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친구들이 서로 생일 때 불러주던 노래는 ‘생일 축하합니다~’가 아니라 ‘왜 태어났니~왜 태어났니~’라는 노래였다. 장난으로 부르던 노래지만 살면서 늘 그 답이 궁금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어릴적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자주 밭으로 갔다. 일을 도우려고 간 것은 아니었고 엄마 옆에 가까이 있고 싶어서 갔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일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딸기가 상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밭에서 어떤 노동이 이루어지고 밤새도록 크기를 선별하는 작업까지 고생스러운 과정을 늘 관찰하고 돕고 하는 환경 속에서 나름의 속상한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아프거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생겨도 부모님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불평 토로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틈만 나면 교회에 가서 왜 이런 상황들을 만들었느냐고 따지고 힘든 것들을 하소연하고 부모의 힘든 상황을 대변하기도 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왜 이런 상황들을 좌시하고 도와주지 않으시는지 마구마구 하나님을 붙들고 따지는지 기도를 하는지 회개를 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위를 했다. 그렇게 몸부림친 결과는 ‘이딴 게 무슨 소용 있어. 어차피 예수님도 하나님도 없는데...’라는 분노만 속에서 쌓여가다가 결국 교회를 나왔다. 그리고 ‘나는 나다’라는 마음으로 단단히 무장된 삶으로 뛰어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있지도 않은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결과는 자신의 무능이고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믿지는 못해도 성경에 쓰여있으니 누구나 맘만 먹으면 읽고 지식으로는 얼마든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라는 존재가 알 수 있는 분이 아닌 것을, ‘나’라는 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도 없을뿐더러 알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자리로 와있었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시편 79:6) 하나님의 처음 창조 안에 진노를 쏟으실 터를 염두에 두셨고 하나님의 분노를 쏟으실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을 알게 하실 때 더이상 무엇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을 리가 없었다. 성경에 쓰인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복 받은 민족이라는 단순한 인식에서 왜 이 세상이 심판받아야 하는지 그 본보기가 되기 위해 선택된 민족으로 성경이 다시 보여질 때 망할지언정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에 언약에 붙잡혀 있는 민족이었고 나는 그저 바람에 날아갈 먼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이방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본성이 향하는 행동을 스스로 절제하지는 못해도 의도적으로 행복을 찾거나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고 계획하기보다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일단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맘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생각들 착각들 판단들은 어찌할 수 없는 작용들이라 흘러가는 대로 놔두니 그 생각에 속기도 하고 휘둘리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마치 내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험과 지식이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곧 자신의 존재감을 만들어 마치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작용들이 감지되었다.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하고 자신을 비교하는 작용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낯선 진짜 의미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그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실 때 그 복종을 온전케 하시는 유일한 의미이신 주님이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몸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이 안 믿어져도 믿고 싶고 내가 가짜라는 사실이 세상 어떤 말보다 고맙고 뭘 해도 죄밖에 나오지 않는 몸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이 살아계시며 홀로 활동하신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을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증거 했고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알 수 없는 욕망으로 갈증이 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 물을 퍼 나르듯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속물 같은 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의문에 대한 모든 것을 메시아라는 분이 오시면 알게 하실 것을 믿고 있었다. 예수님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실 때 자신만이 아는 속내를 들킨 수치심을 압도하는 어떤 것, 욕망의 원천을 차단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품어 감싸시어 늘 죄에 대해 죽게 하시고 쉬지 않고 부어주시는 생명의 법으로 살게 하시는 몸의 주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그 죽음 사건의 현장에서 모두가 죽은 몸임을 증거 해주시고 다시 살아나신 생명으로 덮으셨을 때 내 몸이라고 생각하며 행했던 모든 일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지점으로 항상 인도받고 자신의 자아와 주님 자아의 교체 지점인 십자가 안으로 되돌려 주시는 은혜를 무시로 부어주신다. 지금껏 나를 진짜이고 실제라고 옭아매던 나에게서 놓이게 해주고 주님이 몸소 싫어서 버렸던 자 안에 들어오셔서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 잡아 주신다.
죄의 몸이 주님의 몸의 용도로 바뀌는 과정은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무너뜨리는 외부의 충돌이 일어나고 어느새 자기 내부의 싸움으로 전환되며 자신이 한다고 느끼는 것들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는 사건과 함께 이 세상은 ‘나’라는 인간 위주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동반하며 일어난다.
만난 사람 입에서 십자가, 복음, 성령의 이야기가 줄줄줄 나올 때 그가 형제구나를 느끼는 것이 아니며 복음 좀 관심갖고 듣고 이해 좀 했다고 착각하며 우쭐한 나 자신도 삭제 대상이다. 정말 고맙고 신기한 모습은 저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육이구나, 아담의 몸이구나를 보게 하시면서 도리어 그 육을 비집고 나오는 여분의 무언가에 놀랄 수밖에 없는 몸을 목격했을 때이다. 나오지 말아야 할 곳에서 복음이 나올 때 그 말씀은 지식의 한 부분으로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신의 존재감이 소멸되며 그 말씀이 유일한 존재가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 자신도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할 때 안개 잔뜩 껴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 하나 없는데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 발짝 내딛어야 하는 사건을 만날 때 나름 성도인 척한다고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일을 가리는 것이 되면 어쩌지, 성도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해꾼 역할을 하면 어쩌지’라는 이런 주제 파악도 안 되는 생각이 올라오게 하시고 그것조차 이런 생각의 의도를 발각당하게 하시며 어느덧 세워진 자아를 죄인의 자리로 옮겨 주시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게 하신다.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운명의 갈림은 그들의 열심히 조금도 섞이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이 세상 신은 인간들이 자신의 물건이기에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예수님이 주님의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주시기에 주님에게 사용될 뿐이지 사탄이 안에 있어 사탄의 일을 하는 가롯 유다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주님이 “가서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시면 내 속의 주인이 누구든 그 주인의 뜻이 움직이기 때문에 몸이 움직이는 것이지 이 몸을 내것이라 생각하는 나는 조금도 관여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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