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빠가 딸에게 훈계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둘이 싸우고 있었다. 신들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으려다가 자기 정당성의 항변이 피차 끝이 안 날 것 같다는 의미로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 “신과 신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 줄 알아?” 당연한 대답은 “더 강한 신”이다. 물론 대답은 기대도 안 했고. 그런데 신 중에 한명이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병신?”
이런 말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였다. 성경 말씀도 복음도 십자가도 성령의 활성화 없이 누구나 뱉을 수 있다. 다만 복음을 외치고 병신이라는 말을 하며 들키고 깨지는 것의 결론 지점이 자신인지 그것이 수치가 아니라 기쁨인지, 사건이 지나가는 자리에 주님이 수거할 현장성만 남고 모두들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자리에 즐겁고 고마운 여운이 밀려오는지, 사람들이 아닌 일어난 현상에만 주시하는지 말씀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신이라고,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자기 의로움을 지키려고 싸우기 바쁜데 정작 보이지 않는 진짜 신은 인간이라는 껍데기와 싸우시지 않는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주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을 드러내서 알려주셨는데 이 세상의 신들은 분노를 일으키며 싸우려고 달려들고 결국 진짜 신은 그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히셨다.
자기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는 그냥 고이 보내주는 것이 인간사 미덕이고 고상함이고 쏘쿨~~한 모습이다.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순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괜히 나쁜 사람 만들지 말고 곱게 보내줄 때 가시라고 그리 사정했건만 기어이 인내의 한계를 초과하는 역겨움 유발해서 우회하지 못하게 하시고 기필코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의미 가치로 사정없이 고소하고 즈려밟고 뭉개고 가게 하신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의 요소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의 길, 주님의 길을 내는 과정에 꼭 필요하기에 이리도 요란스럽고 분주한데, 자신의 세상에 푹 빠져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사는 인간 세상에는 아무 상관도 없고 별일 아닌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신의 검문소에서 율법을 만나 죄가 살아나고 내가 죽었음이 확인될 때만 비로소 세상 잡음이 사라져 고요하고 영적 세상만 바삐 움직이고 있음을 실감한다.
참 현실에 상위목적에는 ‘하나님이 뜻하시매’가 ‘여호와로 말미암아’가 말씀의 주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상위목적 아래에서 하위 구조의 일, 피조물의 생존과 연관된 모든 대소사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작업 안에서 지극히 사소한 일이 된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선악과를 훼손하게 하는 뱀이 정체를 드러내고 가인을 통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더 우세하고 죄의 지배를 받는 증상들이 후손으로 퍼지고 확장된다.
악마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던 그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 ‘너 자신을 보게 되리라’는 말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일 줄이야. 악마는 인간을 자기 아바타로 사용하기 위한 작전에 성공했고 이렇게 상위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부끄러웠으나 속히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방법을 터득했고 점차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신에게 매료되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게 함으로써 악마가 거쳐 할 안전한 장소가 셋팅되고 악마가 할 일은 오직 인간들이 자기 자신만 바라보며 자기에게 집중하도록 부추기기만 하면 되고 그럴수록 악마의 거처는 더욱 견고하게 보존된다.
난데없이 등장한 진짜 하나님이 말씀 덩어리로 유일한 성령의 거처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자극할 때 인간이 발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자신의 거처를 위협받는 악마가 발악한다는 것을 자기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인간들은 알 수 없었다.
한때 성경을 보다가 화가 나서 덮어버리는 지점에는 ‘말씀대로 응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있었다. 맘대로 해놓고 무조건 ‘말씀대로’라는 말만 붙이면 다 되나?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인간처럼 사신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론으로는 알아도 믿지는 않았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태클 걸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동방박사를 안내하는 별이 곧바로 예수님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안내해주었다면 그 많은 아기들이 죽지 않아도 되고 엄마들이 가슴 찢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굳이 별이 예루살렘에서 멈춰서 헤롯에게 유대 왕의 탄생을 알린 이유가 뭔지. 또 ‘말씀대로 응하게’인가?
똑같이 하나님이 주신 성경 말씀을 접하고 있는데 인간대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 머리로 짜내고 분석해도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는 해석을 할 수 없다. 표면적인 언어로 말을 인식하는 것과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 민족성이 녹아든 말을 알아듣는 것조차도 차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속한 판이 다른 예수님의 해석과 인간들의 해석이 별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백프로 일치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죄목을 찾을 때 빌라도 앞에서 고발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인간대 인간으로 만들어진 공간과 예수님이 속하신 장소가 위상이 달랐다.
육적 차원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고 스스로는 벗어 날 수도 없기에 나에게서 나온 생각들이 정당하고 자연스럽기만 하지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다. 하나님 예수님 잘 믿어 보려고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한 번도 진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달라 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난데없이 패대기쳐진 진짜 하나님에 죽음의 형상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조각조각 금이 가고 그 죽음의 형상을 뚫고 끌려 들어가는 십자가 안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최종점이고 심판지점이며 하나님의 의가 생산되는 은혜의 장소이다.
기준점을 경유 하면 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먼저 일어난다. 선악적 관점의 죄에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위한 죄로 죄의 규정이 바뀌게 되고, 죄의 중하고 경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죄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죄만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자신만 보이고 죽기가 두려워 벌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나의 자리는 저주의 자리이고 멸망을 기다려야 하는 자리이다.
율법을 흉내 내고 신앙을 연출하며 자신을 기만하는 자리에서 믿음이 아니기에 행함으로 나아가며 미진함을 보충해 완벽함을 스스로 이루려고 자꾸만 끌어모으고 추가하는 저주에 속한 자가 분명했는데 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한 자가 분명했는데 어떻게 행위를 의지하는 믿음이 아닌 믿음에서 믿음으로 흘러가는 성령의 흐름에 합류되어 복음을 듣고 있는지 하루하루가 낯설다. 낯익은 것들이 예수님의 기준안에서 낯선 것들로 바뀐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 집에 있을 때 죄인인 여자 하나가 예수님 거기 계시매 예수님만 보여서 그쪽으로 들어갔다. ‘감히’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당당하게 뚫고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안 느껴지매 타인도 안 느껴지고 오직 예수님만 보여서 나아갔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지하 암반수를 대신해 초라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으며 주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
그 여인이 자신의 육신과 죄로 주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받은 모든 것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고 백부장에게는 믿음 중의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의 특급칭찬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뿐.
주님의 믿음에서 나온 의를 보이시려고 아무 행한 것도 없고 의를 따르지도 않은 자들에게 믿음이 나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믿음을 통해서 믿음이 나오매 인간의 행함이 완전히 차단되도록 해주신다. 율법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이 되리라”가 아니라 “정녕 죽으리라”라를 마침 점으로 모든 율법을 친히 이루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신 분으로 뿌리신 율법과 약속을 모두 수거해 빠져나가셨고 이제 더이상 이 세상 어디에도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의 희생과 상처에 합당한 믿음을 찾으러 육의 판을 뚫고 다시 들어오실 때 아무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으로 오시고, 더 나아가 마음 판까지 후비고 들어와서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관계를 심어주시니 우리 원래의 본질인 악마의 앱과 성령의 앱이 충돌을 일으키며 마음 판에 갈라짐이 일어나며 차이를 형성한다.
지옥 가는 자와 천국 가는 자가 구분 없이 동일한 환경에 놓여 보편적 행태를 보일 뿐이지 개과천선하는 특별 부류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도 안에는 두 요소가 싸우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자국이 만들어진다.
아무런 한 것도 없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고도 어느새 자신이 복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과 사투를 벌이고 하나님과 싸워 이김으로 죽은 자임을 확인받는 야곱과 같은 요소와 이 세상에서 남은 복이 왜 조금도 없는지 원망하는 에서의 요소가 함께 있으며, 모태에서부터 죄인임을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마음의 가시, 눈의 가시가 더 크게 다가오며 교만해지는 사울의 마음이 여전히 공존한다.
차이의 고랑을 따라 예수님 의를 발하는 십자가의 현장성이 흘러가며 주님의 주되심의 증거가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을 발하는 곳이 천국이 비치는 곳이기에 누구도 천국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이렇게 이 세상은 악마에 멸망의 증거가 관영 할 때까지 남겨진 바 되었고 성도는 천국을 품은 채 지옥 한복판에서 주의 주되심의 영광이 절정을 이룰 때까지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서 죄가 우세함을 부인할 수 없는 사건에 계속 휘말리며 신자의 자리가 죽어 마땅함의 자리가 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를 감당할 수 없는 잃어버린 자리에 머물러 주님의 의의 생산 도구로 소모된다.
십자가 효과가 반복될수록 차이의 간격이 넓어지면서 용서하심과 은혜의 폭이 커지고 그 차이에서 나오는 주님의 사랑이 함께 커지기에 그분 앞에서 내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식물인간처럼 무능 해지는 것이 고마움의 이유가 되고, 자신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기쁨이 올라올 때 그 기쁨이 내 것이 아니라 나를 찢고 나오는 주님의 기쁨이고 이 세상에서 경험한 적 없는 낯설고 새로운 기쁨이다.
멸망의 이유밖에 없는 자에게 오셔서 “이 천하에 나쁜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너는 죽었고”라고 말씀해 주실 때 이 말씀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표현은 없을 것이다. “너는 죽었고 이제 내 안에 감춰졌다”라고 말씀하시며 예수 안에 완전 봉쇄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앞에서 촐랑대는 헛짓 어서 정지시켜주시고 주 안에서 잠잠히 흐르는 핏방울에 복속되게 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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