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1b 부산강의 : [시편]28(18편)-주체 창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진리가 아니고 주님의 육체가 진리가 되겠지요. 여기서 신체라 하지 않고 육체라고 제가 표현했거든요. 방금 주체라 해놓고는 첫째 시간에는, 이제 신체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신체에서 그 다음에 주체로 나가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계시와 말씀, 같은 말이에요. 계시와 말씀과 예언이 들어가는 겁니다.
다윗의 움직임은 본인도 의아해. 자기가 골리앗을 이기고, 자기가 골리앗과 한 판 붙자고 약속했습니까? 없었지요. 주어진 상황 자체가 본인 뜻이 아니고 자꾸 뭔가 주께서 몰아서 형성시키는 느낌이 강해요. 다윗의 신체는, 소년 다윗이죠. 소년 다윗인데 주체는 뭡니까? 이번 전쟁은, 사무엘상 17장에 나의 전쟁 아니고 무슨 전쟁? 하나님의 전쟁으로 돼있어요.
그러면 전쟁은 골리앗으로 끝났느냐? 아니에요. 골리앗 쪽에서 새로운 적이 연쇄고리처럼 따라 나옵니다. 골리앗이 적이었다가 골리앗 이겼다고 끝난 게 아니고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사울, 그것도 왕이에요.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왕이 적이에요. 사울+왕이죠. 왕은 권세를 갖고 있어요.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소규모 국가를 무대로 만들어서 그걸 나중에 전체 인류사로 확장시켜버립니다.
이미 권세자가 상주하고 있어요. 사울 왕. 사울이 아니고 사울+왕. 왕이 있다는 것은 통치체제 도는 통치구조가 형성돼있는 거예요. 권력을 한 자로 하면 power힘이 있는 거예요. 그럼 힘에 대해서 다윗 말고, 일반인들은 전부 다 신체를 갖고 있지요. 강의하면서 이해됐는지 자꾸 물어봅니다. 각자 신체를 갖고 있는데 이 신체를 누구의 지시받고 움직입니까? 누가 이 신체를 움직입니까? 선풍기 옮겨볼까, 한 번 써볼까? 이것 누구 지시받고 움직이죠? 본인이죠.
본인인데 여러분들이 화이트보드 하지 말고 뒤에 흑판 합시다, 라고 나왔을 때 그렇게 할까요, 흑판 바꿀까요? 나왔을 때 이게 힘이에요. 힘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신체는 보이지요. 신체는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오지요. 정신적 힘이거든요. 정신적 힘은 뭐로 짜여있냐 하면, 이게 언어로 짜여있어요.
언어란 가갸거겨 그것만 언어가 아니고 흠, 때찌, 아무 소리 안 하고 손짓, 발짓도 언어라니까요. 군에서 유격훈련 받는데 조교들이, “죽어도 좋습니까?” 언어에요, 명령이에요. 그 명령을 확장시켜보면 표정이 되고, 표정이 나오는 인간의 의사를 한 곳에 집결하는 곳이 신체 중에 얼굴입니다. 얼굴에서 표정이 나오지만 표정과 얼굴은 계속 붙어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을 못 만났다. 그 사람의 사진은 있다. 그러면 사진 보면 만났을 때의 희열과 기쁨이 백프로 그대로 다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게 신기합니다. 해운대 앞 백사장에 어떤 여자가 보고 싶어서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눈 그리고 코 그리고 입 그리고 심지어 점 하나까지 그렸는데 그 사람 살아납니까?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인간은 하질 못해요. 인간의 표정은 왜 그렇게 안 살아나는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체가 될 때는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현장에 나타나면 그때 참 좋았던 시절 그대로 여기서 재현, 다시 표현해줄 줄 알았는데 모든 주어진 감정이나 기쁨은 내가 여기에 존재가 등장함으로서 교류하면서 만들어져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없어도 그 사람은 그 미소, 모나리자 같은 웃음, 예쁨을 유지할지 알지만 내가 그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은 그 현장에 누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라보는 내가 현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표정이 나왔거든요. 내가 만약에 현장에 없거나 그때 그 시절 얼굴이 아니고 70 가까이 된 늙어빠진 얼굴로 4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경악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곱게 늙었구나, 이런 멘트 준비하고 갔는데 현장에선 당황해서 커피 쏟고 커피 값은 내가 낼 게, 하고 갈 수 있단 말이죠. 왜냐하면 나만 상대방을 보는 게 아니고 상대방도 나를 보면서 같이 형성된 거예요. 이걸 변수라 합니다. 그 변수가 한둘이 아니에요. 그때 그것이 그대로 재현 안 돼요. 변수가 무한변수에요. 똑같이 동일하게 재현불가입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이걸 한 마디로 하면, 주체는 환경이 만들어내고 환경이 조성한 거예요. 이미 인간은 환경 속에 있습니다. 내가 있고 환경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환경을 조작해내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원치 않는 환경 속에 태어났어요. 환경, 변수, 무한변수, 내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화투를 칠 때는 내가 임의로 그 환경을 조장해내요. 돈 딸 때 나는 단풍 두 개 쥐고 돈 땄다. 그러면 그 다음 순번에서 화투 나눠 줄 때 뭐만 찾으면 돼요? 단풍 두 개만 있으면 또 딸 수 있는 거예요. 괜찮았던 기억이 다시 현실로 내가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럼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창조주가 되지요. 그때 좋았던 창조되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도박판에서 발을 못 빼는 거예요. 돈 딸 때 만유의 주가 되었던 그 기쁨을 내가 발을 뺄 수가 없는 겁니다.
젊은 목사가 목회 자리를 받았는데 교인 수가 오백 명 교회 갔다. 교회에선 호주 유학파라고 기대하지요. 그런데 온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사백오십 명 빠졌으면 설교할 마음 들겠습니까? 안 들지요. 내가 학원을 하는데 200명 됐다. 그런데 신종코로나 때문에 세 명 남았다. 학원 할 마음 안 들지요. 서너 살 때 아이를 내 마음대로 했다. 치마 입히고 바지 입히고. 그런데 그 애가 열두 살 되니 천하에 말썽꾸러기다. 방문 닫고 노크해도 열어주지도 않는다.
그럴 때 갑자기 속상하지요. 변수가 달라졌어요. 자꾸 아이한테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안 그러냐고 닦달내지요. 보통 시간을 T라 하지요. 시간변수가 내가 기대하는 기대치를 벗어나서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는 겁니다. 그건 내 입장에서 혼란하지 이런 상황이 좋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이 내 뜻대로 고집부리면 안 되는 이유가 많은 변수, 무한의 변수 중에서 내가 관리하는 게 25개라면, 25개 빼고 나머지 무한이 25개를 침노하고 완전히 폭파시키면 우리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죠. 그럼 무엇을 오히려 고맙고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내 뜻대로 되는 이게 신기해야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어요. 신앙의 느낌은 뭐냐? 모든 매사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것이다. 당연한 게 아니고 의아해하는 거예요. 의아해하면 감사가 나오지요. 당연하면 감사, 고마움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내가 팔이 움직여서 밥을 먹다니 이상하다. 팔이 왜 움직이지? 이걸 의아해할 때 그 폭만큼 감사가 나오게 돼있어요. 주여, 팔을 움직여줘서 감사합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신앙은 항상 뺄셈이에요. 자기 자신의 기대치와 예상을 그 현장에서 삭제, 빼버리는 겁니다. 나 이것 되기를 원해요. 나에게 이런 소망이 있어요. 주여, 꼭 해주세요. 이걸 다 빼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겁니다. 그럼 감사할 거리만 남아있지요. 주님 저한테 이런 은혜를 왜 주십니까. 그래서 의아해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의아함은 계속 의아함을 낳는다고 돼있어요. 계속해서 감사의 생활이 이어지는 겁니다. 신앙의 모습이죠.
의아해야 되는데 여기서 당연함이 등장하면 의아함이 다 깨지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겠지요. 주여,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이렇게 되지요. 그럼 주님은, 이 변수가 무한 변수다. 네가 25개의 변수를 생각해서 이쯤 되면 내가 만족하는 기뻐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내가 숫자 25개밖에 생각 안 났는데 변수가 몇 개라 했습니까? 무한이죠. 어떤 상황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 무한변수를 누가 주관합니까? 주체가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린 뭘 고집했느냐? 내가 나의 주인공, 주체자라고 돼있던 겁니다. 이 안에서 뭐가 벌어졌는가? 전쟁이 벌어졌어요. 감사가 없이 전쟁이 벌어진 거예요.
25절 봅시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이게 참 이상한 말이에요. 왜냐하면 자비한 자는 이미 자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비하다는 칭호를 받지요. 자비를 모르고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자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자비한 자가 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미 자비를 갖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주의 자비를 드러낸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자비를 모르면 몰라도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알 필요 없는데, “자비하심을 나타내시고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이게 바로 오늘 제목, 주체의 창조와 관련돼있는 말씀입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차원을 둘로 나누자. 인간들의 볼 수 있는 차원. 인간들의 볼 수 있는 차원이니까 주체가 아니고 여기 신체가 있겠지요. 신체니까 얼굴에 눈이 박혀있겠지요. 눈이 하는 일이 뭡니까? 저기 누가 존재함을 보겠지요. 그들이 보는 앞에 어떤 신체가 보이는 거예요. 그냥 신체에요. 자기들이 사람이라면 저 사람도 사람 같아. 사람 눈에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이게 신체지요.
주체는 뭐냐 하면, 신체 안에 담긴 내용물이 되겠습니다. 이 내용물을 주님은 다른 차원이니까 위에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예언과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를 여기다 다윗에게 줘버린 거예요. 줘버리면 일반인 보기에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반인처럼 보이느냐?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아니야. 그 사람 속에서 완전과 온전함과 자비하심이 현재 방출하고 있고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럼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나님 마음에 드는 주체의 창조가 되는 겁니다. 지상이란 환경과 하늘이란 환경을 분리시켜 보면 이 말씀이 이해되죠. 그럼 그 뒤에 있는 말씀, 26절 봅시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이제 이해되시죠. 어떤 자도 깨끗한 자가 없는데, 다윗도 깨끗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깨끗하지 않는 다윗 속에서 깨끗함이 나오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주님께서 다윗에게 무엇을 계속 공급해주고 있는 겁니까? 주님의 말씀과 예언과 계시를 공급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깨끗함은 다윗과 하나님의 일방적 깨끗함이지 세상사람 보기에는 뭡니까? 특이하지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싶은 자기가 주체가 주인공 되고 싶은 조건을 따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딸기밭에 가본 적 있어요? 딸기밭에서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딸기 따먹는 거죠. 그게 에덴동산이에요. 에덴동산의 특징은 따먹어라. 따먹는 동산이죠. 딸기밭에서 딸기를 따먹는다. 그러면 말 바꾸겠습니다. 신종코로나 있는 킹클럽에서 해야 될 일은 뭡니까? 신종콜로나 따먹는 일이죠. 마스크 벗고 춤추고 있단 말이죠. 이태원에 신종코로나 범람한, 동성애자들이 많이 간다는 소문이 있는 그 클럽.
창세기 2장에서 낙원에서는 딸기밭처럼 따먹으면 되지요.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에덴동산은 무슨 동산이 됩니까? 완전히 저주가 작렬하기 때문에 주께서 쫓아내버리죠. 죽어도 그냥 죽지 말고 저 밑에 내려가서 땅을 갈고 죽으라고 하잖아요. 그럼 이 세상, 에덴동산이 아닌 입장에서 우리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오게 되면 그냥 받아야 될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무한변수, 환경이에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뭐냐 하면, 나노(십억 분의 일) 크기의 공격용 드론입니다. 공격용이란 말은 누가 공격했다는 뜻이겠어요? 하나님이 공격했지요. 하나님이 나노 크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용 드론을 띄워서 이건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 몸의 세포를 공격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뭐로 막습니까? 마스크로 막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스크로 하면 우리가 살았다고 돼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뭘 모르느냐 하면, 누가 왜 저를 향하여 공격하십니까? 공격의 주체와 공격의 의도와 공격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공격하는 이유는 인간구조가 허술하다, 또는 허망하다, 허황되다는 것을 말씀에 입각해서 폭로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입각해서 신종코로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우리가 마스크로 되는 게 아니고 마스크 쓰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다른 변종 바이러스로 또 공격하겠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신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 신체로는 천국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 그게 온전함이 돼요. 같이 신종코로나, 사실 우리는 신종코로나 이전에 죽음의 확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안 죽는다고 여긴 것은 이걸 무증상 확진자기 때문에 안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신종코로나가 옴으로써 이게 서서히 무증상이 아니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 증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똑같이 죽을 신체로 태어났다면, 성도를 왜 이 땅에 살게 하느냐? 그건 뭘 보여주기 위해서입니까? 죽어가면서도 온전함을 보이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다윗이 의인이 아니에요. 다윗도 죄인이에요. 죄인이지만 뭐가 나온다? 주님의 온전함이 나오고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온다는 것. 다윗이 간음했지요, 다윗이 살인했지요, 거기다가 다윗이 또 자기 죄를 감추려고 했지요. 그리고 자기 아들 하나 교육 못했잖아요. 압살롬이 반란할 빌미를 줬잖아요.
다윗은 자기가 다룰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제대로 못해요. 못하는데 다윗에게 자비하심이 나오지요. 그러면 그게 언약 사람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성도라면 뭐가 나와야 됩니까?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오면 되고, 그 자비하심이 온전함이에요. 우리 속에서 다 이루었다함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원수들로 가득 차 있음이 드디어 우리 신체의 눈은 모르지만 우리의 주체 마음으로서는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이 바로 성경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고 악인이라는 게 나온다니까요. 악인이라고 나쁜 마음만 먹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복음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 복음에 대해서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제가 어제 오후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쿡 쑤시면 말이 나오는 인형 있지요. 알라브유, 알라브유. 그러면 성도라면 쿡 쑤시면 뭐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 십자가. 왜냐하면 그게 온전함이기 때문에, 그게 자비하심이기 때문에. 놀라운 사실은 강도도, 강도에요. 기생 라합도 기생이에요.
강도나 기생이나 공통점이 뭐냐? 전부 다 주님의 자비하심의 신호가 되는 삶을 살았다는, 증표가 된다는 겁니다. 어떠한 변수가 있더라도 그 인형이 화장실이나 식당이나 목욕탕이나 그건 문제되지 않아요. 누르기만 하면 뭐가 나와요? 알라브유. 다윗은 누르기만 하면 주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이 나와요.
아까 이야기한 것 해봅시다. 감사가 어디서 나온다고 했지요? 의아함. 내가 왜 예수를 믿지? 이상해. 이건 내 의도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훌륭한 남들에게 칭찬받는 신앙이라고 그게 내 주체의 욕망이었어. 하지만 남이 욕하든 욕해도 괜찮습니다. 본인이 알아요. 내가 보기에 내가 의아해요. 이건 어떻게 남한테 설명할 수가 없네.
본인이 하루하루 사는 게 기적 같아요. 안 믿어도 되는데 예수를 왜 믿느냐?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이용할만한 예수를 믿는 것이 나의 타고난 죄의 본성에 맞아요. 나한테 도움 되는 하나님, 나한테 유리한 하나님, 날 천당 보내는 하나님이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내가 선호하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가 아니고 의아한 예수, 의아함으로 다가오는 예수, 이거는 내 의도가 아니고 성령의 임재함이에요. 다윗이 성령 받은 것처럼 똑같은 현상을 우리가 보이는 겁니다. 주여, 제가 왜 이렇게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건 제가 예상 못한 겁니다. 의아합니다. 주님께서 니 구원받으려고? 아니에요. 내가 너를 말씀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하는 겁니다.
온전함과 자비로움과 그 뒤에 26절에 뭡니까? 누가 사특한지 누가 악한지 그 다음에 교만 나오지요. 누가 교만한지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주체자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의아함 다른 말로 생소함 또는 낯섦,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이런 의아함으로 연속되는 어떤 성도가 취직을 하려고 합니다. 면접 보면서 인사 관계자가 지난 회사에서 월 이백 받았는데 우리 회사는 형편이 안 좋아서 반 토막 난 월 백 줍니다. 그래도 우리 회사 취직할 마음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에이, 나도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백 받고 갑니까? 전처럼 이백 받아야 되겠습니다, 라는 말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일 시켜주시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들어가야 될까요? 재수 없네. 잘못 걸렸네. 이런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기본은 주님의 지시고요. 두 번째, 그 지시에 따라서 왜 이런 환경을 주셨느냐? 다시 말해서 나 같은 죄인에게 네 노동력을 사고 싶다는 회사가 등장한 자체가 본인은 뭐로 봐야 합니까? 의아함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내 자존심이 있지. 이게 아니고, 계산하는 게 아니고 그 환경 자체가 주께서 무한변수 중 일부가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됩니까? 그래야 감사가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백만 원이라도 저한텐 고맙지요. 저 같은 걸 누가 받아준다고. 하고 있는데 문자 떴어. 다른 데서 삼백 준대. 어떻게 할까요? 백만 원 주는데 갈까요, 삼백 주는데 갈까요? 삼백 주는데 가야지요. 왜? 그것도 의아함이거든요. 나한테 삼백 주는 데가 다 있다니. 그러니까 이건 적어도 내 수준에 이백 정도는 돼야지. 이게 아니라 나라는 것을 내가 규정한다, 안 한다? 내가 규정하는 게 아니고 의아함으로 살아 계신 주님의 활동으로 자기를 규정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어렵습니까, 자연스럽습니까? 자연스럽지요, 자연스럽지요. 자연스런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되거든요. 죽었는데 살아 있다는 자체가 의아함의 시작이 되니까 살아있으면 이 구경, 저 구경할 수 있잖아요. 백만 원짜리 회사 구경도 할 수 있고 삼백만 원 주는 그 회사도 구경할 수 있단 말이죠. 어차피 죽은 귀신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귀신이 무슨 구경인들 못할까.
괜찮은 자식만 있을 필요 없어요. 애 먹이는 자식도 괜찮은 구경거리에요. 괜찮은 구경거리는 아니구나. 속상할 구경거리는 아니구나. 하여튼 그것도 의아함으로 초월해야 돼요. 그래야 감사가 나타나야 되니까. 세상 탓하지 마세요. 세상 지옥인 것은 기정사실이죠. 지옥에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시편 18편에 나옵니다.
18편 19절에 구원이란 말이 나오고요. 여기서 23절에,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지금 다윗의 주변 환경이 지옥이에요. 죄악입니다. 모든 힘센 악들, 사울 왕이 통치권을 발휘하고 있는 환경이에요. 그 속에서 내가 주님의 자비하심과 온전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내 속에서 작용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윗 자체가 말씀이 주체고요. 다윗이 하는 행동 자체가 오늘날 시편 18편이라는 계시로 이렇게 정리된 겁니다.
여기서 세상의 원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여기 26절에,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인간의 윤리도덕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기게 했습니까, 못 이겼습니까? 간단하지요. 답변은 둘 중에 하나니까. 신종코로나가 이겼습니까, 못 이겼습니까? 인간의 윤리도덕이. 착하게 살면 바이러스가 겁나서 물러갑니까? 안 물러가지요. 그래서 인간의 윤리도덕은 아무 의미 없어요. 신종코로나 앞에 아무 의미 없다고요.
같은 말로 화산 터졌는데 믿음으로 불을 이길 수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간 것은 세 친구가 사전에 연습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왜 자꾸 연습하느냐 하면, 미리 예상해서 예방적 차원에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꾸 예방해요. 백신 없나, 면역체계 없나. 예방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것이니까 내가 지키겠다는 거예요. 우리 마을은 누가 지킵니까? 향토예비군이 지키잖아요. 꼭 내가 향토예비군 된 것 같아.
그 향토예비군 되는 방법이 뭐냐? 착하게 살면 방어가 잘 되고, 악하게 살면 내 인생 조져논다. 그러니까 바르게 살 이유가 예방적 차원에서 수세, 수비적 차원에서 내가 바르게 살고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윤리도덕이고 자기 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변수의 환경은 우리의 윤리도덕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까발리는 식으로 우리에게 와버리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만약에 나의 행실과 선함과 윤리도덕으로 방어가 가능하다면 인간이 자기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공로를 누구한테 돌리겠습니까? 나의 성실함과 나의 노력함과 나의 지혜 있음과 나의 착함과 나의 부지런함과 세상을 보는 아주 빠짐이 없는 촘촘하게 보는 혜안, 또는 지혜, 진리를 꿰뚫어보는 나의 통찰력, 여기에다 자기 공로를 돌리죠.
성경공부 오고 교회 예배하면서 사람들의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천국 가고 세상 읽을 수 있는 아이디어나 정보 확보, 지식확보 차원에서 오게 되지요. 모임이란 게 중요해요. 사람은 모임을 생각할 때 여기 몇 사람이 있는가? 점심 먹으러 가는데 어느 식당갈까? 사람들 줄 서 있다. 그런데 갈까요. 맛 집 몇 사람이 있다 할 때 이걸 헤아림이라 하거든요.
이건 어디서 했느냐 하면, [역사검열]이란 제목 하에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지난겨울에 대전에서 에스더 했지요. 거기 나와요. 헤아린다. 또는 셈한다. 하나둘 셈한다. 이건 누굴 빠트린 거예요? 그렇지요. 본인의 존재를 빠트리고 본인이 다른 사람을 대상화시키는 겁니다. 대상화시키면 본인이 객관이라는 것은 사실은 객관이 아니고 본인의 주관이 돼버려요. 이게 바로 교만입니다.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왔다 했지요. 그럴 때 뭐가 위축됩니까? 나의 주관이 바람 빠진 테니스공처럼 쭈그러드는 거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 오고 난 뒤에 내 인생이 위축된다는 거예요. 인생 앞에 뭘 붙입니까? ‘나’를 붙여요. 내 인생이다. 내 신체고, 내 몸이다. 자꾸 나를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사특한 것이 되고 교만이 돼버려요.
신종코로나가 누굴 공격하느냐? 나를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켁켁거리고 내가 아프지요. 그러면 신종코로나가 나에게는 악마가 돼버린다고요. 신종코로나로 공격하는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신종코로나 보낸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주님이 나의 원수가 돼버리는 거예요. 내 휴대폰에 동영상 하나 저장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세 살 먹은 딸아이가 기도하는데 이런 내용이 나와요. 말도 잘 못해요. “하나님, 지금 악마가 돌아다녀요. 세균이 돌아다녀요. 악마를 물리쳐주세요.” 이건 말로 해선 잘 안 되는데……
악마를 물리쳐주세요.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교회도 못 갔어요. 빨리 교회 가게 해주세요. 신종코로나를 악마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거는 헤아림입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관이 되는 겁니다. 남들은 대상이 되고 객체가 돼버려요.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대결구조를 형성해요.
마지막 어려운 건데 잘 들으셔야 돼요. 대결구조라 했지요. 나 중심의 구조와 주님 중심의 구조가 있습니다. 제가 구조,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신체는 누가 봐도 멀쩡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세계는 구조화된 거예요. 어떻게 구조화되느냐 하면, 여기다가 가치 중심으로 또는 가치에 의한 구분으로 구조화돼있어요. 선과 악으로 구분돼있습니다. 인간의 구조화가.
선은 필히 누가 반드시 속한 거예요? 내 주관이 여기 속하고, 악은 내가 대상화할 때 악하다고 한 사람들, 그리고 선한 사람은 내가 헤아려서 뽑으면 되니까, 선택해서 하면 되니까. 인간의 정신구조는 선과 악으로 돼있어요. 선과 악으로 구조화됐기 때문에 이 말 잘 들어야 돼요. 선으로 따로 뽑을 수 없어요. 그럼 구조가 안 돼요.
구조란 반드시 틀이 형성돼있단 말이죠. 선이 있고 악이 있는 거예요. 선이 있는 곳에 악이 반드시 있고 악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를 선으로 규정하기 위한 악이 되는 겁니다. 저놈 악해, 라는 말은 그걸 같은 말로, 나는 역시 선하게 살기 잘했어. 이렇게 된다 말이죠. 저놈은 지옥 가. 나는 천국 가. 이게 구조화돼있어요. 이 구조와 구조의 대결구조에요.
다윗의 특징은 지금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겁니다. 다윗의 구조는 수평적 구조가 아니고 주님과 함께 연결돼있어요. 그런데 이쪽 세상구조는 이렇게 돼있거든요. 수평적으로 내가 선하면 저게 악이 되고, 내가 잘될 경우에 선하다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해야 되느냐 하면, 나와 네가 싸우는 게 아니에요. 너의 구조와 나의 구조가 싸우는 거예요. 그렇게 돼야 선악체제와 관련성 있는 해명이 되는 겁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그럼 제가 하나 물어볼게요. 가난한 것과 누추한 것의 차이점이 뭐지요? 오늘 차이점을 많이 묻는데 답 들어보면 의외로 간단해요. 가난은 못 살아도 깨끗하게 사는 것, 청소하며 사는 게 가난이고, 누추함은 가난하기도 하지만 지저분하게 사는 것. 가난은 돈이 없을 뿐이지 때가 안 묻은 것, 정신 바짝 차리고 사는 것. 누추함은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
그래서 가난해도 이게 선이 될 수 있지만 누추한 것은 어떻게 해도 악이 되는 겁니다. 환경이 지금 돈이 얼마냐가 아니라 선이냐, 악이냐 둘 중에 하나의 구조에다 전부 다 모든 것을 집어넣어서 서랍정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는 선, 이건 악. 그런데 이게 수시로 바뀌어요. 자기가 선이기 때문에. 선악, 선악, 인간구조가 이 구조 밖에 없는 겁니다.
왜 이야길 하느냐? 이 구조에 다윗이 들어옵니다. 다윗에게 이런 구조를 하늘에 계신 주님이 말씀이 허용 안 해요. 왜냐하면 선악과 말고 다른 나무가 있지요. 무슨 나무입니까? 생명나무지요. 생명나무 구조를 가져오기 때문에 선악구조와 안 맞아요. 오게 되면 타인들이 다윗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 선악 구조적으로 해석해버려요.
다윗이나 사울 왕에 있어서 또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이나 다윗은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선에 속하지 않고 악에 속하는 겁니다. 이럴 때 제가 다윗 이야기하고 사울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우리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뭐가 있다? 선악구조가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착한 분이니까 선에다 집어넣고 싶지요. 이게 바로 교만한 겁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거예요. 나와 함께 계시면 안 돼요. 왜냐하면 구조 없이 몸으로 달랑 몸과 부딪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체제와 우리의 가치체제가 달라요.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일단 어디로 가야 하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기 위해서 선악구조를 부수겠지요. 부술 때 우리는 반항이 일어나는 겁니다. 순서를 정해볼게요. 말로 하면 복잡하니까.
①나는 주인공이다. 주체다. 두 번째, 주님이 우리한테 들어온 거예요. ②주님을 내 안에 모신다. 그런데 모심으로써 내 구조가 십자가로 인하여 부정되지요. 나는 나 혼자 주님 말씀대로 잘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구조로 돼있기 때문에 나의 선함을 주께서 용서를 안 하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주체변동이 일어나는 거죠. 세 번째를 말씀드립니다. ③변동된 주체의 확장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의아함이 계속해서 이어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느냐 하면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주님 오셔서 주님이 주인공 되고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다. 여기서 멈춰버려요. 이것은 결국 그렇게 한국교회는 자기 구원만 이야기하고 구원론만 주장한다고 욕하지만 막상 본인도 무엇에 멈추었습니까? 나는 복음으로 구원받았다. -끝-
지 얻을 것 다 얻었다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께 은근히 노린 것 다 얻어 챙겼으니까 이제는 아쉬운 게 없다는 거예요.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끝나버려요. 나를 구원했으니까 감사하다는 거예요. 참석 안 한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 자체가 또 은근히 압력이 된다.
뭐냐 하면, 이게 주체가 확장하는 거예요. 중요한 게 또 마지막에 등장하네. 내가 움직이면 내 상황은 안 움직입니다. 내가 안 움직이면 주변 상황이 움직여요. 집에서 자가 격리하고 있으니까 세상 사람들 많이 움직이죠.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신종코로나가 신경 쓰이죠. 뉴스에서 계속 이야기하니까. 나이트클럽 가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가만있는데 저쪽에서 움직이죠.
그런데 만약에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뭘 해야 돼요? 장례 치러야 되겠지요. 그럼 누가 움직여요? 지가 가만있으면 장례됩니까? 장례식장 알아봐야 되고 알려줘야 되지요. 부조금은 그냥 계좌로 받겠습니다. 연락해줘야 되지요. 와봐야 점심 10분 이내로 먹고 가야 됩니다. 본인이 움직이니까 뭐가 안 움직여요? 신종코로나라는 게 머리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지금 우리 엄마 장례 치르는 판인데 신종코로나 뉴스가 머리에 안 들어온다니까요.
태극기 부대 참석한 사람들의 누군데요, 젊은 사람들이에요, 노인네들이에요? 노인네들이잖아요. 할 짓 없으니까 정치 게임하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구원받았어요. 구원받고 움직여버리면 그동안 주님이 주신 무한의 변수가 갑자기 스톱이 돼버리고 죽어버린 거예요. 구원 다 받았는데 하나님 왜 찾는데?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뭐. 십자가 피 믿었으니까 용서받았고. 놀러 갈 것 다 놀고 할 거야.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그럼 뭐가 안 되냐 하면, 구원론 중심이 아니라고 백날 본인 입으로 그렇게 해놓고 결국 속마음은 뭡니까? “목사님, 저는 십자가로 구원받았어요.” 이게 일번에서 이번으로 끝나버렸어요. 삼번은 뭡니까? 삼번은 새로운 주체의 움직임, 확장의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주께 쓰이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주님 앞에 뭘 할까를 본인이 결정해버리면, “하나 안 하나 삼백만 원짜리 가나 백만 원짜리 가나 구원받았는데 이 땅에 살면서 일하고 월급이나 받지.”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의 구원 작업은 계속해서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새로운 주님의 말씀이 주체를 주께서는 움직여 나가는 겁니다.
움직여 나간다고 해서 밖에서 활동하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고 집에 있어도 날마다 주님의 지시를 받고 내가 움직인다, 주님이 움직인다? 주님이 움직여서 오늘은 내가 쉬어야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누워 자야겠다. 이것도 주님의 지시받고 숙제 받고 움직이세요. 그게 뭐냐? 지금 주께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온전함과 그리고 자비하심을 확장시키는 주님의 전도방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받았다고 그걸로 족하다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내 일은 없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러한 도구에 불과한 것을 감사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