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9a 부산강의 : [시편]26(18편)-본능과 증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보게 되면 뭔가 주목하고 싶은 단어가 나올 겁니다. “나의”에서 나가 누구냐? 하나님은, 쉽게 갑니다. “나의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태양이라면 나는 뭐냐? 나는 ‘프리즘’이다. 프리즘 하나 놓으면 일곱 색깔 무지개로 퍼지는 것. 햇빛이 들어와서 프리즘을 통과하게 되면 일곱 색깔로 퍼지잖아요. 사실은 일곱 색깔 더 되지만. 나라는 것이 프리즘 역할해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오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죽죽 나오잖아요.
그러면 여기 나오는 방패, 산성, 요새, 이런 단어들을 종합해보면 지금 나라는 이분은 싸움하는 거예요. 전쟁하는 중이에요. 그러면 정리되지요. 나는 어떤 가운데 있다? 전쟁 중에 있다. 그러면 전쟁에서는 적, 원수가 있지요.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의견이 일치될 때 할까요, 의견이 안 맞을 때 할까요? 의견이 안 맞을 때 하는 거예요. 내가 죽던지 네가 죽던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전에 휴전하든지 이런 것 없어요. 끝까지 가보는 거예요.
이 원수가 나의 하나님이라 함으로 말미암아 이 적은 누구의 적이냐 하면, 나의 적이 아니에요. 나는 프리즘이니까. 나는 도구, 수단에 불과하니까. 나의 적은 아닙니다. 절대로 나의 적은 아니에요. 누구의 적이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겠지요. 정리하면, 하나님은 자기 원수를 끄집어내어서 끝까지 그 원수의 실체와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것은 사용하셔서 전쟁에 돌입하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편 18편에서.
여기까지하면 여러분들의 굉장히 쉽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다음 이야기를 듣고도 과연 쉬운지 아닌지 보겠습니다. 과연 이게 쉬운 이야기인지 정말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인지 그 다음에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이 판단을 내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허드레한 일을 해요. 흔히 말하는 제일 낮은 데서 출발한다든지 그보다 못한 단기성으로 청소를 한다든지 하여튼 사회적으로 통념상 단순노동이고 지식도 없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돈 벌기 위해서 남이 잘 하지 않는 천한 일을 한다.
이 사람이 교회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다른 교인과 이야기하면서 뭘 자랑하겠습니까? 자기의 허드레한 일을 자랑하겠습니까? 자랑하지 않겠지요. 나의 치부를 들키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겠지요. 허드레한 일의 반대가 자랑거리잖아요. 뭔가 자랑할 수 있는 자식자랑이라든지 뭘 자랑하든지 말을 끄집어내서 남들이 나를 개 무시하는 말은 절대로 안 하고 남들이 대단하다고 엄지 척할 수 있는 그러한 자랑거리만을 이 사람은 교회 나와서 이야기하겠지요. 여러분,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전쟁하고 있는 겁니까? 이 사람은 지금 하나님 전쟁하는 게 아니고 나의 전쟁이죠. 나의 전쟁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한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는 거예요. 나의 수치를 감추고 자랑거리를 따로 끄집어내는 데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 원수와의 전쟁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라고 등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걸 거부하고, 자기가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은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 대단한 자랑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완전히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과 반대가 되겠지요. 네가 그런 지저분한 일을 하다니, 대단해요. 이렇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와 결탁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와 보통 인간들이 결탁이 돼있습니다. 자, 쉽게 갑니다.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신약의 고린도전서 같은 데서 확정지었습니다.
자랑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지요.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을 던졌어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돼있고 이걸 같은 말로, “나는 십자가로 승리했느니라.” 라고 돼있지요. 십자가로 승리했다. 십자가로 자랑거리가 되고 십자가로 승리가 되려면, 여기 승리란 전쟁 중이었는데 이게 완료가 되었을 때 승리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를 이겼는데 뭐로 이겼단 말입니까? 십자가로 이기고 그걸로 인하여 승리를 낚아챘다는 겁니다. 승리가 되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전리품.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 자가 모든 걸 다 갖습니다. 전리품이 되겠지요. 이 전리품을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약에도 나오지만 구약에도 이스라엘의 긴긴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신약에선 이걸 함축해서 짧게 나와요. 그래서 신약이 어려워요. 이 전리품이 성도란 것이 에베소서 4장에 나오거든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지금 제가 구약, 신약을 다 함축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가면 너무 논리가 힘들 수가 있기 때문에 먼저 결론부터 짓고 들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이야기는 납득이 되는데 어디가 가장 걸리느냐 하면, 허드레 일을 하고 천한 일을 하는데 어떻게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여기서 그만 우리의 평소에 사는 것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제가 어떤 고백 멘트를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 저에게 이런 몹쓸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일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 저에게 이런 몹쓸 일을 하십니까, 라는 이 문장에 합당한 그런 경우를 여러분이 상상해보세요. 몹쓸 일이에요. 이 질문과 같은 질문이 예수님이 마태복음 27장 46절에서 보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버리셨나이까는 버림 또는 버림받음이겠지요.
하나님께 버림받음은 예수님 입장에서는 아버지께서 몹쓸 짓을 한 거예요. 하나님께 짓이라 하면 안 되지만. 어찌하여 그렇게 하십니까? 이게 뭐냐? 프리즘 되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이 참 가혹하지요. 하나님이 자기 원수를 끝까지 추적해야 그 정체를 밝히는데 거기에 뽑혀서 사용당하는 인간은 어떤 경우를 경과해야 되고 밟아야 됩니까? 아들에게 버림받고 마누라한테 버림받는 일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아버지 당장 차 돌리소.” 이런 식으로.
그럴 때 아들을 탓하고 싶지 않아요. 누구한테 대들고 싶냐 하면, 하나님이여 어찌 저에게 이런 몹쓸 짓을 하십니까? 그걸 줄여서, 하필이면 나, 이렇게 되지요. 영어로 하면, Why me?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불렀던 유명한 . 왜 하나님이여 하필이면 저에게.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암에 걸리게 하십니까? 이런 죽을병에 걸리게 하십니까?
결국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단어로 하면, 자랑스러운 게 아니고 뭡니까? 이 모습이 이 현실 인생 자체가 수치스럽다가 되겠지요. 수치스럽다는 이걸 뭐로 바꾸느냐? 수치스럽다에 해당 되어서 비로소 그 안에서 자랑스럽다가 돼요. 이런 사람은 뭐만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해요. 자기는 어느 지경에? 몹쓸 지경을 당하면서.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알겁니다. 자랑스러워 할 내용에서 누가 빠지게 됐다는 뜻이지요?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십자가 자랑과 겸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 안 오고 절에 왔다 합시다. 절에 가서 부처 앞에 빌 때 비는 마음의 심리상태가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요? 모든 세상 사람들 보기에 수치스러운 것은 사라지고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자랑거리를 하기 위해서 그들은 손바닥을 위로 쳐들고 백팔 배를 하겠지요. 물론 허리는 아프지만 자기가 생각한 자랑거리를 건진다는 그 생각에 이런 고통쯤이야 감내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의 엄마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합니까. 여러분은 머리 좋으니까 질문을 낼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①돌이 여기 있다. ②강아지가 여기 있다. ③딸이 여기 있다. 차이점은? 뭐 간단하지요. 돌이 여기 있으면 나는 발로 돌을 찰 수 있다. 전혀 가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여기 있다. 강아지를 늘 차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바깥에서 약간에 성질나는 일이 있으면, “기어 붙지 마, 저리 가.”라고 찰 순 있지요. 그럼 딸은? 그것도 못난 딸이 아니고 예쁜 딸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못 차지요.
우리 인간에서는 이 셋 사이에 차이가 나요.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나의 기쁨, 나의 자랑거리, 나의 소망에 어느 것은 들어있고 어느 것은 빠져있다는 그 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돌멩이 같은 것은 대체가 가능해요. 이 돌멩이 없으면 다른 돌멩이로 갈아 넣으면 되니까. 강아지도 약간은 대체가 돼요. 그동안 사료 값 들어간 게 아깝지만. 죽고 난 뒤에는 다른 강아지로 교체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딸은 어떻습니까? 제가 욥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욥의 자식 열이 있었는데 다 죽었습니다. 아는 어떤 분은 맏이가 죽었어요. 그것도 의대 다니는, 연세대 의대에요. 온 가족의 희망이에요. 등불이고 횃불이에요. 그 부모가 평생을 공들였고 사는 보람은 자식 잘 되는 그것이 함빡 웃음을 지을 수 있는 늘 그 자식만 생각하면 기쁠 수 있는 그 아들이 결혼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해요. 아들 다 똑같지. 다른 아들 있으니까 그냥 사세요. 그게 되겠습니까, 그게 됩니까?
제가 아는 사람이라 목사라고 주제넘게 조언 아닌 조언했지요. “하나님의 아들도 당했습니다.” 그게 아주 퍽이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들 바쳐서 믿음 있는 자를 보셨습니다. 이참에 믿음을 정리해보세요. 그게 퍽이나. 자식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안 묻는다는 뜻이에요. 묻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딸은, 자식은 나의 대체가 안 돼요.
대체가 안 된다는 말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나는 나를 대체할 수 없어요. 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절대자기 때문에. 나라는 신을 다른 신으로 바꿀 용의는 절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지금까지 강의한 것 전부 다 짧게 요약하면, 나한테 누가 자랑거리다? 내가 자랑거리에요. 내가 자랑거리인 상태에서 시편 18편을 본다고요? 거짓말쟁이죠. 신종 코로나 이후에 모든 교회는 거짓말쟁이로 판정 났어요. 안 믿습니다. 믿지 않아요.
내가 자랑거리가 된다면, 제가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썼던 글을 다시 한 번 쓰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 저에게 이런 몹쓸 일을 하십니까?” 이것 기억하고요.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라고 계시고, 전쟁 중이죠. 하나님은 나의 □가 되신다고 집어넣지요. 지금 이런 경우에 이 사람, 나라는 분은 하나님에 자기가 수단으로 뽑혔고 하나님 일에 도구가 된다는 걸 인정하지요.
그러니까 내가 최종적인 겁니까, 아니면 나를 그렇게 일시키는 하나님이 최종적 분입니까? 하나님이 최종적인 분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원수와 전쟁이 붙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와 만약에 내가, 만약이 아니지 한 통 속이 된다면 같은 편이 된다면 나로서 마감이 돼요. 더 이상 나 말고 다른 신은 나의 라이벌도 될 수 없고 이건 나를 위한 존재가 돼요. 내가 하나님께 명령 내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산다니까요. 내가 아직도 염려한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선택 백성을 사용하셨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원수와 같은 편인 증거가 뭐냐? 같이 돼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이여 저에게 이런 무슨 짓이라 했습니까? 이런 몹쓸 짓을 왜 하십니까? 나는 내가 자랑이고 싶어요. 내 수치스런 것을 감추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 뜻과 반대로 뒤집어서 수치스러운 천한 일하는 것을 마치 자랑거리로 내세우게 하십니까? 나는 그런 것 싫어요. 그럼 나는 사는 이유도 없고 보람도 없습니다. 이건 내 생각과 달라요, 라고 되겠죠.
그렇게 여러분 기억하시고. 돌이 있다. 강아지가 있다. 딸이 있다. 하나님은 전부 다 하나로 봐요. 똑같은 걸로 봐요. 이걸 본능이라 합니다. 인간은 본능대로 살거든요. 전부 다 똑같아요. 모든 게 똑같아요. 돌이 있다. 강아지가 있다. 딸이 있다. 이건 결국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과 하나님의 원수와 동일시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자랑거리가 되면 안 되거든요. 이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면 하나님 편에 누가 있느냐? 하나님 쪽에서는 십자가, 그 수치스런 십자가가 우리의 본능과 반대가 됩니다.
본능이란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못 벗어나요. 기쁜 소식이에요. 나는 꾸준히 나에요. 그리고 나는 절대로 내 이익 밖으로 나간 법이 없어요. 나는 내 이익만 있고 그래야 내 자랑거리가 유지가 돼요. 지속되니까. 이걸 슬프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연해야 돼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당연해야 됩니다.
로마서 3장, 갈라디아서 2장, 여러 가지 있는데 로마서 8장도 그런 게 있지요.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할게요. 로마서 보시니까.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율법의 행위입니다. 잘 보세요. 율법은 선한 거예요. 율법의 행위로 뭐가 안 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안 된다고 하느냐 하면, 율법이 잘못됐느냐, 네가 잘못됐느냐?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누가 잘못된 거예요? 율법이에요, 우리에요? 우리가 잘못된 거예요. 잘못됐으니까 고칩시다, 하지 마세요. 이거는 마귀 짓이에요. 주님께서는 고치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네 주제파악을 하라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 말씀 듣고 우리의 행위는 나의 자랑거리에서 나의 절대성에서 포기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이걸 기쁘게 생각하세요. 내가 누군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을 즐겁게 기쁘게 생각하란 말이죠. 천할 일 허드레 일이 자랑거리가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게 무슨 말이 돼요. 내가 허드레 일 천한 일을 했더니만 그 다음에 내 자식이 사법고시에 합격이 됐다. 그럴 땐 어떻게 됩니까?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자랑거리에 나의 허드레 천한 일은 어떻게 자랑거리냐 하면, 부모로서 희생할 도리 다했다. 희생이란 이름으로 자랑거리에 포함이 돼버리죠.
그러면 뭐냐? 내 딸은 대체 불가가 되는 겁니다. 사법고시 합격한 아들은 대체 불가에요. 이건 죽을 때까지 부모의 나의 자랑거리가 되는 겁니다. 이건 바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거죠.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 어떤 분은 그럴 거예요. 목사님은 논리가 그런 식으로 몰아세웁니까? 왜 자꾸 인간의 죄성을 부각시킵니까, 라고 시비 할 거예요.
제는 요한복음 11장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거기에 한 가족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마르다, 그 다음에 누굽니까? 나사로. 나사로가 갑자기 아파서 갑자기 죽어요. 그때 마르다, 마리아의 마음은 뭐냐? 하나님이여 또는 주님이여 어떻게 우리 가정에 이런 몹쓸 짓을 하십니까?
그런데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나사로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제가 강의하면서 계속 논리적으로 하는 것은 이 가정에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무엇이 이익이냐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개인을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말이죠. 자, 나사로는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 마리아는 우리 가정 조졌다고 본 거예요.
그냥 나사로입니까? 기둥 같은 나사로에요. 오빠가 그냥 오빠가 아니에요. 진짜 아버지를 대신한 오빠에요. 엄마를 대신한 오빠라고요. 그 여동생들은 그 오빠를 정말 사랑했고 정말 의지했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자랑거리에요. 우리 집안의 자랑거리는 우리 오빠가 있다는 거예요. 그냥 그렇고 그런 오빠가 아니라 건강하고 든든한 오빠, 의지할만한 오빠.
그런데 그 오빠를 누가 죽였습니까? 마르다, 마리아는 누가 죽였다고 봅니까? 답변해보세요. 하나님이라고 하지 말고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였다고 했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1장에는 안 나와 있지만 자칫하면 예수님 멱살 쥘 수 있어요. 예수님 죽였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분명히 사전 통보했거든요. 오빠가 앓는다고 통보했다고요.
예수님께서 통보를 안 받은 게 아니에요. 언질을 받고 일부러 안 갔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른 데 병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일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마르다, 마리아는 설마 하나님이 죽이려 해도 우리에게 누가 있다? 든든한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돈독한 사이였어요. 식사도 같이 하고 맛있는 잡채도 해주고 고추튀김도 해주고. 그렇게 우리한테 잘해주고 그걸 또 주님께서 인정을 해줬고. 마리아야 네가 말씀을 듣다니 잘했다. 칭찬을 얼마나 해줬어요.
그런 사이라면 우리 아쉬울 때 우리가 힘들 때 후딱 만사 제쳐놓고 올 줄 알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안 갔잖아요. 그럼 누가 죽인 거예요? 병이 났는데 바로 옆에 친하게 지내던 의사가 있었어요. 의사가 와서 소독이나 하면 나을 그런 병이에요. 통보 받고도 안 왔어요. 그러면 그 사람 죽으면 결국 누가 죽인 거예요? 의사 죽인 거죠. 예수님이 죽인 거죠.
자, 나사로를 기둥 같은 오빠를 예수님이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친하게 잘 지냈는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모른다는 말은, 이 말은 본인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본인이 지금 왜 사는지 몰라요.
아까 돌이 있지요. 돌이 왜 사는지 압니까? 모르지요. 강아지가 있다면 강아지가 왜 사는지 압니까? 모르지요. 엄마가 딸을 사랑합니다. 딸은 왜 사는지 압니까, 모릅니까? 부모가 딸을 사랑합니다. 그럼 딸은 사랑받는 그걸로 자기 사는 이유가 되고 존재의 근거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이건 본능이니까요.
여기 본능이란 말은, 땅에 토끼가 있다고 보세요. 하늘에 독수리가 토끼를 발견했어요. 토끼가 독수리를 발견하고 도망칩니다. 이걸 뭐라고 합니까? 독수리 마음을 읽었다고 이야기합니까, 본능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본능이지요. “독수리는 지금 배고플 거야. 내가 잡혀줄까?” 이런 생각 없어요. 그냥 본능이지요. 부모가 딸 좋아하고 자식 좋아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본능이라니까요.
그런데 본능이 사는 이유입니까? 본능이 인간이 존재하는 근거가 돼요? 나는 왜 사냐? 본능대로. 그럼 왜 죽는데? 몰라. 그럼 왜 사냐? 남들 다 죽는데 따라 죽으면 그만이지. 죽는 것 겁나지 않아. 살다가 그냥 가면 되지. 본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죽음 속으로가 아닙니다. 죽음을 피해서 살아가요. 오랜만에 제가 바른 소리합니다. 그렇지요.
가지 말라는 게 뭡니까? 죽음을 피하는 게 본능이에요. 그런데 죽음 속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자랑거리죠. 십자가는 죽음 속에 들어가야 자랑거리가 나오지 죽음 피해서 무슨 십자가겠습니까. 예수님이 죽는다 할 때 마귀가 사탄이 베드로 속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갑자기 말렸어요. “예수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이, “이 소리는 네 소리가 아니고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수, 악마의 소리다.”
죽음 속으로 가는 것은 본능 이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자꾸 제가 말을 하게 되면 우리도 해야 되는데, 걱정하는데 대부분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지만. 죽음 속으로는, 우리는 본능 밖으로는 못 나가요. 우리는 본능대로 죽음이 오면 도망치기 바빠요. 마스크하고, 이렇게 하는 게 본능이에요. 우리는 본능뿐인 것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그걸 고치는 게 믿음이 아니고.
시편 18편 봅시다. 4절에,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이게 뭡니까? 지금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죽음이 무서워서 피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답변해보세요. 간단한데. “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이것은 죽음을 피하는 본능을 이야기한 거예요, 나는 죽음 속에 기꺼이 들어가겠다는 그런 뜻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피하는 거죠. 본능이죠. 여기 나라고 하는 인물은 주님이 오니까 도망치는 거예요. 이건 토끼와 마찬가지에요. 독수리가 사망이고 독수리가 마귀고 독수리가 오게 되면 피하고 독수리 없는 곳에 주님이 없는 곳에 계속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 살고 싶은 나를 누가 붙잡고? 하나님이 붙잡고 무슨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전쟁에 집어넣는 거예요. 사사기 6장, 7장, 8장에 보면 기드온 전쟁 나오지요. 기드온 전쟁에서 적군이 135,000명인데요. 여기에 이스라엘 군사가 마지막 미디안 군사와 붙을 때 몇 명 끌고 나갔습니까? 300명입니다. 300명 할 때 이거는 본능의 극한을 보여주는 겁니다.
300명과 135,000과 게임이 안 됩니다. 여리고 성 그때 이스라엘에 창과 이런 무기가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그냥 나팔 불고 했지요. 그리고 또 뒤에는 애굽 군사 따라오는데 앞에는 홍해 바다.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뭘 뜻합니까? 인간의 본능은 본능대로 다 까발리고 들춰내는 그 과정이 하나님의 전쟁이 이미 개입되었고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도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이 자랑거리가 아니고 수치스러운 본능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위인은 없다는 것을 믿는 자, 성령을 받은 자는 알아요. 믿음? 뭐가 믿음이에요? 사람 없어요. 우리는 본능대로 살지 믿음 속의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본능대로 사는데 본능대로 살게 하는 그게 하나님의 은사에요.
그걸 안다는 것, 나는 뭘 해도 죄인이며 죽을 때까지 죄인이며 본능대로 살 뿐이에요. 치매 걸리면 뇌 과학에 의하면 옆에 있는 대뇌피질이 문제 있다는 겁니다. 문제 있으면 자아를 상실해버려요. 자아를 상실한 치매 환자에게 전신 거울을 갖다놓으면 거울을 보면서 치매 환자가 고함을 지른다는 겁니다. 거울 속에 자기 자신을 보고 우리 집에 왜 왔느냐고 고함을 지른다는 거예요. 심한 사람은 거울에 물을 뿌려요.
저 아는 사람은 그 정도까지 심하진 않았지만 이게 남의 일이겠습니까. 나이 많을수록 옆에 있는 두뇌 신경전달물질이 주저앉아버리면 이건 누구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저한테 물어요. 목사님, 만약에 우리가 예수 잘 믿다가 죽을 때 치매 걸려서 예수 모른다고 하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돼요, 라고 걱정하시는 분이 있는데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하나님이여 죽을 때도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성경에 하나님이 다 계획이 있어요. 치매가 아니라 몹쓸 병에 예수님 욕해도 괜찮아요. 시편 27편 9절에,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방금 봤지요. 우리가 시편 18편을 보면서 나의 절대성으로 스톱이 됐습니까, 아니면 내 배후에 또 누가 있습니까? 나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있지요.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뭐냐 하면, 나는 스톱이 된 거예요. 나 배후에 아무도 없어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돼요. 그런데 분명히 인간은 아까 말씀대로 본능대로 살아요. 본능에서 못 벗어나요. 죽으면 피하고 싶어요.
그런데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점은, 성도인 사람은 그렇게 나에게 몹쓸 짓을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 계획이 있다는 거예요. 그 계획과 본인이 연결돼있다는 것, 물론 신약에 성령이 임하면 연결돼있어요. 연결되면 나의 수치스러움이 도리어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거예요.
어떤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이런 질문하는 분이 어디까지 질문할 수 있는지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왜 언약으로만 일하십니까?” 실제에요. 어제 받은 질문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하는데, “왜 예수님은 버림받아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까?” 질문이 굉장히 극단화된 질문이죠.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면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고, 왜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일하죠?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나오니까 왜 버림받아야 굳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까, 라는 질문. 이 두 질문을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제가 오늘 강의한 것과 연관시켜보겠습니다.
여기 프리즘이라 했지요. 프리즘이 인간이니까 인간 뒤에 따로 없기를 인간이 다 가졌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모든 게 마감이 되고 최종 의미가 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누구의 종이 되고 누구에게 쓰임 받는 자체가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 보기에 역겨운 짓이 된다는 거예요. 몹쓸 짓이 된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인생을 내가 계획한 대로 되고 싶어. 나는 내가 생각한 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싶어요. 이게 모든 인간들의 타고난 본심이고 본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딴 이야기를 하니까 너는 나의 도구라 하니까 그게 굉장히 기분 더럽고 기분 나쁜 거예요. 기분이 엿 같은 거예요. 참고로 엿 먹으라는 말이 있는데 표준말에는 없어요. 원래 뜻이 뭐냐? 염을 먹어라. 이 말은 죽으라는 뜻입니다. 너 죽어서 염이나 덮여라, 이런 뜻이에요. 염 먹으라 하면 너무 분위기가 싸늘해지니까 엿 먹어라, 엿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염을 먹이시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에요. 하나님이 염 먹이신 거예요. 나사로로 하여금 죽음 속에 가게 하셨습니다. 죽음 속에 가야 비로소 이런 질문이, 질문이 아니고 질문은 주님이 하고 나 자체가 질문할 자격자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가보로서 작품으로서 결실물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존재 이유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랑거리입니다.
오늘 시편 18편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려면 장례치를 때 관 있지요. 나를 관에 누워있다고 치고 시편 18편을 보게 되면 이게 이해돼요. 죽은 자가 되면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관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누구처럼?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처럼 관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나사로는 사흘 동안 들어갔지요.
관 속에 들어가면 죽은 자기 때문에 일을 못하지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사람 없잖아요. 우리는 관 속에 들어가야 돼요. 율법 아래 저주 아래 들어가면 일은 누가 합니까? 일은 바깥에서 바로 예수님, 주님이 하시죠. 이게 주님 자신의 절대성에 자랑거리가 되는 거예요. 주님 스스로 자기만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쓰임 받는 사람을 이미 죽은 자로 관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주님과 관 속에 집어넣는 이걸 주 안에서 함께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사로가 죽어 있었지요. 관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나사로는 동굴 안에 들어갔습니다. 동굴 문을 잠그고. 마치 예수님 같아요. 그럼 바깥의 일은 누가 하십니까? 그 마르다, 마리아 위로해주고 울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좋은 관계인데 우리 오빠 왜 죽이셨냐고 닦달내고 있더란 말이죠. 그때 오빠 죽어 있고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마르다, 마리아가 둘 다 못 알아듣는 겁니다. 오빠는 알아듣지요. 죽어 있으니까.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본능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죽기 싫어요. 살고 싶어요. 살고 싶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자기 딴에 안다? 모르지요. 예수님을 모르고 거꾸로 자기 자신을 안다? 모르지요. 자기가 어느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지 모르지요. 자기 잘났다고 예수님과 좋은 관계로 생각하니까. 오빠는 알지요.
주님께서 마르다, 마리아를 데리고 본능적으로 사는 우리와 똑같아요. 몰라요. 모르는데 죽은 나사로를 4일 만에 되살아나게 만들어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제가 몇 십 년 전에 이 설교하면 이런 이야기했어요.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서 주의 말씀 듣는 것은 마치 우리를 무덤 속에 집어넣고 이 강대상에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면서 아무개야 거기서 나오라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불러내는 말씀을 지금 이 성경말씀 설교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에 그런 설교한 기억이 나요. 그때 설교하면서 제가 참 은혜 받았어요. 주의 말씀을 이용할 생각 말고 이미 죽은 잔데 나오는 거예요. 이게 성경 안 보면 모르지요. 왜냐하면 나는 살아 있는데 왜 죽었어? 이렇게 되니까.
그래서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훌륭한 거예요? 안 훌륭하죠. 죽을 만해서 죽은 거지 훌륭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위인은 없어요. 이미 율법은 우릴 죽여 버려요. 십계명이 우릴 죽인다고요. 우리는 십계명이란 관 안에 죽은 자에요. 우린 이걸 못 지키니까 죽음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지요. 내가 말하노니 너는 죽은 자에서 주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회당장 딸에게 이야기하듯이 주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러면 일어난 사람은 누가 일했어요? 내가 일했습니까? 주께서 일하셔서 갑자기 일어난 자체가 주의 일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 프리즘이에요. 무슨 프리즘? 하나님의 일이 되는 모든 원수, 악마지요. 악마가 주의 원수인 것을 고발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도구가 주님에 의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율법의 행위 아닙니다. 그냥 강제적으로 살아난 거예요. 무조건 살아난 거예요. 이게 성도의 존재 의미에요. 본인이 본인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본인을 살게 한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만 자랑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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