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9b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쌔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4절에 보면,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그렇게 돼있지요. 다른 신에 왜 예물을 드리면 괴로움이 더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출애굽기 15장을 잠시 보게 되면 거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낯선 단어가 있어요.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찬양, 찬송하리니, 찬송은 일종에 예언이니까 예언하는 가운데서,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나이다”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여기 오른손이라는 게 등장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오른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뭐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이 마련한 콘셉트거든요. 오른손의 자리가 뭐냐 하면, 오른편의 자리는 통합의 자리에요. 이 통합하는 자리를 점유하시는 분, 차지하시는 분을 주 또는 주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독생자는 주님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모든 걸 통합해야 주님이 돼요. 세상의 모든 만물과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주를 위해서 통합되는 과정을 경유해야 주가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 땅에 계신 예수님께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면, 주의 자리에 앉지요. 뭔가 일을 하셨다는 거지요. 어떤 일을 하셨다? 모든 걸 통일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통일이라는 것은 에베소서 1장 10일에 보면 나와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통일시켰다는 거예요. 통일시키는 것과 오른손의 자리가 무슨 관계있느냐? 오른손의 자리는 앞에 뭐가 붙어요. 그냥 오른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이에요.
하나님의 오른편이니까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니 오른편에는 스케줄, 이게 언약인데요. 창세전의 하나님의 계획, 스케줄이 있거든요.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어요. 이 계획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여기서 권능이 나오고 이 권능은 오른쪽에서 나와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오른쪽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뭐가 이뤄지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통합이 이뤄지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편, 하나님의 계획대로 시행하기 전에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있는 겁니다. 마귀가 있죠. 하나님의 대적이 여기에 있죠. 주님께서는 자기 독생자를 오른편의 자리에다 넘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세상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하늘에 있는 악마가 전쟁을 일으켜서 못 이겨서 땅에 내려와 주인이 된 겁니다.
이 세상의 신이 누굽니까? 악마지요. 원래 악마는 천사로서 하나님의 천상회의 때 시비 거는 존재가 그거지요. 스가랴 4장인가에 나오고, 또 욥기 1장에도 나오고, 그리고 미가야 선지자 나오는 그 대목도 악한 영이 있어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 거예요. 악이 없으면 주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악마와 싸우지 않습니다. 악마와는 주님이 싸우는 겁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10편 1절에 나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내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그 다음에 어디 있으라? 내 우편에 앉아있으란 말이죠. 그러면 마무리 안 하면 우편 자리를 하나님의 권능이 나올 자리지 앉을 주인공은 없는 자리에요. 주인공이 통합해서 모든 걸 말씀대로 언약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마무리한 분이 이 자리에 앉는 겁니다. 앉을 때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오른편의 자리에 주인이 차지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오른편의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12장 잠시 보겠습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하나님의 오른편의 권능으로 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들리게 돼요. 들리면, 그 다음에 뭡니까?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예수님이 아는 각종 여러 민족 가운데 택한 백성 전부를 자기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올리겠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천국이죠.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6편 봅시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천상천하유아독존 홀로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계십니까? 주님이 함께 계시지요. 오른편의 자리는 뭐냐 하면, 권능의 자리입니다.
아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그 권능의 자리가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실 때에 바로의 군대와 병거를 바다에 던지는데,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나이다” 오른손의 권능이 나타난 거예요.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17절에, 주의 영원한 성소라고 돼있어요.
지금까지 성경을 여러 군데 읽어보면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제일 정리가 깔끔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 사함 때문에 내가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시면 정리돼요. 내가 죄 사함을 소유하거나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죄 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죄 사함에 이용당하는 거예요. 그래야 내 용서라는 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내 용서가 돼버리면 뭐가 안 됩니까? 통합이 안 되잖아요. 통합이라는 것은 다수가 아니고 하나를 두고 이야기했지요.
제가 어느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뷔페에 가면 접시는 동일한 접시를 사용하지요. 음식이야 개성대로 담든 간에 동일한 접시, 그걸 만약에 피 묻는 접시라고 봅시다. 어떤 직업이나 키나 또는 성격이나 관계없이 하늘나라 가는 것은 오직 통합된 죄 용서만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그 죄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용서받았다는 그것도 갑자기 내가 들어가면, 이 나는 자아지요. 홀로 있던 자아고 남한테는 나가 주체가 되는 거죠. 나, 이런 인간이야, 라고 나올 때는 주체 행세하다가 혼자 있을 때는 자아가 되고. 나는 없잖아요. 통합이미지, 통합의 자리, 이분이 난데 나가 두 개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 나는 이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되지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야 통합된 나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분한테 이용당해야 되니까. 통합된 나를 바로 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게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철저하게 주의 이름에 이용당한 거죠. 너는 누구한테 시집가거라. 이것도 주님께 이용당한 거예요. 내가 선택했다? 너 자체가 없어. 결혼할 때 선 몇 번 봤습니까? 인물 되니까 한 스무 번? 인물 되면 선 안 보고 데려감을 당하던지, 안 그러면 고른다고 뻗대서 오십 번 보던지 하는데 어쨌든 간에 천이백 번은 아니지요. 내가 맞췄지요. 이만육천사백 번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간택당한 거죠.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남자를 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고르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 가운데서 그 중 나의 보디가드 될 만한 사람을 내가 찍어서 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선택이 아니지요. 객관식 문제거든요. 다음 중 고르세요, 밖에 안 되니까. 오늘 점심에 붕어빵 먹을래, 국화빵 먹을래? 이걸 선택이라 하지 않지요. 회 먹고 싶어. 회는 안 돼. 국화빵과 붕어빵, 둘 중에 하나야.
우리의 모든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이 내 용서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없는 걸 무無라 합니다. 없는데 주님의 통합된 자체에서 무에서 뭔가 꼼지락꼼지락하고 생겨난 것이 우리에요. 이걸 우린 그때는 모르고 성령이 주의 영이 오게 되면 이걸 뒤늦게 알아요. 그걸 after event라 하는데 사후적이다. 일 끝나고 난 뒤에 소급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물론 이걸 매일같이 느끼지 않아요. 왜? 중첩되고 싸우기 때문에. 우리의 관습, 몸이 갖고 있는 육신이 갖고 있던 이것도 만만치 않게 버티고 있지만 결국은 누가 이깁니까? 주님이 분란을 계속 일으키죠.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한꺼번에 완전하면 분란을 안 일으키죠. 계속 쑤시는 거예요.
분란을 일으킬 때 분란을 일으키는 주변의 환경과 재료가 있어요. 그 재료가 오늘 본문에 시편 16편에 보면 나와요. 4절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라고 돼있지요. 이것과 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라 하지요. 존귀하다는 것은 뭔가 비교거리가 있을 때 존귀한 건데 뭐가 존귀하냐 하면, 집에 떼거리가 없어도 존귀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콘셉트니까.
가난하면 패배고 악이고 부자 되면 성공이 아니고 선한 게 아니고 주님이 다루시고 활용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통합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이용당하는 입장에 있거든요. 아까 했잖아요. 우리 자리를 주님이 사용하시는 주님을 주 되게 하는 할당된 자라, 성육신 자리로 만들어달라고요.
죄가 보인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버려둠을 당하는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단 말이죠. 죄가 보인다 해서 시커먼 사람이 돌아다녀서 죄가 보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고 분란 일으키지 않고 내버려둔 자의 그러한 행태와 모습들이 거리에 나가든 가정에 있든 눈에 다 들어오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다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보이지만 그 사람 속에는 뭐가 없다? 성령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용서하심이 없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 자율성밖에 몰라요. 전혀 존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뭐냐 하면,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긴다고 돼있어요. 이제는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 설명해야 되죠. 다른 신을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나님의 오른편에는 어떤 일을 다 완수하는 자의 몫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님은 없어요. 주께서 원수를 이기면 그 주의 자리에 등극하니까 주님이 되고, 그 주님의 자리는 옛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에게 권능을 행했던 그 자리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은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주어진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가 선택한 것처럼 내가 내 사람을 선택한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심판했지만 이제는 모든 심판을 누구한테 맡겼는가? 주님한테 맡겼거든요. 주님한테 심판을 맡겼다는 말은, 갈라낼 자와, 내 사람인지 그런 권한이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에게 버림받는 자들은 오른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전혀 감이 없는 사람들, 왜? 분란을 일으킴을 받지 못하고 내어버려뒀으니까. 인생에 주님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전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요. 한평생 다 내가 고생해서 살았다 하잖아요.
집안의 어른들 모일 때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누가 고생 더 했는지 시합하는 것 같아. 술 한 잔 먹고, 아재요, 그것도 고생입니까? 난 고생 더 했어요. 아이 넷 낳고 고생했고, 애 아빠는 독일에 광부 갔다 죽어 왔고, 애 하나 발목에 고무줄 채우고 부평시장에서 시래기 국 식당하면서 애들 키웠습니다. 노래 부르지요. <하얀나비> 음 어디로 갔을까~ 화장해서 재 뿌리면서. <수상한 그녀>에서. 자기 인생은 하얀 나비 같은 인생.
그게 자기연민이잖아요. 자기로부터 와서 자기의 의로움을 챙기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죽을 때 기어이 남아있는 자기 의로움으로 장렬하게 자멸해버려요. 과감하게 자멸, 그것도 장렬하게. 그게 바로 눈에 보이는 죄란 말이죠, 죄.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 다른 신은 뭐냐? 오른편이 없어요. 오른편 없는 신이 되는 거예요.
오른편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지상에 있는 오른편의 여파, 오른편의 결과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바로 홍해가 갈라진 거예요. 앞에 죽음이 버텼는데 죽음마저 뭘 못 이기더라? 오른편의 권능을 죽음마저 버티질 못하는 거예요. 악마는 맨날 하는 소리가 맨날 죽음이야, 맨날 죽음이야. 걸핏하면 소주 한 잔. 맨날 이러면 너 죽는다. 다시 말해서 실패한다. 너 성공하고 싶지. 성공해야 되거든. 너 성공하고 싶잖아. 이러면 실패하는 거야.
고린도전서 10장 봅시다. 죽음으로 얼마나 협박들 해댑니다. 아이고, 예수 믿으니 무슨 소용 있나. 영감 암 걸려서 병 나을 줄 알고 기도했는데 기도하자마다 돌아가셨는데. 기도 시작, 전화 와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이고, 하나님도 다 소용없다. 이거는 반대로 살았어요. 마치 하나님이 지 보디가드인 줄 알고.
여기 고린도전서 10장 18절에 보면,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우상이 뭐냐? 20절에 나오죠. 이방인들의 제사가 우상이다. 이방인들은 우상이란 말을 하지 않지요. 그들의 유일한 절대 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뭐가 우상이냐 하면, 이게 우상이에요. 신의 주권사상,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이게 우상의 정신이에요. 우상의 정신=개혁주의 정신. 신의 주권이에요. 신의 주권을 말해버리면 여기에 뭐가 빠져요? 나는 죄인이다가 빠져버려요. 신의 주권이라는 이론, 그 지식을 내가 획득하게 되면 추가적인 정보를 더 얻기 때문에 지금 잘난 내가 더 잘나게 되기 때문에 나한테 유익한 선이 되고 성공사례를 가져다주는 그런 유익한 획득이 나의 구원에 뭔가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나의 부인, 나의 파괴가 이 신학적인 명제가 전혀 보태지질 않아요. 파괴는 뭐, 오히려 더 강화시키죠. 어제 오후 설교 때 이걸 구분했습니다. 억압과 부인과 구분한 거예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라 하니까 억압을 해버려요. 스프링을 꽉 밟아버리는 거예요. 이빨 깨물고 참는 거예요. 억압된 이걸 주체라 합니다. 나는 얼마나 용감한지 죽음마저 나는 극복할 거야. 이게 운명을 떠나서 주체가 되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부처와 부처 따르는 중들 보세요. 동안거 들어가서 밥도 조금밖에 안 먹고 버티는 거예요. 자기의 욕망을 본인의 방식으로 끊어내겠다고.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욕망을 끊어내면 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의 주님한테 이끌림을 받지 못해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 불교와 동일한 게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오늘날 한국교회신학이 불교와 똑같은 거예요. 우상입니다. 그들은 신의 주권사상을 이야기해요.
신의 주권사상의 극대화가 이슬람교에요. 그 사람들 인사가 맨날 그거에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이게 인사에요. ‘인샬라’(신의 뜻대로)라 하지요. 주께서 해놓고는 전부 다 여자 강간하고 돌아다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불교의 나무아미타불이나 인샬라 하는 거나 교회에서 은혜로 합시다, 라고 하는 거나 차이점이 뭐예요?
주님의 침노와 주님의 공격 요소가 들어있지 않는 그 명제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거짓된 거예요. 왜냐하면 나를 주께서 불러내기 전에 알아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거든요. 그걸 존재의 사슬구조라 합니다. 존재의 체인. 대표적인 존재의 체인 작품이 [천로역정] 또는 단테의 [신곡]. 고딕체로 지은 대성당시대 때 대성당을 보세요. 전부 다 주님은 천정에 붙어서 목 아픈 사람은 보지도 못해.
억압을 하게 되면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욕망도 같이 억압돼있어요. 압축이 돼있어요. 그래서 이 욕망은 다른 어떤 상황, 계기가 되면 이 욕망을 다른 식으로 풀어내버립니다. 금식 기도했잖아요. 금식 기도한 만큼 본인이 손해라고 여기고 그 다음에 노래방에 가서 다른 기쁨으로 여기서 있던 서러움을 노래방에서 실컷 부르면서 속이 다 시원하다. 고난주일에 참았던 것 속이 다 시원한 거예요.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금식하고 금요일 오후에 뷔페 가서 실컷 먹는 거예요.
전에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목사님이신데 주일 되면 말씀을 경건하게 대한다고 아침을 꼭 굶어요. 점심때는 3내지 4인분을 잡사요. 고추장 넣고 참기름 해서 식욕, 탐심, 식탐이 대단합니다. 이만한 대접으로 아침에 굶은 것 한풀이하듯이 다 잡사요. 그러니 살이 쪘지요. 살이 쪄서 돌아가셨어요.
억압을 해버리면 자기가 계속 선한 자가 돼버려요. 죄를 억압했으니까. 그런데 자기 부인은 자기에게 어떤 상황이 나와 무관한 거예요. 왜? 자기가 빠지는 걸 자기 부인이라 하거든요. 어떤 상황에서 자기가 빠지는 거예요. 관여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자기를 빠지려하면 그냥 안 빠지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손댈 수 없는 상황으로 지경으로 몰아버려요.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군사.
이게 다 계획된 하나님의 무대에서 세팅된 거예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세팅시켜서 오른손의 권능 없이는 주의 일이 되지 않음을 늘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세팅을 본인이 세팅하면 안 돼요. 이건 일종의 억압이에요. 요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심심한데 스스로 고난 받아볼까. 이건 자기가 소꿉놀이하는 거예요. 아빠, 엄마와 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자기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십자가 생각하는 거예요. 그냥 평소 살다가 만약에 외부에서 공격하게 되면 자기 생각이 없다가 갑자가 방어체계가 동원되거든요. 사드요. 방어체계가 동원되면서 내가 어때서? 갑자기 내가 등장하지요. 부부가 싸우지 않을 때는 갑자기 나가 등장하면 이쪽에서 그럼 나는 뭐냐? 갑자기 두 개의 나가 되지요. 그걸 아까 대상화한다. 상대가 갑자기 대상화되는 거예요. 여기서 거리가 생겨버려요. 거리 생기면 거기서 네 영역, 내 영역 따로 돼버리는 겁니다.
억압은 자기가 더 의로워지는 거죠. 그러나 자기 부인은 의롭다, 선하다, 선이다, 악이다, 라는 자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난다는 말은 선도 악도 아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시는 주 되게 하시는 주님의 죄인의 모습이 된 그 지경으로 초대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죄인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죄인 되는 것이 즐거워야 되지요. 그래서 시편 16편에 보게 되면 즐겁다 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계속 해봅시다. 20절에 보면,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여기 귀신이 등장해요. 성경이라는 것이 정말 일상 언어로써 성경 속의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할 때 우리가 아는 우리가 경험한 체험된 단어로 구성하면 그게 우리 일상의 보통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귀신을 뽑아 꽂아버리면 인간과 귀신과 같이 사는 게 돼버려요. 그럼 그 다음부터 복잡한 문제 생겼어요. 인간이 귀신을 다루는 방법은, 만약에 귀신이 왔을 때 내쫓는 방법은? 그 다음부터는 생각 안 해도 될 생각들이 계속해서 드디어 파급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했지요.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귀신이 또 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귀신은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에 어디에 정착돼야 돼요. 몸이라든지 안 그러면 돼지나. 정착하는 이유는, 귀신의 속성이 남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 세상의 신이니까. 자기 것처럼 지 마음대로 다루고 싶은 거예요. 다루려면 대상자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자기가 최고가 되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왔을 때 왜 뱀이 가만있지 못하느냐? 자기 밥으로 여기기 위해서 끈질기게 한 번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따먹을 때까지 계속 이야기해요. 안 따먹으면 못 배기게 마든 거예요.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갈 데 없는데 와 보니까 소제가 돼있거든요. 자기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귀신 일곱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죠. 여기서 수리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의 몸의 몇 명의 귀신까지 포함이 되느냐? 군대 귀신이라 했거든요. 군대는 오천에서 육천 명입니다. 보통 이천 명이라 하는데. 정확하게 로마군대는 오천에서 육천 명이거든요. 육천 명이 한 곳에 몰려 들어갔을 때 너무 비좁지 아니하겠는가? 답답해서 저거들끼리 싸우지 않겠느냐? 그런데 만약에 이천이라 합시다. 이천이 이 사람에게서 나왔을 때 돼지 떼가 있었잖아요. 한 마리씩 올라탄 거예요. 올라타게 되니까 귀신이 인간을 찾아온 이유가 돼지를 통해서 미리 보여줬어요.
귀신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살아 있는 걸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아니고 죽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죽음의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체계를 못 버리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고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돼있어요. 교회가 귀신의 전당이 됐어요. 선악체계를 못 버리게. 왜? 그게 먹어주니까. 설득이 되니까. 너도 귀신, 나도 귀신. 말만 떼면 아멘하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라.
잘 될 줄 믿습니까? 아~멘. 십일조하면 복 받을 줄 믿습니까? 아멘. 복이 뭔지도 모르고. 복을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분란을 일으키죠. 후비고 파내는 거예요. 가만두질 않는 거예요. 왜? 자기 친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데 후비지 않고 파내지 않고 가만 놔두면 인간은 점점 더 자기가 잘난 존재로 알고. 그게 뭐냐? 귀신+알파,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귀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모습이 바로 창세기 3장에 귀신의 지배받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해요. 목사님, 복음은 알겠는데 있는 교회 계속 다녀야 됩니까? 귀신을 연구하려면 다니세요. 아, 저게 귀신이구나. 내가 저렇게 살았었지. 귀신의 교회에선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그냥 맹숭맹숭 잘나면 잘난 게 아니잖아요. 뭐가 있어야 돼요? 돈이 증가해야 되겠지요. 소위 세상적인 복을 받아야 내가 하나님 잘 믿는 티가 나니까 귀신들이 계속 여러분 복 받으면 부자 되고 오래 삽니다,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새 오래 사는 게 얼마나 저주인 줄 모르고. 아예 욕을 해라.
다시 고린도전서 10장 봅시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이 말은 이방인 자체가 어느 관점입니까? 이게 성도의 관점, 이스라엘 관점이었어요. 이스라엘은 뭐라 했어요?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모든 콘셉트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거죠. 오른쪽에서 주어진 것이지 내가 콘셉트 마련해놓고 하나님께서 복을 타내고 힘을 달래는 게 아니에요.
그 콘셉트를 싹 밀어붙이고 시편 16편이라는 콘셉트, 오른편이라든지 그런 콘셉트로 재배치해놓고, 배치만 해놓은 게 아니고 거기에 합당한 내용까지 오른편에서 능력이 오는 것, 권능이 오는 것 이게 바로 말씀이 우리 안에서 독생자가 일하듯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귀신한테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했지요.
자, 그러면 귀신한테 하는 게 아닌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제사는, 우리가 제사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용서는 우리가 죄 용서받는 게 아니고 죄 용서에 활용당한다고 했잖아요. 주님의 오른편의 권능이 우리를 가지고 합당한 제사를 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되고 예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 우리란 자체가 우리가 죄인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를 분란 일으키고 들쑤셔야 되겠지요.
들쑤시는 데 누가 도와주느냐 하면, 고맙게도 고마운 건 아니지만 악마와 귀신이 도와주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 받고 돌아서면 우리는 귀신과 한패가 돼있어요. 계속해서 분란이 일어나요. 맨날 은혜 받았다 해놓고 돌아서면, 오늘 가계부 쓰다보니까 빵꾸났네. 이 걱정하고 있단 말이죠. 이번 달엔 마이너스 이십 만원됐다.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그 다음에 뭡니까? 어떻게 사나? 누가? (내가) 내가 없는데요? 몸은 죽는데요?
그러면 제대로 하려하면 내가 돈이 없는데 주님은 어떻게 살아요, 하잖아요. 주님은 이미 살았는데. 뭘 해도 ‘사나’와 ‘걱정’은 연결이 될 수 없어요. 사나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어디까지 살려내실까?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거든요. 어디까지 살려내시는지 보잔 말이죠. 주께서 또 옆집 아줌마, 귀신 이용해서 파출부 좀 하시렵니까? 아, 파출부하라고 이용당하는구나. 그럼 또 열심히 해서 이틀 치 연장되는 거예요. 연장되면서 내가 광야 같은 세상 살아오면서 바로 광야니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만나 제공에 의해서 살아간다. 만나는 주님의 권능이 만나 안에 들어있잖아요. 말씀 안에. 그래서 범사에 매일같이 우리는 감사하는 거예요.
방금 이 말은 통합 입장에서 보게 되면, 모든 걸 통합시켰다. 그 다음에 뭐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여기서 나오는 건 뭐냐? 분란을 일으키니까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어요? 이방인처럼 살았지요. 이방인처럼 산다는 건 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날 염려는 그날 족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거고. 내일 염려할 게 있을 거예요. 염려 안 한단 말이 아니고 미리 당겨서는 할 필요 없단 말이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데 뭘 미리 당겨서 해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오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할 때 이러한 모든 명령, 지시는 누구 권능입니까? 우리가 못해요. 주님이 이걸 분란 일으켜서 이게 바로 내 육신의 모습이고 죄의 모습이고 죄를 육신을 이기신 주님의 오른편의 권능이 그 나라와 그 의, 그러니까 하늘나라 천국을 주님을 바라보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하루치의 숙제를 하도록 주께서 권면을 하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살면서 오늘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수면제 먹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귀신이 악마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꼭 필요하고 그들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고 친숙해져버렸어요. 이미 우리 마음은. 이 말은 우리 힘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다. 왜냐? 내가 설치는 것은 일이 성사 안 돼요. 죄 사함은 주께서 시작해야 되지 내가 죄 사함 받으려고 여러 가지 일을 해봐야 그건 말짱 소용없는 겁니다.
시편 다시 돌아와 봅시다. 시편 16편 6절에 보면,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게 참 어려워요. 이걸 울산강의에서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했어요. 이게 너무 어려운 말인데 적어보겠습니다. 약속이란 체험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는 인정하는 것. 이게 약속이거든요.
여기 뭐가 있느냐? 체험되지 않는 것이에요. 체험돼버리면 이건 나의 기억이 되기 때문에 약속이 아닙니다. 체험되지 않는 것이에요. 인간은 체험되지 않는 것을 절대로 믿지를 않아요.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인간이 기적이라는 것도 지가 체험돼야 받아들이거든요. 진정한 기적은 뭐냐? 체험되지 않는 데 받아들여진다는 이것이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에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 말이 뭡니까? 본다는 것은 체험이란 말이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구나. 이건 인간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예요. 참 어렵지요.
그 점이 바로 아름다움 곳에 있음이여. 지금 다윗을 좇기고 있어요. 뭐 아름다운 게 있어요. 하지만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왜? 주의 권능이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 오른편의 권능 때문에 자기가 죽어서 사흘 만에 마태복음 16장에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다 했잖아요. 그래놓고 십자가에서는 이 잔을 넘어가게 하옵소서, 이야기하지요.
체험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어요. 이거는 내 스케줄이 아니고 아버지와 주님이 창세전에 만든 스케줄대로 진행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오른편의 자리에 앉아야 되니까. 그래야 하늘나라도 생기고 주의 자리에 등극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독생자가 주가 되는 그 목적으로 확정됐거든요. 다수가 아니고 통합됐어요. 통합이란 것은 나의 것이 없어요. 하나로 주의 이름으로 통합된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 지고 그분을 살리사 모든 만물로 하여금 주의 이름에게 영광을 돌림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아버지의 영광은 오직 주의 이름으로 통합을 주의 이름을 인정할 때 그게 영광이에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지진이 일어났지요. 죄수들의 도망갔는데 바울과 실라는 옥에 앉아 있었단 말이죠. 간수가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왜? 도망한 죄수의 값을 자기가 치러야 되니까 자기 팔자가 더러우니까 죽으려했거든요. 그때 어떻게 할꼬? 할 때 예수가 아닙니다.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입니다. 네게 지진이 일어나고 죄수들의 도망한 것이 어디서 일어났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 그러한 연쇄사슬의 일환으로 네가 존재한단 말이죠.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된 자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간수로 취직하게 했고 지진 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게 바로 애프터이벤트, 사후적이에요. 사후적 의미를 계속 깨닫게 하는 거예요. 위에서 보는 시선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편 16편 8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건 아까 했고요. “내 마음이 기쁘고” 그 능력이 있으니까 기쁠 수밖에 없지요. 왜? 흔들림이 없으니까. 나를 제거해주니까 나의 능력을. 그러니까 기쁘지요. 그 다음에 10절 봅시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체험되지 않았어요. 아직 죽지도 않았어요. 체험되지 않았지만 마치 자기 예언처럼 미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으니까요. 다윗에게 성령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니까.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말은 후대의 우리에게 나는 이렇게 믿었다. 그리고 주님은 이걸 예언대로 완성했다. 그러면 너희들이 과연 주님에게 이용당한 사람이라면 주께서 나한테 주어진 오른편의 권능이 동일하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게 기적이고 권능이잖아요.
체험하지도 않은 성경말씀이 왠지 믿어진다는 게 그리고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믿지도 않는 나를 늘 분란을 일으켜서 믿어지도록 심지어 마귀까지 귀신까지 동원해 가면서 분란 일으켜서 우리를 후비고 쪼개고 흔들게 하고 살피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봅시다. 25절. 13장 전체가 비유로 돼있지요.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가 없다는 거예요. 구원받을 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빠져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던져놓고 밟아가는 것처럼 주님이 먼저 자기 자신의 일하심을 위하여 던져놓은 비유에요. 그러면 비유의 모든 내용은 주님이 친히 그것도 홀로 오직 혼자서만 해야 돼요. 그래야 이게 통합이 되니까.
그런데 여기에 가라지들이 나도 알곡 될래, 이렇게 덤벼들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것들을 차단시킬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의 비유에 의해서 주님 말씀 지켜서 천당 갈래요, 인간들을 차단시켜버리죠. 그래서 제자들도 다 결국 십자가에서 일단은 떠나게 만들어요. 홀로 남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가라지가 뭐냐, 알곡이 뭐냐에 대해서 너희들은 그걸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다.
판단할 필요도 없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남한테 이용당하기보다는 본인이 주인공이 되고 싶고 주체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것 주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 돼버리면 주의 나라에 못 들어가요. 이런 인간 안 넣어줍니다. 내가 나가 아니라 주님이 나라는 것을 만들어낼 때 주님 중심의 나라에 합류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전부 다 주님한테 통합이 돼야 돼요. 그게 주님의 일이거든요. 통합되어야 네가 천국까지 오는 모든 능력은 어디서 나왔다? 너에게 나오고 나에게 나온 게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주님께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나왔다는 주님의 존재에서 나왔다는 것을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을 계속 내 안에서 활성화시키시고 마음껏 할당된 지역으로 여기시고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활동하소서.
이게 뭐냐, 기도의 마지막이 뭡니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저는 제쳐주시고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주께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활용해주시옵소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러면 인간에게 어떤 소망은 없는가? 소망이 왜 없어요. 주께서 소망 주면 있어야지요. 있는 소망을 왜 마다해요. 그것도 일종에 억압이고 겸손인가요? 그건 말도 안 되거든요. 그냥 주시면 주신 대로 하면 되지요.
나 같은 죄인은 빵도 안 먹는다. 윌도 안 먹는다. 윌을 왜 안 먹어요. 맛있는데. 주께서 살리려고 주신 것은 마음껏 먹되 너무 많이 먹지는 마시고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필요해서 살려준다면 돈을 마다하지 마세요. 돈이 없어서 탈이지 마다하긴. 되도 않은 겸손 떨고 자기 부인한다고 낮추고. 난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낮아지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가 낮아지지 않는 게 낮아짐이에요. 왜? 자기 생각을 안 하니까. 그걸 쉽게 말해서 멍청이, 등신, 바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똑똑하지 말고 주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말고 정말 바보처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활동 장소가 제공된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는 그러한 주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