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들은 군대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군용 비행기에서 낙하훈련을 할 때 실전 낙하하기 전에 지상에서 먼저 레펠 훈련을 하는데 위로 올라가는 계단 계단에 조교들이 배치되어 몽둥이로 사정없이 팬다는 것이다. 덜 맞으려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올라가야 한다고. 일단 정신없이 올라는 왔는데 하강할 때 주춤하긴 하지만 다시 맞으면서 내려가느니 그냥 뛰어내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강한다고 했다.
오래전에 친구가 이런 질문을 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지’. 속으로는 ‘미쳤나. 다시 돌아가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마음을 포장해 그 친구에게 되물었다. 너는? 자기는 다시 초등학교로 돌아가면 진짜 공부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공부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아쉽다고 했다. 나도 끄덕거리며 ①속으로 대답했다. 레펠 훈련장에서 낙하해서 그 계단을 다시 올라오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고.
빠삐용처럼 나비같이 하강하는 것이 자유롭고 멋진 것이 아니라 얼마나 허구적이며 사정없이 패는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위로 달려 올라가고 결국 선택의 여지 없이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강요된 자유인 것을,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자랑할 것은 수고와 슬픔밖에 없는 바람처럼 날아가는 인생인 것을 주님이 주시는 진짜 자유 비밀스러운 자유를 알게 하시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요즘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솟구치는 순간은 늘상 듣던 똑같은 단어가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들릴 때이다. 순간순간 올라오는 어쩔 수 없는 교만인 ‘이거는 아는데. 이 말씀은 아는데’라는 생각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오히려 무식자의 자리로 옮겨 주심이 고맙다. 마치 ‘주님 저도 압니다. 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닭을 보내시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자로 바꿔주시며 알 수 없는 힘에 눌려 어쩔 수 없는 무능까지 들키고 눈물만 흘리는 자리를 만드시어 ②무식과 무능을 통해 비워진 공간에 예수님 존재의 힘이 부각 되는 주님의 열심만 가득 차게 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빈껍데기에 ‘나’라는 존재와 의미로 채운 죽은 자와 ‘나’라는 빈껍데기에 주님의 생명만 있는 산자로만 구분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혹시 백스테이지 위에 여러 종류의 예수님 중 자신이 원하는 타입의 예수님을 골라 마음에 모시고 있는지 자신을 의심하게 하고 배신하게 하면서, 요나가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고통을 안겨준 박넝쿨 갉아 먹는 애벌레 같은, 베드로에게 수치감 작렬하게 제때 울어준 닭 같은, 내 인생 종 치게 한 그 예수님이 맞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분노를 발하며 그분을 죽인 십자가가 맞는지 질문을 한다. ③그리고 그 집요한 추궁에도 숨겨진 속내가 들통나도 여전히 말씀이 고마운지 묻는다.
어떤 상황이 와도 어떤 모습으로 들통나도 말씀을 그리고 말씀의 주인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여전하다면 이미 모든 것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과정 과정에서 주님과 꾸준한 만남을 통해 믿음의 성장을 확인하고 주님과의 의리를 다지고 어떠한 환란이 와도 결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나름의 장렬함을 품고 하루하루를 경건하게 살고있는 그런 형식적 만남만 유지되고 닭에게 지고 닭보다 못한 실없는 인간, 비어있는 인간으로 바꿔주시는 십자가 흔적이 있는 연결로 바꿔주시는 주님의 조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며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이다.
주님의 연결작업을 위해 선행하시는 활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시는 일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불신적이기에 주님은 베드로를 물 위를 걷고 변화산의 신비를 체험한 거룩한 영적 존재로 남겨놓지 않으시고 기어이 닭보다 못한 돌멩이보다 못한 아무것도 아닌 가장 인간 본연의 모습인 물질로 만드셨다.
주님의 계획이 얼마나 오묘한지 이 과정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말씀을 거부하며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라는 베드로의 호언장담과 “닭이 2번 운다”라는 꼬꼬닭의 순종(?)을 삽입해 놓으셨다. ④이제 닭이 주의 뜻대로 울어주기만 하면 베드로는 빼도박도 못하고 모든 것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불신적이었는지 그 수치로 몸부림치게 된다.
닭이 우는 순간 모든 걸 깨닫고 베드로가 울며 예수님에게로 오면 안 된다. 가서 예수님을 얼싸안으며 주님과 함께 지금이라도 십자가에 같이 죽겠다고 들이대면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주님을 만지지 못하고 만질 수도 없는 자리에, 불신자의 자리, 죄인의 자리, 완전히 새 되는 자리에 끝까지 있게 하신다. ⑤이 수치가 성립되어야 십자가를 동반해 친히 찾아오셔서 주님이 우리를 만지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뚫고 들어가셔서 용서와 사랑의 흔적을 남겨버리는 예수님의 연결작업이 성공하기 때문이다.
이쯤 하면 항상 올라오는 의문은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지 정말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다는 말만 나오는 게 당연하다. 예수님의 주되심에 신부로 참여될 자들을 건지시기 위해 좀비 같은 시체가 가득한 곳에 직접 오셨다. 죽은 자들로 가득 찬 곳에 진짜 생명이 왔을 때 좀비들이 생명의 피 냄새를 맡고 얼마나 격렬하게 달려들어 물어뜯어 버릴지 그 본성을 아시면서도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생명을 덧입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가장 수치스럽게 가장 비참하게 좀비들의 손에 죽어주시어 십자가를 완성하시고 아버지의 다시 살리심의 유일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주님이 겪으신 수치를 앞세워 친히 찾아오시어 ⑥그것이 우리가 받을 수치였음을 분명히 보이시고 주님의 수치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시는 사건들이 포도송이처럼 주님의 결실이 되고 열매가 된다.
이렇게 예수님과 ‘나’라는 존재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게 해주심에 결코 죽지 못하는 지옥 형벌에서 건짐을 받도록 주님과 죽을 수 있는 복을 주신다. ⑦지옥 세상이 노골화될수록 고통이 만연화될수록 주님이 안겨주신 십자가 죽음 사건의 선물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 감사가 더욱 깊어갈 것이다.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오늘 완전 닭 됐네. 오늘 완전 똥 됐네’라고 서로 고백하며 ‘이 닭이 누구시지? 이 똥이 누구시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상기시켜주시며 지극히 작은 자와 그에게 베푼 자를 등장시키고 주님은 빠져계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들 ⓼두 역할 자들이 오물 같은 죄인으로 규정되고 성령의 갈고리로 싹싹 긁힘을 당하는 사건으로 만들어진 빈공간, 빈껍데기 안에 주님으로 채워져 주님 혼자 다 하셨음만 증거된다. 주고받고 1인 2역 하셨다.
그 현장에서 발생 된 똥 된 자들과 닭 된 자들은 ⑨주님 여기 계시매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 바로 보며 웃는 자리가 형제와의 교제의 자리이고 주님을 바라보는 주님과 서로 응시하는 용서와 사랑만 남는 자리이다.
소감; ① 왜 속으로 대답할까,그냥 자기 생각을 대답하면 되는데.. ② 생겨난 공간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들린다. ③ 여전히 말씀이 고마운지라는 문구가 위로가 된다. ④ 결과를 아는 입장에서 나온 논리적결론으로 들린다. ⑤ 내가 고민하는 나의 모습이 혹시라도 여기에 해당되는가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⑥ 복음을 설명하는 간결한 문구가 맘에 든다. ⑦ 결론을 미리 아는 입장에서 나온 말일 뿐.. ⑧ 성도간의 교제까지도 주님이 개입하셔야만 비로소 의미를 깨닫게 된다? ⑨ 참된 현실을 계속 말씀하신다. 내 생각과 일치할 때만 동의가 되는,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