이 뭐예요? 이건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사특한 자에게 하나님이 거슬림을 나타낸다면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꾸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깨끗하지 않은 자에게 이미 악마의 제안을 넘겨받아 더럽게 된 선악체계로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더러운 악마의 품성을 갖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거슬림을 나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고생하고 아프고 늙어죽고, 그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는 것,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월호 지 자식 빠져죽은 것 너무 억울해하지 말란 말이죠. 대자연의 실수라는 그런 소리하지 말란 말이죠. 당연한 거예요. 성경에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그 다음에 27절 보겠습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셨던 일이고 우린 그 혜택을 입을 뿐이에요. 따라서 나는 십자가만 믿는다 하지 마시고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일을 지금 벌이고 있는가? 이런 일을 하신 거예요. 완전한 일, 깨끗하게 하시는 일.

30절 봅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정미란 정확하고 빠짐이 없이 요소요소에 다 개입하시니, 이런 뜻이거든요. 어느 경우라도 주의 말씀과 무관한 경우는 없어요. 해가 뜨나 달이 뜨나 경리사원이 어렵게 쳐하나 어떤 경우라도 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꼭 일어나야만 하는 일을 우리가 지금 겪고 있습니다.

32절에,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이 말씀을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걸 복습해볼게요. 인간은 성경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홀로 돼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데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성도한테는 홀몸이 아니고 옆에 점선으로 누가 계시다 했습니까? 주님이 계시지요.

주님이 계시니까 우리도 한 고집하지만 주님은 우리보다 더 세지요. 왜? 우리보다 더 센 원수로부터 이겼으니까 주님은 우리를 장악하는 악마보다 힘이 더 세요. 그래서 주께서 우릴 인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완전한 길로 인도해요. 완전한 길이 뭐냐 하면, 주님의 길이죠. 주님의 길은, 주님 가신 길, 무슨 길? 십자가의 길.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 가는 길에 뭐가 보인다 했습니까? 십자가가 보이지요. 참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 보인다 하는데 어떻게 성령 받았다고 우기면서도 십자가 말고 딴 게 변화된 잘난 자기 자신이 보인다 하니까 이게 어떻게 주께서 인도하는 길인지. 그건 아니거든요.

완전한 길은 내가 착한 게 완전한 길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인가를 날마다 더욱 더 느끼는 길이 완전한 길이에요. 높아지는 게 아니고 낮아지는 것, 뚝 떨어지는 길이 완전한 길이에요. 나는 인간도 아니었구나. 그 점을 나만 몰랐네. 천사도 알고 주님은 아는데 나만 내가 잘난 줄 알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욥의 경우를 봅시다. 욥이 처음에 자식 열 명 있고 부자 되었고 착하다고 하늘나라에 소문났지요. 그런데 욥이 중간에 고통 속에 들어가지요. 욥이 고통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하지요. 욥은 혼자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다면 나중에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날 때 욥은 뭘 느낍니까? 내가 그런 자식 죽고 재산 날아가는 길이 무슨 길이다? 그게 바로 제대로 된 길이고 완전한 길이에요.

이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면, 범사에 감사한다. 또는 같은 말로 무시로 감사한다. 시도 때도 없이 감사한다, 기도한다. 이게 같은 말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살면서 감사가 나오거든 주께서 인도한다보고, 불평이 나온다. 뭐 떡국에 만두를 안 넣었냐는 식으로 불평이 나오면 이거는 또 정신을 같이 다이빙하는데 주님은 안 보고 낙하산을 지가 조종하려고 설치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 인생 길 자기가 갈까요? 그동안 살아온 모습이 선악체계 속에서는 남들이 나를 뭐가 선하고 뭐가 악하다고 평가하고 비평하는 보는 눈들을 의식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뭘 보느냐? 아버지의 자리, 신의 자리가 탐이 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자리에 대해서 갖고 있는 높은 자리, 귀한 자리를 탐하다보니까 남들이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나, 이 정도 됐는데 아버지 자리에 앉은 것 맞지? 나, 무시 안 당해도 되지, 라고 자꾸 남한테 묻고 남들은 그걸 또 어떻게 평가하는지 기대하고. 이게 바로 주님 품 안에 있는 탕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탕자가 왜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빼돌려서 가출했습니까? 그건 되고 싶은 것이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집밖에 있기 때문에 집밖에 지 마음대로 혼자 살고 싶은 거기가 좋은 세상인 줄 알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와보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원래 좋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출했다 오니까 아는 거예요. 완전한 길이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게 좁은 길이에요. 그 십자가 가는 길 증거는 뭐라 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거죠.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란 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렇게 감사하고 하니까 그 다음에 살아가는 것이 펄펄 납니다. 33절에 보면,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전사가 되지요. 하나님의 싸움꾼이 되는데 이제는 날아다니며 싸움을 해요.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치 않게 하셨나이다”(35,36절) 실족치 않게 하셨다는 말은 늘 실족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나 혼자. 늘 실족을 하는데 뒤에 주님께서 실족한 것에서 빼내주니까 나를 실족치 않게 하신 공로가 주님한테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초부터 실족치 않는 게 아니고 늘 실족케 하는 감사가 없고 불평케 하는 일들을 대자연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37절에 보면,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원수를 공격한다 이 말이죠.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38절) 여기서 원수에 대한 감각이 생깁니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성도만 알지요. 이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악마의 정체에 대해서 첫 번째, 선악체계로 악마를 아는 것과 두 번째, 생명체계 안에서 악마를 아는 것과의 차이점을 보겠습니다. 선악체계에서 주인공은 누굽니까? 나지요. 나를 해롭게 하면 다 악마에요. 내 돈 사기 치고,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고, 내 자식을 왕따 시키고, 학교폭력으로 자식이 죽을 때는 악마로 보이는 겁니다.

참 이게 모순되는 게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젊을 때 나를 평생 먹고 살도록 좋은 회사에 취직시켜줬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왔는데 제가 물었어요. “집사님, 직업이 뭡니까?” 나이가 50 중반 쯤 되어보여서 잘리지 않았는지 했는데 자기 회사 너무 좋다는 거예요. 사장님도 너무 좋다는 거예요. 부동산회사 다녀요.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나를 좋은 회사에 취직시켜줬어요. 그 때문에 가족 네 식구가 평생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자전거 타고 가던 내 아들 팔을 부러지게 했다. 자, 계산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 이게 계산이 가능해요. 평생 취직시켜준 것을 80으로 본다면, 그리고 아들 팔 부러진 것은 20이라면, 80-20이니까 아직도 60만큼은 은혜가 남아있는 거예요. 수치적이고 수량적으로 계산되는 게 선악체계에요.

어느 게 선이냐? 나한테 잘되면 선이고, 나한테 못되면 악이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돈 백만 원 빌려줘 놓고 내 아들을 폭행했다면 그것은 백만 원 빌려준 선은 30이라면 내 아이 때린 것은 50으로 빼면 그 사람이 싫은 거예요. 그 다음부터 나의 악마가 돼버려요. 선악체계는 항상 감사하라 고맙다는 것을 계산으로 따져서 취직까지 시켜줬는데 아들 다친 것, 그냥 넘어가자. 그 할아버지가 평생 먹고 살게 했다. 이렇게 되면 넘어가는 거예요. 그 할아버지는 악마가 안 돼요. 그러나 선이 넘쳐버리면 악마가 돼버리는 겁니다. 이게 선악체계의 악마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엉망진 악마에요.

그러나 생명체계는 뭡니까? 이런 계산이 안 돼요. 무조건,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나에게 빼앗아 가면 그게 뭐가 돼요? 악마가 돼요. 내가 내 악마에요. 내 불평과 내 불만이 주님의 십자가, 내 옆에 낙하산 쥐고 같이 나를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발로 차고 때리고 주님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게 바로 내게서 뿜어 나오는 악마의 정체가 되는 겁니다.

다윗으로 머물지 않아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시편 18편은 다윗에 머물지 않습니다. 다윗의 예언대로 다윗의 말씀대로 고백대로 오실 분이 와야 돼요. 다윗이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시편 18편대로 움직이는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편 성경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옵소서. 성경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서 악마가 있고 주님이 있음을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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