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없는 은과 금
2013년 5월 5일 본문 말씀: 스바냐 1:14-18
(습 1:14, 개역)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습 1:15, 개역)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6, 개역)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습 1:17, 개역)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습 1:18, 개역)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한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들 머리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하나님을 다 끄집어내어도 하나님은 그 모양새를 피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자력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 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더나아가서 여기에 대한 책임은 필히 다 져야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납득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자를 보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인간이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인생의 일을 자기가 알아서 결정한 일이라고 우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 마저 배후에 숨어있는 세력자의 사주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 주범은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사야 14:12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계명성’ 곧 루시퍼가 악마의 이름으로 교회역사 속에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벨론 제국의 교만성을 표현하는 예입니다. 악마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 추적해서 악마를 파악할 능력이 아예 차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신약 유다서 1:9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악마에 대해서는 천사장마저도 관여해서 조치하지 못하고 다른 분에 의해서 사단은 처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그분조차 이름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름이 없는 두 세력과의 싸움판이 곧 이 인간 현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름을 붙여서 인간들의 언어세계 안으로 장착시켜놓으려고 시도합니다.
그렇게 되니 ‘주의 이름’마저 인간이 나서서 다룰 수 있는 분이라고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고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서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어떤 이름을 부르든지 그 이름 부름의 작용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경우는 없고, ‘주의 이름’만을 부르도록 조치하시는 능력으로 구원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구원 작업에 인간이 넣어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 세상에서 사용하는 그 이름들의 교환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맡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름없는 세력자의 속에 본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 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곧 선이 되리라고 믿고 삽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신학교 나와서 목회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리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목사가 되어서 목회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곧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의 사주를 받아서 움직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합니다.
인간이란 처음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이 한다고 자부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매진하고 종사하는 일에 적합하도록 자신의 몸과 그리고 습관과 정신마저 조정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보겠다는 일을 통해서 도리어 자신의 죽음을 제촉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의 인생을 늘 변신에 변신이 거듭하게 되는데 그것은 본인이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는 그 작업으로 발생된 결과물로 어느새 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은 것은 자기 이름으로 벌린 자신의 업적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오늘 본문의 예언은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것이 뻔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더럽더라도 하나님께서 일괄적으로 모조리 심판해버리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투로 반발할 수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따로 분류시켜 구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의 구원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국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이 가는 그 구원의 길에 합세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거절당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만 아시는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속해 있는 세계에서 구원은 베드로가 가담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을 통해서 성사됩니다. 사도행전 3:2-6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거지는 자신에게 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익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금과 은입니다.
에베소서 2:1-3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권세 아래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즉 악마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바가 은과 금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 쪽 세계에서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곧 악마 자체에 대한 심판이요 이 세상 자체의 심판성을 제공합니다.
그 진노 안에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사랑, 곧 질투입니다. 동전 100원 짜리 도안에는 이순신 장군이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100’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은, 그 사랑 외의 다른 사랑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질투의 능력이 발휘입니다. 이 질투의 불 세기로 인해 이 세상은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그 정도로 자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짐승의 세력 속에서는 질투로 무장된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1장 14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6페이지입니다.
스바냐 1:14-18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화내는 것도 없을 것이고, 분내는 것도 없을 더더구나 없을 것이고, 그런 하나님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예상 밖의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그 하나님이 장차 오실 이 땅에 인간 속에 나타날 하나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생각되는 것은 다 내놔봐라 이 말이죠. 다 끄집어내놓고, 바로 그것과 다른 분으로 오시는 겁니다.
아무도 제 정신으로 도저히 알아보지 못한 그러한 몰골로, 그러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나타났다. 혹은 하나님이 안 오셨다. 또는 아예 하나님이 없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분명히 다녀갔습니다. 못 알아먹었을 뿐이지, 분명히 다녀갔습니다. 다녀가면서 남긴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폐기처분돼야 될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오늘 본문 이야기는 전쟁 이야긴데 이 세상 전체적으로 전쟁으로 전부 다 망한다. 라는 이야기를 오늘 분문에서 했습니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관심 두는 게 뭐냐 하면 전체가 어떻게 멸망하느냐에 관심 없고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될까요? 내가 궁금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게 됩니다. 점집이 서울의 미아리나 대구에도 많습니다만 점집에 찾아가서 ‘도사님, 앞으로 세계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그거 물으러 오는 사람 없어요. 세계 평화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될까, 올해 한 해 신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거 물으러 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출발점이 ‘니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속해 있는 세상은 이렇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누구 개인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다 나빠서 그래요. 모두가 다 나빠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 안에 모으셔요. ‘너도 와, 전부 다 와. 한꺼번에 다 와.’ 다 모으시고 난 뒤에 ‘다 너희들은 멸망돼야 된다.‘라고 하시면서 그걸 일단 수용해야 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그 다음에 선별작업에 들어갑니다.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양에 속한 사람, 염소에 속한 사람, 오른 쪽에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 갈사람, 일단 전부 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하는 식으로 전부 다 주님의 말씀 앞에 모아놓고 분류작업은 그때부터 주님의 일방적인 자기 권한으로 분류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논산 훈련소나 이렇게 51사단 지방의 훈련소에 가게 되면, 처음에 들어갈 때는 집이 그립다. 보고 싶다. 밥맛이 없다. 그리고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어요. 저도 하루 동안은 밥을 못 먹었습니다. 훈련 받고 힘든데 사람이 처음엔 훈련 하는 게 힘들어요. 잔소리도 안 듣다가 말 시키는 대로 똑바로 좌로 돌아가, 우로 돌아가, 그게 짜증스럽고 인격 모멸도 느끼고 인간성이 붕괴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렇게 되지만 훈련소 생활 몇 주만 지나면 서서히 자기들끼리 ‘니 나중에 자대 어디로 가는데?’ 서서히 장래문제에 대해서 서로 비교하면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는 친척이 보안사에 있는데 훈련 끝나면 후방으로 빼준대.’ ‘좋겠다. 니 아저씨한테 나도 부탁해라. 우리 짝꿍이잖아.’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하고 해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 삼촌은 보안사 빽으로 여기 후방에 빠지고 내 동생도 대구 방공포 가서 가까운 데서 했죠. 저만 전방에 갔죠. 전방에 가서 예수 믿었다니까요. 그때 처음 교회 나갔죠. 참 주님께서 순적하게….
사람이 어떤 지금 속해 있는 단체, 이 세상이 질이 어쩌니 나쁘니 하지만 대학교 때는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어야 돼, 북한을 저렇게 놔두면 안 돼, 북한과 교류하는 입장에서 북한 말을 들어줘야 돼, 종 북 세력인지, 하여튼 뭔가 거창하고 범지구적인 활동을 하려고 우리나라에서 봉사활동 하는 게 있어요. 아프리카나 도미니카 그런데 가서 군대생활 대신 가는 것도 있지만 막상 대학교 졸업하고 이력서 100군데 내서 면접 오라는 데 한 군데 없으면 그 다음부터 인류 평화고 국제 정치고 관심 없습니다. ‘뭐 시켜만 주이소, 계약직이라도 좋습니다. 직장의 신이 되겠습니다. 미스 김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간장 공장에 내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세계 평화 이런 거 안 하고 만약에 들어가게 되면 진급 언제 하고 언제 잘리지는 않을까, 그거 생각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추적해 보면 이런 겁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이름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악마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을 숨깁니다. 루시퍼라는 이름을 기독교 교회에서는 그 루시퍼 이름을 사용했어요. 루시퍼가 악마 이름 아닙니다. 악마의 종들이 일부러 만들어 낸, 악마를 감추기 위한, 자기 오야봉을 감추기 위해서 사용한 이름이 루시퍼에요. 하늘에 있는 계명성아 떨어져라. 하는데 그거 악마 아닙니다.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말은 인간은 악마를 다룰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연구하고 철학과 경제학, 과학 아무리 연구해도 니가 살고 있는, 니가 소속돼 있는 그 세계를 성경에서 해석하는 짐승으로 해석할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좋은 세상에 좋은 나라에 가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지, 라는 식은 인간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이렇게 질문했어요. 교회가 문제 있다 하니까 그 사람 취지가 물론 나쁜 교회도 있지만 좋은 교회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질문했는데, 여러분, 교회마다 모두 다 좋은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진짜 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머리가 그리스도고 지체가 몸이고 하는 그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우기는 그 교회한테 핍박받는 형식으로만 이게 도출되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메시아는 여전히 우리가 못 알아보는 식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에 제가 설교 뭐라고 했던가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사람들이 하나님이 오심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대신해서 건전하고 고상해 보이고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 교회를 만들어서 그 진짜 메시아 안 믿는 것을 마치 믿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에서 나라가 짐승이라 했잖아요. 짐승이라 하면 ‘짐승 같은 나라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이 나라는 짐승이 아니고 짐승나라 아닐 거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진짜 나라가 그 나라 의, 이 땅의 천국입니다.
그래서 바로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를 옹호한다고 나대면서 우리는 어느새 짐승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루시퍼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이사야에서 말하는 바벨론 그런 큰 나라 떨어지는 걸 말하는 것이지, 악마에는 그런 이름이 없어요. 천사는 이름이 있어요. 미가엘, 가브리엘.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미가엘도 가브리엘도 누구는 터치를 못하느냐 하면 사탄은 터치를 못합니다.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시체 가지고 논쟁할 때 천사도 그냥 경고로만 이야기했죠. “주께서 너를 꾸짖기를 원한다.” 이렇게 했지, 나대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름 없는 악의 최종적인 본분은 이름 없는 분에 의해서 전쟁으로 처리돼야 되는데 그걸 영적 전쟁이라는 겁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것은 실존하지만 이름이 없는 두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 쪽에서 이름을 붙을 수 없다는 말이고, 우리 쪽에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있는 선에서 차근차근 파악해 나가면 언제나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신학을 아무리 연구하고 아무리 해도 악마는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주님의 하는 일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사도가 주의 일을 했잖아요. 사도가 한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사도가 주님을 알아서 주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 순간순간마다 사도에게 일을 하도록 배당을 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한 겁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그들의 은과 금이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한다”고 돼 있습니다. 스바냐에 나오는 1장 17장 말씀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많이 들었다시피 사도행전 3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냥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지 않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한 거예요.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우리 사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 배후에 있는 이름 없는 세력에 붙잡힌바 되어서 그 세력의 사주를 받고 우리한테 그걸 요구한 겁니다.‘ 이런 뜻 이예요.
지금 우리가 주의 종으로 오니까 ‘금과 은을 주시면 그 덕분으로 우리가 살겠습니다.’라고 그런 의도로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그런 동냥을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고 당신 배후의 이름 없는 세력이 당신한테 그걸 사주하고 그걸 시키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베드로와 요한은 당신을 구원해주는 게 목적이 아니고 당신을 매개로 하여 영적 전쟁을 이 자리에서 실현시키겠습니다. 저쪽에서 이름을 감추고 은과 금을 내세운다면 우리 쪽에서 내세우는 것은 당신들이 내세우는 무기, 은과 금은 내게 없습니다.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되게 어렵죠?
요 어려운 것을 매듭을 푸는 방법이 이겁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어떤 직업을 갖게 되거나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내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어느새 그 일이 나로 하여금 그 일에 적합한 인간으로 조작해 내고 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학교 가서 목사가 돼 버리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목사 질을 한다고요. 자기가 종사하는 그 일에 적합하도록 변화가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제가 울산 가서 그런 강의했는데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은 자기가 죽음을 지연시키고 더 살고자 하는 일인데 자기가 돈이 있어야 살거든요. 사람마다 돈이 없으면 죽으니까. 돈이 안 드는 게 없잖아요. 돈이 있어야 병원에 가니까. 돈이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그 일이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되고 말아요.
여러분, apple, 사과압니까? 그 apple사 주식회사 회장이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천재라는 사람이. 컴퓨터 애플사가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청바지 입고 나오다가 너무 연구를 많이 하고 고민을 많이 해서 죽어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거기에 종사합니까? 이 컴퓨터 해서 인류공영에 기여하기 위해서 했잖아요. 인류평화에 기여하겠다는 그 자세가 이름 없는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일으킨 일이다. 그 사람은 성경 스바냐를 안 보니까 봐도 모르지만 알 수가 있어야지. 그저 신학교 가서 목사 하는 그 일이 자기의 저주와 자기의 지옥 가는 일을 재촉하는 일이라는 것을 목사가 그걸 몰라요. 그저 남 가르치는데 바빠서 자기 본인 신앙생활 자체가 안 된다니까.
차근차근 나가봅시다. 제가 방금 이름 없는 세력인 악마는 이름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주님한테는 주님 이름이 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 주님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의 이름이라고 하느냐? 그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주님의 이름 이예요. 제발 니 이름은 여기서 낄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니가 아무리 행하고 노력해도 주의 이름을 대체할 만하고 주의 이름에 섞일 수 있는 요소는 여기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순전하게 100% 주의 이름 이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적 전쟁은 우리 인간하고 의논하고 상의해서 한 것이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관계 나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갔어요. 우리가 보통 죽으면 천국 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사람들이 천국 간다고 천국 보내달라고 요청하니까 예수님은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께로 가니까 베드로 같은 사람은 못가죠. 왜, 베드로는 죽어도 못 가요. 아버지는 예수님 아버지이지, 베드로 지 아버지 아니거든요.
악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악마를 더듬어서 찾아갈 수 없고, 더듬어서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사주 받고 간섭받는 식으로 꼬이는 겁니다. 인간이 어떤 뭘 해도, 보험을 하든지, 교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 간에 인간이 이렇게 하는 일 그것이 배후에 보이지 않는데서 재촉 받고 쫓기듯이 일을 하게 돼 있어요. 모든 인간은. 이거해서 밥 먹고 살겠나, 이거 해서 은과 금은 생기겠는가, 항상 어떤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나한테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두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지금 더 살아야 되기 위해서는 그게 있어야 돼요. 요양병원에 가도 돈이 저금이 돼 있어야 됩니다. 우리 어른 이런 세대에서는 보험 같은 게 없었어요. 그러니 자식들 돈 좀 분빠이 해서 내도 처음엔 내다가 나중에는 삐져서 안 내고 누구 핑계나 대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도 아들한테 맡겼다가 아들이 사업해서 홀랑 다 까먹고 그런다고 아들이 엄마를 패고 노인을 학대하는 죄를 아들이 제일 잘 팬다는 겁니다. 그 다음이 딸이고 그 다음이 며느리고.
문제는 돈 이예요. 돈! 돈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락교회서 공부하면서 쉬는 시간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딸이 직장에서 일이 힘들어서 자꾸 집에 와서 엄마한테 화풀이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책이 난감하죠. 자꾸 힘들어서 엄마가 애 봐주고 생활비를 딸이 전적으로 감당하고 사는데 너무 힘이 드니까. 사람이 뽑지를 않아요. 기업이 어려우니까. 너무 일거리가 많으니까 그 화풀이를 할 때, 어떤 대책 같은 게 있을까 할 때 저한테 이야기할 때 이러면 됩니다. 그 권사님이죠. 김 권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딸보고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마. 딸아, 딸아 직장 그만둬. 내가 니 키워줄게. 내가 집에 돈 100억 있다. 그러니까 니 직장 가지 말고 그걸로 살면 된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거예요. 돈!
그런데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데 여기 18절에 보면 은과 금은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소용없는 거예요. 잠언서 11장 4절에 보면, 잠언서 볼 때마다 제가 대 심방 하던 게 생각나는데 이건 왜 이런 대목은 대 심방할 때 이야기를 안 하나 몰라. 11장 4절에 보면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돈? 진노하시는 날에 아무짝도 소용없다. 대 심방에 써먹기는 써먹겠다. 돈 벌어서 교회 바쳐라. 하면 되죠.
10장 2절에 보면 “불의한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돼 있어요. 불의한 재물!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의하지 않은 재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의하지 않은 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몰라서 그래요. 뭐 깨끗하게 물건 팔아서 깨끗하게 산다. 이 세상에 깨끗한 게 어디 있습니까? 한번 조사해 볼까요? 농산물 깨끗한지 농약 얼마나 탔는지 조사해 볼까요? 깨끗한 게 있는지. 유기농? 유기농이 어디 있어요? 날씨 안 좋으면 유기농 없어요. 전부 다 몰래 약 쳐놓고 유기농이라고 속이고 있는데. 이런 입장에서 깨끗하게 유기농해서 얼마나 나온다고, 상품이 되지도 않고.
깨끗한 게 없어요. 불의한 재물이 아닌 게 없어요. 이 세상에 불의한 재물이 없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영생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도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모르는 입장에서 우리 쪽에서 하나님한테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산다? 이건 진노의 날에 소용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진노의 날이라 하는 것은 니가 그렇게 의지하고 그렇게 의존하고 ‘나는 이거 아니면 죽어. 이거 아니면 못 살아.’ 하는 그 덩어리, 그 덩치가 사실은 이름 없는 누구 손에 의해서 전부 다 지배당하고 억압당하는 우리는 악마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보면 여기 심판의 날 내용이 죽 나오거든요. 고통의 날이고 깜깜한 날이고, 딱 이 본문 본 인상이 뭡니까? ‘하나님 너무 과하십니다. 심해도 너무 하다. 잘못한 사람 뽑아서 벌주는 건 괜찮은데 이건 집단화 시켜서 이렇게 한꺼번에 벌준다면, 그럼 착한 사람은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 우리가 은근히 반발심 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는 대목 이예요.
“분노의 날에 능히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땅은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이건 봐주는 것 없이 조지는 겁니다. 그럼 해답은 뭐냐,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 중간에 나옵니다. “질투의 불에 삼키운다.” 질투하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동전 100원짜리 뒤를 보면 다보탑이 있습니까? 하여튼 동전의 양면이 색깔이 다르잖아요. 도안이 다르잖아요. 주님의 사랑 뒷면을 살짝 보시기 바랍니다. 질투가 나와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내가 준 사랑을 어떻게 저런 허접한 더러운 사랑과 맞먹으려고 하느냐, 내가 준 이 십자가의 피라는 희생을 어떻게 세상의 은과 금 같은 유로 같이 취급하느냐, 그러니까 내 사랑은 돈 주고 못산다 이 말입니다. 내가 니한테 주는 용서와 자비가 주어진 주님의 사랑은 이 땅의 어떤 값을 쳐도 줄 수가 없을 정도로 질투가 일어날 수밖에 그런 엄청난 사랑입니다. 그 정도로 내가 준 사랑은, 내가 준 사랑의 값을 내가 반드시 되찾아야겠다. 니가 이 사랑 버리고 딴 데 가면 내가 질투심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 이거 지독한 사랑 이예요. 지독한 사랑인데 아가 서에서는 죽음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라 하거든요.
니가 죽어서 지옥의 입구에 있더라도 나는 입구에서 메가지 쥐고 난 천국으로 이끌고 말겠다는 그런 야심과 고집과 오기가 주님의 사랑에서 이미 거기 담겨서 오늘 아침에 들은 대로 성령 세례와 함께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겁니다. 우리는 그 질투를 알아야 돼요.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세상에 어떤 것도 안 바꿀 정도로 세상보다 더 큰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 사랑이 있기에 너를 이렇게 힘들게 했던, 너를 이렇게 아프게 했던 그 보이지 않는 세상을 뭉개버리면서까지 주께서는 그걸 건지시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너희에게 주노라. 사도의 임무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려고 뛰어들다가는 실타래 얽히듯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서 오히려 우리가 세상적인 사람으로 점차 달라지고 변신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어느새 세상적인 것이 더 좋아져버린 우리의 망가진 기계, 하지만 주님의 질투가 담긴 사랑으로 기어이 건져내서 주님의 사랑이 이 세상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날마다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