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자주 했던 말은 ‘안 할래요. 못해요’였다. 그말을 자주 하는 지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아빠께서 지나가듯 한마디 던지셨을 때 알았다. “어차피 다 하던데 왜 말은 늘 안 하고 못 한다고 말을 하느냐.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도록 해봐라” 아빠의 말에 조금 놀란 이유는 그때까지 내가 못한다고 한 것을 어떻게든 해놓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는데 그것을 할 수 있어서 했다고 생각 안 하다가 ‘나는 할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순간부터 힘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건 ‘안해요’라는 부정어가 아니라 ‘할 수 있다’라는 긍정어라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결과들이 자꾸 만들어졌다.
이제는 들어도 너무 담담한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잠시 억지스러운 예로 상상해 보면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아이들 관점에서 아이들이 청소 말끔히 해놓고 설거지 다 해놓고 엄마에게 와서 “엄마, 주께서 하게 하셨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 쉬울지 소파에 컵라면 엎질러 놓고 “주께서 하게 하셨어요”라고 하는 게 쉬울지 그리고 엄마의 관점에서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더 은혜가 될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예가 잘못된 것이 이미 ‘어느 쪽이 쉽다, 어느 쪽이 은혜가 된다’라는 단독 개인의 판단이 서는 자체가 주님이 현장에 계시고 주님의 관점만이 진실임을 부인하고 있는 원수의 모습이다. 정말 주께서 하셨다는 믿음으로 말을 하고 또 듣고 하지만 그러고 있는 나만 느껴지지 어디 주가 느껴지느냔 말이다.
만약 사건이 터지며 자신도 모르게 “안해요”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걸 하고 있는 상황으로 몰리고 “할 수있어요”라고 했는데 우사만 당하고 못하는 상황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안 한다고 말한 자아는 하고 있는 상황으로 부인당하고 후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측하지 않은 사건이 자신에게는 난감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주님의 기쁜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 기쁨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토요일 오후,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수선한 집을 대충 정리하고 피곤해서 쓰러져 자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전화가 와서 20분 안에 도착한다고 잠깐 얼굴을 보자고 하셨다. 그분들이 괜찮냐고 물어보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미 거의 도착했다고 했으니. 전화를 끊고 옷을 입고 뜬 머리에 대충 물 묻혀 가라앉히고 어디만큼 왔는지 전화하려고 하는데 문자가 와 있었다. 가족들에게 밥을 사주고 싶다고...이제 나 혼자의 영역에서 가족으로 확장해서 5분 안에 모두를 준비시켜야 한다. 자초지정 설명하고 그럴 여지 없이 “누가 밥 사준데. 빨리 옷 입어” “누구?” “시간 없으니까 일단 옷부터 입어”
누군가에게는 너무 반가운 손님이 누군가에게는 ‘내가 왜 그래야 하지?’라는 난감한 상황인 것을 감지하면서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데로 마구마구 밀어붙이고 있는 자신의 독단적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상관없을 정도로 기뻐서 가족들의 황당한 반응들이 잘 안 들어왔다.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그분들의 차가 보였다. 차만 봐도 즐거웠다. 주차하고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더니 자기들은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아이들만 데리고 내려오란다. 강권하여 올라가자고 했다. 위에 올라가면 어떤 상황일지 자신도 예측은 못 하지만 함께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서로 만날 수 있으려면 쳐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예감이 들면서 올라가자 했다. 그분들이 한사코 아래 있겠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럴 생각 없었다. 경우가 아니다. 안 하겠다” 그 말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올라가야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니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안 하다’ 이든지 ‘할 수 있다’ 이든지 상관없게 해주시고 자아를 배제시키는 사건에 몸을 의탁하고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개인으로 관점정리 해주시는 주님이 참 고맙다. 못 믿기 때문에 인간이랑 동업 안 하시고 던져 놓으신 약속을 스스로 활용하시며 이루시는 일을 인간이 인지할 수 없음이 당연하고 애써 인식하려고 하며 주께서 하셨다는 말을 하는 것이 주님의 증인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면서 도리어 말씀 안에서 주께서 결과를 소급해서 공유해 주실 때마다 이게 무슨 복일까 싶다.
어떤 현상을 의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을 표현하려 하니 내 생각인지 아니면 떠오르게 하셨는지 해석하고 구별하려는 내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문자를 남기거나 글을 남길 때 자신이 미워 죽겠다 싶을 정도로 뭔가를 잘 조작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갈라짐 사이에서 죽어마땅함과 덮으심으로 터를 만드셔서 일하시는 주님의 열심만 남게 하신다.
내가 산다고 생각했을 때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 불안의 연속이었는데 그 불안이 감사로 바뀌게 하셨다면 그 전환점에서 이렇게 하신 분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이 너무 당연하다.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덩어리 속에서 탈출 되었을 때 그들의 쓰임은 애굽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자신들 내부까지 침투되어 자신과 애굽이 한 몸이었던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일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애굽을 나올 때 더러운 요소를 죄를 모두 제거해 주셨더라면 주님 앞에 죽어 마땅함의 마음이 순순히 받아들여 지고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진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셨을까, 갈 바를 할 바를 알지 못함이 더 나아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불안함이 아니라 평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며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이 기뻤을까.
죄가 죄됨을 알게하도록 주님이 일하실 때마다 ‘내가 이런짓을 하다니’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죄인인 걸 알게 하시다니’라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자신을 옭아 매던 모든 책임이 날아가고 이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은 마음과 그 사랑만 더욱더 커지며 고백하는 말이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셨습니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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