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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5강-수치와구원(2;1-3)이근호130512

아빠와 함께 2013. 5. 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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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3-05-12 15:34 
                          수치와 구원

203년 5월 12일                            본문 말씀: 스바냐 2:1-3

 (습 2:1, 개역)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습 2:2, 개역)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습 2:3, 개역)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회개를 외쳤던 세례 요한의 역할은 이미 구약 때 말씀하신 그 심판의 날이 왔다는 점을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무대 사회자가 이미 무대 장막 뒤에 가수가 와 있음을 알리는 그런 일을 세례 요한이 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물 세례가 결코 사람을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세례 요한의 기능까지 예수님에서 맡아서 해내십니다. 성령을 일방적으로 주입하시므로서 그동안 인간들의 모든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짓을 했음을 폭로시키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상태 자체가 구원받은 상태이기도 하고요. 오늘 본문에서도 스바냐 선지자가 세례 요한의 역할 같은 것이 해냅니다.

그는 세례를 주는 대신, 진노의 날의 도래를 언급하게 되지요. 그 전에 자기 백성을 향하여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구원의 경로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이루어집니다. ‘수치를 모르는 자로 규정’→‘수치를 깨닫게 됨’→‘수치 없는 자 되게 함’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이유가 뭘까요? 레위기 18:3-4에 보면,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줄곧 애굽에서 살아왔던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면서 애굽의 습관와 관습을 하루 아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반복적인 습관은 사고방식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즉 정신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옛 습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질서에 대드는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풍속과 규례를 버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기 때문이요 그 속에서 자기 백성이 물들어 있는 그 모양새가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를 느낄 만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란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식으로 자기 속에서 끓어오르는 수치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나만 가지고 그래. 다들 그렇게 하는데”라는 식으로 변명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도가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태도를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거룩에 해당되는 애굽이라는 관습을 옷을 벗기고, 거룩이라는 옷으로 입히시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그들의 수치성을 주변 환경의 변신으로 통해서 강제로 노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방법에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집합적’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개별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집합적으로 소개하는데 비해 사람들은 “내가 이스라엘입니까”는 식으로 개별화시켜 소지하려는 본성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또한 성경에 ‘형제’라는 단어가 나오면 자신이 형제로 만들 수 있는 자라고 나서고 싶어합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이러한 오해와 객기를 거부하시고 제 3의 인물을 투입하십니다. 히브리서 2:11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개별자로 행세하기에 자신의 일방적인 뜻을 남들에게 설득시키기를 시도하지만, 결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대로 도저히 이해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즉 인간은 타인과 자신의 통합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이스라엘’이나 ‘하나님 백성’이라는 통합개념을 현실화 시킬 능력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무능력은 하나님에게 그냥 넘어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아니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짓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수치를 당사자들은 모른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작업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 수치를 알게 하는 기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그동안 그들이 나름대로 수치를 ‘수치스럽지 않음’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작업들을 붕괴시키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느끼고 있는 수치들은 양적인 증대를 통해서 대체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뭐근지 크고, 많고, 세다고 느끼면 곧 성공적인 삶이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서면 여지없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짓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자기 내부의 있는 수치를 안들키기 위해서 위장을 많이들 부려왔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수치를 걷두어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부터 뭔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백성들 가운데 보내셔서 그들을 ‘형제’라는 단일체제개념을 전환시키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수치를 수거해서 홀로 아버지에게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그 수치를 아버지로부터 해결받고 성령을 통해서 그 결과를 통고하고 집어넣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노력으로 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제’라는 단일체제 개념을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십니다. ‘형제라고 부르는데 있어’ 주저하지 아니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중매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는 매일같이 자신에 대해서 용서해주세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자신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중매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판정내릴 권한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개입하신 바로 그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을 관리하고 판정내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심판날, 진노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 집단적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실상을 감추면서 살기 말고, 위장하지 말고 하나님의 용서로 용서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습2장1-3(수치와 구원)1305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7페이지입니다.

스바냐 2:1-3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 가까이란 의미는 만약에 직접 왔으면 두 번 다시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는 뜻 이예요. 만약 바로 직접 왔다면!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는데 지금 대기 상태에 있다는 거예요. 무대에 가수가 이미 도착했는데 아직까지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았어요. 딱 준비해서 ‘자, 박수로 요번에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오신 분 왔습니다. 박수로.’ 할 그때 무대 뒤에는 물 벌컥 마시면서 지금 떨려서 ‘사람들 많이 왔을까?’ 걱정해가면서 대기상태에 있는 거예요.

그렇게 대기상태에 있을 때 먼저 사회자가 나서서 ‘여기에 와 계십니다.’라고 할 때 그게 세례요한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례요한의 역할은 실패하죠. 성공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요단강 물에 들어갔다고 구원받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요단강 물만 더럽혀지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세례요한이 못한 보류된 일을 완성을 해버립니다. 세례요한은 그냥 잔소리만 했을 뿐이죠.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나누어주라든지 잔소리를 했는데.

성령님은 잔소리 할 것도 없어요. 직접 투입해 버립니다. 내시경 할 때 마취약이 직접 들어가요. 들어가면 ‘간호사님, 내가 알아서 잠들게요.’ 이럴 필요 없어요. ‘주사바늘 주지 마세요. 마취제 주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잠들게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런 거 없어요. 직접 놔버리면 언제 내 속에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나중에 깨어나면 벌써 모든 진료는 끝나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이라 하는 것은 프로포폴(우유주사) 같아요. 직접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 인생의 장악력, 또는 우리 인생의 관리자가 우리가 아니고 이미 예수님 손에 주도권이 넘어가 있습니다. 바로 그 넘어가 있는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의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냈고 사도들이 그런 유를 보여주는 견본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견본의 인생!

사도들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지만 무슨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되고, 가고싶지도 않은 그쪽에 가야 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해야 되고,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주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일을 그만 두게 하옵소서.’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살리는데 내가 쓰레기처럼 다루어져서 너희들은 잘되고 우리는 힘들게 되었다는 고백을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본인의 의사는 자꾸 비껴가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다루시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거 뭐 주사를 맞았어요. 성령의 주사를 맞아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건 회개 안 하고 싶어도 회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구약이거든요. 구약은 그 틈을 줍니다. 신약에는 성령이 오면 동시에 구원 받는 동시에 그 자체가 회개고 그 자체가 구원이고 그 자체가 주의 일을 하게 되지만 이게 시간적인 간격이 없지만, 구약은 시간적 간격이 있어요.

그래서 말하기를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일단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할 때 일단은 수치를 몰라야 돼요. 수치를 지가 알아서 오면 안 돼요. 수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거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이 수치를 모르는 인간들아, 그런 욕설 비슷한 것을 그들이 그것을 아주 스무스하게 받아야 돼요. ‘맞습니다. 우리는 수치를 모릅니다.’ 그런 걸 인정하면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라는 그 사슬에 끌려서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인데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이제는 하나님이 너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라는 쪽으로 자리 이동이 그렇게 진척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하죠. 처음에 그들이 구원받기 전의 자리는 뭐냐, 수치스런 행동으로 살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상태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그러니까 너희들은 더욱 더 수치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게 되고, 세 번째는 그 수치를 누가 대신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니가 하나님 앞에 서도 전혀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 된다, 라는 그 세 가지 단계를 거쳐서 구원해 주겠다는 내막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단계를 외곽에서 감싸주는 환경이 뭐냐 하면 바로 분노의 날, 진노의 날,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옛 하늘과 옛 땅, 그런 시간과 공간, 이런 것들이 다 날라 가 버립니다. 분노의 날에!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수치를 몰랐던 이유가 등장하죠. 그건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속에서 우리가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런 느낌을 현 세상에서 우리가 제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끄러울 일이 없기 때문에 부끄러운 체 안 한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천막을 거둬가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때는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을 거둬가는 작업을 하는데, 레위기 20장에도 있고 레위기 18장 3절에도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들이 전에 살던 애굽 나라의 풍속과 그러한 규례와 법도를 따르지 마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따르지 말라했다고 당장 몸이 안 따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 환경에 푹~ 젖도록 돼 있는 일종의 젓갈 같은 거거든요. 새우젓이라든지, 낙지젓처럼 푹~ 소금 끼에 젖어 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 풍속을 버린다는 것은 마치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다니다가 제사 지내는 집에 시집가는 것이 그게 부자연스럽습니까? 아니면 대대로 제사에 푹 젖어 살고 친정에서는 제사 열 번 드리는 아가씨가 교회 다니는 집에 와서 제사 하나도 안 드리는 그게 어색할까요? 어느 쪽이 어색할까요? 바로 제사 드리다가 안 드리면 그게 굉장히 뭔가 조상한테 벌 받는 느낌이 들고 이게 자식 된 도리 다 안 한 것 같고 하는 사업도 망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뭔가 자기 몸에 안 맞죠. ‘우리 집안은 그런 거 필요 없다. 안 해도 된다.’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더 이상해요.

평생을 십일조 하면서 교회 왔던 사람들, 여러분, 신약에는 십일조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일조 1/10 떼서 교회 한다고 그게 하나님께서 십일조 했구나. 하는 게 아니라, 예수 피를 믿으면 그게 십일조 한 것으로 쳐주십니다. 이러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목사님, 왜 그렇습니까?’ 물으면 모든 율법은 안식일이나 주일 성수나 십일조라 하는 것은 그 하는 행위 자체에는 의미가 없고, 어떻게든 하나님께 응답이 되는 하나님의 의를 낳게 하기 위해서 구약 때 율법을 준 건데, 율법으로서는 하나님의 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의만 자꾸 발생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걸 아시고 “치워라. 치워라. 너희들이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해서 의가 생긴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니까 그것이 나의 행함과 관계없는 주의 행함이 의라고 믿게 되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는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해는 돼요. 이해만 될 뿐이죠. 이해는 되는데 뭔가 찝찝하고 허전한 거 같아요. 그래서 이러한 결핍, 이게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은 이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주위 사람한테 수치를 당하지 않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겁니다. ‘내가 저 사람과 비슷하게 가게 되면 저 사람이 나보고 얼레리 꼴레리, 놀리지 않겠지.’ 라고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이미 입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디 가면 같이 따라 해야 돼요.

부흥회 한다고 해병대 박수를 이렇게 저렇게 치는데 가만 있어버리면, 옆 사람 치다가 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주께서 강림하십니다.’ 하면 저쪽에서 ‘아멘, 할렐루야’ 하고 ‘같이 통성 기도 합시다.’ 하는데 눈 똘망, 똘망하게 가만히 있으면 뭔가 찝찝해요.

주께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게 우리 몸에 먼저 와야 되는데 주께서 원하는 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옆 사람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이건 이상한 거 같은데 또 안 따라하면 미안한 것 같기고 하고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인간은 뭔가 꼼지락거린다는 말은 나름대로의 수치를 제거하는 방안을 간구해 왔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오늘 약간 어려운 게 있는데 딴 게 어려운 게 아니고, 성경 한 구절이 어려워서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말씀 드리면 구원의 방법은 수치를 몰라야 된다. 그 다음에 수치 모른다고 잔소리 들어야 된다. 그 다음에 잔소리 이끌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 앞에서도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 환경은 우리가 살고 있던 기존의 애굽 같던 옛 하늘과 옛 땅이 우리를 그렇게 적응하도록 그렇게 강제화 시켰습니다.

거기에 누가 들어오느냐? 거기에 철거작업!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분노가 일어나야 되는데 수치를 모르는 자에게는 수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분노를 뜯어내는 거예요. 가렸던 자기 옷을 벗겨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옷을 벗기고 그 다음에 무슨 작업을 하느냐 하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세우게 되면 ‘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하나님 보기에 당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어! 아휴 부끄러워서, 주여, 제가 부끄러워서 주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숨기 바쁜 그런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하면서 ‘그것 봐, 내가 부끄럽다고 했잖아.’ ‘맞습니다. 정말 부끄럽네요.’ 라고 하는 환경이 조성되는 거예요.

그럼 그 부끄러운 환경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스바냐 2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온다고 했거든요. 진노가 오는 것은 구약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지만, 이건 최종적으로 나와 있는 것이고, 그 전에 구원할 자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여기 히브리서 2장 9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돼 있고 11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형제라 부르시기에 부끄러워 아니한다.“ ‘목사님,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왜 상당히 어려우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부부라 할지라도 개별자예요. 한 침대에 부부가 같이 누워 자도 꿈은 다 달라요. 한쪽에 있는 어떤 의도나 의사가 옆 사람에게 절대로 전달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렵죠. 목사님, 그게 왜 어렵습니까? 물으면 예수님 생각을 우리가 모르게 되고, 내 생각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옆에 친한 친구라도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는 지 나름대로 내 말을 자기 맘대로 해석해요.

왜냐 하면 자기가 평소에 세상 살아오면서 갖추어진 그런 세계관이 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이야기 하게 되면 그 이야기가 그냥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세계관에 일단 입수가 되면 그 세계관에 맞추어서 지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지 맘대로 편집하고 지 맘대로 해석해서 ‘그래, 그래 니 말이 맞아.’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나중에 물어보면 맞기는 뭐가 맞아요? 지 맘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설명을 잘 해도 옆 사람이 내 뜻 그대로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 말은 뭐냐 형제란 게 성립이 안 된다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하는데 옆의 형제도 뭔 뜻인지 모르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을 우리가 이해할 때 내 좋은 대로만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해석하죠. 그러니까 주께서 ‘그러니까 니가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수치를 당하지.’ 자꾸 뒤에 있는 뒤에 자꾸 드리워진,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너는 부끄러운 존재야.’라고 하니까 뭐 어쩌라고? 이게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렇게 해결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누굴 집어넣느냐 하면 둘 다 부끄러움을 다 품고 있는 부부의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둘 다 구원 받으려면 아내의 뜻은 남편에게 전달 안 되고 남편의 뜻은 아내에게 전달이 안 돼요. 그래서 둘 다 부끄러워요. 그 둘 다 부끄러운 것을 다 대신 담당해야 될 분이, 너희들이 어느 정도로 부끄러운 존재이냐 하는 것을 온 몸에 듬뿍 실어놓고 그걸 누구한테 찾아가느냐 하면 아버지한테 찾아가요.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아버지, 저 구원받아야 될 저 부부가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당사자들은 전혀 본인이 무엇 때문에 부끄러운지도 감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내세우게 되면 그 남편과 아내 둘 다 신자라고 우겨도 남편과 아내는 절대로 형제가 아닙니다. 보통 교회에서 자매, 오빠로 시작해서 여보로 끝나잖아요. 둘 다 자매님, 오빠 해도 그건 전부 다 지 맘대로 결정한 것이고, 인간이 이미 수치스런 짓을 하면서도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물론 환경 탓 이예요. 아담의 죄 탓이지만.

어쨌든 간에 수치를 모르는 이 점에 대해서는 인간에게는 형제란 게 없고 자기 밖에 몰라요. 인간은 결국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형제란 게 성립이 안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로 다루시는 것은 전체를 이스라엘로 다루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 제가 이스라엘이죠?’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너 아니거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사람을 성전이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 성령 받았으니까 제가 성전이죠?’ 하거든요. ‘어, 성전 아니다.’ 하시거든요. 자꾸 우리는 내 개별자를 콕 집어서 성전이라 하는데, 전체를 가지고 성전이지, 나 하나를 잡아서 성전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 전체를 이스라엘로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리는 나의 개별자로부터 나한테로 의미를 다시 회귀시키지만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보기 때문에 그 용어 자체나 그 개념 자체가 전부 다 집단적 개념입니다. 개별자 단독 개념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성경은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구원받으려면 뭘 믿으면 됩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아서라. 말아라. 너 구원 없어.’ 이스라엘 구원은 있고 하늘나라 백성 구원은 있는데 너 개인을 위한 구원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백성 되면 될 게 아닙니까? 백성은 니 혼자되는 게 아니에요. 백성은 너, 나, 너, 나를 엮어주는 본드, 1000원 짜리 본드처럼, 뭔가 이렇게 찐득찐득하게 같이 붙여주는 그 진드기가 우리를 하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로 만드는 겁니다.

교인들끼리 경쟁한다는 것은 이건 주님이 들었으면 이미 듣고 계시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인데, 니 믿음 따로 있고 내 믿음 따로 있고 이런 거 없습니다. 니 소망 따로 있고 내 소망 따로 있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형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 모여서 형제가 아니고, 우리 사이에 형제라고 이끌어주는 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조건하에 우리가 형제 되는 겁니다.

그럼 이야기를 더해봅시다. 자, 같은 교인들끼리 이야기가 안 통합니다. 통할 수가 없어요. 지가 잘났다고 하는데 어디 통합니까? 통하지를 않으니까 주님께서 개입하게 됩니다. 주께서 개입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도 저쪽을 이해 못하고 저쪽도 이해 못하는데 서로 이해 못하는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서 내가 아버지께 기도해서 응답 받아서 이해 안 되는 너희들을 이해 되게 했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내 뜻이 저쪽 집사님한테 전달되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이게 문제가 있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그걸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또 개별자로 나서서 ‘거봐, 주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내 말을 그렇게 못 알아들어.’ 이렇게 또 처음부터 하는 행세를 똑같이 하게 되는 거예요. 특히 전도한다고. 십자가 이렇고 이렇다고 했는데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알아들을 수가 없죠.

그러면 형제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우리는 또 애가 닳는 거예요. 또 화가 나고. 왜 자꾸 형제를 찾느냐 하면 외롭거든요. 외로우니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됩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에 보면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신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만약에 창녀다. 창녀인데 다른 천국 가는 사람이 ‘니 창녀 짓 했지?’ 하고 놀리더란 말이죠. 놀릴 때 ‘그래, 나 창녀 짓 안 해.’ 이게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에 나름대로의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나 이제 나쁜 짓 그만 뒀어. 그러니까 하지 마.’라고 남들에게 납득을 시키려고 하고 수치스러운 것을 그런 방법으로 수치를 감추려고 하는 방법인데, 제발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왜냐 하면 주님께서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데 왜 너는 자꾸 남들로부터 부끄러움을 안 당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느냐 말이죠. 그건 아직도 너는 너 개별자의 사적인 자존심과 명예욕에 그냥 젖어있다는 증거 밖에 안 되는 거거든요.

“남들이 다 너를 부끄러워하지?” ‘그렇습니다.’ “남들이 너를 인간 취급 안 하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를 내 백성이라 부르시기에 조금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 왜? 너와 나 사이에서는 이미 하나님 앞에 이미 점검 받기를 “쟤를 구원시키는 데서는 이 하나님도 조금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이미 결재가 났어요. 이미 결정 난 사항 이예요. 그럼 주님께선 ‘쟤 말입니까?‘ “그래. 쟤” ’쟤 구원할까요? 쟤 왜 구원하는데요?‘ “내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아.” ’아! 그렇구나.‘ 그래서 주님 찾아오셔서 성령으로 프로포폴 주사 놔서 성령으로 찾아와서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니는 내 형제야. 형제이기 때문에 너는 범사에 뭐든지 선을 이루고 니가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해줄게.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죽었어.”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가운데서 뭐냐, 구원을 받아버렸어요. 구원을! 세상에 구원받은 기쁨만 있으면 뭐가 날라 가느냐 하면 ‘내가 나쁜 짓 했을까? 이게 착한 짓일까? 나쁜 짓일까?’ 그러한 깨알 같은 헤아림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발 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좀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행동에 대해서 본인이 본인을 좀 용서해 주세요. 왜, 이미 부끄럽지 않도록 권한이 주님한테 넘어가 있어요. 주님이 갑이고 우리는 을이라니까요. 주님하고 계약돼 있어요. 이게 언약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남양 분유 본사고 우리는 대리점이라니까요. 계속 성령을 우리한테 밀어내요. 성령 같은 것은 내 자존심 도움도 없는데, ‘팔아, 무조건 성령을 팔아.’ 무조건 성령에서 강제로 밀어붙여요.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일도 제발 좀 용서를 해주세요. 왜, 본사에서 용서가 밀려오니까. 자꾸 용서가 밀려오니까 ‘아! 이런 더러운 짓도 용서 받는구나.’ 해서 매일 하는 짓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을 좀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이렇게 용서받은 걸 알 때 비로소 다른 집사하고 이야기할 때 납득이 되고 형제가 느껴져요. ‘나 용서 받았어.’ ‘나도 용서 받았어.’ 둘 다 서로를 보는 게 아니고 둘 다 만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분노의 날에, 마지막 진노의 날에 온 세상이 다 꺼지는 그 날에 시간 공간이 다 불타는 그 순간에도 그걸 미리 사전에 간파하시고 이 땅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 구원의 효과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형제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꾸 개별자 생각합니다. 내가 남보다 기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음의 신앙에서 안 지려고 경쟁하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 모든 이것 자체가 정말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스스로 자기를 용서 못하는 악마적인 짓인 것을 고백하면서 이런 인간도 용서 받았기에 이런 생각이 든다는 그것을 구원받은 기쁨으로 접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