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0a 부산강의 : [시편]25(17편)-배신의 분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7편 내용을 보면서 성경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창세기 1장에서 객관이죠. 왜냐? 해와 달과 별이 실제로 있으니까. 지금도 해가 떠있잖아요. 객관이죠. 그런데 창세기 2장, 3장에 가서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관으로 바뀌어요. 해와 달과 별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게 더 중요하게 돼버렸지요, 인간이.
원래 해와 달과 별, 모든 것은 누구와 관련돼있느냐 하면, 실은 하나님과 관련돼있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행세하니까 그 다음부터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객관이 자기 주관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된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객관이 주관으로 인간 위주로 바뀐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돌려받아야 되겠지요. 다시 이것은 새로운 객관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객관에서 주관으로 바뀔 때 악한 영이 여기에 개입되었습니다. 악마, 옛 뱀 또는 용, 사단이 개입됐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있었다. 객관이죠. 어렵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주관 돼버린 거예요. 그냥 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다. 그대로 있는 거예요. 동생 가만 놔두면 되잖아요. 형이 동생을 들에 있을 때 죽여 버립니다. 객관에 주관이 삽입돼버려요. 그러면 사건이 터지거든요.
그때 가인이 동생 죽일 때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4장 7절에 보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돼있어요. 성경이 객관 밖에 없는 그 세계에 가인이 동생을 죽이게 되는 주관적 조치를 할 때 여기 객관에서 주관으로 옮김을 허락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객관을 여기에 노출시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죄라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주관이죠. 주관인데 인간들의 주관을 건드리면 객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주관보다 악마의 주관이 더 세다 이 말이죠. 더 강렬해요.
이것이 정치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국가적인 위치에서도 그렇고.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 포위하다 아람 군대가 몇 명 죽었습니까? 십팔만 오천 명 죽었지요. 그 사람들이 거기에 왜 죽어요?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그랬지 자진해서 차비 내고 택시 대절해서 온 것 아니죠. 이게 뭐냐 하면, 국가라는 악한 영의 주관이 그냥 전쟁하고 싶지 않은 젊은이의 주관보다 우세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관과 주관들이 모여서 거대한 주관이 되고 이것이 뭐냐? 객관으로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티비에 보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세상 살기 싫어서 산 속에 혼자 기어들어가서 가족들 다 버리고 지만 편하게 살겠다, 나는 마음에 우울증이 있다 어쩌니, 동생 죽고 난 뒤에 산으로 피했다고 온갖 핑계를 다 대는데 이건 철저한 주관이죠. 당신은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나는 세상에 나가면 죄를 짓기 때문에 산 속에 혼자 있으면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좋지 않으냐는 거예요.
그러나 산 속에 혼자 피신하다고 해서 절대적인 주관의 기능을 혼자 할 수 없어요. 항상 더 큰 주관의 죄에 휩싸이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 객관만 있는 이 세계에 인간이 선악과 과실을 따먹고 객관을 주장하는 주관이 되고 싶지만 여기에 악한 영이 개입했다는 이 사실, 그리고 악한 영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주관보다 더 센 주관으로 작용하는 이것이 바로 객관입니다. 새로운 객관이죠.
그러면 객관의 층이 둘이 되는 거예요. 하나는 인간이 보고 있는 자연세계가 객관이고, 그 자연세계라는 먹잇감을 두고서 하나님이 주장하느냐, 아니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주관적으로 먹잇감을 다루고 사용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까 창세기 4장의 예를 들면, 가인은 악이 쳐들어올 때 가인은 그 악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게 돼있어요.
그러면 가인이라는 주관이 아벨이라는 객관을 살해했으니까 없애버렸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형이 동생을 죽였다고 보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악마의 주관성이 하나님께 속한 객관성을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고 보는 거예요. 아벨은, “형, 한 판 붙자.” 이런 게 아닌 것처럼 그냥 당했다는. 무기력하게 그냥 당한 거예요.
그래서 시편 17편도 마찬가지고 시편 모든 내용들은 객관에서 주관된 것을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한테 주관을 악마의 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원하는 객관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으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시편 17편도 마찬가지에요. 악마에 잡혀있는 주관을 거기서 객관으로 뽑아내는 그 작업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21장 19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거기에 나무 한 그루가 나오죠. 무화과나무, 객관입니다.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우리 인간들 보기에 그야말로 객관이고 순수객관이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나무 안 할래. 코끼리 할래. 이럴 수 없어요. 나는 여기보다 딴 데 저쪽에 가서 자랄래, 할 수는 없어요. 땅에 박혔으니까. 무화과나무는 땅의 성질과 동일해요. 땅은 어디로 옮길 수 없어요.
땅의 객관성과 동일합니다. 땅의 일부죠. 다른 말로 하면 땅에 솟아난 부분,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고. 뿌리가 땅에 박혀있으니까. 하늘에 박혀있는 그런 나무는 없어요.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성도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박아라. 지난 오후 설교에서 했지요. 골로새서 2장 7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박으란 말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뿌리가 하늘에 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거꾸로 돌입해서 이 세상에 머리를 두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자세는 누굴 닮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어요. 예수님의 근본은 하늘에 있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하늘의 분으로써 땅의 사정을 살피려 오신 분이고 땅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죠. 악마의 주관성에 사로잡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원래 객관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객관성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손보려고 오신 거죠.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땅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 보기엔 주관이죠. 죄인이니까 주관입니다. 악마의 영에 사로잡혔으니까 주관이죠. 주관이니까 무화과나무는 무능하죠. 인간에 비해서 무능하단 말이죠. 인간은 유능한 데 주관이 있으니까 뭐든지 하고 싶고 기대하고 계획 잡을 수 있고 다 있단 말이죠. 네가 계획이 다 있구나, 이런 것처럼 계속 계획 세우고 뭔가 시도해보려 하고 다른 사업, 장사 치우고 다른 장사해볼까. 끊임없이 뭔가 해보는 겁니다. 학교도 여러 군데 내보고, 하다가 때려치우고 여러 가지 한단 말이죠. 또 시집 안 가고 석사하고.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무능하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들 보기에 무능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열매를 원해요. 열매 맺었는지 보자, 했는데 아직 때가 안 돼서 열매가 없어요. 열매가 없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주를 해버립니다. 내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고 싶은데 없으니까 저주를 해버려요. 무화과나무가 놀란 게 아니고 제자들이 놀래버렸어요.
왜냐하면 객관에 저주를 한다는 말은 성립이 되질 않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주관이라는 것은 그냥 주관이 아니고 선악의식을 가지고 있는 주관이란 말이죠. 선은 복이 되고 악은 저주가 되는 것은 주관일 경우에만 합치되는 겁니다. 자기의지, 자유의지라든지 이런 게 있을 때는 벌을 받아도 납득이 돼요. 잘못한 게 있는 모양이다, 라고 납득이 되는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한다는 말은 무화과나무가 놀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놀래버려요. 전혀 자기가 알고 있는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악령에 의해서 생각하는 객관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소멸대상의 객관이에요. 멸망대상의 객관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주관에 문제가 생겨요. 우리 주관 자체가 뭔가 망가졌고 고장 났어요. 주관이 고장 나니까 인간이 쳐다보는 모든 객관적 창조세계, 과학 눈에 보이는 모든 변화 자체가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악령이 사기극에 인간이 말려든 거예요.
이 말은 그냥 사기 당했다는 게 아니라 정반대에요. 저주를 복이라 여기고 복을 저주라 여겼던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자체가 하나님의 주관과 대치되기 때문에 정반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그 심보를 그대로 아담이 거기에 한 패가 되어 우리까지 물려받으니까 단순히 틀린 게 아니고 대치되고 반대가 되는 거죠.
사는 것은 좋은 것, 죽는 것은 악한 것,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사는 것은 좋은 것, 죽는 것은 나쁜 것.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 못한 사람들 전부 다 나쁜 것을 택해서 가는가? 참석하면 죽고 참석 안 하면 산다, 뭐 그런 뜻인가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것부터 더 소중한 것 없고 사는 것이 남는 거고 사는 것이 성공한 일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객관적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해석의 정답은 뭐냐 하면, 성경해석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님이 한 저주를 집어넣는 거예요. 죽음을 집어넣고 해석하는 겁니다. 죽음을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아는 로마서 6장의 공식, 죄 값은 사망이죠. 죄 값은 사망이란 말은 죽은 것은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면 운명론자가 되거든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운명론자처럼 하지 말고 죄 값은 사망이니까 사망이 오게 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죄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망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주관이 아니고 사망을 객관으로 바꿔버리면 죄가 주관이 아니고 객관이 되면서 그러니까 선과 악의 주관적 선택에서 죄가 벗어나게 돼요. 선을 악을 선택하든 말든 죄인 돼버려요. 바르게 살고 안 살고 관계없이 바르게 살겠다는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인간의 주관, 마귀의 주관, 악한 영의 주관에서는 사람들은 잃는 것을 고통스러워해요. 제일 부모로서 엄마로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젊은 나이에 자식이 죽는 거죠. 맏아들 잃어버리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지요. 예수님이 떠난 자리가 그냥 빈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떠난 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읽어버린 어머니의 통곡의 자리죠. 라헬이 자식을 잃음으로써 통곡하는 것.
어떤 자리에 예수님이 있다, 그냥 태어났다, 떠났다, 아무렇지 않다. 이게 아니에요. 벌건 다리미가 놓였다, 떠났다. 그러면 맨 전과 같이 똑같은 자리 됩니까? 타지요. 그냥 다리미라면 치우면 그만이지만 벌건 다리미라면 놓인 자리마다 타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는 마귀가 하지 성도가 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지나갔다 하면 마귀가 알아요. 마귀가 성도 지나간 자리를 알아요.
그래서 성도 아니면서도 전도한다는 것은 성도 아님을 마귀가 먼저 알아요. 그런데 진짜 성도가 한 전도는 마귀 쪽에서 알고 돌로 쳐 죽이든지 스데반 집사처럼 뭔가 우리교회에서 꺼져라, 나가라. 이런 조치가 있지 백날 전해도 아무 일도 없는 것은 다시 한 번 내가 가짜 같아. 먹히질 않아. 사람들이 잃는 것은 고통이죠.
오다가 들은 이야기지만 어떤 분이 이 년 동안 복음 들었답니다. 남편은 반대하고 아내는 몰래 복음 듣다가 겨울에 엎어졌는데 팔뼈가 박살났답니다. 남편이 때를 기다렸어요. “거봐. 네가 교회를 옮겨서 저주받았잖아.” 자, 팔을 잃었지요. 잃어버리니까 고통이 온 거죠. 그런데 인간은 팔다리 잃는 것보다 자식 잃는 것보다 더 힘든 고통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망각되지 못한 것이 고통이다.
자기가 아직도 주관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게 고통이에요. 주님이 다루시는 객관인데 그냥 까라면 까고 오라면 오고 부러지면 부러지고.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때가 되매 주어진 대로 살면 되는데 나라는 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내 주관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어지간한 것 잃어버리면 참아내요. 잃어버려도 이겨내야지.
그런데 아무리 잃어버려도 망각되지 못한 게 자아의 주관, 또는 자아성 이걸 망각하지 못하니까 계속해서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지고 해도 복음 쪽으로 나오질 못하는 거예요. 2년 동안 복음을 듣고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잃어버림은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최후의 막이 돼요.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지옥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장벽처럼, 그 사람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면 그렇단 말이죠.
내가 팔 부러졌으니까 저주받았으니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기존교회 다닐 걸 괜히 복음 아는 교회 갔다, 라는 선택을 하게 만들 때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내가 팔은 있더라도 내 자아성, 주관성, 내 가치는 못 놓겠다는 그 고집이 악마가 계속 쥐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예를 든 거니까요. 난 그 사람 모르니까. 바빠서 못 올 수 있고, 타이어 펑크 나서 못 올 수 있고, 그런 경우 있으니까.
자아성을 쥐고 있는 한 이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자아를 주장하고 견디고 이겨내려고 애쓰지 결국 자기 주관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천국 가는 것이 청국장 먹는 것처럼 쉬운 일 아니에요. 온 우주보다 네 목숨 구하는 게 귀하다고 할 때 주께서 지금 빈말하시는 게 아닙니다. 악마가 온 우주를 준다 할 때 주님께서 고개 안 숙였잖아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우리도 고개 안 수그립니다.
그걸 오후 예배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걸 가진 걸 성공이라 했고 그 성공 자체가 악마의 유혹이라 했지요. 인생의 베테랑은 실패를 즐길 수 있어야 돼요. 왜 실패를 즐기느냐 하면, 이미 다른 걸로 성공, 주님의 객관에 포함됐기 때문에 그까짓 것 세상 성공? 흥칫뽕이다. 해봤자, 뭐? 그거 뭔데. 백세까지 살아봤자 백세 된 그 날이나 지금 이 날이나 낮 기온 13도밖에 더 있냐 말이죠.
나라는 인간이 뭔가 변화가 돼야 되는데 내가 나를 스스로 관리해서 천국 가겠다고 싸대고 있는 이 어리석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일방적인 주관적 생각이에요. 주님은 일을 할 때 객관적으로 일한다고요. 객관적으로 일하는 데 주관이 왜 쓸데없이 끼어듭니까. 객관이 주관을 발로 차버리죠.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나 받아라.
무화과나무에 주님께서 저주를 한 것은 이 제자들이 본인은 주관이라 하지만 사실은 악한 영에 매인 객관으로 보는 거예요. 마치 무화과나무처럼. 무화과나무가 어떤 의지가 없어요. 때가 되면 열매 맺고 때 안 되면 열매 안 맺혀요. 그뿐이에요. 무화과나무한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무화과나무와 똑같이 너희는 주관이 있다고 보지만 나는 너희를 객관으로 보겠다.
베드로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누가복음 22장에서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하는 게 아니고 마귀가 지금 너를 노리고 있다. 너는 악마라는 주관의 종이야.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발 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너는 악마에서 벗어날 수 있어. 베드로 너는 결국 악마 편이 아니고 예수님 편에 있다는 그 증거를 대봐? 증거 댈 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주님에게 각본상 줘야 돼요. 너는 각본대로 진행될 거야. 그 정도로 너는 객관이야. 베드로야, 아직도 주관으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헌신하겠나이다. 이러느냐.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예를 들었어요. 사적 기도에서 벗어난 무시로 기도는 우리 손모가시를 비틀어서 수도원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가자, 집으로. 쓸데없는 짓하고 있어. 무슨 도를 닦겠다고, 무슨 짓하고 있느냐 말이죠. 그것 안 되면 안 돼요. 손모가지를 비튼다는 말은 내 주관은 쓸모없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잘해드리겠습니다, 순결하게 살겠습니다. 그런 짓하지 마라. 그런 짓하면 악마의 사기극에 말려든 거예요.
우리는 순종을 하는 게 아니고 해야만 하는 존재에요. 무화과나무처럼 그냥 주께서 하게 하시면 할 뿐이지 나름대로 내가 계획 잡아서 주님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자체가 이게 바로 악마와 한 패가 되는 겁니다.
오늘 시편 17편은 진행방향이 두 가지로 진행돼요. 첫 번째 전반부는 요즘 말로 하면, 양심에 비춰서 살겠다. 양심대로 살겠습니다. 양심이란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주관적으로 산다는 것을 표시한 거죠. 전반부는 내가 나름대로 바르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나쁜 짓하고 바르게. 후반부는 뭐냐? 그런데 여기서 적이 등장해요. 이 두 개가 다윗이 납득이 안 돼요.
나쁜 짓하면 적이 와서 나를 괴롭히고 모함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양심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 순종해서 사는데 왜 적이 등장하느냐? 그게 합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모순되는 거예요. 나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한테 가란 말이죠. 착하게 사는 나한테 발생되느냐 말이죠.
여기에 오늘 제목이 나와요. 바로 배신. 하나님이 나를 배신하는 겁니다. 배신이 없으면 객관에서 주관, 주관에서 객관으로 안 변해요. 이미 우리가 본인도 모르게 악마의 주관에 놀아난다면 주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방식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뜻에 배신하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무엇의 표상이냐 하면, 배신하는 자는 사울이고 배신당하는 자의 표상이 다윗으로 등장돼있어요. 시편 22편도 그렇게 시편 23편도 그렇고. 골리앗을 이겼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겁니까? 그런 인기를 얻기 위해서 무슨 수작을 부린 거예요? 아니지요. 그냥 이겼어요. 순수하게 이겼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예상과 너무나 배치되는 결과들이 자기한테 찾아오는 거예요. 가만있는 데 공격하는 거예요. 질투와 시기심으로 무장된 그것이 가만있는 데 오는 거예요.
시편 17편도 마찬가지에요. 전반부에서는 바르게 살았어요. 그런데 적이 등장해요. 그럼 다윗은 어쩌라고? 같이 나쁘게 살까?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게 뭐냐 하면, 13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도와줘요, 뽀빠이. 이것은 자기가 고생한다고 주님을 불러내는 게 아니고 다윗이 본인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자기가 예상과 다른 여호와의 모습을 비추니까 자기가 거기서 어떻게 호응해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갖고 있는 재주는 다 발휘했는데.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 율법대로 살자. 그러면 도와주실 것이다. 내놓을 카드는 다 내놨는데 그 카드가 먹히질 않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할 때는 결과가 모순 없이 연결될 때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제대로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음을 우리가 믿고 싶은 거예요. 역시 나도 신자 맞는다고 자기 자신도 안심하고 싶고. 그런데 비관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은 그걸 배신하는 거예요. 배신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네가 운명에서 벗어나라. 운명이라는 것은 내 관리대상이 아니다. 내 운명이라고 해서 내가 관리자로 가꾸어나가는 게 아닙니다. 텃밭에 꽃 가꾸고 배추 가꾸는 게 아니에요.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물주고 비료 주는 게 아니에요. 그 운명 관리에서 운명을 차버려야 돼요. 벗어나야 돼요.
내 운명을 포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이 나로 하여금 기존의 운명을 무효로 돌리는 기존의 운명을 헛것으로 돌리는 다른 곳으로 자기를 인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잘 하는 걸로 해보세요.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면 곱게 인도하면 될 터인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해놓고 4절에 보면, “음침한 골짜기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죠.
사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소실되고 소멸되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나를 없애고 그 대신 목자만 부각시키는 겁니다. 목자 있는데 뭘 걱정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양이 원하는 운명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고 양이 모르는 운명, 목자만 알고 있는 운명 쪽으로 우르르 몰고 가는 겁니다.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지요.
버슬 탔는데 예상한 코스가 아니고 이상한 데로 막 들어간다고 생각해봅시다. 버스 타고 부산역까지 가려고 하는데 버스가 해운대 모래사장으로 가더니만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설마 여기서 커브 돌겠지. 커브 안 돌아요. 막 들어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버스운전사가 사이코패스라. 혼자 죽으려 하다가 억울해서 같이 죽자고 버스 몰고 해운대 모래사장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어, 이럴 줄 몰랐어. 교회 다녀서 팔 부러질 줄 몰랐어. 빨리 차에서 내려 돌아서야 돼. 다시는 복음과 상종 안 해. 복음, 빠이빠이야. 돌아서려면 돌아서란 말이죠. 천국 가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내 의지대로 내가 꼼수 잡아서 내가 구상해서 계획 잡은 대로, 그게 나의 운명이잖아요. 내 운명의 코스를 미리 설정하고 그대로 하면 천국에 골인? 골인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길은 악마가 설정한 종교오락이죠.
종교오락을 현대정신분석학에선 쉽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인간보다 욕망이 우세해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인간은 따를 수밖에 없다. 욕망을 통해서 항상 상상의 세계를 자꾸 유발해서 욕망의 맛을 들이는(맛을 들이나 안 들이나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절대로 상상의 세계, 천국이죠. 천국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요. 천국에서 못 벗어나게.
나 천국 안 갈래. 지옥 갈래. 하는 인간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천국이 미끼였어요. 악마의 낚시 끝에 천국이 달려있어요. 교인들도 거기에 다 말려든 거예요. 천국 준다 하니까 지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냥 따라 가는 거예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주여, 감사합니다.” 그 주님한테 본인이 된통 당해야 돼요. 배신당해야 됩니다.
이럴 줄 몰랐어. 내 팔 다 부술 줄 몰랐어. 그런데 그것을 감사해야 되지요. 내가 알던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으로 나타나야 되기 때문에. 그 다른 하나님이 어디서 오는가? 아까 제목을 뭐라 했습니까? 배신이라 했지요. 배신, 바꿔야 되겠다. 이 제목으로, 분출. 땅에서 분출해버려요. 땅이 있다면 땅 속에서 분출해버려요.
모세 지팡이의 특징은 항상 땅을 치는 거예요. 땅을 때리는 겁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애굽의 강에 대니까 생수가 흐르던 그 맛있는 1급수가 흐르던 강이 뭐가 됐어요? 못 먹는 피가 흐르는 죽음의 강이 됐지요. 지팡이를 대면 분출하는 거예요. 땅 밑 속에 있는 원래의 진리가 지팡이가 때리는 지점, 지점이라 하지 말고 사건, 그 사건을 통해서 분출하는 겁니다.
애굽에 내리는 열 재앙 있잖아요. 특징들이 뭐냐 하면, 그게 모세 때문에 더 정확하게 모세의 지팡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열 재앙 전에 출애굽기 4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 모세 등장하지요. 그 중간에 지팡이 등장해요. 지팡이로 하나님 자기 뜻을, 자기 계획을 알려줍니다. “지팡이 던져라.” “어, 뱀이네.” “너 그동안 뱀 쥐고 있었어.” “머리를 쥐지 말고 꼬리를 잡아라.” “도로 지팡이 됐네.” “그렇지.” 네가 쥐고 있는 지팡이가 아니고 하나님이 쥐고 있는 지팡이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는 그냥 시다바리죠. 시키는 대로 하고 하나님이 직접 애굽을 치는데 애굽이 아니고 애굽으로 표상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대결장으로 애굽이라는 객관적인 땅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애굽 사람이나 히브리 사람이나 다 땅 없이는 못 살아요. 땅 없이는 못 사니까 생명이, 자기 목숨이 볼모된 거예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뭐, 우리가 자유롭다고요? 어떤 인간도 요 목숨 때문에 살아요. 자식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니가 이렇게 공부 못하니 못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공부 못해서 어떻게 밥 먹고 살래? 가장 근원적인 것, 밥 먹고 살면 됐지 뭐하려고 석사학위는 왜 하는데? 이런 식으로. 모든 교훈 가치가 일단 밥 먹고 살려면 얼추 안심 레벨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밥 먹고 살만하면 딴 데 눈 돌리게 돼있어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게.
기본적으로는 뭐냐?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이 가장 기본 활동으로써 어떤 인간도 발목 잡혀서 못 벗어난다는 것은 악마의 확신입니다. 이 연사는 외칩니다, 할 때 악마가 강력하게 목사의 모습으로 강단에서 외치는 거예요. 사람은 돈이 복이라고. 돈과 건강이 축복이다. 첫째는 돈이고, 두 번째 시험은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건강이죠.
돈, 건강, 그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 너희들은 그러한 유혹에 철저하게 봉쇄돼있다. 못 빠져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 없어요. 천당 생각하지 마세요. 끝났어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악령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모세가 등장해서 하나님의 사건을 일으키니까 여기서 지하세계가 분출되지요. 분출되면서 배신의 논리가 땅에 펼치게 됩니다. 배신의 논리가 펼치게 되면 여기서 착한 일을 할 때 모든 목적이 뭐냐? 뭘 얻겠다는 거예요. 얻는 것에서 반대쪽으로 나가요. 얻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잃어버리죠. 여기서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오늘 시편처럼.
어찌하여, 라든지 하나님께 호소해서 이럴 수 없나이다. 내가 이런 고난 받고 내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임을 당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조치입니다.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나오지요. 9절에. 전반부에선 뭡니까? 지금 바르게 산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범죄치 아니하고, 사람들 행사에 봐도 바르게 살고,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뒤에서 난리도 아니란 말이죠.
그건 뭐냐 하면, 땅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올라와서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괜찮은 주관으로 목적을 삼고 인생을 살아가는 나를 땅 속에 있는 주님의 손길에 붙잡힌 객관으로 만들어요. 네가 생각한 운명은 버리고 내가 계획한 운명에 너는 끌려들어가야 돼. 그것을 드러내야 돼요. 여호와를 증거 하는 삶이 돼야 됩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사람이죠.
아브라함도 사실은 배신당했죠.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해놓고 약속의 땅이 갑자기 가뭄 들었지요. 이건 배신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아파트 주겠다고 해서 아파트 가보니까 쥐 있고 바퀴벌레 나오고 비새고 문도 삐걱거리고 살 수가 없어요. 지붕이 뚫려서 비오면 다 새고. 그러니까 그 아파트 말고 좋은 아파트로 간 거예요. 갔는데 좋은 아파트에서 쫓겨나서 도로 이리 오잖아요. 그야말로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 믿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하는 겁니다.
아브람의 운명은 악마의 운명이라서 날아가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려면 아브람 본인의 어떤 의사와 관계없이 있지도 않는 후손에 의해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주관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증거 하는 객관에 소속돼버립니다. 포함이 돼버립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철저하게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어떤 의미에서 배신당하고 하는데 그 배신당할 때 오히려 처음에는 갈등이 일어나고 의심이 되고 내가 신자 맞는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렇지만 배신당함의 단일 증거, 하나밖에 없는 확정된 최종 증거 이게 뭐냐 하면, 배신의 표식은 뭐였지요? 신약에서 배신 중의 배신은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가짜가 진짜를 죽여 버린 사건이에요.
십자가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을 때 예수님이 그 사람들 눈에 다 보였어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할 때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주지 않는다는 사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나를 죽였던 그 사건 속에서 기어이 네 힘으로 못 빠져나오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부활한 주님 믿을 게, 라는 그 시도를 아예 합리적 시도를 차단시키는 겁니다. 못하게 만들어요. 우리 손으로 죽인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했구나. 하지만 그게 진짠지 아닌지는 보여주면 믿겠다고 나오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구원된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은 똑같이 세상 사람과 배신당하게 만들어서 예수님도 미쳤지만 같이 미치게 만들어요.
나는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있음을 믿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주님을 보여주면 네 말도 인정해줄게. 그러면 성도가, 너한테 인정받을 생각 없다. 너한테 인정받아서 우리교회 만들 그런 의사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나 됨은 일방적인 주님의 조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한 6년간 찾아보니까 발견했다. 그런 식으로 발견될 분이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인간은 주님 앞에 배신한 죄인으로 유지돼야 돼요. 죄인으로서 계속 가야 돼요. 그 다음에 이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일방적 조치여야 되지 어떻게 한 수 가르치고 지식 있어서 그래서 구원되는 수는 하나님의 배신이라는 그 개념 자체, 배신이라는 내용 자체를 주께서는 지워버리길 원치 않는 거예요. 그걸 계속 생생하게 배신당한 자만 산다는 것, 주님한테. 그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으로만 구원받습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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