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선택의 신비-주님의 현재성

아빠와 함께 2020. 4. 13. 00:12
2020-04-12 15:23:12조회 : 19         
선택의 신비-송민선 성도님의 글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들어도 깨닫지 못할 말을 듣게 하신 이가 누구십니까.

어디에 있든 그곳이 공동묘지임을 알게 하시고 그곳에서 잠잠한 어둠이 되게 하신 이가 누구십니까.

이미 멈춘 시간 속에서 분주하다고 착각하고 열심히 몸을 움직여 뭔가를 행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를 죄인으로 규정해주신 이가 누구십니까.

주의 음성으로만 주의 말씀으로만 온 세계가 가득 차기를 고대하는 마음을 주신 주께서 우리 안에 끊이지 않는 감사를 만들어 주시고

보고 듣고 깨닫는 어떤 것도 우리가 움킬 수 없는 바람이고 흐르는 물 같음을 없어지는 안개임을 알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주의 손에 움켜 져 마음대로 부림을 받는 복을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 철저히 이용당하는① 복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는 이런 기도를 하는 자가 아니다. 나는 자신의 유익을 포기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설령 들더라도 어떻게 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주를 위해 사는 방법은 더더욱 모른다. 처음 참가한 십자가마을 수련회에서 무던히 들었던 말 ‘나’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한다는 그 ‘나’, 복음을 아는 자들에게는 금기어인 듯한 ‘나’, 어차피 없는 ‘나’, 있지도 않은 ‘나’라는 말을 원없이 쓰며 오늘도 막산다. 모든 책임을 주님께 돌리며 말을 바꾼다. ‘주께서 내 안에서 막사신다’

죽음도 아닌 것을 죽음이라고 착각하며 땅에 묻히고 무덤 속에서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그때 서야 ‘원래 죽었던 존재였기에 죽지 못하는 죽음만 있구나. 심판만이 있구나’를 깨닫고 이를 갈며 원통해야 함이 마땅한 자인데 지금 이렇게 미리 심판의 덮침을 받는 복음을 듣는 것이 감당할 수 있는 은혜일까.

원래부터 인간을 위한 시간은 없었기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말도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완료된 시간 안에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 선상에 주님의 현재로 그려지는 죄의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주님의 길목을 장식하는 사건들만 있다.

사건의 생산을 위해 기능으로 뽑혀 눈살 찌푸리게 하고 손가락질받는 연기를 제대로 잘했다고 어느 분의 글처럼 십자가가 드러나도록 삶을 허비하느라고 주님에게 ‘수고했어’라고 칭찬받는 것이 ‘여우주연상’ 받는 영광에 비할 기쁨일까.

이제는 수고했다는 말씀에 응축된 주님의 긍휼과 사랑이 무엇인지 그 깊이를 더해주시는 주님의 현재 안에서 없었는데 있게 하시고 있었는데 없게 하시는 주의 일하심을 통해서 인간 속내에 자리 잡은 부패의 근원으로 항상 인도받는다.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주인의 것을 맡겼을 뿐인데 어느새 나 자신이 존재의 이유가 되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어버리는 작용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들추시고 보여주시고 책망하실 때 모든 것을 ‘예’할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들이 나름(?) 순수했을 때 했던 여러 질문 중에 대부분은 ‘왜 하나님은 모기를 만드셨어요?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똥을 싸도록 만드셨어요? 왜 병균을 만드셨어요?’라는 질문과 같이 자신의 편이를 위해 있어서는 안 될 것들과 연관된 것이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어린아이들조차 그 속에서 일어나는 본능적 방향성은 하나같이 나의 불편함과 나의 더러움이 발생하는, ‘나’라는 의롭고 가치 있는 존재에 흠이 되는 것들을 거부하는 현상들과 연결된다.

그 질문 중에 왜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만들었는지는 물어도 왜 가난한 자와 부자를 만들었는지를 묻지는 않는다. 이미 부자라는 이미지는 자체 해석상 의로운 쪽으로 속해있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여기니까.

말이 질문이지 그 질문들의 실체는 아이가 정말 궁금해서 물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능력과 통제를 벗어나 원치도 않은 결과가 미리 주어진 것에 대한 주인 의식의 아우성이고 원망이며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다. 그 아이들은 육에 속한 이스마엘 같은 내 육에서 빠져나온 죽음의 분신들이다.

이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신 해답을 들춰보게 하시고 기준점이 만들어낸 기적 안에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교만한 자의 구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인데 어떻게 구출되는지 그 과정을 보이신다.

스스로 비천을 꿈꾸며 가난하고 쇠약한 자리를 바라며 살지 않는다. 설령 아프고 빈핍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 자리가 당연하다고 주의 뜻이면 이것도 감사하다고 인간적 겸손을 발휘해 자기 최면이나 또 다른 자기 정당성의 표현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심은 늘 베풀 수 있는 관대한 자리, 넉넉하고 편안한 자리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자들의 기도에는 한결같이 자신을 비천한 자로 내리는 겸손과 부자와 권세 있는 자의 교만을 흩으시는 주의 권능의 손을 높이는 찬양이 동반된다. 예언을 품었던 사람들의 낮아짐은 어디에서 왔고 그 낮아짐이 만들어내는 공백은 무엇인가.

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어야 하고 권세 자와 비천한 종이 있어야 하는지 왜 고아와 과부가 생기게 하시는지 의아해하기 전에 자신 안에 구약에 등장하는 희년의 취지가 자리잡혔는지 보게 하신다. 인간이 생각하는 부자나 가난한 자라는 개념은 하나님에게 성립되지 않고 오직 아들의 용서가 구현되기 위한 각자의 역할만 있을 뿐이다.

누구도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없고 비련의 고통의 주인공임을 한탄할 자격은 애초에 없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예언이 쳐들어 와서 박혀 자신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계기를 만나고 막상 그 자리로 가 보아야 왜 자신이 정상이 아닌지를 알 수 있기에 율법이 쳐들어와서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과 반발심이 분출되는 것이 복이다.

뚫고 나옴이 있을 때만 부자는 가난한 자를 보며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임을 알게 되며 자신의 노동, 가치, 소유가 아닌 주님의 노동으로 축적된 주님의 것만 있지 자신의 것은 없으면 더 나아가 그것이 자기의 것임을 확신하며 품었던 아까움, 분함, 탐욕이 드러나면서 죽어 마땅한 낮은 자리, 빈자리가 되게하신다.

가난한 자들 또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 자리가 마땅함을 알게 하시고 속에서 꿈틀대는 부와 권세를 바라는 지향성과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은 하나님에게 품었던 원망과 분노를 들키며 낮은 자리 죄인의 자리로 옮겨진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삶의 전부였던 자가 자기를 없어도 되는 무용지물로 인식하며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잠시 있음으로 유지해주신 것을 깨닫는 기적을 위해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무엇을 지켜낸다는 거, 법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강력하게 분출시킬 수 있는 표현이고 그 율법을 통해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반항을 하는지 더 나아가 율법에 흠이 없음을 목표로 할수록 악마의 최적화된 도구로 예수님에게 침 뱉고 뺨을 때리고 조롱하며 자신들의 존재 밖으로 퇴출시키는 폭력성이 격하게 발휘됨을 발각당하게 하신다.

희년의 취지가 이루어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방되고 모든 것을 잃어야 하고 자신의 존재감까지 희미해져 가는 자리, 본연의 자리로 옮겨졌던 것처럼 버려두시고 찾아가 데려오시는 주님의 작업이 오직 주님의 현재성 안에서 관계망처럼 반복적으로 단일성으로 성도를 통해 항상 새롭게 만들어진다.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황무지에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비처럼 내려주시는지 깨닫게 하시려고 무가치한 자가 되는 그 자리에서 시온을 바라보게 하시고 눈물 흘리게 하신다.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은 진짜 존재하시는 분을 향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깨달으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시온을 바라게 하신다. 율법의 완성이 오셔서 주의 백성을 다시 모집해 주시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법을 초과한 죽음이 발생했고 죽어서는 안 되는 분이 저주받아서는 안 되는 분이 피를 흘리시고 어느 누구도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공의를 이루셨다. 대속이라는 말이 대신이라는 말씀이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사랑으로 다가오게 하신다.

이 대속의 죽음 앞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자신의 구원을 바랄 자격이 없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졌고 아들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었다. 십자가 안팎으로 주님의 분류작업은 분주히 진행되고 십자가 안으로 옮기시는 택함에는 십자가 밖에 버려두는 배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주님이 원하시는 자에게 주의 뜻대로 이루시는 것에 토 달 수 없다.

법을 초월한 피의 법, 사랑의 법이 주의 지체를 하나로 모집하시는 작업은 오직 주님의 현재성 안에서 주님의 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용서이다.

예전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런 실험을 해준 적이 있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에도 네다섯 개씩 먹어치우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이 먹지 말라는 경고가 먹히지 않자 아이스크림 몇 개를 구해서 냄비에 아이스크림을 담고 가열했다. 그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녹으면서 이상한 액체로 변하며 역한 냄새가 나자 아이들이 모두 코를 막았다. 아이스크림의 실체를 까발려 준 덕분에 얼마간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달콤함을 기억하는 육이 꿈틀대면서 다시 아이스크림을 찾기 시작했다.

이 역겨운 흐물거리는 액체가 자신의 실체인 것을 말씀은 부지런히 알려주시며 자신을 부정하고 부인하게 해주시는데 어느새 예쁘고 달콤하게 생긴 옛사람의 환상으로 다시 빠져들고 육의 습관으로 돌아와 있을 때마다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의 존재감 부숴주시며 주님의 기쁨에 참여시켜 주시기를, 이 사랑 속에 침몰 되기를 원하게 하시며 어찌하든지 주님 안으로 완전히 소멸되어 들어갈 날만을 고대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이근호 (IP:119.♡.87.190)20-04-12 15:28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하나님은 없는 분이었습니다. 없는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는 백성들의 '찾는 행위'의 특이성에 맞추어서 나타내주시는 주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송민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습인생  (0) 2020.05.21
차이  (0) 2020.05.02
  (0) 2020.03.29
기쁜죽음  (0) 2020.03.20
누가 했을까  (0) 202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