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배신의 분출 2002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2. 12. 19:23
2020-02-10 16:07:21조회 : 128         
배신의 분출 20021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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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19.♡.174.200)20-02-12 10:56 
20200210a 부산강의 : [시편]25(17편)-배신의 분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7편 내용을 보면서 성경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창세기 1장에서 객관이죠. 왜냐? 해와 달과 별이 실제로 있으니까. 지금도 해가 떠있잖아요. 객관이죠. 그런데 창세기 2장, 3장에 가서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관으로 바뀌어요. 해와 달과 별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게 더 중요하게 돼버렸지요, 인간이.

원래 해와 달과 별, 모든 것은 누구와 관련돼있느냐 하면, 실은 하나님과 관련돼있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행세하니까 그 다음부터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객관이 자기 주관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된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객관이 주관으로 인간 위주로 바뀐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돌려받아야 되겠지요. 다시 이것은 새로운 객관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객관에서 주관으로 바뀔 때 악한 영이 여기에 개입되었습니다. 악마, 옛 뱀 또는 용, 사단이 개입됐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있었다. 객관이죠. 어렵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주관 돼버린 거예요. 그냥 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다. 그대로 있는 거예요. 동생 가만 놔두면 되잖아요. 형이 동생을 들에 있을 때 죽여 버립니다. 객관에 주관이 삽입돼버려요. 그러면 사건이 터지거든요.

그때 가인이 동생 죽일 때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4장 7절에 보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돼있어요. 성경이 객관 밖에 없는 그 세계에 가인이 동생을 죽이게 되는 주관적 조치를 할 때 여기 객관에서 주관으로 옮김을 허락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객관을 여기에 노출시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죄라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주관이죠. 주관인데 인간들의 주관을 건드리면 객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주관보다 악마의 주관이 더 세다 이 말이죠. 더 강렬해요.

이것이 정치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국가적인 위치에서도 그렇고.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 포위하다 아람 군대가 몇 명 죽었습니까? 십팔만 오천 명 죽었지요. 그 사람들이 거기에 왜 죽어요?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그랬지 자진해서 차비 내고 택시 대절해서 온 것 아니죠. 이게 뭐냐 하면, 국가라는 악한 영의 주관이 그냥 전쟁하고 싶지 않은 젊은이의 주관보다 우세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관과 주관들이 모여서 거대한 주관이 되고 이것이 뭐냐? 객관으로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티비에 보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세상 살기 싫어서 산 속에 혼자 기어들어가서 가족들 다 버리고 지만 편하게 살겠다, 나는 마음에 우울증이 있다 어쩌니, 동생 죽고 난 뒤에 산으로 피했다고 온갖 핑계를 다 대는데 이건 철저한 주관이죠. 당신은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나는 세상에 나가면 죄를 짓기 때문에 산 속에 혼자 있으면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좋지 않으냐는 거예요.

그러나 산 속에 혼자 피신하다고 해서 절대적인 주관의 기능을 혼자 할 수 없어요. 항상 더 큰 주관의 죄에 휩싸이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 객관만 있는 이 세계에 인간이 선악과 과실을 따먹고 객관을 주장하는 주관이 되고 싶지만 여기에 악한 영이 개입했다는 이 사실, 그리고 악한 영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주관보다 더 센 주관으로 작용하는 이것이 바로 객관입니다. 새로운 객관이죠.

그러면 객관의 층이 둘이 되는 거예요. 하나는 인간이 보고 있는 자연세계가 객관이고, 그 자연세계라는 먹잇감을 두고서 하나님이 주장하느냐, 아니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주관적으로 먹잇감을 다루고 사용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까 창세기 4장의 예를 들면, 가인은 악이 쳐들어올 때 가인은 그 악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게 돼있어요.

그러면 가인이라는 주관이 아벨이라는 객관을 살해했으니까 없애버렸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형이 동생을 죽였다고 보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악마의 주관성이 하나님께 속한 객관성을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고 보는 거예요. 아벨은, “형, 한 판 붙자.” 이런 게 아닌 것처럼 그냥 당했다는. 무기력하게 그냥 당한 거예요.

그래서 시편 17편도 마찬가지고 시편 모든 내용들은 객관에서 주관된 것을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한테 주관을 악마의 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원하는 객관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으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시편 17편도 마찬가지에요. 악마에 잡혀있는 주관을 거기서 객관으로 뽑아내는 그 작업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21장 19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거기에 나무 한 그루가 나오죠. 무화과나무, 객관입니다.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우리 인간들 보기에 그야말로 객관이고 순수객관이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나무 안 할래. 코끼리 할래. 이럴 수 없어요. 나는 여기보다 딴 데 저쪽에 가서 자랄래, 할 수는 없어요. 땅에 박혔으니까. 무화과나무는 땅의 성질과 동일해요. 땅은 어디로 옮길 수 없어요.

땅의 객관성과 동일합니다. 땅의 일부죠. 다른 말로 하면 땅에 솟아난 부분,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고. 뿌리가 땅에 박혀있으니까. 하늘에 박혀있는 그런 나무는 없어요.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성도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박아라. 지난 오후 설교에서 했지요. 골로새서 2장 7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박으란 말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뿌리가 하늘에 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거꾸로 돌입해서 이 세상에 머리를 두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자세는 누굴 닮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어요. 예수님의 근본은 하늘에 있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하늘의 분으로써 땅의 사정을 살피려 오신 분이고 땅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죠. 악마의 주관성에 사로잡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원래 객관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객관성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손보려고 오신 거죠.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땅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 보기엔 주관이죠. 죄인이니까 주관입니다. 악마의 영에 사로잡혔으니까 주관이죠. 주관이니까 무화과나무는 무능하죠. 인간에 비해서 무능하단 말이죠. 인간은 유능한 데 주관이 있으니까 뭐든지 하고 싶고 기대하고 계획 잡을 수 있고 다 있단 말이죠. 네가 계획이 다 있구나, 이런 것처럼 계속 계획 세우고 뭔가 시도해보려 하고 다른 사업, 장사 치우고 다른 장사해볼까. 끊임없이 뭔가 해보는 겁니다. 학교도 여러 군데 내보고, 하다가 때려치우고 여러 가지 한단 말이죠. 또 시집 안 가고 석사하고.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무능하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들 보기에 무능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열매를 원해요. 열매 맺었는지 보자, 했는데 아직 때가 안 돼서 열매가 없어요. 열매가 없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주를 해버립니다. 내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고 싶은데 없으니까 저주를 해버려요. 무화과나무가 놀란 게 아니고 제자들이 놀래버렸어요.

왜냐하면 객관에 저주를 한다는 말은 성립이 되질 않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주관이라는 것은 그냥 주관이 아니고 선악의식을 가지고 있는 주관이란 말이죠. 선은 복이 되고 악은 저주가 되는 것은 주관일 경우에만 합치되는 겁니다. 자기의지, 자유의지라든지 이런 게 있을 때는 벌을 받아도 납득이 돼요. 잘못한 게 있는 모양이다, 라고 납득이 되는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한다는 말은 무화과나무가 놀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놀래버려요. 전혀 자기가 알고 있는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악령에 의해서 생각하는 객관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소멸대상의 객관이에요. 멸망대상의 객관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주관에 문제가 생겨요. 우리 주관 자체가 뭔가 망가졌고 고장 났어요. 주관이 고장 나니까 인간이 쳐다보는 모든 객관적 창조세계, 과학 눈에 보이는 모든 변화 자체가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악령이 사기극에 인간이 말려든 거예요.

이 말은 그냥 사기 당했다는 게 아니라 정반대에요. 저주를 복이라 여기고 복을 저주라 여겼던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자체가 하나님의 주관과 대치되기 때문에 정반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그 심보를 그대로 아담이 거기에 한 패가 되어 우리까지 물려받으니까 단순히 틀린 게 아니고 대치되고 반대가 되는 거죠.

사는 것은 좋은 것, 죽는 것은 악한 것,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사는 것은 좋은 것, 죽는 것은 나쁜 것.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 못한 사람들 전부 다 나쁜 것을 택해서 가는가? 참석하면 죽고 참석 안 하면 산다, 뭐 그런 뜻인가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것부터 더 소중한 것 없고 사는 것이 남는 거고 사는 것이 성공한 일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객관적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해석의 정답은 뭐냐 하면, 성경해석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님이 한 저주를 집어넣는 거예요. 죽음을 집어넣고 해석하는 겁니다. 죽음을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아는 로마서 6장의 공식, 죄 값은 사망이죠. 죄 값은 사망이란 말은 죽은 것은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면 운명론자가 되거든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운명론자처럼 하지 말고 죄 값은 사망이니까 사망이 오게 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죄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망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주관이 아니고 사망을 객관으로 바꿔버리면 죄가 주관이 아니고 객관이 되면서 그러니까 선과 악의 주관적 선택에서 죄가 벗어나게 돼요. 선을 악을 선택하든 말든 죄인 돼버려요. 바르게 살고 안 살고 관계없이 바르게 살겠다는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인간의 주관, 마귀의 주관, 악한 영의 주관에서는 사람들은 잃는 것을 고통스러워해요. 제일 부모로서 엄마로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젊은 나이에 자식이 죽는 거죠. 맏아들 잃어버리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지요. 예수님이 떠난 자리가 그냥 빈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떠난 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읽어버린 어머니의 통곡의 자리죠. 라헬이 자식을 잃음으로써 통곡하는 것.

어떤 자리에 예수님이 있다, 그냥 태어났다, 떠났다, 아무렇지 않다. 이게 아니에요. 벌건 다리미가 놓였다, 떠났다. 그러면 맨 전과 같이 똑같은 자리 됩니까? 타지요. 그냥 다리미라면 치우면 그만이지만 벌건 다리미라면 놓인 자리마다 타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는 마귀가 하지 성도가 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지나갔다 하면 마귀가 알아요. 마귀가 성도 지나간 자리를 알아요.

그래서 성도 아니면서도 전도한다는 것은 성도 아님을 마귀가 먼저 알아요. 그런데 진짜 성도가 한 전도는 마귀 쪽에서 알고 돌로 쳐 죽이든지 스데반 집사처럼 뭔가 우리교회에서 꺼져라, 나가라. 이런 조치가 있지 백날 전해도 아무 일도 없는 것은 다시 한 번 내가 가짜 같아. 먹히질 않아. 사람들이 잃는 것은 고통이죠.

오다가 들은 이야기지만 어떤 분이 이 년 동안 복음 들었답니다. 남편은 반대하고 아내는 몰래 복음 듣다가 겨울에 엎어졌는데 팔뼈가 박살났답니다. 남편이 때를 기다렸어요. “거봐. 네가 교회를 옮겨서 저주받았잖아.” 자, 팔을 잃었지요. 잃어버리니까 고통이 온 거죠. 그런데 인간은 팔다리 잃는 것보다 자식 잃는 것보다 더 힘든 고통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망각되지 못한 것이 고통이다.

자기가 아직도 주관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게 고통이에요. 주님이 다루시는 객관인데 그냥 까라면 까고 오라면 오고 부러지면 부러지고.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때가 되매 주어진 대로 살면 되는데 나라는 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내 주관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어지간한 것 잃어버리면 참아내요. 잃어버려도 이겨내야지.

그런데 아무리 잃어버려도 망각되지 못한 게 자아의 주관, 또는 자아성 이걸 망각하지 못하니까 계속해서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지고 해도 복음 쪽으로 나오질 못하는 거예요. 2년 동안 복음을 듣고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잃어버림은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최후의 막이 돼요.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지옥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장벽처럼, 그 사람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면 그렇단 말이죠.

내가 팔 부러졌으니까 저주받았으니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기존교회 다닐 걸 괜히 복음 아는 교회 갔다, 라는 선택을 하게 만들 때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내가 팔은 있더라도 내 자아성, 주관성, 내 가치는 못 놓겠다는 그 고집이 악마가 계속 쥐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예를 든 거니까요. 난 그 사람 모르니까. 바빠서 못 올 수 있고, 타이어 펑크 나서 못 올 수 있고, 그런 경우 있으니까.

자아성을 쥐고 있는 한 이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자아를 주장하고 견디고 이겨내려고 애쓰지 결국 자기 주관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천국 가는 것이 청국장 먹는 것처럼 쉬운 일 아니에요. 온 우주보다 네 목숨 구하는 게 귀하다고 할 때 주께서 지금 빈말하시는 게 아닙니다. 악마가 온 우주를 준다 할 때 주님께서 고개 안 숙였잖아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우리도 고개 안 수그립니다.

그걸 오후 예배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걸 가진 걸 성공이라 했고 그 성공 자체가 악마의 유혹이라 했지요. 인생의 베테랑은 실패를 즐길 수 있어야 돼요. 왜 실패를 즐기느냐 하면, 이미 다른 걸로 성공, 주님의 객관에 포함됐기 때문에 그까짓 것 세상 성공? 흥칫뽕이다. 해봤자, 뭐? 그거 뭔데. 백세까지 살아봤자 백세 된 그 날이나 지금 이 날이나 낮 기온 13도밖에 더 있냐 말이죠.

나라는 인간이 뭔가 변화가 돼야 되는데 내가 나를 스스로 관리해서 천국 가겠다고 싸대고 있는 이 어리석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일방적인 주관적 생각이에요. 주님은 일을 할 때 객관적으로 일한다고요. 객관적으로 일하는 데 주관이 왜 쓸데없이 끼어듭니까. 객관이 주관을 발로 차버리죠.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나 받아라.

무화과나무에 주님께서 저주를 한 것은 이 제자들이 본인은 주관이라 하지만 사실은 악한 영에 매인 객관으로 보는 거예요. 마치 무화과나무처럼. 무화과나무가 어떤 의지가 없어요. 때가 되면 열매 맺고 때 안 되면 열매 안 맺혀요. 그뿐이에요. 무화과나무한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무화과나무와 똑같이 너희는 주관이 있다고 보지만 나는 너희를 객관으로 보겠다.

베드로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누가복음 22장에서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하는 게 아니고 마귀가 지금 너를 노리고 있다. 너는 악마라는 주관의 종이야.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발 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너는 악마에서 벗어날 수 있어. 베드로 너는 결국 악마 편이 아니고 예수님 편에 있다는 그 증거를 대봐? 증거 댈 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주님에게 각본상 줘야 돼요. 너는 각본대로 진행될 거야. 그 정도로 너는 객관이야. 베드로야, 아직도 주관으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헌신하겠나이다. 이러느냐.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예를 들었어요. 사적 기도에서 벗어난 무시로 기도는 우리 손모가시를 비틀어서 수도원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가자, 집으로. 쓸데없는 짓하고 있어. 무슨 도를 닦겠다고, 무슨 짓하고 있느냐 말이죠. 그것 안 되면 안 돼요. 손모가지를 비튼다는 말은 내 주관은 쓸모없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잘해드리겠습니다, 순결하게 살겠습니다. 그런 짓하지 마라. 그런 짓하면 악마의 사기극에 말려든 거예요.

우리는 순종을 하는 게 아니고 해야만 하는 존재에요. 무화과나무처럼 그냥 주께서 하게 하시면 할 뿐이지 나름대로 내가 계획 잡아서 주님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자체가 이게 바로 악마와 한 패가 되는 겁니다.

오늘 시편 17편은 진행방향이 두 가지로 진행돼요. 첫 번째 전반부는 요즘 말로 하면, 양심에 비춰서 살겠다. 양심대로 살겠습니다. 양심이란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주관적으로 산다는 것을 표시한 거죠. 전반부는 내가 나름대로 바르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나쁜 짓하고 바르게. 후반부는 뭐냐? 그런데 여기서 적이 등장해요. 이 두 개가 다윗이 납득이 안 돼요.

나쁜 짓하면 적이 와서 나를 괴롭히고 모함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양심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 순종해서 사는데 왜 적이 등장하느냐? 그게 합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모순되는 거예요. 나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한테 가란 말이죠. 착하게 사는 나한테 발생되느냐 말이죠.

여기에 오늘 제목이 나와요. 바로 배신. 하나님이 나를 배신하는 겁니다. 배신이 없으면 객관에서 주관, 주관에서 객관으로 안 변해요. 이미 우리가 본인도 모르게 악마의 주관에 놀아난다면 주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방식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뜻에 배신하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무엇의 표상이냐 하면, 배신하는 자는 사울이고 배신당하는 자의 표상이 다윗으로 등장돼있어요. 시편 22편도 그렇게 시편 23편도 그렇고. 골리앗을 이겼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겁니까? 그런 인기를 얻기 위해서 무슨 수작을 부린 거예요? 아니지요. 그냥 이겼어요. 순수하게 이겼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예상과 너무나 배치되는 결과들이 자기한테 찾아오는 거예요. 가만있는 데 공격하는 거예요. 질투와 시기심으로 무장된 그것이 가만있는 데 오는 거예요.

시편 17편도 마찬가지에요. 전반부에서는 바르게 살았어요. 그런데 적이 등장해요. 그럼 다윗은 어쩌라고? 같이 나쁘게 살까?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게 뭐냐 하면, 13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도와줘요, 뽀빠이. 이것은 자기가 고생한다고 주님을 불러내는 게 아니고 다윗이 본인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자기가 예상과 다른 여호와의 모습을 비추니까 자기가 거기서 어떻게 호응해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갖고 있는 재주는 다 발휘했는데.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 율법대로 살자. 그러면 도와주실 것이다. 내놓을 카드는 다 내놨는데 그 카드가 먹히질 않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할 때는 결과가 모순 없이 연결될 때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제대로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음을 우리가 믿고 싶은 거예요. 역시 나도 신자 맞는다고 자기 자신도 안심하고 싶고. 그런데 비관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은 그걸 배신하는 거예요. 배신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네가 운명에서 벗어나라. 운명이라는 것은 내 관리대상이 아니다. 내 운명이라고 해서 내가 관리자로 가꾸어나가는 게 아닙니다. 텃밭에 꽃 가꾸고 배추 가꾸는 게 아니에요.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물주고 비료 주는 게 아니에요. 그 운명 관리에서 운명을 차버려야 돼요. 벗어나야 돼요.

내 운명을 포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이 나로 하여금 기존의 운명을 무효로 돌리는 기존의 운명을 헛것으로 돌리는 다른 곳으로 자기를 인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잘 하는 걸로 해보세요.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면 곱게 인도하면 될 터인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해놓고 4절에 보면, “음침한 골짜기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죠.

사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소실되고 소멸되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나를 없애고 그 대신 목자만 부각시키는 겁니다. 목자 있는데 뭘 걱정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양이 원하는 운명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고 양이 모르는 운명, 목자만 알고 있는 운명 쪽으로 우르르 몰고 가는 겁니다.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지요.

버슬 탔는데 예상한 코스가 아니고 이상한 데로 막 들어간다고 생각해봅시다. 버스 타고 부산역까지 가려고 하는데 버스가 해운대 모래사장으로 가더니만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설마 여기서 커브 돌겠지. 커브 안 돌아요. 막 들어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버스운전사가 사이코패스라. 혼자 죽으려 하다가 억울해서 같이 죽자고 버스 몰고 해운대 모래사장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어, 이럴 줄 몰랐어. 교회 다녀서 팔 부러질 줄 몰랐어. 빨리 차에서 내려 돌아서야 돼. 다시는 복음과 상종 안 해. 복음, 빠이빠이야. 돌아서려면 돌아서란 말이죠. 천국 가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내 의지대로 내가 꼼수 잡아서 내가 구상해서 계획 잡은 대로, 그게 나의 운명이잖아요. 내 운명의 코스를 미리 설정하고 그대로 하면 천국에 골인? 골인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길은 악마가 설정한 종교오락이죠.

종교오락을 현대정신분석학에선 쉽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인간보다 욕망이 우세해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인간은 따를 수밖에 없다. 욕망을 통해서 항상 상상의 세계를 자꾸 유발해서 욕망의 맛을 들이는(맛을 들이나 안 들이나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절대로 상상의 세계, 천국이죠. 천국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요. 천국에서 못 벗어나게.

나 천국 안 갈래. 지옥 갈래. 하는 인간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천국이 미끼였어요. 악마의 낚시 끝에 천국이 달려있어요. 교인들도 거기에 다 말려든 거예요. 천국 준다 하니까 지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냥 따라 가는 거예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주여, 감사합니다.” 그 주님한테 본인이 된통 당해야 돼요. 배신당해야 됩니다.

이럴 줄 몰랐어. 내 팔 다 부술 줄 몰랐어. 그런데 그것을 감사해야 되지요. 내가 알던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으로 나타나야 되기 때문에. 그 다른 하나님이 어디서 오는가? 아까 제목을 뭐라 했습니까? 배신이라 했지요. 배신, 바꿔야 되겠다. 이 제목으로, 분출. 땅에서 분출해버려요. 땅이 있다면 땅 속에서 분출해버려요.

모세 지팡이의 특징은 항상 땅을 치는 거예요. 땅을 때리는 겁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애굽의 강에 대니까 생수가 흐르던 그 맛있는 1급수가 흐르던 강이 뭐가 됐어요? 못 먹는 피가 흐르는 죽음의 강이 됐지요. 지팡이를 대면 분출하는 거예요. 땅 밑 속에 있는 원래의 진리가 지팡이가 때리는 지점, 지점이라 하지 말고 사건, 그 사건을 통해서 분출하는 겁니다.

애굽에 내리는 열 재앙 있잖아요. 특징들이 뭐냐 하면, 그게 모세 때문에 더 정확하게 모세의 지팡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열 재앙 전에 출애굽기 4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 모세 등장하지요. 그 중간에 지팡이 등장해요. 지팡이로 하나님 자기 뜻을, 자기 계획을 알려줍니다. “지팡이 던져라.” “어, 뱀이네.” “너 그동안 뱀 쥐고 있었어.” “머리를 쥐지 말고 꼬리를 잡아라.” “도로 지팡이 됐네.” “그렇지.” 네가 쥐고 있는 지팡이가 아니고 하나님이 쥐고 있는 지팡이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는 그냥 시다바리죠. 시키는 대로 하고 하나님이 직접 애굽을 치는데 애굽이 아니고 애굽으로 표상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대결장으로 애굽이라는 객관적인 땅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애굽 사람이나 히브리 사람이나 다 땅 없이는 못 살아요. 땅 없이는 못 사니까 생명이, 자기 목숨이 볼모된 거예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뭐, 우리가 자유롭다고요? 어떤 인간도 요 목숨 때문에 살아요. 자식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니가 이렇게 공부 못하니 못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공부 못해서 어떻게 밥 먹고 살래? 가장 근원적인 것, 밥 먹고 살면 됐지 뭐하려고 석사학위는 왜 하는데? 이런 식으로. 모든 교훈 가치가 일단 밥 먹고 살려면 얼추 안심 레벨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밥 먹고 살만하면 딴 데 눈 돌리게 돼있어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게.

기본적으로는 뭐냐?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이 가장 기본 활동으로써 어떤 인간도 발목 잡혀서 못 벗어난다는 것은 악마의 확신입니다. 이 연사는 외칩니다, 할 때 악마가 강력하게 목사의 모습으로 강단에서 외치는 거예요. 사람은 돈이 복이라고. 돈과 건강이 축복이다. 첫째는 돈이고, 두 번째 시험은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건강이죠.

돈, 건강, 그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 너희들은 그러한 유혹에 철저하게 봉쇄돼있다. 못 빠져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 없어요. 천당 생각하지 마세요. 끝났어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악령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모세가 등장해서 하나님의 사건을 일으키니까 여기서 지하세계가 분출되지요. 분출되면서 배신의 논리가 땅에 펼치게 됩니다. 배신의 논리가 펼치게 되면 여기서 착한 일을 할 때 모든 목적이 뭐냐? 뭘 얻겠다는 거예요. 얻는 것에서 반대쪽으로 나가요. 얻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잃어버리죠. 여기서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오늘 시편처럼.

어찌하여, 라든지 하나님께 호소해서 이럴 수 없나이다. 내가 이런 고난 받고 내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임을 당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조치입니다.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나오지요. 9절에. 전반부에선 뭡니까? 지금 바르게 산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범죄치 아니하고, 사람들 행사에 봐도 바르게 살고,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뒤에서 난리도 아니란 말이죠.

그건 뭐냐 하면, 땅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올라와서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괜찮은 주관으로 목적을 삼고 인생을 살아가는 나를 땅 속에 있는 주님의 손길에 붙잡힌 객관으로 만들어요. 네가 생각한 운명은 버리고 내가 계획한 운명에 너는 끌려들어가야 돼. 그것을 드러내야 돼요. 여호와를 증거 하는 삶이 돼야 됩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사람이죠.

아브라함도 사실은 배신당했죠.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해놓고 약속의 땅이 갑자기 가뭄 들었지요. 이건 배신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아파트 주겠다고 해서 아파트 가보니까 쥐 있고 바퀴벌레 나오고 비새고 문도 삐걱거리고 살 수가 없어요. 지붕이 뚫려서 비오면 다 새고. 그러니까 그 아파트 말고 좋은 아파트로 간 거예요. 갔는데 좋은 아파트에서 쫓겨나서 도로 이리 오잖아요. 그야말로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 믿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하는 겁니다.

아브람의 운명은 악마의 운명이라서 날아가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려면 아브람 본인의 어떤 의사와 관계없이 있지도 않는 후손에 의해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주관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증거 하는 객관에 소속돼버립니다. 포함이 돼버립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철저하게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어떤 의미에서 배신당하고 하는데 그 배신당할 때 오히려 처음에는 갈등이 일어나고 의심이 되고 내가 신자 맞는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렇지만 배신당함의 단일 증거, 하나밖에 없는 확정된 최종 증거 이게 뭐냐 하면, 배신의 표식은 뭐였지요? 신약에서 배신 중의 배신은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가짜가 진짜를 죽여 버린 사건이에요.

십자가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을 때 예수님이 그 사람들 눈에 다 보였어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할 때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주지 않는다는 사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나를 죽였던 그 사건 속에서 기어이 네 힘으로 못 빠져나오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부활한 주님 믿을 게, 라는 그 시도를 아예 합리적 시도를 차단시키는 겁니다. 못하게 만들어요. 우리 손으로 죽인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했구나. 하지만 그게 진짠지 아닌지는 보여주면 믿겠다고 나오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구원된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은 똑같이 세상 사람과 배신당하게 만들어서 예수님도 미쳤지만 같이 미치게 만들어요.

나는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있음을 믿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주님을 보여주면 네 말도 인정해줄게. 그러면 성도가, 너한테 인정받을 생각 없다. 너한테 인정받아서 우리교회 만들 그런 의사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나 됨은 일방적인 주님의 조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한 6년간 찾아보니까 발견했다. 그런 식으로 발견될 분이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인간은 주님 앞에 배신한 죄인으로 유지돼야 돼요. 죄인으로서 계속 가야 돼요. 그 다음에 이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일방적 조치여야 되지 어떻게 한 수 가르치고 지식 있어서 그래서 구원되는 수는 하나님의 배신이라는 그 개념 자체, 배신이라는 내용 자체를 주께서는 지워버리길 원치 않는 거예요. 그걸 계속 생생하게 배신당한 자만 산다는 것, 주님한테. 그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으로만 구원받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200)20-02-12 10:57 
20200210b 부산강의 : [시편]25(17편)-배신의 분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천 번째 시간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 안에 어떤 테마가 들어있느냐 하면, 배신이라는 테마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배신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와서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와서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 했지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해놓고 택한 이유가 나를 배신하라고 택한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의 예정이란 예수님의 예정을 증거 하라고 예정된 것이지 자기 구원받으라고 예정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캘빈주의에서는 자기 구원 챙기려고 예정론을 거론하고 있어요. 얼마나 이단적이에요. 모든 성경은 자기 주관, 또는 자기 자아지요. 자아와 결별하라는 겁니다.

이걸 낮 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나는 나와 의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매사를. 의논할 자를 의논해야지 맨날 자기와 의논해요.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은 나 말고 의논할 사람이 없어요. 나와 의논해버리면 항상 나를 살리는 쪽,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의논해요. 그러나 나와 의논하지 않게 되면 그 자체가 주님이 일하신 답이 된다니까. 내 자체가.

답이 된 입장에서 새롭게 뭘 하느냐 하면, 세상을 새로운 객관, 아까 객관에서 주관에서 그 다음에 뭐로 바뀌느냐? 이 새로운 객관은 이미 주님의 주관이 되게 하셔서 그 답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얼마나 개판인지, 세상은 어떤 질문을 갖고 있기에 주님께서는 미리 우리를 답으로 주셨는가, 하는 겁니다. 여유롭지요.

그렇다면 이 과정이 있잖아요. 객관에서 주관, 주관에서 객관이란 이 과정이 늘 우리 안에서 살아 있어야 되겠지요. 이게 십자가 안의 테마니까. 객관에서 주관 될 때는 여기에 악령이 개입했지요. 주관에서 객관 될 때는 뭡니까? 주님의 손길에 의한 배신이 주어지지요. 내가 나한테 배신당해야 돼요. 내 착각과 내 환상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아야 돼요.

저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제목 또 바꿔야 된다. 노쇼(no show), 계약 취소에요. 내가 기대한 그 기대감에서 계약 취소하는 겁니다. 다섯 명 갑니다, 해놓고 안 나타났어. 나 그 식당 안 갑니다. 니가 사기를 쳐? 우린 사기 못 쳐? 내가 나한테 사기를 쳐버리는 거예요. 왜? 악마가 먼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원래 사기당한 사람이 사기 친다고. 악마 쪽에서 사기 쳤는데 내 쪽에서 먼저 사기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 사기를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게 되면 나를 지키려는 꼼수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자아를 잃는 방향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게 아까 시편 중간부터 나오는 마귀가 우리가 할 일을 악마가 와서 협조해주고 있어요.

카지모도란 사람이 있거든요. <노틀담의 꼽추>의 이름입니다. 그 사람이 청각을 잃어버려요. 왜냐하면 꼽추라고 허드렛일을 한다고 노틀담 성당에서 종을 치다 자기를 잃어버려요. 그 소설에서 의미하는 바는 종소리에요. 성당에서 울리는 성스러운 종소리에 카지모도란 노틀담의 꼽추가 청각을 상실하지요. 성스럽다는 자체가 대단히 위선적이 되는 거예요. 소설에서는 신학적이 아니고 인본주의적이니까 성당이 꼽추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소설에서 대주교란 작자가 나쁜 인간으로 등장해서 종교의 허상, 또는 종교의 무의미성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 시대상을 이야기하면서 종교란 것이 인류에 아무 보탬이 안 된다. 사기꾼이라고 고발하려고 한 건데 그 가운데서 종교의 희생물이 된 꼽추야말로 진짜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냐. 하지만 그 꼽추는 성당에서 일한다고 종을 너무 쳐서 청각을 잃어버렸다. 사찰집사가 종치다 귀머거리된 거예요. 비록 자기는 성당 때문에 청각을 잃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어떻게 되고. 그래야 인본주의적 소설이 되니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도 의미 있지만 사라졌다는 의미와 결부돼야 나타남의 제대로 된 완결된 의미가 주어지게 됩니다. 나타났는데 없어진 거예요. 없어졌으니까 이 세상엔 있는 자들만 남았지요. 눈에 보이는 자들만 남았지요.

마치 야곱이 천사 만날 때 천사가 야곱과 동행해서 야곱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이제 해가 떴으니까 나는 사라져야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천사는 사라지고 야곱 혼자서 하면 되는데 사라졌다는 그 천사가 원래 자기가 있던 곳으로 그냥 간 게 아니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전환시키는 일과 천사가 빠지는 일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냥 왔다 가는 게 아니고 그냥 왔다 아무것도 없이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이쪽에 어떤 변화 또는 변용이 생겨야 돼요. 용도의 변화, 형태 자체의 변화. 첫째, 육과 혈은 하늘나라에 이를 수 없다는 것, 분명히 언급해요. 인간이 육체로 왔으면 하늘나라 못 가는 겁니다. 두 번째, 죽음이 있어야 되는데 이 죽음은 자살한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특이성을 가진 죽음이에요.

이 특이성 속에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테마가 들어있느냐 하면, 배신이죠. 그러니까 전체가 혈과 육이 존재만으로 못 가는 게 아니라 거기에 숨어있는 어떤 악한 영의 기능으로 인하여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배신당해서 죽는 죽음, 그 배신에 실려야 비로소 천국 갑니다. 이 말은 내가 나를 배신해야 돼요.

내가 나를 배신한다는 말을 요한복음 16장에선 이렇게 이야기하죠.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란 말이죠. 내 목숨이 없다 하면 안 돼요. 미워해야 돼요.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 쪽입니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이건 불교 쪽이고요. 미워 죽겠어 하는 것처럼 미워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짓거리가 미워져야 돼요.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바로 그것을 실시합니다. 세례요한이 가죽 한도모피 입고 등장해서 하는 말이, 하늘나라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 물에 풍덩, 물에 뛰어들어. 하늘나라 왔으니까 죽자. 이게 바로 뭡니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짓이죠.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물속에 들어갈 수 없지요. 멀쩡한 몸인데.

만약에 자기가 지금 몇 달 후에 종로구에 나가는데 물에 왜 뛰어 들어갑니까. 곧 국회의원 될 사람이. 못 뛰어들지요. 자기가 자랑스럽고 자기 미래가 기대가 될 것 같으면 왜 뛰어들어요. 자기가 자기를 못 버리죠. 아까워서. 이만큼 살아온 것도 얼마나 용을 쓰고 애를 썼는데 이만큼 됐는데 그걸 뛰어드는 거예요.

여기 시편 17편 봅시다. 앞에 4절에 보면,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보기에 괜찮은 존재고 나는 지킬 만하단 말이죠.

그런데 7절에 보면,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인자하심을 나타내 달라. 구원이거든요. 갑자기 스스로 자기 주관을 유지하면 되는데 괜찮은 주관은 복을 받게 된다고 하면 되는데 갑자기 여기에 뭐가 등장했습니까? 주의 원수가 등장하죠. 원수가 그냥 따로 놀면 되는데 갑자기 원수들이 하는 기능이 누굴 공격대상으로 삼았어요? 말씀대로 사는 자는 복을 받게 돼있는데 이 복을 겨냥해서 원수가 공격대상으로 삼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죄지었습니까? 죄 안 지었지요. 죄 안 지었는데 예수님 주변에 왜 그렇게 적들이 많이 생겨나는지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구약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죽음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럴 때 다윗이 말하기를 제가 뭐 잘못됐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잘못된 게 없는데 공격받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잘못 된 사람은 복을 받아야 돼요. 서로 도와주려고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말씀대로 순종하게 해서 이 세상 자체가 말씀에 순종한 인간을 그냥 가만두지 않는 악으로 완전히 도배가 된 세상인 것을 택한 백성을 통해서 언약백성을 통해서 다 폭로시키는 겁니다.

골리앗이 등장했을 때 사울 왕 밑 이스라엘은 겁을 먹고 있었겠지요. 그러면 그들의 대화는 뭐였겠습니까? 골리앗은 키가 크다, 힘이 세다, 무기가 대단하다. 그러면 방법은 뭡니까? 더 발달된 무기와 더 큰 힘 센 자와 더 큰 완벽한 무장을 하고 힘으로 힘을 이기는 그게 전부겠지요. 그러니까 힘이란 점에서 블레셋이나 이스라엘 전부 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같은 주관들을 갖고 있는 겁니다. 힘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힘이 배신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힘에 의존하고 힘을 기대하고. 요새 같이 자본주의에선 돈의 힘이죠.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 생각이 성도를 배신케 하는 거예요. 그게 성도로 하여금 지옥으로 몰아넣는 악마의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상상도 못하잖아요. 돈 잘 벌고 만사형통한 그것이 사탄의 시험이고 사단의 가시라는 걸 생각 못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철야기도하면서 돈 좀 그만 들어오게 하옵소서. 얘가 뛰어나게 공부 잘해서 걱정입니다. 왜 몸이 건강한지 왜 자꾸 제 몸은 건강합니까, 이 가시를 빼달라고, 제목을 건강이란 가시와 돈 다 날아가라고 새벽기도나 철야 기도하는 것 봤습니까? 없지요. 그럼 가짜지.

하나님은 창세기 원칙을 절대로 보류하거나 그걸 취소시킨 적이 없습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이게 창세기 1장 1절이에요.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두움을 적시고 와야 그게 진짜 인간이에요.

그래서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는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일체 안 망하는 구석이 없는 환경이 아니고 인간 앞에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한 나무를 심어놨지요. 625400년 동안 견뎌도 소용없어요. 그 다음 날 또 먹고 싶어. 아무리 과거에 그동안 힘들게 인내해서 안 따먹은 착한 일해도 소용없어요. 문제는 내 주관이 객관이 아니거든요. 그게 객관이란 말이죠.

따먹으면 죽는다가 객관이에요. 그동안 안 따먹잖아요. 소리쳐도 소용없어요. 지금 안 따먹어야 돼. 그동안 안 따먹는다고 애쓴 것 인내하고 참고 욕망을 누른 것 소용없어요. 지금 여전히 선악과는 유혹이에요. 거기는 마귀도 있었고 인간도 있었고 선악과도 있었고 생명나무는 있지만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는 물 건너 간 겁니다. 차단시켰어요.

이 차단은 무엇과 무엇의 차단이냐 하면, 어두움이 빛 흉내 내고 빛 모방하는 이것을 차단시킨 겁니다. 어두움은 어디까지나 어두움이에요. 어두움이 자체적으로 빛을 만들어내고 뭘 하든 간에 그건 어두움에 속한 빛이지 이 빛이 아닙니다.

정말 빛은 이 차단을 넘어서 왔다는 뜻으로 인간 쪽에서 빛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빛이 우리한테 왔을 때는 니 재주로 니 능력으로 믿음으로 뭘 하든지 간에 빛의 세계는 들어올 수 없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그 빛이 되려면 이 어두움은 곧 죽음이 돼야 돼요.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이미 우리가 죽은 자란 뭔 뜻이냐 하면, 숨을 안 쉰다는 말이 아니고 무능하다는 뜻이에요. 내 구원과 내가 할 스케줄에 대해서 우리가 무능한 자에요. 오늘 눈이 와야 된다. 우린 무능해요. 눈 오면 받는 것이지 눈이 와야 된다고 요청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체에 대해서 대책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이미 복 받은 사람이에요. 특히 자식들에게 대책이 없어요. 할 도린 다 했지만 자식은 대책이 없습니다.

이 어두움의 세계에 대해서 땅 자체가 어두움입니다. 사람들의 생각한 어두움의 세계가 생각한 어두움은 지하에요. 인간들이 생각한 어두움이 생각한 빛은 뭐냐 하면, 하늘에 빛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자꾸 올라가기를 시도하지요.

시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제가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역사를 만들어놓고 역사의 끝에 점점으로 해서 올라가는. 여러분 항공모함에서 비행기 뜰 때 항공모함 끝부분을 약간 높게 한 것은 급발진해서 쉽게 상승 각도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스키나 스케이트 앞이 꼬부라졌지요. 역사의 끝은 천국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어디서? 신학교에서. 개혁주의신학에서. 역사의 끝은 천국과 통한다는 겁니다.

역사의 끝, 그게 몇 년도에 하늘나라 되죠? 사람들은 이게 재림이라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나 부활은 의미 없어요. 재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역사를 밟아나가고 내가 죽고 난 뒤에 무덤 속에 대기하고 있으면 언젠가 마지막 때 문이 열리면서 재림해서 합류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 중에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어느 대목에서 내가 철저하게 어둡다는 대목이 안에 들어있어요, 안 들어있어요? 안 들어있지요. 이 자체가 구라입니다, 사기입니다. 이건 하나에 악마가 만들어낸 연극이에요.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요. 일종의 영화에요. 영화는 망상이에요. 상상이고 환상이죠.

이러지 않아요. 역사의 끝이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주께서 십자가 달릴 때 역사는 끝났기 때문에 그래요. 바로 세상에 말한 빛의 세계로 올라가는 게 아니고 빛에 계신 분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지하에서 어두움에서 부활된 겁니다. 어두움 세계에서 올라와버려요. 죽음의 세계에서 올라와버리죠. 특이한 죽음이라니까요.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이 죽으면 음부의 세계에 가죠. 그 음부의 세계에서 올라와버려요. 음부에 가셨다 올라와버리죠.

사도신경에 나오죠. 죽었다가 올라오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잖아요. 음부에 계시다가. 이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이 아니고 죽은 자들 속에서 부활. 이 의미가 중요해요. 이 세계 자체를 가위표하고 부활. 인간이 나름대로 주관이 긍정적으로 봐서 주관에서 본 객관적인 어떤 시나리오를 짠 거예요. 악마 시킨 대로. 이렇게 해서 구원받고 십자가, 부활, 재림이라 하는데 이 자체로부터 벗어남. 이 자체가 어두움이니까요.

에베소서 5장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호칭을 뭐라 합니까? 잠자는 자여, 죽은 자여. 우리가 생생하게 심장 뛰고 있고 까불고 있는데 뭐로 봅니까? 잠자는 자여. 죽음은 주님 앞에 객관이 되거든요. 우리의 주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떤 멋진 생각, 하나님께 영광 생각 있더라도 전부 다 그거는 시체가 망상을 시체가 꿈꾼 거예요.

잠자는 자, 유사한 것이 바로 요셉 이야기에 나오지요. 힘은 누가 세요? 요셉이 셉니까, 바로 왕이 셉니까? 바로 왕이 세지요. 그런데 바로 왕은 어디에 갇혀있어요. 꿈에 갇혀있어요. 꿈은 꿨는데 해석이 안 되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꿨는데 해석이 안 되네요. 해석이 안 될 수밖에 없지요. 자기는 꿈의 세계에선 자기가 왕이 아니고 죽은 자에요. 그러면 꿈의 세계에 속한 자만이 그 꿈을 깨면 같이 정신 바짝 차리고 내 객관적 현실이 이런 세계란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말이 어려운데요. 어렵더라도 여러분 감당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게 감당하기 힘드냐 하면, 꿈을 꾸고 난 뒤에 7년 풍년 뒤에 7년 흉년이 온다는 걸 알았다면 그걸 꿈 말고 미리 알려주면 안 될까요? 미리 알려주면 바로 왕이 내가 알고 있는 객관적 사실이 진짜 객관이 나도 긍정적 존재로 인정하게 돼요.

예수님 십자가 지고 부활되고 재림하시고 오면 된다. 이것이 정답인 줄 알고 있다고요. 그렇게 생각한 본인이 죽은 존재, 엉터리란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내가 갇혀있고 내가 생각한 몽땅 사기란 사실을 그걸 경과하지 아니하면 그 잘난 존재가 계속 잘난 존재로 변용이 일어나지 않아요.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다시 말해서 스톱하는 절단되는 순간이 와야 돼요. 뭐냐 하면, 나는 무식쟁이다.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면서 백성들 통치하는 모든 통치가 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로 내가 통치했다는 사실을 알아줘야 그 다음에 자기의 모든 권한을 요셉에게 이양하게 돼있어요. 넘기게 돼있어요. 그래서 창세기 45장 9절에 보면 요셉이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나니”

예수님이 주가 되듯이 요셉이 주가 되는 거예요. 주라는 것은 성도에게만 주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는 모든 만민이 주가 되지만 일단 그 당시 상황에서는 오직 성도,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주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주라 하지 않잖아요. 그들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걸 인정 안 해요. 그 사람들은 망상 속에 갇혀서 미친 자로 살고 있다는 걸 몰라요. 오늘날도 마찬가지고요.

끊어줌이 있어야 돼요. 내가 성경 보고 알았던 모든 지식이 다 이게 말짱 도루묵이라는 걸 알고 있어야 돼요. 성경 지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주가 돼야 되지 성경을 공부한 내가 이론의 주가 돼버리면 내가 아는 지식으로 구원받겠다는 이 짓은 악마가 원했던 바입니다. 왜? 그렇게 가게 되면 지옥 가기 때문에.

신학교 교수들이나 박사들이 그래서 이단들인 거예요. 불신자들인 거예요. 그 사람들은 맨날 이것만 따져요. 원어와 역사. 이 둘에서 진리 나온다고 보는 거예요. 역사를 파고 원어를 파면 진리가 나온다고 보는 거예요. 안 나옵니다. 여기는 특이 사건이 안 나와요. 자기의 엉터리 주관만 나올 뿐이에요. 주관 쪽으로 이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역사와 원어. 그러면 역사를 버리고 원어를 버렸는데 불구하고 성경해석이 된다는 이건 사건이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요셉 이야기에서 바로 왕이 꿈을 꾸게 하느냐 하면, 요셉으로 하여금 바로 왕의 종이 아니고 부하직원이 아니고 진정 주가 된다는 겁니다. 주가 된다는 것은 그 일에서만 주가 되면 안 되고 바로가 펼쳤던 세계에 속한 모든 것 위에 주가 돼야 됩니다.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말은 주님과 거래대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 이렇게 하면 영광 받겠지요, 하는 거래대상, 협상대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팔이 부러지던 관계없이 주는 주에요. 주께서 그렇게 팔 부러지게 한 거예요. 교회 오지 말라고.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어제 낮 설교에서 시간 걸려서 다 말씀 못 드렸는데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여호사밧이 암몬, 모압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여기 지중해고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과 같은 위도가 사해 꼭대기에요. 모압 여기 있고 암몬 여기 있습니다. 지금 요르단 여기 있고. 이 사람들이 건너와서 엔게디에서 공격했으니까 북서쪽으로 방향 바꿔서 공격한 겁니다.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기도했지요. 기도하는데 야하시엘이란 제사장에게 응답 내렸지요. 이 싸움은 너희들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들은 빠져. 하나님의 전쟁이지 네 싸움이 아니라고 봤지요. 그래서 전쟁 이후의 상황이 뭐냐? 찬양하는 거잖아요. 여기서 질문이 뭐냐? 그럴 것 같으면 기도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인간의 이성으로. 기도 안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겠는가를 인간들은 생각하기 마련이죠.

식겁한 거예요. 식겁하게 만들어놓고 일을 푸는 게 아니고 차라리 처음부터 적들이 안 쳐들어오거나 쳐들어와도 그들의 알아서 죽으면 되지 않느냐 말이죠. 왜 기도하게 하셨느냐, 기도하게 하신 이유가 뭐냐? 구약 때는 인간은 정답을 찾습니다. 정답을 찾는 의도가 뭐냐 하면, 자기 목숨 줄 이어보려고 정답 찾아요. “주여, 이러다 죽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이 물러간 게 정답이 아니고 내가 아직도 내 살 길을 찾고자 하는 엉터리를 못 놓고 있다는 것, 이 죄를 폭로시키는 그게 답이 돼야 돼요.

자, 내가 암에 걸렸다. 기도하니까 암이 나았다. 암이 났고 난 뒤에 갑자기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암 걸리고 기도해서 나았다 하지 말고 처음부터 암 안 걸렸으면 더 좋을 것 아니냔 말이죠. 그 말은 결국 주께서 암에 걸리게 한 것은 너는 진즉에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동안 암 안 걸린 건 뭐냐? 이것은 주님이 쓰시고자 주님의 주님 되심을 위해서 암에 안 걸리게 했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암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는 것은 네가 걱정할 사항이 아니란 말이죠. 참 이론은 되게 쉽지요. 이론은 쉬운데 우리는 살면서 하루도 경기 안 날 때가 없어요. 자식 둘이 있어도 하나 아프면 하나 잘 되고 이 걱정 저 걱정 남편 걱정 자식 걱정 온통 걱정거리로 하신 이유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이 땅에서 정답일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나를 미워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왜 복음이냐? 나는 지금 죽어도 마땅하다는 사실이 왜 복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점을 알기 위해서 더 깊이 있게 나가 봅시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어두움의 세계는 미규정적 세계에요. 첫 날도 아니고 둘째 날, 셋째 날도 아니에요. 규정된 게 없어요. 빛이다. 이거는 물이다. 땅이다. 해다. 달이다. 별이다. 코끼리다. 인간이다. 규정되지 않았어요. 미규정적 사실, 이게 혼돈이죠. 미규정적 사실이 이 세상에 창조로 등장하게 되면 기록이에요. 다큐멘터리, 기록이 돼요. 기록이란 말은 말씀이죠. 문자로 확정될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죽은 자로 본다는 것은 규정적 존재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가자. 요단강으로 빠져. 물속에 들어갑니다. 물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흑암이 물위에 있지요. 미규정적 존재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취소돼버려요.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 라는 것이 다 무효가 돼버려요. 내 직분이 뭐고 키는 몇 센티고 한 달 수입이 얼마고 다 없애버려요.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두 번 죽으란 말이죠. 물세례로 한 번 죽고 성령세례로 또 죽고. 두 번 죽는다는 말은 두 번 격려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거고 죽었다고 인정해서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누가 와야 되잖아요. 누가 온다는 걸 인식하려면 내가 죽은 자가 돼야 누가 오지요. 누가 오는 게 보이는 거예요. 지가 잘났으면 지가 알아서 해결하려 할 텐데.

자기가 죽은 자가 된다는 말은, 이 땅에서 나는 절대로 안 죽어요. 자아라는 것은 죽었다 쳐도 한쪽 눈 뜨고 있다니까요. 밑에서부터 예수님에서 올라와서 우리 자신이 생명나무에서 끊어졌고 무화과나무처럼 땅에 박힌 자체가 저주라는 것을 인식시킬 때 우리는 이미 내가 나의 규정과 판단과 신학과 목사직 내 모든 것은 죽음의 방편에 불과하다.

내가 무의미하게 죽어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그 경로를 통로를 통해서 주님께서 오시거든요. 율법으로 죄 되게 하시는 작업이나 주님께서 십자가 알게 하는 작업이나 같은 노선에서 진행되는 겁니다. 규정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게 죽은 존재가 된다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나를 규정 안 하면 될 것 아니냐 하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그것을 라캉이나 이런 사람들이 잘 지적한 거예요.

인간이 자아가 있다는 것은 말로써 자기를 표현 가능하다는 뜻이에요. 나는 해놓고 ‘~~이다’ 할 때 규정입니다. 이거는 ‘나는 ~~있다’와 달라요. 나는 여기 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요. 그냥 있다. 어쩌라고? 나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뭐다. 직업이 뭐며 나는 어떤 존재며 이렇게 잘났다.

그게 시편 초반부에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았다. ~~이다. 이게 규정적 존재라고요.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더 나아가서 선악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에 나는 이 정도로 잘났으니 반드시 보상으로 뭐가 주어지겠습니까? 축복과 천국과 구원과 영생이 주어지게 돼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믿는 신자이다. 따라서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 이게 바로 내가 나를 규정한 거예요. 이건 사기극이거든요. 말도 안 돼요. 왜냐? 요한복음 12장 25절입니까? 자기를 뭐하라 했어요? 자기를 미워하라.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라 했어요. 누가 데려가야 되는 것이지. 누가 대신 가는 거예요. 천국은. 혼자 덜렁덜렁 가는 동네가 아니에요. 여기서 도 닦는다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누가 손잡고 데려가야 돼요.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뭘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그럼 죄가 뭐냐? 규정하는 게 죄에요.

인간의 자아를 부모로부터 언어를 배웠고 그 언어는 자기를 구축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확산돼 갑니다.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계속 확산돼서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가 내 안에 하나의 기억으로 다 들어와서 나는 이런 존재라는 것은 남들의 그렇게 이야기해주더라, 하는 것이 곧 나다, 라는 뜻으로 이해한단 말이죠. 인간은.

자식 키울 때 학교교육에서 뭐라 합니까? 자꾸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잘 될 수 있어. 너의 꿈을 잊지 마. 이러면 아이들이 희망이 생기고. 다시 말해서 타인이 나를 뭐라고 규정함에 따라서 나는 거기에 따라가게 돼있다. 인간의 욕망은. 너는 못 났다, 뭘 해도 안 돼, 나가 죽어라. 이러면 나가 죽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인간의 교육에서 자아형성과정에서 어차피 인간은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누가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고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릴 때 그렇게 컸던 그 사람들이 교회 가서 목사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는 뭡니까? 잘~ 될~ 거야~ 열심히 잘하면 잘 됩니다. 기도하면 응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본인들이 지금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거예요. 요청해놓고 은혜 받았다고 난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는 죽은 자다. 이런 이야기, 나는 나를 미워해야 돼. 그런 이야기는 들려오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나라는 덩치가 있으면 이 안에 뭐로 가득 차야 돼요? 미규정으로 가득 차야 돼요. 이걸 액체자아에요. 둥그런 컵이면 둥그렇게 되고 삼각 컵은 삼각이 되고. 이게 주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느냐 따라서 그때마다 출렁거리면서 살면 돼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 관계성이 믿음이죠.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게 아니고. 우리는 어떤 것도 쟁취하거나 소유할 게 없어요.

쟁취하고 소유해버리면 나는 뭐라고 규정이 돼버린다고요. 이게 미규정이 되면 내 자리에 뭐가 들어가요? 다른 규정이 들어가요.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피동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가 돼버린다니까요.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때가 되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도 있고.

드라마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요. 그 대목이 저한테 정말 의미심장했어요. 어떤 여자가, 드라마에선 남자의 직업이 감독인데 감독에게 치킨을 사들고 오는 거예요. 계속 치킨을 사들고 오는데 남자는 그 여자가 싫은 거예요. 아침드라마 보셨구나. “맛 좀 보실래요?” 계속 거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요. 남자 보고 하는 이야기가, “감독님, 내가 싫은 이유를 이야기하면 내가 깨끗하게 떨어지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 따져보세요. 그런 말 할 권한이 있습니까? 그걸 요청할 권한이 있느냐 말이죠. 인간에게.

전에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송유관을 뚫어서 기름을 빼내려하는데 암벽 때문에 막혔단 말이죠. 그래서 체포됐어요. 하는 말이 자기는 무죄라는 거예요. 왜? 실패했기 때문에. 그 이론이나 내가 치킨 사들고 들어갔는데 당신 것은 안 받겠다고 하니까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대면 떨어지겠다. 이게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말이 안 돼요. 전부 다 의미의 출발점을 어떤 경우라도 나는 잘 났다는 것을 포기 안 하도록 당신이 도와달라는 거예요.

왜 도와줘야 됩니까? 왜 주님이 우릴 도와줘야 되죠? 내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데 주님은 날 지옥 떨어뜨린다면 그걸 주님한테 따지겠다는 거예요. 그럴 권리가 인간에게 있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우리는 사랑을 원합니까, 미움을 원합니까? 사랑을 원하지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한테 미움 받은 거예요. 내가 미움 받았는데 너도 미움 받음에 동참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느냐? 그게 배신이고 이걸 안 되는 걸 하게 하는 게 분출이고 밑에서 올라와요.

어두운 데서 미규정이라고 여겼던 것에서 새로운 규정이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객관에서 주관에서 새로운 주관이 나오죠. 누구와 싸우느냐? 우리와 안 싸워요. 우리는 무능해요. 우리를 그렇게 나를 규정했던 악한 악마와 주님이 싸웁니다. 악마가 규정한 그것과 내가 규정한 그것과 그 사이에는 바로 십자가 사건이 있다는 겁니다. 다르다는  야기에요.

내가 나 되고 싶은 그것과 주님이 우리를 되게 하는 것과는 반드시 필히 십자가 사건이 가로놓여 있다는 겁니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요. 그러나 사랑받고 싶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 자체가 주님을 미워하는 세계에 속한 거예요. 일부였습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가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어요. 연쇄살인 해도 사랑받고 싶어요.

예수 믿어서 사랑받는 게 아니고 예수 안 믿어도 사랑해줘야 그게 하나님답지 않느냐고 우리가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그 기본이 뭐냐 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해야 된다면 내가 믿는다는 것은 사실은 쓸데없는 추가적인 부질없는 행위를 심어놓은 것뿐이에요. 그것 빼도 마찬가지잖아요. 어차피 기본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해줘야 당신이 진짜 사랑의 하나님답잖아 하는 식으로 요구한다면 마찬가지잖아요.

“감독님, 내가 싫은 이유를 대세요.” 라고 묻는 것은 그 질문 문항을 누가 제출해요? 감독이 제출하는 게 아니고 지가 적어서 제출하는 것은 지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거예요. 감독이 말하기를, “나 똑똑한 여자 좋아한다.” 지가 못하는 걸 줘버렸어요. 그 여자가 아무리 해도 못하는 걸.

나는 네가 미운 인간인 것을 원한다 할 때 인간들은 그러면 예수 당신이나 나가 죽어라. 그 사건이 바로 객관성, 예수님 십자가 죽었다는 게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우리 머릿속에 있는 거예요, 실제로 있던 일이에요? 실제 있던 객관이죠.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주관이에요. 불교도 이슬람교도 성당에 가는 것도 주관인데 오직 성경만이 사도 바울 복음만이 뭐냐?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 증거 해요. 객관을 증거 하는 거예요.

역사가 아니고 객관입니다. 지금의 나의 주관과 늘 싸우고 있는 객관이에요. 자기감정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감정은 항상 내 편입니다. 나를 위로하고 나를 격려해요. 그러나 객관은 뭐냐? 오직 십자가 밖에 없어요. 내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나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그것 객관이죠. 그 객관에 우리는 종으로 부름을 받는 겁니다.

여기 9절 봅시다.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자기에게 그런 실력이 있다, 없다? 지금 가진 모든 양심적인 바르게 사는 그런 것 아무리 모아도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극한 원수 앞에선 그걸 벗어날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바르게 산 것으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선 나를 바르게 살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획득하고 얻었던 어떤 선행도 진정 나를 구원하는데 소용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주관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갇혀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경험을 하게 한 겁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돼있지요. 그러면 다윗이 자기가 이렇게 해도 안 된다면 기도를 할 필요 없지 않느냐 하는데 다윗의 기도가 무규정성 속에서 기록이 돼요. 기록이 된 이 자체가 계시가 되고 예수님은 이 계시대로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뭡니까? 시편 17편의 주인공이 되는 거죠. 주인공 되게 하시죠. 말씀대로. 나쁘게 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그냥 사는데 악인들이 나를 우리 자신을 복음 안다는 이유 때문에 몰아세우는 그런 이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시편 17편 주인공 역할 하도록 제3, 제4, 제5의 역할 하도록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시편을 보면서 우리는 공감하며 감사해야 되지요.
특히 14절에 보게 되면 죽은 부모가 유산 할 때 주의해야 돼요.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어린아이를 몇 살 이하를 어린아이라 합니까? 일곱 살짜리에게 주식을 남겨야 돼요, 안 되겠어요? 미성년자에게 주식, 그 문제가 아니겠지요.

여기 보면,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운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이 땅에 자기를 괜찮게 보는 그 규정을 끊어짐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악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헛살았다는 걸 내가 생각한 모든 건전한 것조차 이게 하늘나라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걸 자기 자신이 끊어지고 그동안 내가 나를 사랑했던 이것이 바로 구원에 방해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자식한테 유산을 남기든 말든 전부 다 악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들처럼 남보다 조금 낫고 그것으로 우리가 선한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십자가에서 보기에 뭘 해도 죄인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된 그것이 복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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