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함께 사는 딸의 방은 참 신기하다. 무엇이든 그 안에 들어가면 쓰레기가 된다. 맛있는 간식도, 예쁜 옷도, 책들도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쓰레기가 된다. 발 디딜 틈이 없어질 때가 위험 수위이고 이때 경고와 함께 내가 딸에게 주는 것은 빈 통이다. 쓰레기통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듯하다. “다 담아서 내놔” 청소하라는 말이 의미가 없는 건 그녀가 고작 한다는 청소는 바닥과 침대와 책상을 덮고 있는 쓰레기들을 구석구석으로 밀어 넣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은 그것들이 더러운 줄 모르겠다는 듯이 버리기 아깝다는 듯이...
주님에게 온 택배 상자에 아무것도 없을 때 그 실망감을 넘어서는 빈 상자의 고마움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 안으로 무엇이든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시고 안에 있는 것을 담아낼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게 하시면서 보내시는 말씀으로 언약의 피로 엮어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미로만 채워진 상자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과 하와가 숨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 물으신 건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라는 말씀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완료된 지금도 육신에 갇혀서 십자가 안의 죽음을 잊을 때마다 동일한 말씀을 듣는다.
선악적 관점에서 수치스럽다고 판단되는 사건을 안겨주시며 그것을 담대하게 이겨내게 해주시지 않는다. 믿음을 발휘해서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으나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을 속일 수는 없다. 본능적으로 무화과 이파리로 가리려는 행위를 연출하게 하시며 가차 없이 십자가 열기로 이파리 오그라들게 해서 결국 수치를 드러내게 하시고 고마운 책망을 선물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신의 육 안에 다른 법이 있어 항상 패배자로 만들어 죄의 법안에 사로잡히게 하고 나름의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어리석은 자리에서 비로소 느낀다. 나를 비웃으며 꼼짝 못 하게 하는 악마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모든 곳은 존재로 채워지는 공간이기에 자신의 지식에 의지하니 다시 살아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날아가고 빈 무덤에서 예수님 시체가 없다고 주저앉아 우는 꼴사나운 짓을 하게 되는데, 이미 말씀대로 승리하신 다윗의 뿌리가, 약속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주님이 펼치시는 영적 전쟁터를 느끼게 하시며 주님의 전리품으로 주님의 것으로 어디에 놓여있는지 알게 하신다.
‘나’라는 존재가 살았다고 착각하기에 말씀을 망각하고 빈 무덤에서 주님을 찾으니 아무런 가림막 없이 악마를 대면케 하시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유감없이 표출케 하시고 마귀가 휘두르는 대로 하나님의 대적자로 행하며 꾀임에 놀아날 수밖에 없고 악이 늘 이길 수밖에 없는 마귀의 장난감인 것이 밝혀지고 왜 살아있는 육은 주님에게 조금도 가치가 없는지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신다.
항상 다짐하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쪽으로 가리라는 결심이 살아있는 육의 또 다른 가치추구이며 자신의 편이를 구하는 것임을 말씀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려고 율법을 말씀을 주시는데 그 죄가 보이면 어떻게든 자체 처리를 하려고 자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또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속는다. 말씀에 의지해서 주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자신이 살아있음의 공간은 절대로 주의 이름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기에 사망을 제압하기 위한 무기는 어찌하든지 살고 싶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고, 예수님의 죽으심인 피를 포함한 부활의 생명뿐이다. 피가 있는 부활을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죽음. 예수님의 죽음만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죽음이고 명분이 만들어지는 죽음이다. 죽음을 이기는 죽음.
주님이 그 기쁜 죽음을 알려주시려고 작정 된 자들에게 다시 오실 때 가져오시는 죽음은 피로 씻기는 육의 심판이다. 그 심판이 더욱더 기쁘고 고맙게 하시려고 정하신 자들에게 죄를 더 깊이 알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어찌하든지 자신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주님을 모독하는 작용이 함께 올라온다는 것이고 그 근원에서 등장하는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쟁터에서만 주님의 넘치는 사랑이 느껴진다.
철저히 죄의 노예이고 태생적으로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죄의 송곳으로 촘촘히 무장하고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대를 찌를 수밖에 없는 육을 가진 자를 찾아오셔서 괴물이라고 규정해주시고 넘어오시면 안 되는 선을 넘으셔서 그 소름 끼치는 자를 주님께서 안아버리신다. 오면 찔리는 줄 알면서도, 오면 피 흘리실 줄 알면서도, 오면 죽을 줄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와서 안아버리신다. 처음에는 천지 분간 못하고 자신을 악하다 하시기에 악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에 밀치고 나중에는 자신이 주님 찌르는 괴수이기에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의로움을 지키려고 밀친다. 밀치는 거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주님의 안아주시는 힘이 더 강하고 압도적이기에 그분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는 주님의 일방적임이 고맙다.
피조물을 창조하신 죽음이 다시 피조물을 찾아와 죽음이 죽음 되게 드러내 주시는 것을 자아는 결코 기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짜 주님을 만나는 길은 그분을 죽여야만 만나게 하시니 창조주를 죽여 삽입된 예수님의 희생이 마음에 자리 잡은 자만이 비로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진짜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생명으로 머물게 된다. 죽음 안에서 정죄함이 없으니 가릴 것도 없고 수치도 없다.
예수님을 죽여서 받은 사랑 안에서 자기 의로움, 자기 행함, 옳고 그름의 판단 가치, 자기 유익은 헛되고 안개 같다. 우리의 선악적 관점과 주님과의 충돌로 생긴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모든 것을 덮었고 죄를 의로 만드시는 주님의 사랑이 피처럼 흥건히 젖어드는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의 승리가 만든 전리품의 무늬들이 선명히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장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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