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민족의 교만
2013년 5월 26일 본문 말씀: 스바냐 2:8-11
(습 2:8, 개역)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습 2:9, 개역)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습 2:10, 개역)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
(습 2:11, 개역)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이방민족을 보고 흔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무엇 때문에 저주받아야 될 민족인지를 따지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민족과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망하게 된 처지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망해야 마땅하다고 단정짓는다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조건 하나님편에 서 있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말씀이란 이런 인간들의 심정에 호응하기 위해서 있는게 아닙니다. 늘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매일같이 교제하고 있다고 자부한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는다면 이는 우리들이 예상한 다른 기준에 준해서 하나님께서 조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예상 못할 기준이 뭘까요? 그것은 인간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조직화를 시도하면서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언약은 이런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십니다. 즉 인간들은 죄를 이길만한 위치에 있지 아니합니다. 자기 딴에 다들 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살아온 환경이 일방적으로 엉터리 진리와 의로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인들을 하인 다루듯이 한 것이 그 집안의 기강이라면 그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바깥에 나가면 자기 집안에서 하던 행세가 세상에서도 진리처럼 통용되리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미 죄의 조직화에 휘말려든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압과 암몬 민족들이 하나님의 의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지만 이들 나라들이 그들 나름대로 얼마나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인 것을 우리가 모르면 아니됩니다.
사람들의 모임 안에는 필히 상대적으로 악한 자들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이는 정의사회에 불균형을 유발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불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 폭력이 어디 가정적인 문제에 국한되었겠습니까? 먼 나라에서 한국땅에 시집왔는데 남편이라는 자가 사랑해주기는 커녕 맨날 개패듯이 패고, 보호해주어야 될 친정집은 저 바다 건너 구만리일 때 누가 이 가련한 여인을 지켜주어야 합니까?
당연히 국가가 나서야겠지요. 따라서 사람들에게 국가란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암몬 나라도 마찬가지고 모압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이 과연 복을 받을지 아니면 저주받을 지를 결정짓는 규정은 그들 내부의 주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 본문의 뜻입니다.
나라가 나라로서 바르게 설려고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저주성은 그런 나라에도 예외없이 퍼부어집니다. 단지 과거사 어느 먼 나리의 이야기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이 한반도라는 지역에 한국이 있게 한 조선 시대의 국가 제도를 봐도 이들이 나름대로 얼마나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기위해 애쓰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건 건국이념은 성리학에 의해 유교적 이상국가건설입니다. 이것이 성사되기 위해서 왕은 철저하게 백성의 편에 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겁니다. 왕은 왕과 그 가족을 위한 존재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평소에 왕은 국정에 부지런해야 하고 여자나 음악이나 토목공사나 스포츠나 놀이에 몰두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즉 왕은 민심을 살펴야하고 민심을 잃으면 왕의 자리도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경연(經筵)을 통해 왕과 고위직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어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덕으로 통치할까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인 체제도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을 나라에 해당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존재 때문입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저주니 축복니 하는 것이 자기 집단 안에서 그들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견수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특별한 인물의 등장은 곧 저주와 축복을 결정짓는 유일한 근거로서 작용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누구든지 아브라함 언약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아차리면 그 자가 곧 축복을 받는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국가 형태로 확대시켜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개인이 개인자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소속된 채로 구원받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 속한 자를 건드리는 이방세력이 있다면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건드리는 자라고 규정받게 됩니다. 민수기 20장과 22장에서 보면 에돔 나라가 나오고 모압나라가 나옵니다.
이 나라들은 자체적으로 있을 때는 아무런 하나님의 재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가운데 애굽에서 탈출해온 이스라엘 집단이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우물이나 과수원에 해치지 않을 테니 그냥 지나가게만 해달라고 이스라엘이 부탁했을 때 이들 나라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입장에만 편들지 말고 이들 상대방 나라의 입장을 헤아려봅시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조치를 내린 겁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그들은 아무리 내부적으로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고 해도 저주받을 요소를 토해낸 민족임이 들통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접촉으로 인해 그들이 저주받을 민족의 일부라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점은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민주주의적으로 모든 운영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축복과 저주를 가름한 기준은 무관심합니다. 언약이 없는 집단은 단순히 언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가치를 못알아보고 공격하는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교회들은 강한 반발심을 드러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게 되면 교회는 필요없단 말인가?”라고 반발합니다. 이들은 언약이 뭔지도 모르고 그리고 구박도 하게 됩니다. 소위 믿는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핍박하는 경우들을 우리는 지켜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심이니 민심이 조직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지킨 방안이 없음이 교회를 지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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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2:8-11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이런 본문에 있어서 우리가 몇 가지 사전에 알아야 될 것을 요구받게 되죠. 여기 모압이라는 민족이 나오고 암몬 민족이 나오고 또 이스라엘 민족 나오고 특히 경계를 침범했다는 경계 이야기 나오고, 소금 기둥 이야기 나오고 소돔 이야기 나오고, 고모라 이야기 나오고, 이런 이야기들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뭔가 일이 벌어진 지역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일이 벌어지면 그건 과거에 지나간 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반복을 시도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그것을 그 과거와 똑같지는 않지만 그 원리는 그 후에도 변하지 않고 되풀이 되는 겁니다. 항상 되풀이되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은 단 한 번의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해서 그 십자가란 것은 그저 지나간 우리의 과거에서는 지나간 한 번의 일이지만, 현재 똑같은 원리의 취지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죠.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얼굴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부 다 하나에서 나온 다양성에 해당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믿을 것은 각자, 각자를 믿어서는 안 되고, 나를 이렇게 다양하게 만든 그쪽 하나라는 것, 그 하나에서 나온 그분을 믿어야 돼요.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지만 그 중보자는 하나이니라, 해서 하나에 주목하자는 거예요.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에 주목하자는 것은 여럿에 대해서 니가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직업이 어떻게 되는가? 직업은 각 종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꼭 결혼을 해야 되는가? 꼭 결혼이 될 사람도 있고 안 될 사람도 있는데 꼭 결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들 한다고 해서 똑같이 그들을 따라가는 인생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하려면 이런 저런 이야기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것을 그들이 똑같이 되풀이 되는가를 설명을 해야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생중계라, 라이브(LIVE), 생중계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진행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진행을 시키면서 여기에 모압이 등장하고 암몬이 등장하는데 이 모압과 암몬이 등장하는 그 이유가 뭐냐, 이건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질이 나쁘다는 뜻이죠. 안 좋은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지옥 간다는 뜻 아닙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 저주 받을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간단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들이 왜 저주받아야 하는가, 이것이 핵심이 되겠어요. 모압이 뭐며 암몬 자손이 뭐며 그들이 어떤 생각, 어떤 짓을 했기에 그들은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 저주 받듯이 저주 받아야 하는가, 를 알면 돼요.
그러면 그걸 왜 알아야 되는가? 우리가 지금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저주 받는 길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장담합니까? 누구나 다 나는 천당 간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정답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에 비춰볼 때 내가 천국 간다고 우기는데 나중에 보니 서서히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놓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암몬과 모압 자손, 왜 그들은 지옥 갈 수밖에 없는가? 나쁜 짓을 했는가? 아니에요. 그럼 더러운 짓을 했는가? 아닙니다.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 저주받고 벌 받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이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 받아야 되죠. 우리가 나쁜 짓 하지만 사실은 나쁜 짓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세상이 우리를 나쁜 짓 하도록 그렇게 몰아세웁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자신이 나쁜 것에 우리가 합세하도록 하고 합세되지 아니하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돈을 우리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돈을 원해? 돈을 원한다면 나쁜 짓을 해야지.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거지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 이예요. 그래서 거지에 대해서 물으니까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또 돈 내라는 거예요. 온 천지에 돈이 안 끼는 자기가 없어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돈이 안 끼는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취미로 하는 사람 없어요. 왜냐 인간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남한테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았다고 그냥 허리만 한번 툭 쳤다고 그렇게 할 바에야, 남의 처자 허리는 왜 칩니까? 미국 술이 먹고 싶어서, 그럼 술은 왜 먹고 싶은 거예요? 누가 술이 맛있다고 가르쳐 준 환경이 있잖아요? 청소년 보고 담배 왜 피우느냐, 하니까 담배 피우면 어른 된다고 누가 가르쳐 준 환경이 있어요. 집안에 아버지가 피우니까 이게 피우면 어른 되는 줄 알고 피우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어떤 집안에 좀 사는 집안에 일하는 사람보고 나이 불문하고 반말을 찍찍 해댔다 말이죠. 그 집안에서는 아버지도 엄마도 전부 다 나이 상관없이 하인한테는 전부 다 반말을 하는 걸 들었으니까 자식도 그게 옳은 줄 알았던 거예요. 옳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사회에 나와 보니까 그건 호로 자식이 돼 버리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본인이 하인한테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원래 집안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모압과 암몬을 가지고 이들을 탓할 때 ‘에이, 나쁜 인간들, 저주받아 마땅하지, 하나님이 저주해도 마땅하지.’ 이러면 안 돼요. 그들이 저주받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을 건드려서 그래요. 이스라엘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은 저주받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에 누가 있는가?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이 계십니다. 요걸 정리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건드리면 저주받게 돼 있어요. 주의 이름을 건드리는데 왜 저주를 받느냐? 이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따질 입장이 못 됩니다. 약속이라는데 할 말이 없어요. 그게 약속이라는데. 우리는 그런 약속이 우리한테 귀에 들리기 전에는 우린 이런 식입니다. 내가 나쁜 짓하면 저주받고 내가 착한 일 하면 복 받는다. 이게 우리끼리 통하는 어떤 약속 같은 것, 묵계, 또는 진리라고 여기는데 거기다가 언약을 집어넣으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는 사람을 건드리면 저주받는다, 라고 돼 있어요. 여기 갈라디아서 5장에도 주의 형제를 건드리면 심판받는다. 돼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소자를 건드리면 그들은 지옥 가게 돼 있어요.
성도를 건드린다는 것은 성도 안에 계신 성령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심지어 목사라도 건드리면 안 돼요. 요한일서 2장에 나온 것처럼 “누가 너희를 가르치느냐. 너희들 속에 성령이 계시는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고 했습니다. 다만 너희 속에 성령께서 친히 너희들을 가르칠 것이라 했습니다. 어디 건방지게 목사 지가 뭔데 누굴 가르쳐요? ’저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 이런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의지를 제시할 뿐이지, 누가 건드립니까? 안 되죠.
그런데 이 모압과 암몬은 이게 뭐냐, 나라가 되려면 누가 윗사람이 있어야 되고 아랫사람이 있어야 돼요. 윗사람, 아랫사람은 계속 가르쳐야 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지배를 해야 돼요. 이걸 ‘죄의 조직화‘라 하는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아브라함 가족을 건드리면 저주받아요. 이게 나중에 이스라엘이 돼 버리면, 이스라엘나라가 국가가 돼 버리면, 이건 저주가 개인별 정도가 아니고 국가별로 주어집니다. 이쪽 이스라엘 건드리면 저쪽 이스라엘이 저주받아요.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나님께서는 개인 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니 구원받아라.’가 아니라 ‘니가 이스라엘 이름으로 구원받아라.’ 이스라엘에 소속됐다는 그 이유 때문에 너는 구원된다. 니가 위치한 자리 때문에 구원받아요.
비행기 탈 때 혼자 타서 오라이, 한다고 비행기 뜨는 게 아닙니다. 비행기 여럿이 타야 비행기 뜨는 거예요. 천국 갈 때 자기만 구원받는 줄 알았더니만 같이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는 각자의 운명을 이미 박탈당하고 주님이 주신 운명으로 이미 갈아치운 사람들 이예요. 그래서 형제들끼리는 내가 잘났다. 니가 잘났다가 아니라 주님 잘났기 때문에 우리 다 같은 사람들이 한 배를 탔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엮는 걸 요한복음에서는 사랑이라고 하죠.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 말이 그 말씀 이예요.
따라서 우리는 모압과 암몬을 알아야 되고 그들이 저주받는 이유를 알려면 죄의 조직화, 죄가 어떻게 조직화가 되는가를 알아야 돼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는데 뭐 지옥 갈 사람을 알 필요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우리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해놓고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조직화 할 때 조직하는 그 방식이 모압과 암몬이 하는 행동하고 똑같이 해요. 교회라는 그 조직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을 거론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성도라 거론하면서 조직법을 만들고 교회 운영을 하는 걸 보면 모압과 암몬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겁니다. 이 죄의 조직화가 모압과 암몬이라 했는데 너무 우리와 낯설어요. 왜냐 하면 이름도 생소하고.
그렇다면 가까운 조직화가 어디 있느냐? 조선시대입니다. 신라통일 이후에 궁예 미친 자가 왔다 갔다 했고 그 미친 궁예를 대신하여 왕건이가 했고 왕건이 나라 세울 때 공신 한 사람이 신 승겸이라고 해서 요기 누워있습니다. 여기 동산 하나 있어요. 왕건이 다음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죠.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웁니다. 우리는 마땅히 있어야 할 나라 한반도가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조직화입니다. 이게 모압이고 암몬 이예요.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러한 모압과 암몬이 있을 때 거기에 어떤 땅을 차지하고 있을 때 거기 누가 지나가느냐, 이스라엘 나라가 지나가게 됩니다. 지나가니까 하는 말이 이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어, 이스라엘, 남의 땅에 왜 들어와? 비켜, 우리 땅에 들어오지 마.’ 에돔 나라 저주받습니다. 그 다음에 에돔 나라 피해서 민수기 22장에 보면 모압 땅에 오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우물이나 과수원에 과일 안 댈 테니까 그냥 통과만 하게해달라.’ 하니까 모압이 ‘이게, 씨, 국제법도 모르고 어디? 안 돼.’
여러분,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에 들어온 구실이 뭔지 알아요? 명나라 칠 테니까 잠시 길만 지나가겠다고 허락해달라고 할 때 우리 조선이 안 된다고 했어요. 일본이 만약 이스라엘이고 우리나라가 선조대왕이 만약 반대했다면 우리나라 조선이 모압과 암몬, 에돔입니다.
우리보기에는 죄의 조직화라는 것이 굉장히 나쁜 어떤 범죄 양아치 집단, 조폭 집단인줄 알죠. 우리가 애국가 부르고 우리가 평소에 국가에 충성하고 월드컵 할 때 울면서 전부 다 감동해서 서울시 광장에 모일 때 모인 그들이 모압이고 암몬 이예요. 그게 죄의 조직화라니까요.
조선시대 들어와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왕은 이 나라는 왕의 나라기 때문에 까불지 마라, 신하들 내 말 들어라, 하니까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나라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 임금님이 국민의 민심을 놓치면 국민이 당신한테 대항하는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허수아비고 우리 사대부들이 알아서 정치를 잘할 테니까 당신은 결재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유교의 이상정치론 이예요. 그 갈등이 조선 끝날 때까지 계속 되는 겁니다. 중간에 ‘나 임금 안 해’ 라고 해서 삐진 사람도 있고, 임금이란 사람은 부지런 떨면서 열심히 정치해야 되고, 임금은 항상 공자, 맹자 책을 옆에 두고 어떻게 하면 국민을 위해서 할 것인가, 생각해야 되고, 이걸 경연(經筵)이라 합니다. 경연이란 임금이 신하와 같이 고위 관리와 같이 세미나 여는 거예요. 나라는 어떻게 해야 되고 국가는 어떻게 다스리는가, 그게 죄의 조직화라니까요.
그렇게 할 때 정도전이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임금이 되었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부지런히 살펴야 되지, 임금이 딴 데 태만하면, 예를 들어서 여자, 토목공사, 음악, 그리고 스포츠, 그리고 기괴한 놀이, 여기에 빠지면 우리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민심이 돌아서면 당신도 왕 오래 못해, 협박조로 나오죠. 정말 이러한 모습은 인간이 자기 이 세상에 죄가 있기 때문에 사는 게 불편한 거예요. 불편할 때는 국가의 권력을 나의 권력을 일임해 줄 테니까 나의 권력을 대신 일임하되 내가 힘들 때, 어려울 때, 내가 괴로울 때, 내가 나쁜 사람한테 구박받을 때, 내 대신 복수해 주고 정의와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 나의 대행 체를 사람들은 사모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국가라는 거예요.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국가에 요청해야죠. 외국인 여자가 결혼해서 보니까 남자가 난봉꾼이고 만날 주먹으로 패더라. 어떻게 합니까? 가까운 경찰서에 연락해서 가정문제, 가정폭력 문제를 신고해야 됩니다. 신고해서 연락을 취해서 100미터 접근금지 해야죠. 나라가 가정문제 나서야 된다 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외국에서 한국에 시집와서 완전히 주먹으로 얻어맞을 판인데요. 자식도 죽고, 국가가 나서서 방어해 줘야 돼요. 이게 바로 죄의 조직화예요.
이 시점에서 죄의 조직화란 뭐냐, 나의 평화와 나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성적인 완전체를 끄집어낼 때 이거는 여기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존재,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존재가 여기 필요치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왕과 백성이 머리 맞대고 얼마나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고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다.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왜 들어갑니까? 하나님이 왜 끼어들어갑니까? 인간끼리 잘하고 있는데. 나라에 충성,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그렇게 이웃끼리 서로 살아가면 되는데 거기에 뭐 하나님의 법이 왜 들어가요? 그런데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뭐가?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않고 뺀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만 생각하겠다는 거예요. 정도전이 이야기한 유교 이상나라는 뭐냐, 오직 왕은 민심을 헤아려야 이게 나라가 됩니다.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민주주의 같죠? 그걸 링컨 식으로 이야기하면, for the people, 국민을 위하여, 그런데 두 가지가 빠졌어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국민을, 국민에 의해, 가 빠져버렸어요. 그러니까 ‘국민들아, 너희들은 입 다물라. 우리 사대부가 배운 인간들이 너희들을 위해서 변호사 해줄 테니까 너희들은 우리들의 카리스마, 권한을 믿고 무조건 끽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거나, 오늘날 목사나 장로들이 당회장들이 ‘너희들이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해줄 테니까 너희들은 우리 말 들으면 천당 가.’ 이렇게 교회를 조직화 하는 거나 다른 게 뭐예요? 똑같아요.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너희 속에 성령이 한다 했죠. 성령이!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게 되면 우리가 한 수 배우는 게 아니에요. ‘주여, 우리가 바로 죄의 조직체를 그리워했던 당사자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이 직접 오게 되면 십자가 피를 가져오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잘난 체하고 잘난 덕분에 이 땅에서 행복하게 넉넉하게 땅땅 거리며 살겠다는 그 욕심이 이거는 하늘나라는 싫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내가 성공한 인간되고 싶다는 그런 탐욕이 내가 직접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라는 걸 만들어서 그걸 감추죠. 충성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헌금 많이 했습니다. 그걸 감추는 거예요. 그게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받을 모암과 암몬인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모압과 암몬은 자체적으로 문제없어요. 우리가 보기도 문제없어요. 다만 이스라엘이 와서 하는 말이 ‘지나갈 테니까 봐주소.’ 하니까 ‘어디, 씨, 이 나라에 니가 들어와?’ 다른 말로 해서, 요새 말로 해서 ‘어떻게 내 가정에, 내 교회에 뭔데 십자가 진 예수, 당신이 기어들어와? 나가. 우리끼리 잘하고 있어.’
구원을 해주시는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 백성을 건지러 오신 그 메시아를 죽여 버렸어요. 그게 저주예요. 자기가 불행한 게 저주가 아니고 예수님을 빼고 살만하다, 라는 그 의식, 그게 바로 죄의 조직화! 나밖에 모르는 인생, 바로 그런 나라에게 메시야 나라 오면 저주받게 돼 있다는 겁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의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양식의 형태의 죄를 개발해 낸다는 사실 이예요.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롯의 말을 안 들어서 그 사위 둘은 죽었잖아요. 자기 마누라도 뒤 돌아봐서 소금기둥 됐어요. 갑자기 소금 값이 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건 그 시대고.
오늘날 이 시대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언약과 복음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십자가로 다 이루었어요. 이제는 인간의 행함이고 뭐고 없고 오직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습니다. 교회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교회에 봉사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오직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자기 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오히려 십자가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인데 바로 이런 소식이 듣기 싫다는 겁니다. 나도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를 나도 확인받고 싶은 그런 증거물 좀 갖고 싶다는 거예요. 남보다 뛰어난 신앙인 것을 확보하고 싶다는 겁니다. 만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예쁘냐.’ 이런 식으로 자기 거울을 만들어서 자기를 되비추는 자기 우상화 작업에 교회가 그걸 부추기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전자제품 들고 수리 점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 고장 난 전자제품을 수리 점에 들고 가게 되면 그 수리 받고 난 뒤에 고쳐진 수리된 전자제품 들고 올 때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이게 인간 이예요. 인간은 자기가 고장 났으면 교회 가서 고쳐서 그걸 다시 내 것으로 되돌아 올 때 기뻐요.
그러나 언약은 그게 아닙니다.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고장 났습니다. 그럼 그냥 드리세요. 다시 깔끔한 내 것으로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뜻대로 하시옵소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맡깁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라는 게 없는 게, 주의 것으로 사는 거예요. 값을 주고 샀으니 이제는 니 것이 아닌 내 것이 됐느니라. 이게 바로 전자제품 수리점하고 차이점 이예요. 교회하고. 진짜 성도하고 차이점입니다. 그냥 여러분이 하는 일에 여러분이 주인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농사짓고 뭘 하든지 간에 그냥 인생을 자꾸 맡기세요. 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처하지 마시고 눈물과 콧물과 불행을 자처하지 마시고 사랑과 전쟁을 자처하지 마시고 그냥 맡기세요.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주께서 언약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무슨 뜻이 있어서 이런 사랑과 전쟁이라는 사태가 벌어졌겠지, 자꾸 항상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냥 맡기면서 주께서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한번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이 빠져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반대로 언약을 이용할 생각을 했습니다. 잘난 존재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척하고 하나님을 이용했지만 들통 난 것은 들통 나고, 이제는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으로만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7강-습2장8-11(이방민족의 교만)130526-이 근호 목사.hwp (48.0K), Down: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