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남은 자
2013년 5월 19일 본문 말씀: 스바냐 2:4-7
(습 2:4, 개역)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습 2:5, 개역)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습 2:6, 개역)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습 2:7, 개역)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일에 결과물에 불과한 인간이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결과물이 원인요건에 압박을 가할 권리는 없는 입장입니다. 현재 자신이 마음이 안 든다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현재 사정을 수정하기 위해 과거까지 손대고 싶은 충동을 쏟아냅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의 존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출현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또한 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핍박받은 이스라엘이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자신의 의사대로 복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 나라라고 해서 하나님편에 있는 나라들이 개입할 자격을 갖는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달성하는데 있어 자신들의 의사도 약간이나마 반영이 되리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왜곡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을 처단할 권리를 확보하는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마저 원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우리는 결과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도로 원인자의 자리에 앉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있어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만이 하나님과 관련지으려고 합니다.
소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아채는데 있어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시도가 효과가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건방지게 하나님의 일에 개입한 바가 됩니다. 이런 기대가 곧 하나님의 원수와 같은 사고방식인데 그 이유는 자신을 순수한 결과물로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 나라가 망하고 ‘유다의 남은 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던 유다 나라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대단히 희망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원수로서 멸망한다면 유다 나라도 역시 멸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생각하면서 현재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있음’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인간은 분명히 여기 있음’에다 의미를 두고 시작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고 글 쓰고 있는 나는 분명히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방금 주장한 그 주장이 하나님에게도 통할까요?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는 너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자신들이 여기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없다”와 “죽었다”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인간은 있어도 없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죽어 있다”입니다.
사람들이 “나는 여기 분명히 살아있다”는 주장은 인간들의 일방적인 고집이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원수 취급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멋대로 ‘있음’을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있음은 인간 존재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있다’, 혹은 “예수님이 계시다”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안보이는 존재는 하나님에게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있어 없는 존재입니다. ‘없는 존재’에서 ‘있는 존재’가 되려면 자동적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중심에는 예수님만이 계셔야 합니다. 다른 인간들은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이면서 자꾸만 본인들이 ‘있음’을 주장한다면 이는 곧 악마의 술책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의 수법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대상이다 는 말입니다. 그들의 교만과 자만은 인간의 능력으로 수그리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공격한다고 해서 공격당할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징벌할 때, 이스라엘이 되레 공격하지 못할 하나님의 몽둥이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12:19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악마를 함부로 할 수 없듯이 블레셋도 이스라엘이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의 원수인가를 아는 원리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즉 블레셋이 하나님이 친히 치셔야 하는 원수인 것처럼 그들이 멸망되기를 고대하는 유다 나라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나 여기 있음’의 의식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원수’같은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블레셋이 멸망당한 그 지역에 ‘유다의 남은 자’가 들어가려면 그 들어가려는 자들이 왜 블레셋 나라가 망했는지를 충분히 공감하고 느껴야 합니다.
이 세상을 건전한 신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들이 교회역사를 통해서 비쳐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예가 바로 루터가 주장한 겁니다. 그는 말하기를, “신은 지상에 두 가지 왕국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 없는 자들과 악한 자를 징벌하는 세속국가요 다른 하나는 의로운 자들을 양산하는 영적 나라입니다.
기존 성직자들의 반응이 미미하자 군주(귀족들)에게 이점을 호소를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다양한 수입과 막대한 재산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죄를 척결하고자 하는가요? 그것은 그 좋은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즉 지엄한 법의 엄격한 적용이 자기 빼놓고 남들에게 적용할 때는 신나는 일이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가까운 가족에게 적용될 때는 거부합니다. 그래서 법이란 자기 자신에의 '있음‘을 마땅히 옳은 것으로서 있는 것임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자기 중심성을 교회마저 계속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에 눈에 뜨이는 식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24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다른 제자들은 이 말을 의아해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같은 인간들이 보기에 하등의 하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인간들이 짐작하거나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자기 존재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다의 남은 자’란 오로지 말씀 있음 앞에서만 밝혀집니다. 레위기 27:34에 보면, “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로 끝납니다. 말씀이 있고 복음이 있고 용서와 사랑이 있는 자만이 진정 이 땅에서 ‘있는 존재’이며 ‘유다의 남은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독자적으로 있는 것은 ‘있음’이 아니라 ‘없음’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2장 4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7페이지입니다.
스바냐 2:4-7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전부 다 지명 이름입니다. 요 지명들이 모여서 무슨 국가를 형성했느냐 하면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어요.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요즘으로 말하면 팔레스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이스라엘 근처의 해변 가에 있는 도적떼, 해적 떼들이 만든 그러한 해적민족인데 그 민족이 해적질 하다가 땅에 해변 가 하나 얻어서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다곤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민족인데 이 민족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 땅에서 멸망당하고 그 땅을 유다나라의 남은 자가 차지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우리가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지 말고 우리 유대나라가 하면 어떻겠느냐, 그런 생각을 아마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 하나님이 안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나오니까 전부 다 우리 자신의 적들로 이렇게 오해를 해서 그걸 판단하시는데 막상 이야기해보면 우리하고 생각이 똑같아요. 적이, 적이 아닙니다. 친구 같아요.
이들이 왜 멸망당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 이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평소에는 우리한테 너무너무 잘해주고 친하게 지내고 살 같게 대하고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성경에 하나 예를 들면 가룟유다 있잖아요. 가룟유다가 나머지 열 한 제자하고 사이가 나빴고 성격이 문제가 있고 절대로 그런 거 아닙니다. 가룟유다를 포함 열두 제자는 마치 야구팀의 한 팀 같아서 선수로 친하게 지내고 아무 문제없는 자로서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만 아시죠. 저게 원수라는 걸 예수님만 아시죠. 마태복음 26장 23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다음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가룟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기한테는 훨씬 인생이 좋은 인생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태어나게 해놓고는 하나님이 이런 멘트를 날리면 그 당사자 가룟유다는 뭐 어쩌란 말입니까?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턱 본인이 또 태어나고 나니까 ‘아이고, 이쁜 아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는데.’ 이 말을 그 사람보고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라는 그 사람에다 괄호( )를 해놓고 거기다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다 집어넣으면 이해가 돼요. ‘그래, 내 돈 떼먹은 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만약에 ( )에다 진짜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넣어 보세요. 그걸 집어넣을 용기가 있습니까? 어떤 아가씨가 남자 친구를 사귈 때 ‘우리 균씨는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가 결혼하려고 하니 너무나 사랑스러워.’ 이러는데, 그 자기 남자 친구 이름을 거기 집어넣고 ‘우리 누구누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을 사랑하는 사이에서 과연 그걸 할 수 있느냐 말이죠. 못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밝혀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안 되도 이 사람만큼은 손대지 마세요. 저 사람은 그냥 데려가도 이 사람은 구원해 주세요.’라는 너무나 강렬한 우리의 희망관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파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말은 중보기도라는 게 전부 다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중보기도 할 때 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죠. 그게 얼마나 반칙입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블레셋의 멸망은 우리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왜, 블레셋은 마치 신과 같은 존재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마귀라는 것, 악마라는 것, 이게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신과 같은 존재라서 감히 인간이 ‘저 민족 없어져야 돼, 저 민족 죽어야 돼. 저주 받아야 돼.’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블레셋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이웃에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저 사람은 심판 받아야 돼. 저주 받아야 돼.’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라. 니가 나서서 심판주도 아닌 게 니가 나서서 ‘저거 심판 받아라. 저주 받아라. 지옥 가라.’ 니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블레셋이 망하게 되고, 그 다음에 블레셋 대신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유다의 남은 자가 거기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라고 교체에 들어가는 요 대목인데요. 이 대목에서 블레셋이라는 이 나라를 유다나라나 이스라엘이 손댈 수 없다면, 유다 민족이 ‘저 땅은 내 땅이야. 들어가야 되겠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에 못 됩니다.
제가 전에 다녔던 교회에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어떤 교회가 있는데 교인 수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주차장을 넓혀야 되는데 들어오는 입구에 반듯한 터가 하나 있는데 이 집 주인이 팔지를 않네요. ‘왜 안팝니까?’ 하니까 ‘나는 절에 다닌다.’는 거예요. 절에 가기 때문에 딴 데는 다 팔아도 이 교회에는 절대로 팔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 교인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철야기도 하는 거예요. ‘저 마귀새끼 빨리 멸망해서 팔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쪽 마귀새끼가 블레셋이 되겠고 이쪽은 유다 민족이 되는데 유다 민족이 저걸 차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여기에 동원되는 소위 유행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나는 세상에 예수님이 땅 장사 한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게 주님은 우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천국은 우발적으로 사건화 돼서 나타나지, 이미 어떤 땅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게 아니에요. 부동산 투기하는 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해도 지나고 보니 바로 그것들이 블레셋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에 분명히 유다의 남은 자가 거기 차고 들어간다 했잖아? 들어갈 때는 그만한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으니까, 원리 원칙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 뜻이 궁금하다. 이야기하실 거예요.
유다의 남은 자가 거기에 들어갈 때는 이 유다의 남은 자는 유다의 민족조차도 유다의 남은 자가 누군지를 모르게 돼 있습니다. 요 원리가 레위기에 나오는데 그 설명하기 전에 인간적인 방법을 하나 먼저 말씀드리겠어요. 이렇게 땅을 차지하고 이렇게 뭔가 승리하는 어떤 증거물을 획득해야 내가 하나님 존재함을 믿겠다, 하는 대표적인 것 중에 교회사에 루터가 나옵니다. 많이 들어봤죠? 루터!
루터의 아이디어를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이 아이디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가, 한번 들어보세요. 루터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은 이 지상에 두 개의 왕국을 세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의 왕국은 뭐냐 세속 국가고, 또 하나의 왕국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얼른 이 말을 듣게 되면, 그럼 루터가 그 말을 했다는데 그러면 그전에 다른 사람은 그런 주장을 안 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전에 천주교에서는 뭐라고 주장했는가, 천주교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천주교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나의 왕국을 세웠다. 그 하나의 왕국은 뭐냐, 바로 왕의 신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세웠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이 땅에는 하나의 왕국을 세웠다.’와 루터가 이야기한 ‘두 개의 왕국을 세웠다.’
둘 중에 스티커 붙여놓고 ‘어느 쪽이 호감 갑니까?’라고 호감 가는 쪽에 스티커 붙이라 하면 사람들은 루터보다도 천주교를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만약에 이 세상에 세속 국가와 교회를 두 개를 세워 놓으면 우리의 몸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가 되거든요. 하나가 되게 되면 내가 이렇게 세상에 살아가면서 몸이 찢어질 판입니다.
국가의 고급 공무원이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을 때에 자기는 기독교 신자로서 대통령의 명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성경 말씀을 따를 것이냐, 딜레마가 생겨버려요. 딜레마가 생겨버리면 그 딜레마 때문에 자기가 짜증이 나고 두 마음이 찢어질 판입니다. 이걸 따르자니 하나님이 울고, 하나님을 따르자니 자기 상관이 싫어하면 쫓겨날 것이고 차라리 그만 나라를 두 개를 통합해서 ‘나라는 하나 밖에 없다.’ 라는 말이 오히려 더 좋아지고 싶은 거예요.
윤창중이란 사람이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얼마나 마음이 두 개가 갈등이 되었으면 술을 먹었겠어요? 이것은 결국 해답이 없는 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천주교에서는 왕한테 세례를 줍니다. 왕한테 세례를 주면서 책임을 부여해요. 뭐냐, ‘왕아, 니는 우리 교황이 왕에게 너는 세상을 지배하는 위임 권을 줄 테니까 너는 일차적으로 무조건 교회 말에 무조건 순종을 해야 돼.’라고 이렇게 시킵니다.
천주교가 그걸 근거로 구약 성경을 대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가 세속 나라인 동시에 무슨 나라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임금님은 옆에다 항상 율법 책을 두고 그냥 통치하면 안 되고 율법에 있는 대로 통치를 해줄 때 이 나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그 나라 백성들은 영원토록 죽어서는 구원도 받고 살아서는 복을 받는, 번영을 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나라가 된다. 이것이 유럽의 기독교 나라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알면서 루터는 그걸 왜 거부했느냐 하면 이것이 천주교 신부들이 무엇과 결탁돼 있느냐 하면 세상에 있는 지배 왕이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고 또 세상의 왕은 정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정신을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를 장악하는 거죠. 신앙을 장악할 때 왕이 ‘이렇게 해주세요.’ 보다도 ‘내 말을 어기면 이는 신의 뜻을 어기기 때문에 이 땅에서 벌 받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멘트를 날리게 되면 훨씬 더 일반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거죠.
미국에서 2천 2백 몇 년도에 금주법을 했는데 술을 못 마시는 법을 했는데 술을 못 마시게 하는 법이 뭐냐 하면 미국은 신의 나라예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돼요. 법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은 자기 말 하면 안 되고 성경에 있는 대로 술 취하면 나라꼴이 안 되니까 술 먹지 마라는 법을 내리는 것이 신의 뜻에 합당할 것이고, 신의 뜻이 합당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합당한 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줘서 이 미국이 잘되게 해 줄 것이라는 은근한 노림수가 있었던 거죠. 그 금주법으로 술값이 올라간 게 아니고 도리어 내려갔다는 겁니다. 술을 안 마셔서 내려간 게 아니고 술이 넘쳐서 내려갔어요. 왜, 밀주가 성행해서 차라리 금주할 때보다 술을 더 많이 생산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빨리 담배 법을 만들어서 담배 못 피우게 만들어야….
그래서 루터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세속 나라는 교회에 간섭하지 마라. 그러면 교회가 썩어빠지니까 왕이 자기 중요한 자리에 신부나 주교를 채용했어요. 신부, 주교는 신학교 가는 목적이 신부 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신부 가는 그 코스가 국가의 권력을 쥐는 아주 직통 엘리트 코스가 돼 버렸어요. 지금 독일도 마찬가지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직통 코스가 돼서 전부 똑똑하고 공부 잘하면 빨리 신학해서 전부 다 한자리 차지하는 거죠.
그러면 그 교회가 신부들이 그 권력가지고 뭐 하느냐, 땅 장사 하는 거예요. 모든 토질이 좋은 땅을 사들여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하느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노예로 부리고 자기는 떵떵 거리면서 많은 부를 누리는 겁니다. 그걸 루터가 보고 난 뒤에 ‘아하, 나라가 하나 되면 안 되는구나. 둘로 나눠야겠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세속 국가는 죄를 짓는 사람을 벌하는 일만 하고, 그리고 교회는 뭐만 하면 되느냐, 교회는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들고 바르게 사는 일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독일 귀족들은 루터의 말에 대해서 대 환영을 했습니다. 왜 너무 진리 같아서 환영했느냐? 아닙니다. 그동안 교회가 갖고 있는 땅을 군주가 뺏을 수가 있어요. 왜냐 하면 군주가 종교와 천주교에서 루터교로 바뀌면서 천주교가 갖고 있던 모든 땅은 이제는 교회라는 왕국을 위해서 전부 다 뺏을 수가 있어요. 뺏어 버리면 그 땅은 누구 땅이 되느냐면 군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산을 획득하기 위해서 핑계로 루터 신학을 따랐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독일은 개신교입니다. 덴마크는 물론이고, 사람이 진리고 뭐고 그건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힘으로 땅을 많이 가졌는가, 돈이 많이 나오는가, 그거 쪽으로 사람들은 진리를 지 맘대로 이렇게 해석하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천주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으로 섬기면 안 되고 루터가 이렇게 교회는 오직 경건한 일만 하고 나머지 세속은 정치를 맡긴다. 이런 것이 다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지만 다 틀린다면!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유다의 남은 자는 여기에 이미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를 유다의 남은 자가 차지한다는 말은 적어도 유다의 남은 자 만큼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원수가 안 될 경우에만 하나님에 의해서 척결한 그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여기 4절에 나오는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이거는 뭐냐, 남쪽에서부터 점점 북쪽으로 나오는 지명인데 전부 다 이거는 다 앗수르나 아니면 애굽에 다 멸망하고 말아요. 이스라엘도 망하는데. 이렇게 망하는 나라를 유다 민족이 차지할 자격이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 원수라고 여기고 척결하고 그 자리에 유다의 남은 자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유다 민족은 안 되지만 유다의 남은 자만 들어갈 수가 있거든요. 유다와 유다 민족의 차이는 뭐냐, 그건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의 방식이 나옵니다. 레위기 27장 34절 마지막 대목입니다. 레위기의 마지막 대목인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레위기 마지막의 이 취지가 뭐냐, 이스라엘 전부 모든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레위기 27장 33절에 보면 “다 거룩하니 속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제가 하는 취지는 이겁니다. 개인적으로 단체를 만들고 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 이 말입니다.
유다의 남은 자가 또는 유다 나라의 남은 자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 ’유다 사람.‘ ‘당신은?’ ‘유다사람’ ‘됐다. 우리 힘 합치자.’ 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나 유다 사람에게는 없다는 말을 분명히 합니다. 없기 때문에 결국은 뭐냐, 유다의 남은 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은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교회사에서 교회가 루터도 실패하고 칼빈도 실패하고 천주교도 실패한 이유가 뭐냐, 본인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질 않는 거예요. 없기는 미쳤다고 없나? 손 있고 발 있고 눈 있고 입이고 다 있는데 없기는 있잖아. 하나님께서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런데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그 투입되는 방법이 뭐냐,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나오는 말씀의 결과물로 될 때만 없는 데서 있긴 있어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와서 유다의 남은 자로 만들 경우에만 있음이 돼요. 그 용어가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우리는 여기에 발 딛고 있으면 있다고 보잖아요. 주께서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뭐가 없는가? 말씀이 없어요. 뭐가 없는가? 진리가 없어요. 뭐가 없는가? 복음이 없어요. 뭐가 없는가? 하나님의 계명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다고 거울보고 아는 거예요. 자기가 만져보고 아는 거예요. ‘있네. 있네, 근육 있잖아. 있는데 뭐가 없어? 있잖아. 나 있고 너 있고 다 있잖아.’ 있는 걸 모아보면 있는 나라 되지, 우리는 이스라엘, 우리는 유다나라. 우리는 천주교, 우리는 루터 교, 우리는 칼빈교, 우리는 개혁주의, 그런 것은 하나님이 교회라고 쳐준 적이 없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반드시 ‘없다.’에서 불러요. 우리교회 있잖아요? 우리교회 없어요. 주께서 우리교회를 계속해서 만들어 줘야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를 만들지 않아요. 교회를 만들지.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안 만듭니다. 어떤 특징 교회를 만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왜 저기 동부교회, 범어교회 있고 왜 제일 서문교회가 있다고 하느냐, 그들은 천주교거든요. 그들은 루터교고 칼빈교거든요. 그들의 있음은 말씀 앞에 있는 게 아니고 부동산이 있어요. 부동산이 있어야 돼요. 옛날 천주교 루터 같으면 토지가 있어야 되고, 힘이 있어야 돼요. 돈이 모아져 간판 있어야 되고 목사 있어야 되고 장로 있어야 돼요. 있음을 긁어모아서 있음의 교회를 만든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뭐만 있으면 되느냐? 말씀만 있으면 되고 언약만 있으면 되고 율법만 있으면 되고 하나님의 법만 계명만 있으면 되고 성령만 있으면 돼요. 이게 제 말이 아니고 히브리서에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히브리서에 하늘에는 하늘의 총회가 있습니다. 하늘의 총회는 먼저 죽었던 사람들과 나중에 합류할 사람들이 모여서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겁니다. 하나의 백성을 이루는 겁니다.
유다의 남은 자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남은 자에 누가 들어가느냐? 유다의 남은 자니까 문자 그대로 보자. 유다 나라 가운데서 주께서 이렇게 남은 자 있겠지, 그런 사람 있겠지. 그냥 혈통적으로 유다의 남은 자 들어가 버리면 들어가도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블레셋이 왜 블레셋입니까? 블레셋이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그 원수가 하나님에게 잘렸으면 그 취지를 모르는 인간이 들어가도 그 인간은 잘리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의 남은 자는 뭐만 알면 되느냐 하면 블레셋이 왜 잘렸을까? 그거 알면 그 사람이 바로 유다의 남은 자입니다. 블레셋이 왜 잘렸을까? 블레셋이 왜 하나님의 원수였을까? 아! 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우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계시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살아 계시기에 지금도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선 나를 살려내고 있는 분으로서 계십니다.
내가 여기 있음보다도 주님의 있음에 의해서 엮어져 있는 그러한 존재가 유다의 남은 자고,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날 구원했습니다.’ 한번 해놓고는 잊어버리고 주님과의 관계를 잘라버리고 ‘내가 5년 전에 이미 예수님과 하나 돼 버렸는데, 5년 전에 예수님과 한 사람 된 사람들 모이세요. 모이고 우리 교회 만듭시다.’ 그거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참새를 키우고 잡초라도 주께서 키우는 것은 매일같이 우리를 키워내시는데, 키워낸 근거가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그 말씀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와 원수 아닌 자를 분류하시는 그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고 있는 사람, 내 안에 주님의 용서가 있고 주의 피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나라에서 인정받는, 있는 존재, 있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있다고 사는 게 아니고 그건 죽은 채로 사는 것이고, 말을 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주께서 말씀에 입각해서 주의 백성으로서 있어야 인간됨을 저희들은 말씀을 통해서 뻔히 알면서도 이상스럽게 세상에 나가면 놓쳐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살려내시는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6강-습2장4-7(유다의 남은 자)130519-이 근호 목사.hwp (48.0K), Down:2 |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2장 4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7페이지입니다.
스바냐 2:4-7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전부 다 지명 이름입니다. 요 지명들이 모여서 무슨 국가를 형성했느냐 하면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어요.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요즘으로 말하면 팔레스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이스라엘 근처의 해변 가에 있는 도적떼, 해적 떼들이 만든 그러한 해적민족인데 그 민족이 해적질 하다가 땅에 해변 가 하나 얻어서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다곤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민족인데 이 민족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 땅에서 멸망당하고 그 땅을 유다나라의 남은 자가 차지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우리가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지 말고 우리 유대나라가 하면 어떻겠느냐, 그런 생각을 아마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 하나님이 안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나오니까 전부 다 우리 자신의 적들로 이렇게 오해를 해서 그걸 판단하시는데 막상 이야기해보면 우리하고 생각이 똑같아요. 적이, 적이 아닙니다. 친구 같아요.
이들이 왜 멸망당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 이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평소에는 우리한테 너무너무 잘해주고 친하게 지내고 살 같게 대하고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성경에 하나 예를 들면 가룟유다 있잖아요. 가룟유다가 나머지 열 한 제자하고 사이가 나빴고 성격이 문제가 있고 절대로 그런 거 아닙니다. 가룟유다를 포함 열두 제자는 마치 야구팀의 한 팀 같아서 선수로 친하게 지내고 아무 문제없는 자로서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만 아시죠. 저게 원수라는 걸 예수님만 아시죠. 마태복음 26장 23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다음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가룟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기한테는 훨씬 인생이 좋은 인생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태어나게 해놓고는 하나님이 이런 멘트를 날리면 그 당사자 가룟유다는 뭐 어쩌란 말입니까?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턱 본인이 또 태어나고 나니까 ‘아이고, 이쁜 아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는데.’ 이 말을 그 사람보고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라는 그 사람에다 괄호( )를 해놓고 거기다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다 집어넣으면 이해가 돼요. ‘그래, 내 돈 떼먹은 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만약에 ( )에다 진짜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넣어 보세요. 그걸 집어넣을 용기가 있습니까? 어떤 아가씨가 남자 친구를 사귈 때 ‘우리 균씨는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가 결혼하려고 하니 너무나 사랑스러워.’ 이러는데, 그 자기 남자 친구 이름을 거기 집어넣고 ‘우리 누구누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을 사랑하는 사이에서 과연 그걸 할 수 있느냐 말이죠. 못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밝혀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안 되도 이 사람만큼은 손대지 마세요. 저 사람은 그냥 데려가도 이 사람은 구원해 주세요.’라는 너무나 강렬한 우리의 희망관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파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말은 중보기도라는 게 전부 다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중보기도 할 때 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죠. 그게 얼마나 반칙입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블레셋의 멸망은 우리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왜, 블레셋은 마치 신과 같은 존재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마귀라는 것, 악마라는 것, 이게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신과 같은 존재라서 감히 인간이 ‘저 민족 없어져야 돼, 저 민족 죽어야 돼. 저주 받아야 돼.’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블레셋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이웃에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저 사람은 심판 받아야 돼. 저주 받아야 돼.’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라. 니가 나서서 심판주도 아닌 게 니가 나서서 ‘저거 심판 받아라. 저주 받아라. 지옥 가라.’ 니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블레셋이 망하게 되고, 그 다음에 블레셋 대신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유다의 남은 자가 거기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라고 교체에 들어가는 요 대목인데요. 이 대목에서 블레셋이라는 이 나라를 유다나라나 이스라엘이 손댈 수 없다면, 유다 민족이 ‘저 땅은 내 땅이야. 들어가야 되겠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에 못 됩니다.
제가 전에 다녔던 교회에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어떤 교회가 있는데 교인 수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주차장을 넓혀야 되는데 들어오는 입구에 반듯한 터가 하나 있는데 이 집 주인이 팔지를 않네요. ‘왜 안팝니까?’ 하니까 ‘나는 절에 다닌다.’는 거예요. 절에 가기 때문에 딴 데는 다 팔아도 이 교회에는 절대로 팔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 교인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철야기도 하는 거예요. ‘저 마귀새끼 빨리 멸망해서 팔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쪽 마귀새끼가 블레셋이 되겠고 이쪽은 유다 민족이 되는데 유다 민족이 저걸 차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여기에 동원되는 소위 유행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나는 세상에 예수님이 땅 장사 한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게 주님은 우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천국은 우발적으로 사건화 돼서 나타나지, 이미 어떤 땅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게 아니에요. 부동산 투기하는 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해도 지나고 보니 바로 그것들이 블레셋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에 분명히 유다의 남은 자가 거기 차고 들어간다 했잖아? 들어갈 때는 그만한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으니까, 원리 원칙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 뜻이 궁금하다. 이야기하실 거예요.
유다의 남은 자가 거기에 들어갈 때는 이 유다의 남은 자는 유다의 민족조차도 유다의 남은 자가 누군지를 모르게 돼 있습니다. 요 원리가 레위기에 나오는데 그 설명하기 전에 인간적인 방법을 하나 먼저 말씀드리겠어요. 이렇게 땅을 차지하고 이렇게 뭔가 승리하는 어떤 증거물을 획득해야 내가 하나님 존재함을 믿겠다, 하는 대표적인 것 중에 교회사에 루터가 나옵니다. 많이 들어봤죠? 루터!
루터의 아이디어를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이 아이디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가, 한번 들어보세요. 루터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은 이 지상에 두 개의 왕국을 세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의 왕국은 뭐냐 세속 국가고, 또 하나의 왕국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얼른 이 말을 듣게 되면, 그럼 루터가 그 말을 했다는데 그러면 그전에 다른 사람은 그런 주장을 안 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전에 천주교에서는 뭐라고 주장했는가, 천주교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천주교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나의 왕국을 세웠다. 그 하나의 왕국은 뭐냐, 바로 왕의 신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세웠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이 땅에는 하나의 왕국을 세웠다.’와 루터가 이야기한 ‘두 개의 왕국을 세웠다.’
둘 중에 스티커 붙여놓고 ‘어느 쪽이 호감 갑니까?’라고 호감 가는 쪽에 스티커 붙이라 하면 사람들은 루터보다도 천주교를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만약에 이 세상에 세속 국가와 교회를 두 개를 세워 놓으면 우리의 몸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가 되거든요. 하나가 되게 되면 내가 이렇게 세상에 살아가면서 몸이 찢어질 판입니다.
국가의 고급 공무원이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을 때에 자기는 기독교 신자로서 대통령의 명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성경 말씀을 따를 것이냐, 딜레마가 생겨버려요. 딜레마가 생겨버리면 그 딜레마 때문에 자기가 짜증이 나고 두 마음이 찢어질 판입니다. 이걸 따르자니 하나님이 울고, 하나님을 따르자니 자기 상관이 싫어하면 쫓겨날 것이고 차라리 그만 나라를 두 개를 통합해서 ‘나라는 하나 밖에 없다.’ 라는 말이 오히려 더 좋아지고 싶은 거예요.
윤창중이란 사람이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얼마나 마음이 두 개가 갈등이 되었으면 술을 먹었겠어요? 이것은 결국 해답이 없는 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천주교에서는 왕한테 세례를 줍니다. 왕한테 세례를 주면서 책임을 부여해요. 뭐냐, ‘왕아, 니는 우리 교황이 왕에게 너는 세상을 지배하는 위임 권을 줄 테니까 너는 일차적으로 무조건 교회 말에 무조건 순종을 해야 돼.’라고 이렇게 시킵니다.
천주교가 그걸 근거로 구약 성경을 대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가 세속 나라인 동시에 무슨 나라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임금님은 옆에다 항상 율법 책을 두고 그냥 통치하면 안 되고 율법에 있는 대로 통치를 해줄 때 이 나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그 나라 백성들은 영원토록 죽어서는 구원도 받고 살아서는 복을 받는, 번영을 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나라가 된다. 이것이 유럽의 기독교 나라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알면서 루터는 그걸 왜 거부했느냐 하면 이것이 천주교 신부들이 무엇과 결탁돼 있느냐 하면 세상에 있는 지배 왕이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고 또 세상의 왕은 정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정신을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를 장악하는 거죠. 신앙을 장악할 때 왕이 ‘이렇게 해주세요.’ 보다도 ‘내 말을 어기면 이는 신의 뜻을 어기기 때문에 이 땅에서 벌 받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멘트를 날리게 되면 훨씬 더 일반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거죠.
미국에서 2천 2백 몇 년도에 금주법을 했는데 술을 못 마시는 법을 했는데 술을 못 마시게 하는 법이 뭐냐 하면 미국은 신의 나라예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돼요. 법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은 자기 말 하면 안 되고 성경에 있는 대로 술 취하면 나라꼴이 안 되니까 술 먹지 마라는 법을 내리는 것이 신의 뜻에 합당할 것이고, 신의 뜻이 합당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합당한 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줘서 이 미국이 잘되게 해 줄 것이라는 은근한 노림수가 있었던 거죠. 그 금주법으로 술값이 올라간 게 아니고 도리어 내려갔다는 겁니다. 술을 안 마셔서 내려간 게 아니고 술이 넘쳐서 내려갔어요. 왜, 밀주가 성행해서 차라리 금주할 때보다 술을 더 많이 생산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빨리 담배 법을 만들어서 담배 못 피우게 만들어야….
그래서 루터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세속 나라는 교회에 간섭하지 마라. 그러면 교회가 썩어빠지니까 왕이 자기 중요한 자리에 신부나 주교를 채용했어요. 신부, 주교는 신학교 가는 목적이 신부 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신부 가는 그 코스가 국가의 권력을 쥐는 아주 직통 엘리트 코스가 돼 버렸어요. 지금 독일도 마찬가지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직통 코스가 돼서 전부 똑똑하고 공부 잘하면 빨리 신학해서 전부 다 한자리 차지하는 거죠.
그러면 그 교회가 신부들이 그 권력가지고 뭐 하느냐, 땅 장사 하는 거예요. 모든 토질이 좋은 땅을 사들여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하느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노예로 부리고 자기는 떵떵 거리면서 많은 부를 누리는 겁니다. 그걸 루터가 보고 난 뒤에 ‘아하, 나라가 하나 되면 안 되는구나. 둘로 나눠야겠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세속 국가는 죄를 짓는 사람을 벌하는 일만 하고, 그리고 교회는 뭐만 하면 되느냐, 교회는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들고 바르게 사는 일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독일 귀족들은 루터의 말에 대해서 대 환영을 했습니다. 왜 너무 진리 같아서 환영했느냐? 아닙니다. 그동안 교회가 갖고 있는 땅을 군주가 뺏을 수가 있어요. 왜냐 하면 군주가 종교와 천주교에서 루터교로 바뀌면서 천주교가 갖고 있던 모든 땅은 이제는 교회라는 왕국을 위해서 전부 다 뺏을 수가 있어요. 뺏어 버리면 그 땅은 누구 땅이 되느냐면 군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산을 획득하기 위해서 핑계로 루터 신학을 따랐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독일은 개신교입니다. 덴마크는 물론이고, 사람이 진리고 뭐고 그건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힘으로 땅을 많이 가졌는가, 돈이 많이 나오는가, 그거 쪽으로 사람들은 진리를 지 맘대로 이렇게 해석하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천주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으로 섬기면 안 되고 루터가 이렇게 교회는 오직 경건한 일만 하고 나머지 세속은 정치를 맡긴다. 이런 것이 다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지만 다 틀린다면!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유다의 남은 자는 여기에 이미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를 유다의 남은 자가 차지한다는 말은 적어도 유다의 남은 자 만큼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원수가 안 될 경우에만 하나님에 의해서 척결한 그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여기 4절에 나오는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이거는 뭐냐, 남쪽에서부터 점점 북쪽으로 나오는 지명인데 전부 다 이거는 다 앗수르나 아니면 애굽에 다 멸망하고 말아요. 이스라엘도 망하는데. 이렇게 망하는 나라를 유다 민족이 차지할 자격이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 원수라고 여기고 척결하고 그 자리에 유다의 남은 자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유다 민족은 안 되지만 유다의 남은 자만 들어갈 수가 있거든요. 유다와 유다 민족의 차이는 뭐냐, 그건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의 방식이 나옵니다. 레위기 27장 34절 마지막 대목입니다. 레위기의 마지막 대목인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레위기 마지막의 이 취지가 뭐냐, 이스라엘 전부 모든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레위기 27장 33절에 보면 “다 거룩하니 속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제가 하는 취지는 이겁니다. 개인적으로 단체를 만들고 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 이 말입니다.
유다의 남은 자가 또는 유다 나라의 남은 자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 ’유다 사람.‘ ‘당신은?’ ‘유다사람’ ‘됐다. 우리 힘 합치자.’ 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나 유다 사람에게는 없다는 말을 분명히 합니다. 없기 때문에 결국은 뭐냐, 유다의 남은 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은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교회사에서 교회가 루터도 실패하고 칼빈도 실패하고 천주교도 실패한 이유가 뭐냐, 본인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질 않는 거예요. 없기는 미쳤다고 없나? 손 있고 발 있고 눈 있고 입이고 다 있는데 없기는 있잖아. 하나님께서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런데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그 투입되는 방법이 뭐냐,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나오는 말씀의 결과물로 될 때만 없는 데서 있긴 있어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와서 유다의 남은 자로 만들 경우에만 있음이 돼요. 그 용어가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우리는 여기에 발 딛고 있으면 있다고 보잖아요. 주께서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뭐가 없는가? 말씀이 없어요. 뭐가 없는가? 진리가 없어요. 뭐가 없는가? 복음이 없어요. 뭐가 없는가? 하나님의 계명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다고 거울보고 아는 거예요. 자기가 만져보고 아는 거예요. ‘있네. 있네, 근육 있잖아. 있는데 뭐가 없어? 있잖아. 나 있고 너 있고 다 있잖아.’ 있는 걸 모아보면 있는 나라 되지, 우리는 이스라엘, 우리는 유다나라. 우리는 천주교, 우리는 루터 교, 우리는 칼빈교, 우리는 개혁주의, 그런 것은 하나님이 교회라고 쳐준 적이 없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반드시 ‘없다.’에서 불러요. 우리교회 있잖아요? 우리교회 없어요. 주께서 우리교회를 계속해서 만들어 줘야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를 만들지 않아요. 교회를 만들지.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안 만듭니다. 어떤 특징 교회를 만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왜 저기 동부교회, 범어교회 있고 왜 제일 서문교회가 있다고 하느냐, 그들은 천주교거든요. 그들은 루터교고 칼빈교거든요. 그들의 있음은 말씀 앞에 있는 게 아니고 부동산이 있어요. 부동산이 있어야 돼요. 옛날 천주교 루터 같으면 토지가 있어야 되고, 힘이 있어야 돼요. 돈이 모아져 간판 있어야 되고 목사 있어야 되고 장로 있어야 돼요. 있음을 긁어모아서 있음의 교회를 만든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뭐만 있으면 되느냐? 말씀만 있으면 되고 언약만 있으면 되고 율법만 있으면 되고 하나님의 법만 계명만 있으면 되고 성령만 있으면 돼요. 이게 제 말이 아니고 히브리서에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히브리서에 하늘에는 하늘의 총회가 있습니다. 하늘의 총회는 먼저 죽었던 사람들과 나중에 합류할 사람들이 모여서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겁니다. 하나의 백성을 이루는 겁니다.
유다의 남은 자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남은 자에 누가 들어가느냐? 유다의 남은 자니까 문자 그대로 보자. 유다 나라 가운데서 주께서 이렇게 남은 자 있겠지, 그런 사람 있겠지. 그냥 혈통적으로 유다의 남은 자 들어가 버리면 들어가도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블레셋이 왜 블레셋입니까? 블레셋이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그 원수가 하나님에게 잘렸으면 그 취지를 모르는 인간이 들어가도 그 인간은 잘리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의 남은 자는 뭐만 알면 되느냐 하면 블레셋이 왜 잘렸을까? 그거 알면 그 사람이 바로 유다의 남은 자입니다. 블레셋이 왜 잘렸을까? 블레셋이 왜 하나님의 원수였을까? 아! 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우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계시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살아 계시기에 지금도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선 나를 살려내고 있는 분으로서 계십니다.
내가 여기 있음보다도 주님의 있음에 의해서 엮어져 있는 그러한 존재가 유다의 남은 자고,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날 구원했습니다.’ 한번 해놓고는 잊어버리고 주님과의 관계를 잘라버리고 ‘내가 5년 전에 이미 예수님과 하나 돼 버렸는데, 5년 전에 예수님과 한 사람 된 사람들 모이세요. 모이고 우리 교회 만듭시다.’ 그거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참새를 키우고 잡초라도 주께서 키우는 것은 매일같이 우리를 키워내시는데, 키워낸 근거가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그 말씀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와 원수 아닌 자를 분류하시는 그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고 있는 사람, 내 안에 주님의 용서가 있고 주의 피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나라에서 인정받는, 있는 존재, 있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있다고 사는 게 아니고 그건 죽은 채로 사는 것이고, 말을 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주께서 말씀에 입각해서 주의 백성으로서 있어야 인간됨을 저희들은 말씀을 통해서 뻔히 알면서도 이상스럽게 세상에 나가면 놓쳐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살려내시는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