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나와 남

아빠와 함께 2020. 6. 11. 18:03

20200608a 부산강의 : [시편]29(18편)-나와 남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40절,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원수란 게 성립되려면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해줘야 돼요. 허공에 설치는 걸 원수라 할 수 없거든요. 구체적으로 원수가 되려면 하늘 쪽에 계신 분이 이 땅에 방문해서 인간에게 당하는 경우가 있어줘야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냥 땅에서 욕한다고 원수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벌을 주시되 벌을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나야 되는데 거기에 등장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아벨이 등장하지요. 아벨은 하나님 아닙니다. 그런데 아벨에 여기 있고 가인이 있을 때에 가인은 다른 데서 오는 대표자, 아벨도 대표자, 가인은 땅의 지배자의 대표자, 땅을 지금 장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대표자, 아벨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땅에 속했다고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쪽의 대표자.

대표자끼리 만나서 땅은 자기의 본성을 감출 길이 없어요. 땅의 본성을 누가 건드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땅의 본성을 건드렸지요. 제사를 안 받음으로 나는 너와 안 논다. 나는 너와 상대 안 한다. 성질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제사하라 했습니까? 하라 한 게 아니에요. 가인이 먼저 하나님께서 제사 드렸잖아요. 뭔가 내 쪽에서 하나님께 했다는 말은 자기의 내부적 본성이 외부로 발산된 겁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에게 다이아반지를 준단 말이죠. 그럴 리 없겠지만. 여자가 다이아반지를 집에서 몰래 갖다 버린 게 아니고 다이아반지를 개한테 줘버렸다. 보는 데서 완전히 개 무시한 거예요. 그럴 때 외부에서 보는 본성은, 먼저 종교적 본성이죠. “신이시여, 내 정성을 받으옵소서.” 그 정성을 하나님이 보는 데서 치워버리죠. 건드린 거예요. 땅을 하나님 쪽에서 집적거린 거죠.

다 같이 제사를 안 받으면 성질날 일이 없지요. 인간은 끝났구나. 그런데 나는 안 받는데 아벨을 받아버린 거예요. 이걸 편애라고 합니다. 편애를 창세기 4장에서 보여준 것은 중계지요. 생생하게 중계방송 해버린 겁니다. 일방적인 사랑의 중계방송. 그러면 아벨이 사랑을 받았단 말은 가인은 가만있는데 미움 받은 거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한 원칙은 뭐냐? 누가 뱀의 후손이고 누가 여자의 후손인지 그 원칙은 이미 창세기 4장에 정해졌어요. 한 쪽은 미워하고 한 쪽은 사랑하고. 한 쪽은 사랑하고, 이 말은 다 같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다 같이 아니고 어느 한 편이에요. 어느 한 쪽을 사랑한 겁니다, 사랑은 항상 편애에요. 골고루 사랑하는 그런 사랑은 저 절이나 천주교 성당에서나 찾으라 하세요. 그런 사랑은 없어요.

편애를 인간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편애했더라도 본인은 편애 없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공평하다고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편애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여기서 발생되는 것은 뭐냐? 미움 받은 쪽이 원수가 되는 겁니다. 시편 18편에 방금 보았던 주께서 잠복돼있는 원수를 역사적 수면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누가 원수고 누가 하나님 쪽에 속했는지는 우리가 결정할 순 없어요. 주님이 결정한 대로 따라줘야 돼요. 거기에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편애적인 조치에 의해서 갈라지더라도 이걸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걸 섭섭해 여긴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죠.

그렇다면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것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미움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랑과 미움과 대상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르지요. 달라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역시 나한테 잘해주면 사랑이고 못하면 미움이죠. 내게 속한, 이걸 소유라 하는데 내 소유의 입장에서 사랑과 미움이 결정되는데 내 소유를 힘들게 하면 미움이 되겠지요.

주님의 미움과 사랑은 항상 미지의 요소입니다. 미지의 요소가 중간에 오늘 시편 18편 하니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뜻이 시편 18편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보이는 우리의 뜻과 여기서 만나게 돼요. 그래서 내 사랑과 내 미움이 여기서 박살나야 됩니다. 깨지고 시편 18편의 중재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동이 돼야 됩니다.

제가 중재란 말을 했는데 어제 낮 설교시간에 주가 없는 신은 주가 아니라 했지요. 반드시 신이 있어요. 중재자, 중보자가 있어야 돼요. 일반종교에서는 중재가 필요 없지요. 본인 자체가 중재자니까. 내가 드렸고 내가 가인이거든요. 무조건 내가 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줘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내 마음을 드렸으면 나는 주는 쪽이고 하나님은 아무 소리하지 말고 내 정성을 받아줘야 돼요. 우리가 아는 신은. 하나님, 조물주, 하여튼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은 이런 신이에요. 중간에 난데없이 끼어들면 싫어요.

내가 만약에 백만 원을 헌금했는데 누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백만 원 그건 무가치하다. 내 피를 받는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고 정의를 무시한 게 되잖아요. 성의를 무시하면 내가 기분 나빠요. 다시 정리합시다. 주님이 끼어들면 누가 기분 나쁘다? 내가 기분 나쁘다. 다시 말해서 주님 없이 중재자 없이 중보자 없이 직접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신과 관계하겠다. 이 신이 바로 우상이란 겁니다.

우상이란 인간이 만든 신이고 인간의 구미에 맞아떨어지는 신인데 그것은 뭐냐?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신은 존재해야 된다. 사랑의 하나님, 산타클로스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든지 간에 내 기쁨을 위해서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예수님 끼어드는 게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겁니다. 왜 끼어드는지 이유도 모르지요.

교회에서 부흥되는 방법은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은 뭐하냐? 기도를 하라고 자꾸 기도를 시켜요. 한 맺힘이거든요. 기도를 해서 한을 풀게 되면 그 교회 교인으로서 큰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응답 안 하겠다 하는데 기도하는 건 바보지요. 내가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줘야 돼요, 하나님은. 그래야 좋은 하나님이에요.

그렇다면 먼저 신약부터 하는 것이 시편 18편을 이해하는데 도움 될 겁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하나님은 시간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 속의 사건 유발이에요. 제가 여러 번, 수십 번 수백 번 했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하나 있어요. 우리가 사건을 펼친다 하니까 뭔가 획기적 사건, 깜짝 놀랄 만한 사건, 이런 사건이어야 사건답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누가복음 9장 62절을 적어볼게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시간 속에 사건을 어떻게 유발하느냐 하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모든 인간을 뭐라고 규정을 하느냐 하면, 그게 공무원인 되던 바다에서 그물 던지던 집에서 그냥 백수로 살든 관계없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려요.

그러면 시간 속에 없던 사건이 개시가 돼요. 스타트가 되는 거예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 했을 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공무원이라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네. 이렇게 되면 안 돼요. 또는 학원에서 애들 가르친다고 볼펜을 잡고 있는데,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 하니까 나는 볼펜 잡았으니까 나한테 해당 없네. 이렇게 되면 안 된단 말이죠.

모든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일방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때부터 사건이 유발되지요. 방금 예를 들면 쟁기를 잡은 자, 나는 볼펜 잡은 자 사이에 여기서 괴리가 발생됩니다. 격차가 발생돼요. 내가 볼펜을 잡았다는 말은 나의 뜻에 의해 내가 구성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볼펜 잡는 것은 공무원 시험 합격하겠다는 일방적인 내 뜻에 의해서 내가 구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나의 뜻, 내 구성은 방해가 돼요. 이게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를 받으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제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잖아요. 그러면 가인이 졸지에 제사 드려서 복을 받아내겠다는 기본적인 가인의 뜻은 좌절되는 겁니다. 참을 수 없지요. 반항하지요.

그런데 아벨 같은 경우에는 나는 제사 드려서 형한테 얻어맞아야지.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벨도 그렇게 생각 못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일방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일방성이 바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일방적이 아니라 내 소망을 품고 있어요. 시간 따로 사건 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 속에 내 뜻을 단절시키는 내 시간을 끊어버리는 그러한 사건이 여기서 개입됩니다. 뭐로 개입되느냐? 언어로 개입돼요. 계시언어로 개입이 돼버립니다.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계시언어라 수시로 이 시간을 잘라버립니다. 마치 지나가는 이 시간을 미국 개척시대에 있던 마차 있잖아요. 마차가 달리면 이쪽 산, 저쪽 산, 가는 곳마다 인디언들이 화살 쏘는 그런 장면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역마차 속에는 보안관이 타고 있어요. 상대할 수 없어요. 그냥 달려야 돼요. 앞에 마부는 치고받고 있고. 보안관은 달려오는 인디언을 행해 장총을 쏘아대고.

얼마나 신납니까. 인디언 조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겐 서글픈 이야기지만. 미국 개척하는 사람 입장에서 쓰레기 같은 인디언들 쏠 때 영화가 재미있단 말이죠. 그 영화 볼 때 인디언 편이었던가요, 미국 편이었던가요? 미국 편이죠. 왜냐하면 인디언 역사는 끊어졌거든요. 끊어진 역사를 신경 쓸 필요 없지요. 현재 미국 역사가 실제니까.

그러니까 악마는 인간을 싣고 역마차로 달리고 있는데 누가 자꾸 화살을 쏘아댑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시언어가 사건을 유발하는 거예요.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갑자기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면, 하늘나라 가고 싶어 했어요, 라고 우리가 대꾸하지요. 그리고 나는 교회 잘 다니고 잘 살고 있는데 나야 천국 가겠지, 라고 자체적인 변명 같은 게 나타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이렇게 돼버리면 사람들의 튕겨나가겠지요. 현실화된다. 제가 문장을 쓸 테니까 어느 문장이 마음에 와 닿는지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심리테스트는 아니고요. “사람 두 명 죽인 인도 호랑이가 갱생 실패하여 철장신세”라는 기사 제목이 나왔어요. “야생서식지에 집어넣었는데 주택가 배회하다가 체포” 이런 기사가 있다면, 여러 가지 단어들 있잖아요. 사람, 갱생, 철장, 어느 것이 가슴에 와 닿느냐 하면, 제 이야기부터 먼저 할게요. 이겁니다. 배회.

배회란 뭘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거죠. 인도 호랑이가 야생, 산에 살아야 될 것이 자꾸 사람 사는 주택가에 나타나는 거예요. 사람 두 명을 죽였거든요. 그래서 인도당국에서 그냥 호랑이 죽여도 되는데 갱생한다고, 그러니까 갱생한다는 의미도 강해요. 갱생하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의미가 갱생이 어떻게 됐습니까? 실패한 거예요. 이게 호랑이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갱생에 실패했다. 앞에 교회를 갖다 붙이면 멋지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면서 자기가 스스로 갱생하려했는데 교회 다녀봤자 뭐다? 실패다. 교회 다녀봤자 갱생이 안 되는 겁니다. 야생 호랑이처럼 우리 인간이. 그래서 안 됐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야생, 이 세상에 있는 호랑이가 자꾸 주택가에 배회하지요. 해운대 주택가를 빌딩숲을 배회하지요. 이게 갱생 실패한 상태란 말이죠.

사람이 호랑이를 볼 때 너는 네 자리로 가란 말이죠. 인간 자리에 오지 말란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자리가 어디지요? 우리의 자리는, 아벨의 자리가 사랑받는 자리에요. 사랑받는 자린데 인간이 스스로 무엇에 실패하는 하면, 갱생에 실패하고 스스로 하나님 사랑받고 하나님 사람 되려는 마음에 의지는 있어요. 교회 다녔으니까. 이건 소용없어요.

맨날 어딜 배회해요? 주택가, 평소에 살던 내 행세,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본성, 생존에 대한 욕구, 그 동네에 계속 배회하는 겁니다. 잠시 교회 왔더라도 다시 세상적으로 살고 싶고. 결국 이건 갱생 실패란 말이죠.

이 이야기를 왜 했는가? 시간에서 사건으로 갈 때 필히 단절돼야 돼요. 지금 단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봐도 인간은 갱생 실패하는 거예요. 분명히 인도당국에서 단절시켰지요. 단절시켰는데 기회를 줬지요. 네가 이 동네 살지 말고 산 속에 살아라. 토끼나 잡아먹고. 그런데 주택가를 어슬렁거리니까 인도 호랑이를 철장에 집어넣고 사진을 찍어서 철장신세를 공개했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간에서 사건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절돼있다. 그러니까 교회와도 갱생은 된다, 안 된다? 갱신이 될 리가 없습니다. 제가 단절이란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땅과 하늘의 연속성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개입의 자리 마련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개입했다는 것은 연속성을 가만두지 않고 단절시키는 거예요. 그래야 여기서 사랑과 미움은 따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시간에 속한 나를 애써서 천국 가려는 모든 시도는 가인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다는 것은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러면 시편 18편은 실패한 자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 성공하게 되는가? 그 방법이 있어요.

단절을 다시 볼게요. 이 논리가 어렵진 않은데 좀 생소하게 느껴질 거예요. 단절을 키웁니다. 단절 불가능이죠. 불가능함을 계속 키워나가는 거예요. 성급하게 구원받았다고 하면, 이건 착각이 될 수 있어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인하게 됩니다. 매일같이 살면서 불가능함을 키우는 거예요. 불가능함을 키우게 되면 이렇게 돼요.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겁니다. 나는 남이 될 수 없다. 이 원칙이 중요한 거예요. 여기 남에다 예수님이라 봅시다. 나는 때려죽여도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기 때문에. 그리고 남이기 때문에. 남은 나가 아니고 나는 남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는 예수님 속에 들어갈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이걸 분명히 해야 돼요. 내가 나라고 생각한 이상은 절대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될 수 없는데 인간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단절을 키우라 했잖아요. 하나님은 단절을 말씀으로 키우는 거예요. 이게 답답하니까 여기서 자꾸 상상을 하는 거예요. 상상을 하게 되면 오인이 일어나는데, 잘못 생각하는데, 왜곡이죠. 이 상상은 현실을 상상하는 목적이 아니라 현실 상상을 통해서 누굴 상상하느냐 하면, 나를 오인해버려요. 내가 구원받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은 것으로 오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한테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오인하는데 협조해달라는 겁니다. 모든 설교가 거기에 소위 긍정적 마인드가 들어가지요. 내가 신자가 아닌데 신자 아니지만 성경에 보니까 천국 있고 성도만 간다 하니까 좀 목사가 돼서 날 속여 달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요. 내가 신자 아니더라도 신자라고 속여 달라. 속여 달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위로해 달라, 사랑을 베풀어 달라. 그래야 이 사람이 계속 교회 올 마음이 드는 거예요. 거기 가니까 이상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더라.

다시 말해서 내가 생각한 현실의 나와 성경에 나오는 천국 갔다는 성도와 이게 일치가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단절을 키우기 때문에. 주님이 없는 신이면 쉬워요. 그냥 성경말씀과 나를 동일시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내가 성경말씀을 믿기 때문에. I believe나는 믿습니다. 성경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까짓것 돈도 안 드는 걸 왜 안 해요.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누구 보고 하는 거예요? 그게 가면 갈수록 자기 자신을 오인하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계속 속이고 싶은 나를 내가 만들고 싶어요. 물론 못 나려고 속이는 게 아니고 잘 나려고 속이는 거예요. 내가 괜찮은 걸로 속고 싶어. 내가 나를 속여서라도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고 싶어. 그것 없이는 인생을 힘들어 못 살겠어.

나로부터 연속성을 갖는데 단절 빠지고 주님 빠지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신이 도와주는 그런 신과 더불어 살고 싶어. 그게 상상이고 현실인 동시에 그 현실 속에서 나는 오인이 된 채 일시적인 만족감에 숨이라도 쉬어보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로 코 다 막혔는데. 상상도 못하나. 상상할 자유도 없나. 상상 좀 해보자. 죽으면 천당 간다고. 그런데 상상도 반복이 되면 현실인 줄 알고 착각해버려요.

그런데 어느 교회에 진짜 복음 아는 목사가 와서 여러분, 그것은 당신이 당신을 속이는 겁니다, 라고 바른 소리하니까 아무리 진리로 자유하는 교회라 해도 그 교회 싫어. 왜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목사 네가 뭔데 사람을 억하심정으로 만들고 부정적 마인드 집어넣어서 나의 긍정을 다 깨느냐, 이 말입니다.

찬송가 중에도 좋은 노래 있잖아요.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얼마나 아름다워요. 장미, 이슬. 그 찬송가는 부담이 안 되는데 십자가 지고, 피 흘리고. 이러면 짜증나. 정육점에 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피를 남발하는지. 목사가 찬송가 고를 때도 좀 아름다운 노래 있잖아요. 이런 노래 불러야지 험악한 노래 부르면 교회 분위기 왜 이래?

레퀴엠, 진혼곡이란 게 있지요. 장송곡. 슬픈 노래 그런 것은 지양하고 밝고 예쁘고 신나는 노래로 대체해달라는 요구가 있을 거란 말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말씀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모든 성경은 누굴 이야기한다? 나에 대한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는 일은 단절을, 우리의 시간, 아름다움,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우리의 본성적인 그러한 가능성 시간대에 사건을 집어넣어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얼마나 부정적 발언입니까.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벌써 못 간다, 안 된다. 그 자체가 얼마나 부정적이에요. 나는 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남이 될 수 없지만 내가 단절이 빠지고 연속성이 되는 그런 예수, 예수님은 남이죠.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나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 남과 하나가 돼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억지 춘향처럼 억지로 예수님과 내가 하나인 것처럼 내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신을 속이고 싶은 거예요. 이게 본성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주님이라 합시다. 이런 인간이 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주님 보시기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인간이라면, 사랑받기로 작정된 인간이라면 무슨 조치부터 내려야 되겠어요?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있으니까 나를 자꾸 상상하지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나를 아예 없애버리지요. 그걸 아예 오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제목은 청소. 집에 오실 때 청소하셨어요? 치워버리는 거예요. 놔두면 자꾸 자길 긍정하기 때문에 자기 긍정하면 자기변명이 또 나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불가능이 있으면 안 되고 항상 가능만 나와야 그게 나답고 여기기 때문에. 단절보다 연속성을 인간은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일단 제목을 청소라고 정해놓고, 나중에 바뀔지 모르겠습니다만.

청소는 세 가지만 하면 돼요. 첫 번째는 방법은? 사실 방법이라 하지만 두 번째가 더 중요해요. 왜? 세 번째는 누가? 보통 언제 어디서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사건 앞에서 관계없어요. 사건은 시간이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이게 뉴욕인지 런던인지 서울인지 관계없이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기 때문에 시간, 공간은 별 의미 없어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할 때 무엇은 청소라고 정해놨기 때문에 세 가지만 하면 돼요. 사실은 첫 번째 방법보다도 왜, 누가 인데 왜 그러면 첫 번째에 방법을 썼는가? 이 방법을 통해서 왜가 드러나고 누가 청소하는가가 등장해요. 방법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또는 구약 때 언약에 의하면 어린양이 이스라엘 진영 한 복판에서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죽지요. 그냥 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이 계속 죽음으로써 흠 있는 네가 용서받는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의 젖과 꿀의 혜택을 그들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건 노선 바뀜인데 노선이 바뀌는 거예요. 전라도 갔다가 경상도로 철도노선이 바뀌는 거예요. 방법은 죽음인데 죽어야 노선 교체가 일어납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녹물 나오다가 생수 나온다고 파이프 수도관 교체 이야기했지요. 죽음 앞에 뭐가 붙어요. 우리가 자살하면 안 돼요. 흠 없는 죽음이 방법이에요. 흠 없는 죽음이니까 이 땅에서 흠 없을 찾을 수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상대적으로 흠 없는 것,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흠이 없다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양 또는 염소, 암소나 수소, 그런 희생제물 또는 식물성 가루, 제물이라고 규정을 한 게 있어요. 이런 것을 규정함으로써 성스러운 또는 정결한 제물이라 한 거예요.

창세기 7장 봅시다. 2절 읽어보세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둘로 일방적으로 나눴어요.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정결한 것 아니면 부정한 것. 정결한 것은 쓸데가 있어요. 창세기 8장 끝에 보면, 방주에서 노아식구가 나와서 제사 드릴 때 부정한 것을 제치고 정결한 짐승을 잡아요.

그러면 노아 자체 내에서, 6일에 인간 중심으로 짐승들이 창조되었지요. 그러면 인간이 짐승을 볼 때 짐승 이름 짓는 것도 좋지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면, 저건 더러운 것 부정한 것, 이건 깨끗한 것, 그런 인식을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결한 것은 제물용이에요.

제물용이란 하나님 있고 인간 있을 때 그냥 못 만나고 정결한 제물이 중재자 역할 해야 인간과 하나님 관계는 유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정결, 부정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여러분 생각하기에 창조 때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일까요? 범죄 하고 난 뒤겠지요.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관계가 끊어졌음이 분명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건 정결한 것, 이건 부정한 것이란 지시, 규정, 그 하나님의 계시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그리스도, 주가 누군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 주변에 배치돼있고. 그 짐승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키고 그 다음에 그 짐승과 하나님 사이가 연결되게 되면, 다리가 두 개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면, 우선 여기에 정결함이 있다면 인간과 정결함이 구성돼야 되고, 그 다음에 정결함과 하나님이 구성돼야 되고. 이 두 가지의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겁니다.

주님이 계시면 그래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아까 처음에 인간들은 뭘 필요로 하지 않다? 골치 아프게 이게 왜 필요하냐? 그냥 하나님이여, 내 정성 받아주소서. 그러면 끝나는 문제지 정결, 부정이 왜 들어가야 되느냐. 니가 왜 거기 있어요. 왜 니가 거기서 나와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말이죠. 나는 내가 보기에 깨끗한데. 나는 남보다 죄 그렇게 많이 안 지었어. 얼추 이 정도 깨끗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건 기본이고 천국 가도 높은 자리 앉을 거야. 예수님 앞에서 장차 보너스로 싸웠던 대목이잖아요.

그러니 제자들의 하는 행세를 보면 어찌 오늘날 일반인들을 그대로 반영해주는지요. 도대체 주님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교회 왜 안 나오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누가 열심히 하래? 그건 연속성인데. “앞으로 헌금 좀 할게요.” 누가 헌금하래요? 열심히 하고 헌금하고 바르게 살고, 그런 것 하겠답니다. 이웃사랑하고.

이웃사랑 같은 것 말고 당신이 어디서 오인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이 오인하고 있다는 거예요. 뭔가 속고 있다는 겁니다. 속이는 전문가는 악마잖아요. “아이고, 손자 키우느라.” 손자 키우는 건 아는데 코로나 누구 보냈고 손자 누가 보냈어요? 주께서 보내셨잖아요. 다시 말해서 신종코로나 없을 때 자기는 기본 신앙이 있는 신자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신종코로나 덮치고 아들, 며느리 회사 다니고 손자 누가 키울 거야? 할머니가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서울에 큰 교회가 정부시책에 따라서 이 미터씩 띄워 앉고 인터넷 동영상으로 했단 말이죠. 정부시책에 맞춘다고 한 달간 그랬어요. 그 다음부터 더는 못 맞춘다고 교회 오라 했거든요. 교인들 반이 안 오는 거예요. 왜? 편하거든. 처음에는 하나님의 모든 일의 중심은 예배라 해서 예배참석 안 하면 지 하는 사업이고 가정이고 파탄 날 줄 알고 예배가 중심이다. 목사는 맨날 예배가 중심이래.

예배중심으로 모여야 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한 번 집에서 하니까 얼마나 편한지. 이건 진짜 화장실에서 용변 보면서 예배할 수 있어요. 막 나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파자마는 기본이고요. 침대 누워서 하든지 다리 꼬고 예배 보고. 큰 교회가 문제가 몇 명 참석 안 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헌금이 얼마나 나오느냐? 헌금이 반 토막 났답니다. 교인들은 교회 안 나오니까 차 기름 값이 절약이 되지요. 교회 안 나오니 꼴 보기 싫은 집사 안 보니 좋지요.

그리고 예배드릴 때는 만사 제쳐놓고 예배드렸는데 자기 몸이 집에 있으니까 자기는 예배드린다 하는데 전화는 왜 그렇게 오고 할 일은 왜 그렇게 생기는지. 너 교회 안 가고 집에 있지. 시아버지 병원에 있는데 등등 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은지. 전에는 교회 간다는 핑계대고 내 시간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게 또 안 돼. 그러니까 교회 위기라는 거예요. 원래부터 위긴데 그것도 모르고.

뭐냐 하면 안 가보니까 예배중심이 돼야 복 받는다는 이것이 그동안 내가 날 속인 거예요. 사실은 목사가 속이도록 했지만 이제는 목사 핑계대지 말고 내가 편해. 어떤 경우라도 편한 맛을 보면 내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내가 한 시간 동안 내내 이야기한 게 뭐냐?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전혀 모르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지, 이건 뭐냐? 인간은 항상 뒤돌아보게 돼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내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제거가 돼요. 그러나 우리는 내가 제거되는 것을 참을 수 없고, 내가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순종하면 되잖아요. 말씀 지키면 되고 예수님 십자가 믿습니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자꾸 출발 스타트를 일단 나는 있고 나부터 출발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정성과 순종을 받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처럼? 가인처럼.

시편 18편의 이야기는 나를 지적하면서 나를 지적하는 것에 멈추는 게 아니고 전적으로 내 책임으로 돌리는 게 아니에요. 환경이 문제다. 우리가 온 이 땅, 이 세상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저주받은 환경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 환경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 몸 하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너무 안일하게 자기 자신을 속여 온 겁니다.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고 진실이 없으니까 속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갱생이 안 됩니다. 아무리 말씀해도 역시 몸은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배회하게 마련이죠. 그쪽으로 이끌리게 마련입니다. 첫째 시간 결론은 뭐냐? 내가 없어져야 돼요. 그냥 죽으면 자살하면 안 돼. 나를 죽이는데 흠 없는 제물과 연합해서 죽으면 돼요. 그게 주님의 청소 방법을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 바른 것부터 시작하는 거죠.

피 흘린 주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해서, 내 집에 들어오는 문설주, 문지방에 내 피를 바르는 게 아니고 내 피 바르면 자살이죠. 내 피 바르지 마시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거예요. 그러면 놀랍게도 사람 잡아 죽이러 온 천사가, 아예 나를 만나지도 않아. 내가 앞장세운 어린양의 죽음만 보고 그냥 돌아가요. 그것을 약속이라고 이야기해요.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정결하다, 부정하다 하나님이 나누신 이유는 노아방주에 노아식구와 함께 정결한 것으로 정결한 짐승은 노아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될 제물로 동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주인공이 노아겠습니까, 정결한 짐승이겠어요? 정결한 짐승이죠. 그래서 노아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그 노아의 후손들은 누가 정결한 짐승을 앞장세우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하나는 축복을 받고 하나는 저주받는 노선이 새로 갱신해서 개시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00608b 부산강의 : [시편]29(18편)-나와 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기분이 즐겁지 않을 건데 따지고 보면 누구나 없어지게 돼있어요. 제가 지금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한 오십 면 후에 이 자리에 없어요. 우리는 없어질 그 시점의 입장에서 거꾸로 되돌아보며 나를 볼 줄 알아야 돼요.

내가 있다, 있다, 있다는 것에서 나를 보지 마시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그 시점부터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분명히 여기 귀한 내가 있는데 나는 왜 없어져야 되지?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들 겁니다. 내가 남한테 꼭 필요한 사람 같은데 그러면 안 없어져야 되는데 필요하고, 안 필요하고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거든요. 우리는 내 생각보다 못하니까 주님 생각은 나를 없애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나를 없애는 겁니다. 없애는 걸 아까 청소라고 했지요.

없애버리는 방법은 첫째 시간에 한 걸 연속적으로 하게 되면, 어린양의 대신 죽음이 없애는 방법인데, 하나님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이 계시죠. 그러면 주님과 인간 이걸 A, 주님 하나님 관계를 B라고 한다면, A관계는 B관계가 원형이 되어서 원형을 그대로 적용하는 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주님 사이의 관계가 이게 언약이 완료된 상태에요.

완료된 상태가 완성이고 원형이기 때문에 이 완성의 관계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집어넣게 되면 그 완성의 효과로써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있어서 살아 있는 내 안에 주님의 완료가 들어오시면 되겠네, 라고 하는데 이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냥 살아 있다는 것은 내 안의 내용물이 추접하고 더럽단 말이죠. 좀 어려운 논리지만 해봅시다.

노아가 여기 있습니다. 노아가 뭘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있잖아요. 그럼 노아는 현재 부정에 해당되겠어요, 정결에 해당되겠어요? 부정에 해당되어야 정결과 부정으로 나눠질 것 아닙니까. 몽땅 다 정결이면 부정과 나눌 이유 없지요. 부정으로 새삼스럽게 나눈다는 말은 노아의 입장이 부정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간다?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주 만들고 언약 주셨다는 겁니다.

그럼 언약관계의 원형은 어디서 왔는가?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 관계가 원형이고, 그 원형이 언약이란 이름으로 노아에게 그냥 들이닥친 거예요. 언약으로. 그러면 부정한 관계, “난 더럽습니다. 주여 깨끗한 것이 오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또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제가 부정합니다, 라는 말 자체가 오인이고 왜곡이에요. 앞에 나가 있기 때문에.

하여튼 나에게서 나온 것은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약간 고개 숙이고 겸손한 체하고 회개하는 척하는 그런 수작까지 내가 할 수 있어요. 주여, 이 정도 낮추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하면 진짜 순교하는 것 맞지요? 자꾸 뭔가 인간이 내뱉는 모든 의도와 의지는 결국 누구 좋으라고, 그게 출발점 되었던 나에게 내가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도록 수작에 불과해요. 이 수작이 이 땅에서 하나의 게임으로 등장하는데 게임이면 이겼다, 졌다는 게 있거든요. 하나의 수작이 되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면, 1998년에 박세리 선수가 연장전 승부에서 양발 벗고 물속에 들어가 칠 때 배경음악으로 양희은이 불렀던 끝내 이기기라였잖아요. 그런데 박세리가 상대방 태국 선수보다 먼저 홀컵에 들어가길 바랐지 어느 누가 박세리가 시집가기를 바랐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조성한 시간 속에는 현재 나의 의지와 의도 그게 있을 때 시집가는 건 나중 문제고, 아직 시집갈 나이도 안 됐고,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유리하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순간이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 순간이라고 오인하고 있습니다. 숨 쉬고 움직이고 골프 치는데 이게 살아 있는 것 맞잖아요. 누가 와서 관찰해도 이건 살아 있는 거지 죽었단 생각 안 든단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뭐냐? 그랬던 박세리도 결국 죽는단 말이죠. 죽음의 힘이 살아 있다는 형체만 있을 뿐이지 그 안에는 아무리 살아 있어도 죽음이라는 힘은 삭제시킬 수 없어요. 설교해도 마찬가지에요.

죽음이 힘이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없어질 거예요. 죽는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거거든요. 누가? 몸이 없어지는 건 기본이고 몸이 없어지면 누가 없어져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게 주의 일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없어지는 게 굉장히 아깝게 여길 때 그건 이미 나 자신이 나를 오인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진짜 주님이 생각한 내가 아니고, 주님이 생각한 나라면 기꺼이 없어지려 할 텐데 도대체 누가 중간에 장난질을 쳤는지 세상은 바이러스로 다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그동안 꾸준히 우리를 속여 온 가예요. 가만있는 박세리가 강의에 들어와서 욕 얻어먹네. 미안해요, 박세리.

둘째 시간에 한 걸 정리한다면, 없어질 것에 충성하고 있다. 우리가. 4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서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청소하는 모습이에요. 완전히 작살내는 거예요. 왜 작살내느냐? 원수니까. 왜 원수냐? 부정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눈다는 자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사이에 언약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또 오해해요.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고 두 분 다 하늘나라 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기 때문에 두 분의 존재 자체로 언약이 완성될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이 되려면 아들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야 돼요. 왜? 부정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더러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 뜻은 더러운 것은 심지어 아들이라도 버려버려요.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어서 죽으셔야 되는데. 그런데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흠 없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정결할 걸로 쳐서 사랑을 해줘요. 그럼 죽은 예수님을 누가 건집니까? 아버지가 건지는데 조건이 뭐냐? 흠이 없는 주님이기 때문에 건짐을 받는 거예요. 의인은 죄인과 함께 음부에 둘 수 없다는 원칙이에요. 죄가 없는 자는 결코 죄 있는 자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그 원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는 흠 있는 자기 백성을 그냥 건지면 안 돼요. 의인과 죄인이 함께 할 수 없어요.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면전에 나갈 수 없어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이는 거예요. 그러나 그냥 죽이면 안 돼요. 살아생전에 무엇과 결합되어야 하느냐 하면, 흠 없는 요소와 더불어 장렬하게 죽어줘야 돼요. 그냥 자살하면 안 돼요. 흠 없는 요소와 결합된 채 죽어줘야 주님과 우리 사이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우리는 흠 없는 의인의 자격으로 아버지 앞에 사랑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그 다음 문제는 뻔하네요. 그 다음 문제는 뭐냐? 어떻게 흠 없는 요소가 흠 있는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느냐, 그 문제겠지요. 지금 방법에 대해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왜, 누가 그건 설명 안 했어요. 방법을 통해서 왜, 누가 저절로 발생돼 나오기 마련입니다.

흠 없는 요소가 흠 있는 나에게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느냐? 그냥 들어가면 되지요, 라고 하는데 그냥 들어올 수 없는 이유가, 흠이 있다는 말은 여기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도 우리가 밀어내요. 그러니까 이걸 다시 하면, 나 자신은 어떤 나다 오인된 나 또는 왜곡된 나다. 왜곡된 나에게 남이 오게 되면 나 자신을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밀어냅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밀어내요.

심지어 부부가 되도 밀어내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도 밀어내게 돼있어요. 부모는 누굴 사랑하느냐? 자식을 사랑하지요. “네가 호주에서 고생 많이 했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엄마가 날 사랑한다는 말이 자식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 엄마 본인의 오인된 주장이기 때문에 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아, 어려울 도와준다는 그 말이구나. 아플 때도 그런 뜻이구나.”

그런데 엄마를 대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엄마가 사랑해주는 것보다 어떤 아가씨가 엄마 사랑은 저리 갈 정도로 너무 지극 정성 잘해준다면 엄마를 밀어내요. 그 엄마는 되게 섭섭하지요. “난 너 하나 보고 사는데…” 그럼 자식 하는 말이, “내가 하나 보고 사람 따로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준다고요. 내가 바라볼 아가씨는 따로 있습니다.

그럼 아가씨에게, “저 남자가 너만 본다는데…” 아가씨가 하는 말이, “그 남자가 왜 그런 소리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날 위해 살아요.” 전부 다 각자 각자가 남에 대해서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왔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만났다, 택했다, 이렇게 될 때 어떤 원칙이 작용하느냐 하면, 서로는 서로를 선택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했잖아요. 그런데 열두 제자는 생각하기를 누가 누구를 선택했다고 봅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고 보지 않고 본인이 예수님을 선택한 걸로 여겨요. 그게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이 선택은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관계를 끊는 것도 나의 결심만 있으면 된다. 그게 베드로고 가룟 유다거든요. 열두 제자 다 그랬어요. 그 열두 제자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이에요. 내가 예수 믿기로 작심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예수 안 믿기로 누가 작심할 수 있다? 내가 작심할 수 있게 돼버려요.

그러니까 계속 나는 나로 남고, 남아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나 외에 모든 것은 뭐냐? 남이 되는 겁니다. 점 하나로 님이 됐던 남이 됐던 간에 서로가 서로를 선택할 권한이 있고 권리가 있는 이상 이 고집 부림은 갱신이 안 돼요. 부산지역이기 때문에 갱신이란 말을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갱신이 안 돼요. 이 말이 이 동네에선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다.

인간은 갱신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방법이 실패로 끝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책은 뭐냐? 주님의 대책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뭐와 상대하느냐? 우리 안에 어떤 영이 있어요. 물론 악한 영이죠, 악마지요. 주님께서 공생애 사시면서 병든 사람 붙들고 닦달 내던가요, 병든 사람 속의 귀신 보고 하던가요? 귀신 보고 하지요. 귀신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을 주께서는 관여해버립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2장이 성립이 돼요.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보면, 도둑이 들어와서 가재도구와 상대하지 않고 먼저 집주인부터 묶어놓지요. 묶어놓고 그 다음에 싫든 좋든 관계없이 가재도구 챙겨서 도둑이 가져가버리잖아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이런 말씀 있어요. 이건 성령 받아야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와요.

31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어디 못하였고”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가 되지만 어떤 죄는 용서가 안 되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와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십일조 하라, 헌금하라, 교회 나와라, 우리와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우리는 내가 착한 일했다고 또 오인하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자아를 쥐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과 상대해서 누가 이기느냐 하면, 성령이 주님이 우리 귀신을 이겨버립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그 방법을 위해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5장 18절을 그전부터 하신 말씀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와 시편 18편 나머지 이야기가 다 관련성이 있어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데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인간의 행위로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의도, 그 사람의 마음의 방향성, “너 지금 어딜 쳐다보느냐?” 이런 것처럼, 네 마음이 어딜 쳐다보고 있느냐?

보통 성령 없는 사람은 어딜 쳐다보느냐 하면, 휑해요. 두리번거리면서 쳐다볼 것이 없어요. 그러나 성령 받으면 성령이 온 출처를 바라보게 돼있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에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십자가 쪽을 생각하게 돼있습니다. 복잡한 것보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요.

누가 성령 받고 누가 성령 안 받았느냐, 누가 사랑받은 사람이고 누가 미움 받은 사람이냐, 누가 천국 갈 사람이고 누가 지옥 갈 사람이냐, 라고 할 때 원인과 결과를 놓고 내가 여기 있음이 어디까지나 결과일 따름이다. 그러면 원인은 어떻게 돼요?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게 원인이에요. 십자가가 원인이고 그 다음에 내가 결과물로 여기 있는 겁니다.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내가 원인이 아니다. 이걸 더 어렵게 말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나가 아니다. 내가 나를 생각할 때 그 나는 진짜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눈이 있고 다른 시선이 있어요. 그분이 오늘도 나를 살려내신 거예요. 그분이 나를 살려주신 겁니다. 성경공부 참석하려 하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직장 가버리고 아이는 학교 가고 오고 숙제 체크해야 되고 동영상 같이 해야 되고, 그래서 못 갔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예배 참석해서 잘못됐다. 그건 잘못됐다는 것은 오인된 거예요. 누가 그렇게 했어요? 누가 손자 낳고, 신종코로나 누가 했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지요. 그게 바로 신자의 자세에요. 이건 남이 가르쳐준 게 아니고 본인이, 내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현상이 아니고 주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만들어낸 현상에 내가 따를 뿐이에요. 나는 그 결과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겐 어떤 식으로 오느냐 하면, 이 사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주님께서 이방인들로 유대인의 오인을 지적합니다. 마태복음 8장 같은 경우에. 어떤 백부장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 주께서 아프라고 하면 아프고 죽으라 하면 죽나이다. 그러니까 이 자체가 이 사람은 죽은 거예요. 죽기 전에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다루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너무 반기면서 하는 말이, 세상이 이런 믿음이 다 있느냐? 천국 간다는 아브라함 자손들은 나가! 어디서 얼쩡거리고 있어, 꺼져. 이방인들이 여기에 들어간다고 돼있어요.

시편 18편 4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이방인들이 쇠미하며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그 앞에 보면 이방인들이 네게 복종하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짐에 있어서 이미 내 백성은 왜곡됐기 때문에 백성 아니에요. 백성 아닌데 나보다 더 세신 분, 나는 내가 세다고 생각하는데 주님 찾아오시니까 나보다 주님이 더 세요. 더 세신 분이 모든 것은 부서뜨리고 이 몸을 죽이는 권한도 그분이 갖고 있어요.

그분을 아는 이방인들이 순복함으로, 여기 44절 봅시다.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 말씀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시편 18편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으니까 유대인들이 주님에 대해서 동의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까? 죽여 버린 거예요. 흠 없는 어린양을 죽였단 말이죠. 여기서 논리가 복잡하게 돼버렸어요. 이방인들도 자기를 오인하기는 마찬가지거든요.

①방법은 흠 없는 어린양 출격. 흠 없는 어린양의 죽음이 방법이에요. 두 번째, 왜 그래야 되는가? 벌써 나왔습니다. 반발하는 영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반발입니다. 그냥 죄 짓는 게 아니고. 그냥 죄 지으면 반성하면 그만이에요. 그게 아니고 어떤 새로운 나타남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발하는 거예요. 세 번째가 누가? 이게 제일 어려워요. “아이고, 그게 뭐 어렵습니까,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을 우리가 오인한 예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안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가 있는 이상 예수도 오인된 예수거든요. 누가? 이 누가를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미 오셨는데 메시아를 찾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누가라고 묻는 자체가 나를 고집하고 있지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대목을 잠시 설명해보겠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공격했지요. 그러니까 사울은 나지요. 내가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남을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란 이름의 남을 공격하는 겁니다. 절대 사울이란 사람은 예수님을 공격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이미 죽어서 이 땅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뭐 있어야 공격하지요. 활을 쏘든지 수갑 채워 체포하든지.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싶어도 예수님이 눈에 보여야 믿지요. 안 보이는 데요. 예수님이 저기 있다. 거기 가서 믿지요. 예수님이 구세주인데 뭘 아끼겠어요. 저기 있다 해도 믿지 말라 했거든요. 여기 있다 해도 믿지 마라. 도대체 뭘 봐야 믿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니까 더 희한한 말처럼 들려서 뭐 어쩌라고? 꿈속이라도 보여주고 믿으라 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된 이유가 사울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살아서 부활해 있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안 죽였어요. 그러나 사울에게는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무가 아니고 부재라 했지요. 예수님은 부재한 거예요. 부재란 말은 사울 본인은 뭐다? 부재의 반대, 자기는 여기 있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 있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 속에 누가 포함돼있다? 예수님이 포함됐다는 거예요. 이 말이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단독으로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무슨 무리와 함께 섞여서 나타난다? 예수님에 의해서 택함 받은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결과물들, 예수님에 의해서 부림을 당하고 백부장처럼 예수님께서 쥐락펴락하는 그 사람들과 전체로 남이라는 집단을 이루면서 계시는 거예요.

사울은 이 사람들을 공격했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가 되려면, 청소하는 분 누구세요, 할 때는 누구들 속에 계시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누구들이 보여요.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 받은 사람만 보여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내게 한 것이다. 이게 쉬운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예수님 꿈에 보여주고 믿으라 하면 그게 더 쉬워요. 만약에 내가 산 사람이라 한다면 우리는 골라내기 바빠요. 그런데 골라내는 작업도 오인된 작업이죠. 그게 실수투성이란 말이죠.

마태복음 10장 끝에 40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누구를 영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누구를 영접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이 그걸 반대해요. 악령이 영접하는 걸 반대해요. 우리를 절대적 존재로 악마가 만들어놨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네가 있는 되지만 너를 위해서 내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건 도저히 우리한테는 갱신 안 돼요. 용납이 안 돼요.

그럼 뭐냐? 누구라는 걸 찾아내기 위해서 첫 번째, 다툼이 있다. 두 번째, 다툼이 종결 상황을 맞아야 됩니다. 이것 성도한테 평생 갑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할 때 사울을 죽었지만 바울의 완성은 마지막 관철될 때까지 주께서 책임지고 가져간다고 했지요. 다툼을 계속 이어져가요. 종결 상황을. 자, 다툼이 있어줘야 돼요. 다툼이 있고 난 뒤에 다툼은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는 겁니다. 계속하다 나중에 종결되게 되면 누가 승자 되느냐 하면, 끝내 이기리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승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유발시킨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패자 되는 겁니다. 이게 평생 간다고 했는데 시간상 평생 가는 것 맞아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시간의 끝이 종결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이 순간순간이 종결이에요. 왜냐하면 은혜를 받으면 더 이상 내일에 대해서 내 소관이 아니에요. 내일은 내가 있을지 없을지 그걸 관여할 입장이 안 됩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은 내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흠 없는 주님과 다툼이 일어나고 그게 종결 상황이 돼버리면 더 이상 걱정 앞에 붙어있는 나, 근심 앞에 붙어있는 나, 염려 앞에 붙어있는 나가 이것들을 유발한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는 이것 때문에 유발한 거예요. 이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주님이 모든 상황을 종결시킬 때 이 순간 내가 나쁜 놈이란 사실을 깨달을 때 여기서 뭐가 오느냐 하면, 모든 완성의 기쁨이 쏟아져 오게 돼있어요. “죽을 때 기뻐하지.” 죽을 기뻐하지 말고 순간순간 기뻐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못 일어나는 일은 우리에게 목을 조르는 일이에요. 목을 조르면 덜 실감나기 때문에 엎어놓고 무릎으로 목을 누른다고 봅시다. 이 자세 어디서 많이 봤지요. 그런 자세로 우리 목을 누르고 있는 거예요. 너, 나와 싸우자는 거예요. 주님이 가만두질 않아요. 매사가.

밥을 먹을 때도 싸우고 있고, 차를 탈 때도 싸우고 있어요. 내가 탈 버스, 오자마자 가버리네. “참, 주님 너무 하십니다.” 매 순간 되어진 일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안 나타낼 때가 없어. 모든 순간에 불평불만이 쏟아지면서 귀신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나를 장악하고 있던 주님께서 대든 귀신이 나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에서 누굴 고분고분 대접한다는 것은 다툰다는 과정 없이는 절대로 이러한 결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모든 결과 모든 종결된 상황은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대로 종결된 상황이에요. 내 뜻과 내가 살아 있기에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고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프로젝트가 있고 생각한 바가 있거든요. 계획이 다 있단 말이죠. 그 계획인데 주님께서 백인 경찰로 죽으라고 꽉 누르는 거예요. 7분 32초 동안 꽉 누르는 거예요. 데모하든 말든 주께선 눌러버려요.

만약에 집사님이 죽는다면 누구 생각나겠어요? 애들, 남편 생각나겠지요. 그게 전부다 한 패에요. 결국은 사울이 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느냐 하면, 자기 혼자 죽인 겁니까, 자기 패가 있어요, 없어요? 자기에게 체포하라고 권한을 준 자기 패가 있잖아요. 그 사람들 마음에 들 때 진짜 내 욕망에 충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혼자 죽이는 법은 없어요. 집단적으로 덤벼들어서 예수님을 죽여 버리죠. 비록 예수님은 나한테 달려들어도 우리가 주님에 달려드는 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경험했던 내 편이란 내 편은 다 모아서 함께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을 죽였는데 죽였다고 여긴 예수님을 살아나 버렸지요. 그게 승리 아닙니까. 우리는 죽으면 끝인데 주님은 죽어도 되살아나잖아요.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게 될 때가 아니라 받아들이게 돼있어요.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원인이 되어서 말씀이 결과물로 우리는 움직이는 하나의 시편 18편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누구라는 걸 다시 정리할게요. 누가 우리를 죽이는가? 누구는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들은 나타나지요. 예수님은 안 보여요. 누구들은 있어요.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은 있어요. 예수님이 택한 자들과 우리 사이에 만남에서 그들은 모든 원인이 어디 있다 했습니까? 주님에게 있지요. 이 사람들과 다투게 되면 나는 내가 원인이 되고 내 나름대로 결과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달려들게 하고 주님께서 내 영, 내 마음에다 직접 다투게 되고 공격하게 되면 바로 이 소자한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주께서 힘들게 하시고 또 주께서 원해서 하신 일이란 사실을 내 쪽에서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이게 바로 계시언어가 되죠.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말씀이 계속해서 나를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된 우리 자신이 주의 사람이 되면, 이 주의 사람이 누굴 만나겠어요? 또 악귀가 들린 사람을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접촉하도록 주께서 주선을 해요. 이게 전도입니다. 전도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만남 자체에요. 만나게 되면 저쪽에서 주님은 안 보이니까 불신자가 나한테 퍼붓겠지요. 그럴 때 내가 날 방어에 나서면 이건 가짜 신자지요. 그런데 저쪽에서 공격하는데 나는 뭘 느끼느냐 하면, 주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공격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이거는 내가 생각했던 옛날의 내 마음이 아니에요.

전에 있던 내 마음은 내가 나를 지키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그 마음에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이 온 걸 어떻게 아느냐, 남들이 날 공격할 때 그 공격도 그 사람 탓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주께서 나로 그 사람의 공격을 받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걸 둘 다 이해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해 안 됐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방금 공격이란 말 했지요. 공격이란 말 안의 내용이 뭐냐 하면, 신세계백화점에서 루이비통 가방 사주는 것, 여러분 이게 공격이라고 생각 되십니까? 이게 공격이에요. 우리의 모든 만남이 공격이라고요. 겉으로는 고맙다고 이야기해야 지요, 인간적으로. 하지만 그 사람한테 미안하지만 이것 누가 하신 거예요?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공격이란 것은 비참하고 피 흘리고 얻어터지고 이것만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만남이 공격이에요. 만약에 그 사람이 불신자기 때문에 나한테 도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진짜 어려울 때 집에 물이 안 나온다든지 갑자기 타이어 펑크 났는데 목사도 그냥 지나가고 집사도 그냥 지나갔는데 여호와증인이 와서 도와줬을 때 여호와증인이 정통이란 말이 아니고 누가 했단 말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건데, 누구한테? 나에게? 아니지요, 아니지요, 이건 아니지요. 이런 말이지요. 복음을 위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루이비통을 사준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해외여행도 가게,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는 그 안에 악마가 심어준 뭐가 제거되었다? ‘나를 위해서’는 제거된 거예요.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시편 18편에서는 이런 기능을 누가 하느냐? 다윗이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다윗이 기름부음 받아서 그렇지요. 50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기름부음 받은 자가 요한일서 2장 29절에 보면 성령 받은 걸로 돼있지요.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노아처럼 언약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노아가 역시 자기 믿음을 바라보겠습니까, 정결한 짐승을 바라보겠어요? 노아가 방주에 있으면 정결한 짐승을 바라볼 때마다 너는 나중에 홍수 끝나면 미안하지만 내 대신 죽어줘야 돼, 하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았다는 건 뭐냐?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내 대신 죽은 분이 그 죽음이 옛날에 있던 내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왜 아직도 살아 있느냐? 죽은 자가 살아 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으면서 루이비통, 구찌, 온갖 다이아 이런 것들을 세상으로부터 다 받는 거예요. 왜? 복음을 위해서 쓰시라고. 루이비통에 성경책 담아가든지. 물론 교회 갈 그것 들고 가는 사람 없겠지만. 자랑질 할 게 있어야 들고 가지.

이 순간 상황이 종결된 거예요. 종결됐는데 주께서 새로운 누굴 만나게 하시죠. 만나면 지 자랑하다보니까 또 다툼이 시작돼요. 계속해서 이 세상에 시간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말씀이 계속해서 소낙비처럼 주어지는, 원칙을 적어볼게요. 시간이란 사건을 보여주는 바탕이다. 시간만 줄곧 쳐다보면 안 됩니다. 시간이란 뭐냐? 사건을 찾아주는 거예요.

이미 너는 구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49, 50, 59, 60, 61, 계속 시간이 가는 것은 사건인데 주께서 무슨 사건? 종결 사건. 모든 것이 주님이 이겼고 나는 졌다는 사건. 사실은 정확하게 주님의 영이 이겼고 내 속의 악령은 주님한테 진 거예요. 만약에 악령이 이기면 내가 원인이 되고 성령이 이기게 되면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난 결과에 불과하고.

만약에 악령이 이기게 되면 내가 원인이 되어서 세상 것을 이용할 권한을 가지고 나 잘되기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 난 죽으면 안 된다. 이건 악령이 하는 일이고, 성령이 이기게 되면 주님이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승리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잖아요,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승리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내 안에서 주님의 것을 찾고 바라보시는 겁니다. 아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선지자의 상 있지요. 선지자의 상 또는 제자의 상, 의인의 상, 그리고 예수님의 상, 이것은 전부 다 나한테 없는 거고 예수님의 것을 내 안에 심어놓고 예수님이 심어놓은 그것을 우리에게 찾으면서 주님의 상을 허락하신 겁니다.  내 상을 너희와 같이 공유하자, 같이 누리자, 하고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청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왕은 기름부음이 오지요. 기름부음은 어디서 오느냐? 위에서 오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청소를 해요. 청소는 반드시 완료가 됩니다. 청소를 하게 되면, 방법은 십자가 죽음이고, 이유는 뭐냐? 정결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누가? 그것은 바로 다윗시대에는 다윗의 모습으로 오지요.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데 여기에 누가 청소해요? 예수님이 청소하지요. 무엇을?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내서 예수님의 것을 자기가 가져가는 것이 바로 청소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것을 가져가시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못 삽니다. 여러분 앉은 자리도 몇 십 년 지나면 없어지고, 모든 게 없어져요. 없어지게 하십니다. 왜냐? 청소기 때문에 없어지게 해요.

그러나 있는 자들은 바로 예수 믿는 자들을 이 땅에 계속해서 세상 끝 날 때까지 남기게 될 겁니다. 내가 있다, 없다. 내가 산다, 죽는다 하는 것은 내게 전혀 문제 되는 게 아니고 주의 복음의 출몰한다는 것,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더러운 내 안에 주의 복음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 용서된다는 복음이 출몰될 때 이거는 사람의 힘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을 저희들이 원했던 건 아니고 이미 시작한 일이 저희에게 덮쳤습니다. 내가 살아야겠다는 이것을 늘 꺾어서 주님이 살아 계심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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