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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3강-복도 저주도 없다(습1;12-`13)이근호130428

아빠와 함께 2013. 4. 28. 22:22

 

복과 저주도 없다(습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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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4-28 15:36 
복도 저주도 없다

2013년 4월 28일                              본문 말씀: 스바냐 1:12-13

(습 1:12, 개역)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습 1:13, 개역)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땅은 평범한 땅이 아닙니다. 그전에 많은 이방민족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주지는 황무지로 만들어버리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폐기물 처리장으로 데려가서 살게 하신 바가 됩니다. 이방민족들의 거주지가 쓰레기장으로 된 이유는 단지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언약이란 ‘여호와’라는 이름의 낯선 하나님의 등장으로 나타난 법입니다. 기존의 신을 섬기는 내용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 완전히 틀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존의 신은 인간의 입장을 반영해주고 호응해주는 신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계획과 언약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그 가나안 땅을 접수했다는 말은, 이제 쓰레기 무더기 위해 살면서 이방민족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됨을 요구받게 됩니다. 만약에 이스라엘마저 이방민족과 유사하게 살면 같이 쓰데기 더미에 합세하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이방민족들이 믿는 그 신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그 흔적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예상도 못한 저주를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만 움켜주고 살기만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과 더불어 저주도 혹독하게 경험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신명기 11:26-28에 보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라는 말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만 챙겨서 따로 살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반 나라에서는 복만 오면 그만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 민족만큼은 복과 저주의 출처를 알아야 합니다. 그 출처는 언약궤를 알려줍니다. 

신명기 11:29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8:33-35에 보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언약궤가 중심이 됩니다.

언약궤란 모든 언약의 의미가 집중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가 축복산인 그리심 산 밑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저주산이라는 에발산 밑에 놓여집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언약는 ‘저주’라는 환경 속에서 발휘되는 것으로 그 진가가 드러난다는 말이 됩니다. 즉 저주를 유발하는 율법이요 말씀이다.

말씀에 의해 유발된 저주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들이 기대한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 도리어 가짜 축복임이 드러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야말로 저주를 더욱 저주되게 하는 기준입니다. 이 저주와 만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앞에서 이스라엘은 저주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저주를 자기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축복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저주와 축복, 이 모두를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비록 인간들은 저주를 버리고 축복만 쥐려고 시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 축복이란 오로지 저주의 마땅함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해당됩니다.

즉 에발산에 있는 언약궤가 진정한 이스라엘 중심지임을 수용해야 맞은편에서 축복을 제대로 받게 됩니다. 이 언약궤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께서 몸소 이 땅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하나님이라서 세상을 대충 훑어보고서는 “더러운 세상, 신나게 심판이나 해버려야지”고 하늘로 훌쩍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 죄에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죄를 지고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궁극적인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아버지의 저주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로 이 취지가 옛날 구약성도들도 담당해야했고 신약에서는 성도들도 이 저주의 취지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과 저주의 기준이 결코 인간 자신에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선에서 잘되면 축복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들이 그 경로를 살펴보면 모두 남들의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잘된다는 것은 그로 인해 남들이 못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혼자서 성공했다는 것은 나로 인해 실패자가 발생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과 저주를 소유의 증가로 보면 안되고 진정한 복과 저주의 출처를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그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힘들게 살더라도 그 출처가 새록새록 다가오는 자들은 복이 되고, 반대로 재산이 늘어나고 만사가 형통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더라도 복의 출처가  언약적 희생에 있음을 잊게 되면 그것이 바로 저주의 관계에 놓여 있는 바입니다.

언약궤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됨을 아는 자들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떻게 생이 꼬인다고 할지라도 축복 노선 위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가 복과 저주의 기준을 알려야 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습1장12-13(복과 저주도 없다)1304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1장 12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6페이지입니다.

스바냐 1:12-13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건축할 때 원래 좋은 땅에 건축하지 않았거든요. 자꾸 집이 내려앉더라 이 말이죠. 나중에 그 기초를 파보니까 옛날 쓰레기장에다 기초공사가 안 된 상태에서 집을 올려버리니까 서서히 한쪽이 무너지죠. 이 예루살렘이라는 동네가 원래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한 땅입니다. 그 땅에는 쓰레기 적채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방민족을 쓰레기로 취급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쓰레기 무더기로 만들어버린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거기서 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쓰레기 취급해서 멸망시킨 기준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었습니다. 언약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켜서 거기 살게 했는데, 거기 들어가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 언약을 어겨버리면 오늘 본문에 13절의 말씀처럼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그들은 땅이 다 보통 땅하고 똑같은 땅인 줄 알았죠.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땅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집을 건축하나 주저앉게 돼 있어요.

사람은 지가 갖고 싶은 걸 가지면 그게 행복의 전부고 복이라고 보는데 하나님의 복은 따로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복이고 화고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냥 말로만 추상적인 관념만 신이지, 실생활에 우리 안에 실제로 주고 이런 건 없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 우리가 애쓰고 하는 만큼 우리가 얻게 돼 있다.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애초부터! 거기 쫄지 말고 겁내기 말자. 애초부터 복도 없고 화도 없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 벌준다는 거죠.

그러면 오늘 성경말씀은 간단하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래, 하나님 살아있어도 소용 없는기라. 복도 안 내리고 저주도 없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그들은 그 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일 거예요.

예를 들면 ‘하나님은 무서운 분’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겁나는 분, 겁나는 분’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다 이 말이죠. 에이고, 하나님 없어, 그때를 타겟으로 해서 그때를 노리고 벌주는 거예요. 기다리시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 이건 축복이고 우리 생각에 이건 벌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교체하기 위해서 그걸 갈아치우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한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그건 자기중심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복과 저주는 없습니다.

제가 목요일 날 대전에 갔었는데 분명히 일기예보에 비 온다고 돼 있어요. 비 온다고 했는데 대구에 보니까 비가 안 오는데 그렇지만 일기예보를 믿고, 우산을 무거운 가방에 가져갔는데 비가 오지를 않는 거예요. why? 왜 비가 안 와요? 내가 우산을 가져갔는데 왜 비가 안 와야 되죠? 아니 내가! 내가 우산을 가져갔으면 비가 이렇게 내려줘야 내 선택이 옳았다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산을 가져도 비가 안 오니까 그 다음에 무슨 생각 들겠어요? 내가 앞으로는 일기예보 믿는가 한번 보자. 그 다음부터 비가 온다 해도 우산을 안 들고 갈 거다 말이죠. 우산을 안 들고 가서 비 흠뻑 맞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말이죠.

내가 우산을 가졌기 때문에 비는 반드시 와야 된다는 그 의식,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애가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 애가 대학 들어갈 때나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시험이 일체 없어야 합당하다는 그 의식, 내 아들이 군에 갈 때는 군대가 들어가는 사람만 들어가도록 그렇게 돼야 된다는 그 사실, 그리고 내 아들이 군데 갔을 때는 일체 개성공단이고 뭐고 전쟁은 일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항상 나의 세계를 천국이라고 오인하는 가운데서 발생되는 복과 저주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떠나서 남의 생각을 전혀 접근이 불가합니다. 우리는 내 생각 가지고 남에게 다가가지, 남의 뜻에 동의하고 싶어서 가져가봤자 거기서도 내 뜻만 고집하게 돼 있습니다.

자, 이러한 입장에서 복과 저주를 안 내린다는 이러한 주장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그 약속의 땅이라는 그 바탕 자체하고 이미 충돌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방금 목사님 한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아니냐? 옛날에는 그랬는지 지금은 없는 이야기 아니냐. 지금은 약속의 땅이 없으니까 지금 이야기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여러분, 이 원리를 알고 있으면 참 좋아요.

성경이 66권인데 성경의 모든 책은 전체 내용을 한권에, 한권에 축소해 놓은 책입니다. 성경 창세기 속에 전체 성경이 거기 축소돼 있고, 레위기 속에 모든 것이 응축이 돼 있습니다. 출애굽기 속에 모든 게 응축이 돼 있고, 책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 문장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성경의 전체 내용이 거기 다 고스란히 응축이 돼 있습니다.

옛날이야기요? 옛날이야긴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옛날에 구약에 있던 약속의 땅이라는 그것이 원리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그 원리가 천국으로 이미 확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약속의 땅의 원리를 아신다면 그것은 바로 천국을 아시는 분이 되고, 약속의 땅의 복과 저주가 있는 취지가 무엇인가 아는 사람은 천국 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천국 반드시 가야 될 사람 이예요.

그렇다면 이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쉽게 말씀 던지겠습니다. 그러면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우리는 축복만 택하고 저주는 버리면 되겠습니다.‘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구약의 원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는 설날이 굉장히 좋은 날 이예요. 설날 되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딱 주도권을 쥐고 한복에 두루마기 입고 조상한테 제사지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설날 되면 자식이 8명인데 손자까지 죽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호명이 되면 가서 절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노란봉투에 그 전날 은행에서 빳빳한 돈을 넣어서 이름을 다 써요. 그것도 그냥 볼펜으로 안 쓰고 할아버지는 볼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양반집이라고 붓글씨로 ‘이 근호, 동생 이 근수, 이 근숙, 해서 봉투에다 돈을 세뱃돈을 빳빳하게 넣어 놓아요. 절하고 난 뒤에 잔소리 한번 듣고 그 다음에 봉투를 주는데, 봉투를 받았으면 자기 것을 받았으면 나가야 되지 않습니까? 안 나가는 거예요. 왜 안 나가는가, 만약에 제가 받았으면 나가야 되는데 안 나가요. 내 동생이 절하고 난 뒤에 ’얼마 받았니?‘ 꼭 이걸 물어요. 복만 받고 나가면 되는데 저주가 왜 궁금합니까?

우리가 복만 받고 가면 천국 가면 되고 지옥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요런 점이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운 점입니다. 신명기 11장 26절에 보면 어려운 부분이니까 그냥 읽을 테니까 듣기나 해 보세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거예요. 우리보고 복만 주시고 ‘빨리 꺼져, 나가.’ 이러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복만 받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고,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둔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둘 다를 우리 앞에 두겠다는 거예요. 우리 앞에!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쉽게, 쉽게 갑니다. 옛날 신은 복만 따내면 돼요. 세뱃돈 지 받아서 장난감 사러 가든지 맛있는 거 사러 가면 되는데, 새롭게 투입되는 진짜 하나님은 복을 가지란 말이 아니고 저주를 받으란 말이 아니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 너희 민족만큼은 유일하게 ‘아! 이게 복이구나. 아하, 이게 저주구나.’ 둘 다를 아는 유일한 민족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 가지란 말이 아니고, 이것이 복이고 이것은 저주구나, 둘 다를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문방구에 애들이 와서 ‘아저씨, 사탕 주세요. 아저씨, 장난감 주세요.’ 돈 주고 사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문방구 주인의 아들은 그렇게 ‘아빠, 이거 사  주세요.’ 이러면 안 되고, 이것은 가격은 얼마고 저것은 얼마고 저 쫀드기는 얼마고 장난감은 얼마고 공책을 얼마고, 모든 걸 아버지의 것을 같이 알아야 그 문방구와 더불어 같이 공유하면서 그 아버지와 아들로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천국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고, 천국과 지옥을 경영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동참하는 자로서 아들인 거예요. 그거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 생각은 내가 우산 가졌으면 비가 오면 좋겠다, 그걸로 끝나는데 내가 우산을 준비했는데 비가 안 올 때 왜 비가 오지 않았지? 라는 그거까지 끝까지 다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아버지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냥 구원만 챙기고 내빼지 마시고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우리 앞에 딱 둡니다. 두고 둘 다를 경험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셔서 딱 시찰하고 뒤에 ‘한 세상 참 더럽구먼. 내가 가서 심판해 버려야지.’ 그냥 왔다가 그냥 스윽~ 보고 ‘나 간다.’ 하고 그냥 올라가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저주도 알았고 복도 알고 죽음도 알고 그리고 십자가 부활도 경험하고 양쪽 다 경험하신 분이 진정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창조자, 메시아 자격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이 되는 거예요. 그냥 스윽~ 보고 ‘아이고, 꼴 보기 싫다. 저주해야지.’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몸소 저주를 체험하신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렇게 가입된 사람은, 부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는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그들은 그것을 몸소 체험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기 위해서는 새삼스럽게 죄를 지으면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 죄 어기기 위해서 죄를 체험할 필요가 있을까요? 옷 땡 처리를 한다 합시다. 땡 처리를 할 때 백화점 아침 10시 반에 문 열 때 와르르 쏟아놓을 때 방금 나온 브랜드, 고급 의상을 5천원에 판다 하면 서로 가지려고 하거든요. 땡 처리할 때는 옷이 헐은 것도 문제지만 자기 체형에 맞아야 골라 가져갈 수 있어요. 땡 처리 주인이 하는 말이 ‘여러분 다 손 떼고 여기 있는 의류가 5천 점인데 5천 점이 다 맞는 사람은 몽땅 다 가져가기.’라는 땡 처리. 원피스고 투피스고 다 맞아야 돼, 나에게 맞는 것만 돈 주고 그거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몽땅 다 가져가야 돼요.

율법이란 게 뭐냐 하면 우리 모든 것에 다 적용되는 율법입니다. 요건 내가 지킬 만한 것, 요건만 지켜서 복 받아야지.‘ 이런 건 없어요. 모든 게 우리가 딱 다 지켜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는데 달랑 하나만 줬습니까? 딱 하나 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말을 들어라, 다른 신 말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딱 달랑 하나 줬거든요. 그런데 여호와 입에서 나온 말씀이 달랑 하나였습니까? 여호와 말씀을 들어라, 해놓고 내 앞에 쏟아지는 말씀은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래서 딴 거는 지켰다고 뭐 하나 놓쳐 버리면 놓친 것이 안 맞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고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것은 율법이 한 가지만 아니고 많다는 거예요. 많다는 것을 두고두고 대대로 자손 대대로 과연 지킬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실험하고, 실험하고 실험해 보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성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매일같이 실험하는 인생이 됩니다. 저는 아마존의 선교사 허 운석 선교사님의 일대기 같은 거나 다큐멘터리 나온 걸 보고, 글도 보고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듣고 했는데, 들을 때마다 내가 만약에 아마존에 갔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존에 가도 마찬가지로 지금 대구에 있는 것처럼 똑같이 실험할 거예요. 어떤 실험? 어떤 말씀이 내 체형에 안 맞는가를 실험할 거예요. 아마존이냐, 대구냐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항상 이 말씀은 나를 비껴간다는 것, 내가 그 말씀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는 겁니다.

대전의 어떤 권사님 부부는 영천에 살고 싶다는데 영천에서 두릅 캐고 산나물 캐는 건 좋은데 그 두 분이 대전 사시다가 영천에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영천 살면서 왜 나는 말씀대로 못사느냐를 영천 가서 살아야 돼요? 영천 사시는 분도 계시지만 영천 사시니까 말씀이 잘 지켜지던가요? 아니죠? 영천 사니까 ‘야! 가만있어도 말씀이 잘 지켜지네.’ 이렇게 되던가요? 아니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저주를 체험하듯이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말씀(율법)을 통해서 왜 우리가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늘 체험을 해야 돼요. 이렇게 저주 쪽에서 먼저 들어가는 이유가 그거부터 말씀드릴게요. 신명기 11장 19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해놓고 거기 언약궤를 들고 가는데 이 언약궤가 여호수아 8장에 보게 되면 언약궤를 에발산 밑에 둬요. 에발산은 무슨 산이다? 저주 산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 그러니까 그 약속의 땅은 뭐냐, 너희들이 생각도 못한 저주와 축복의 모든 결정적인 기준은 니들이 내가 우산을 가져가면 비가 와야 되고 우산이 없으면 비가 안 와야 되고, 이런 니 중심에서 나온 복과 저주가 아니고, 복과 저주가 나오는 출처가 이 하나님의 언약궤에서만 복과 저주가 새롭게, 새롭게 나온다는 걸 그들은 경험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언약궤의 완성이 뭐냐, 새 언약이고 그 새 언약을 신약에 보면 예수님의 살과 예수의 피, 죽음,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그 십자가 피의 효과가 없는 사람은 저주, 피의 효과를 본 사람은 축복이고 그걸 우리 앞에 두노니, 왜 우리 앞에 두느냐 하면, 그렇다고 십자가 피를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고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이 취지를 받았고, 그 예수님의 취지가 우리 속에 와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세계가 바로 천국인 겁니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두는 이유는 장차 오실 하나님께서 축복 기준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으면 축복이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신약에서는 알려주지만 구약에서는 몰랐다 이 말이거든요.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도 철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축복과 저주가 이루어지는 땅으로 그들을 데려가요. 데리고 가서 그 언약궤를 앞장세우는데 언약궤 안에는 모든 율법이 다 나오거든요. 그래서 율법이 나오니까 거기서 잘난 체하고 이정도 하면 복 받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언약궤 앞에서, 들어가는 약속의 땅에서 막상 살려고 하니까 죄 안 질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약속의 땅에서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다 드러내니까 죄 안 질 수가 없죠. 광야에서 물도 없고 양식 없는데 원망 안 할 수가 없죠. 다 그렇게 나오는데 ‘아! 우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거룩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복이라 하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확고히 아는 거죠. 그럴 때 그 율법의 완성에서 나오는 그 어린양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살 수도 없는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용서라는 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을 속죄일을 통해서 그들은 다 누리게 되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에서 쫓겨나게 만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가 없다고 한 것은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왜냐 하면 내가 뭔가 가져야, 부자 돼야 복이고, 내가 어려우면 저주라고 여기는 내 중심에서 나오는 그러한 복과 저주,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저주로 교체가 돼야 돼요. 우리가 내가 잘 살아야 된다는 것, 먼저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내가 잘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내 대신 파산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자본주의의 그 원리를 연구해 보면 그래요. 내가 뭔가 수입이 들어왔다는 건 그만큼 잃어버린 사람이 저쪽 구석 산골에 누군가 있으니까 수입이 들어오는 거예요.

상주에 가면 오이 생산을 많이 합니다. 오이 생산을 하는데 오이가 잘 됐다는 겁니다. 오이가 잘 됐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가만히 들어보니까 상대적으로 남보다 많은 경매 값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집에 사는 사람은 그 귀농해서 오이 농사 잘 된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가격을 좋게 쳐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더 좋은 상품을 옆 사람이 와서 개발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정도 해서는 그냥 오이 값을 받았는데 뭔가 서울에서 대기업에서 엔지니어가 와서 9년 만에 오이 생산을 해서 성공했는데 그동안 연구해서 독학해서 성공한 건 좋은데, 연구도 못하고 독학도 못한 이쪽 집은? 옆집에 새로 날라 온 돌 때문에 박힌 돌이 오이 값을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니까요.

그래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뭐든지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복과 저주라고 할 수가 없어요.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일체 그러한 모든 잘남과 못남과 가난과 부자를 일체 묻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체 ‘너 가난했어? 오이 잘 키웠어? 오이 망했어?’ 이런 걸 묻지도 않고 다른 기준을 가지고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새 언약! 언약궤의 완성 새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내 중심이고 내가 잘 될 때는 좋은 하나님이고 내가 못 되면 나쁜 하나님으로 이해했던 저희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위하여 피 흘려주시고 저주 대신 받아주신 대신 담당하신 그 심판이 용서가 되어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그 예수님의 용서만 사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스바냐 1:12-13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건축할 때 원래 좋은 땅에 건축하지 않았거든요. 자꾸 집이 내려앉더라 이 말이죠. 나중에 그 기초를 파보니까 옛날 쓰레기장에다 기초공사가 안 된 상태에서 집을 올려버리니까 서서히 한쪽이 무너지죠. 이 예루살렘이라는 동네가 원래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한 땅입니다. 그 땅에는 쓰레기 적채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방민족을 쓰레기로 취급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쓰레기 무더기로 만들어버린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거기서 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쓰레기 취급해서 멸망시킨 기준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었습니다. 언약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켜서 거기 살게 했는데, 거기 들어가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 언약을 어겨버리면 오늘 본문에 13절의 말씀처럼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그들은 땅이 다 보통 땅하고 똑같은 땅인 줄 알았죠.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땅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집을 건축하나 주저앉게 돼 있어요.

사람은 지가 갖고 싶은 걸 가지면 그게 행복의 전부고 복이라고 보는데 하나님의 복은 따로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복이고 화고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냥 말로만 추상적인 관념만 신이지, 실생활에 우리 안에 실제로 주고 이런 건 없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 우리가 애쓰고 하는 만큼 우리가 얻게 돼 있다.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애초부터! 거기 쫄지 말고 겁내기 말자. 애초부터 복도 없고 화도 없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 벌준다는 거죠.

그러면 오늘 성경말씀은 간단하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래, 하나님 살아있어도 소용 없는기라. 복도 안 내리고 저주도 없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그들은 그 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일 거예요.

예를 들면 ‘하나님은 무서운 분’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겁나는 분, 겁나는 분’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다 이 말이죠. 에이고, 하나님 없어, 그때를 타겟으로 해서 그때를 노리고 벌주는 거예요. 기다리시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 이건 축복이고 우리 생각에 이건 벌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교체하기 위해서 그걸 갈아치우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한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그건 자기중심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복과 저주는 없습니다.

제가 목요일 날 대전에 갔었는데 분명히 일기예보에 비 온다고 돼 있어요. 비 온다고 했는데 대구에 보니까 비가 안 오는데 그렇지만 일기예보를 믿고, 우산을 무거운 가방에 가져갔는데 비가 오지를 않는 거예요. why? 왜 비가 안 와요? 내가 우산을 가져갔는데 왜 비가 안 와야 되죠? 아니 내가! 내가 우산을 가져갔으면 비가 이렇게 내려줘야 내 선택이 옳았다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산을 가져도 비가 안 오니까 그 다음에 무슨 생각 들겠어요? 내가 앞으로는 일기예보 믿는가 한번 보자. 그 다음부터 비가 온다 해도 우산을 안 들고 갈 거다 말이죠. 우산을 안 들고 가서 비 흠뻑 맞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말이죠.

내가 우산을 가졌기 때문에 비는 반드시 와야 된다는 그 의식,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애가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 애가 대학 들어갈 때나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시험이 일체 없어야 합당하다는 그 의식, 내 아들이 군에 갈 때는 군대가 들어가는 사람만 들어가도록 그렇게 돼야 된다는 그 사실, 그리고 내 아들이 군데 갔을 때는 일체 개성공단이고 뭐고 전쟁은 일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항상 나의 세계를 천국이라고 오인하는 가운데서 발생되는 복과 저주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떠나서 남의 생각을 전혀 접근이 불가합니다. 우리는 내 생각 가지고 남에게 다가가지, 남의 뜻에 동의하고 싶어서 가져가봤자 거기서도 내 뜻만 고집하게 돼 있습니다.

자, 이러한 입장에서 복과 저주를 안 내린다는 이러한 주장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그 약속의 땅이라는 그 바탕 자체하고 이미 충돌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방금 목사님 한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아니냐? 옛날에는 그랬는지 지금은 없는 이야기 아니냐. 지금은 약속의 땅이 없으니까 지금 이야기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여러분, 이 원리를 알고 있으면 참 좋아요.

성경이 66권인데 성경의 모든 책은 전체 내용을 한권에, 한권에 축소해 놓은 책입니다. 성경 창세기 속에 전체 성경이 거기 축소돼 있고, 레위기 속에 모든 것이 응축이 돼 있습니다. 출애굽기 속에 모든 게 응축이 돼 있고, 책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 문장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성경의 전체 내용이 거기 다 고스란히 응축이 돼 있습니다.

옛날이야기요? 옛날이야긴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옛날에 구약에 있던 약속의 땅이라는 그것이 원리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그 원리가 천국으로 이미 확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약속의 땅의 원리를 아신다면 그것은 바로 천국을 아시는 분이 되고, 약속의 땅의 복과 저주가 있는 취지가 무엇인가 아는 사람은 천국 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천국 반드시 가야 될 사람 이예요.

그렇다면 이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쉽게 말씀 던지겠습니다. 그러면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우리는 축복만 택하고 저주는 버리면 되겠습니다.‘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구약의 원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는 설날이 굉장히 좋은 날 이예요. 설날 되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딱 주도권을 쥐고 한복에 두루마기 입고 조상한테 제사지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설날 되면 자식이 8명인데 손자까지 죽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호명이 되면 가서 절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노란봉투에 그 전날 은행에서 빳빳한 돈을 넣어서 이름을 다 써요. 그것도 그냥 볼펜으로 안 쓰고 할아버지는 볼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양반집이라고 붓글씨로 ‘이 근호, 동생 이 근수, 이 근숙, 해서 봉투에다 돈을 세뱃돈을 빳빳하게 넣어 놓아요. 절하고 난 뒤에 잔소리 한번 듣고 그 다음에 봉투를 주는데, 봉투를 받았으면 자기 것을 받았으면 나가야 되지 않습니까? 안 나가는 거예요. 왜 안 나가는가, 만약에 제가 받았으면 나가야 되는데 안 나가요. 내 동생이 절하고 난 뒤에 ’얼마 받았니?‘ 꼭 이걸 물어요. 복만 받고 나가면 되는데 저주가 왜 궁금합니까?

우리가 복만 받고 가면 천국 가면 되고 지옥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요런 점이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운 점입니다. 신명기 11장 26절에 보면 어려운 부분이니까 그냥 읽을 테니까 듣기나 해 보세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거예요. 우리보고 복만 주시고 ‘빨리 꺼져, 나가.’ 이러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복만 받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고,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둔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둘 다를 우리 앞에 두겠다는 거예요. 우리 앞에!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쉽게, 쉽게 갑니다. 옛날 신은 복만 따내면 돼요. 세뱃돈 지 받아서 장난감 사러 가든지 맛있는 거 사러 가면 되는데, 새롭게 투입되는 진짜 하나님은 복을 가지란 말이 아니고 저주를 받으란 말이 아니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 너희 민족만큼은 유일하게 ‘아! 이게 복이구나. 아하, 이게 저주구나.’ 둘 다를 아는 유일한 민족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 가지란 말이 아니고, 이것이 복이고 이것은 저주구나, 둘 다를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문방구에 애들이 와서 ‘아저씨, 사탕 주세요. 아저씨, 장난감 주세요.’ 돈 주고 사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문방구 주인의 아들은 그렇게 ‘아빠, 이거 사  주세요.’ 이러면 안 되고, 이것은 가격은 얼마고 저것은 얼마고 저 쫀드기는 얼마고 장난감은 얼마고 공책을 얼마고, 모든 걸 아버지의 것을 같이 알아야 그 문방구와 더불어 같이 공유하면서 그 아버지와 아들로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천국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고, 천국과 지옥을 경영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동참하는 자로서 아들인 거예요. 그거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 생각은 내가 우산 가졌으면 비가 오면 좋겠다, 그걸로 끝나는데 내가 우산을 준비했는데 비가 안 올 때 왜 비가 오지 않았지? 라는 그거까지 끝까지 다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아버지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냥 구원만 챙기고 내빼지 마시고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우리 앞에 딱 둡니다. 두고 둘 다를 경험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셔서 딱 시찰하고 뒤에 ‘한 세상 참 더럽구먼. 내가 가서 심판해 버려야지.’ 그냥 왔다가 그냥 스윽~ 보고 ‘나 간다.’ 하고 그냥 올라가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저주도 알았고 복도 알고 죽음도 알고 그리고 십자가 부활도 경험하고 양쪽 다 경험하신 분이 진정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창조자, 메시아 자격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이 되는 거예요. 그냥 스윽~ 보고 ‘아이고, 꼴 보기 싫다. 저주해야지.’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몸소 저주를 체험하신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렇게 가입된 사람은, 부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는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그들은 그것을 몸소 체험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기 위해서는 새삼스럽게 죄를 지으면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 죄 어기기 위해서 죄를 체험할 필요가 있을까요? 옷 땡 처리를 한다 합시다. 땡 처리를 할 때 백화점 아침 10시 반에 문 열 때 와르르 쏟아놓을 때 방금 나온 브랜드, 고급 의상을 5천원에 판다 하면 서로 가지려고 하거든요. 땡 처리할 때는 옷이 헐은 것도 문제지만 자기 체형에 맞아야 골라 가져갈 수 있어요. 땡 처리 주인이 하는 말이 ‘여러분 다 손 떼고 여기 있는 의류가 5천 점인데 5천 점이 다 맞는 사람은 몽땅 다 가져가기.’라는 땡 처리. 원피스고 투피스고 다 맞아야 돼, 나에게 맞는 것만 돈 주고 그거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몽땅 다 가져가야 돼요.

율법이란 게 뭐냐 하면 우리 모든 것에 다 적용되는 율법입니다. 요건 내가 지킬 만한 것, 요건만 지켜서 복 받아야지.‘ 이런 건 없어요. 모든 게 우리가 딱 다 지켜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는데 달랑 하나만 줬습니까? 딱 하나 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말을 들어라, 다른 신 말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딱 달랑 하나 줬거든요. 그런데 여호와 입에서 나온 말씀이 달랑 하나였습니까? 여호와 말씀을 들어라, 해놓고 내 앞에 쏟아지는 말씀은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래서 딴 거는 지켰다고 뭐 하나 놓쳐 버리면 놓친 것이 안 맞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고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것은 율법이 한 가지만 아니고 많다는 거예요. 많다는 것을 두고두고 대대로 자손 대대로 과연 지킬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실험하고, 실험하고 실험해 보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성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매일같이 실험하는 인생이 됩니다. 저는 아마존의 선교사 허 운석 선교사님의 일대기 같은 거나 다큐멘터리 나온 걸 보고, 글도 보고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듣고 했는데, 들을 때마다 내가 만약에 아마존에 갔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존에 가도 마찬가지로 지금 대구에 있는 것처럼 똑같이 실험할 거예요. 어떤 실험? 어떤 말씀이 내 체형에 안 맞는가를 실험할 거예요. 아마존이냐, 대구냐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항상 이 말씀은 나를 비껴간다는 것, 내가 그 말씀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는 겁니다.

대전의 어떤 권사님 부부는 영천에 살고 싶다는데 영천에서 두릅 캐고 산나물 캐는 건 좋은데 그 두 분이 대전 사시다가 영천에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영천 살면서 왜 나는 말씀대로 못사느냐를 영천 가서 살아야 돼요? 영천 사시는 분도 계시지만 영천 사시니까 말씀이 잘 지켜지던가요? 아니죠? 영천 사니까 ‘야! 가만있어도 말씀이 잘 지켜지네.’ 이렇게 되던가요? 아니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저주를 체험하듯이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말씀(율법)을 통해서 왜 우리가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늘 체험을 해야 돼요. 이렇게 저주 쪽에서 먼저 들어가는 이유가 그거부터 말씀드릴게요. 신명기 11장 19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해놓고 거기 언약궤를 들고 가는데 이 언약궤가 여호수아 8장에 보게 되면 언약궤를 에발산 밑에 둬요. 에발산은 무슨 산이다? 저주 산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 그러니까 그 약속의 땅은 뭐냐, 너희들이 생각도 못한 저주와 축복의 모든 결정적인 기준은 니들이 내가 우산을 가져가면 비가 와야 되고 우산이 없으면 비가 안 와야 되고, 이런 니 중심에서 나온 복과 저주가 아니고, 복과 저주가 나오는 출처가 이 하나님의 언약궤에서만 복과 저주가 새롭게, 새롭게 나온다는 걸 그들은 경험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언약궤의 완성이 뭐냐, 새 언약이고 그 새 언약을 신약에 보면 예수님의 살과 예수의 피, 죽음,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그 십자가 피의 효과가 없는 사람은 저주, 피의 효과를 본 사람은 축복이고 그걸 우리 앞에 두노니, 왜 우리 앞에 두느냐 하면, 그렇다고 십자가 피를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고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이 취지를 받았고, 그 예수님의 취지가 우리 속에 와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세계가 바로 천국인 겁니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두는 이유는 장차 오실 하나님께서 축복 기준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으면 축복이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신약에서는 알려주지만 구약에서는 몰랐다 이 말이거든요.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도 철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축복과 저주가 이루어지는 땅으로 그들을 데려가요. 데리고 가서 그 언약궤를 앞장세우는데 언약궤 안에는 모든 율법이 다 나오거든요. 그래서 율법이 나오니까 거기서 잘난 체하고 이정도 하면 복 받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언약궤 앞에서, 들어가는 약속의 땅에서 막상 살려고 하니까 죄 안 질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약속의 땅에서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다 드러내니까 죄 안 질 수가 없죠. 광야에서 물도 없고 양식 없는데 원망 안 할 수가 없죠. 다 그렇게 나오는데 ‘아! 우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거룩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복이라 하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확고히 아는 거죠. 그럴 때 그 율법의 완성에서 나오는 그 어린양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살 수도 없는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용서라는 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을 속죄일을 통해서 그들은 다 누리게 되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에서 쫓겨나게 만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가 없다고 한 것은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왜냐 하면 내가 뭔가 가져야, 부자 돼야 복이고, 내가 어려우면 저주라고 여기는 내 중심에서 나오는 그러한 복과 저주,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저주로 교체가 돼야 돼요. 우리가 내가 잘 살아야 된다는 것, 먼저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내가 잘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내 대신 파산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자본주의의 그 원리를 연구해 보면 그래요. 내가 뭔가 수입이 들어왔다는 건 그만큼 잃어버린 사람이 저쪽 구석 산골에 누군가 있으니까 수입이 들어오는 거예요.

상주에 가면 오이 생산을 많이 합니다. 오이 생산을 하는데 오이가 잘 됐다는 겁니다. 오이가 잘 됐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가만히 들어보니까 상대적으로 남보다 많은 경매 값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집에 사는 사람은 그 귀농해서 오이 농사 잘 된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가격을 좋게 쳐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더 좋은 상품을 옆 사람이 와서 개발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정도 해서는 그냥 오이 값을 받았는데 뭔가 서울에서 대기업에서 엔지니어가 와서 9년 만에 오이 생산을 해서 성공했는데 그동안 연구해서 독학해서 성공한 건 좋은데, 연구도 못하고 독학도 못한 이쪽 집은? 옆집에 새로 날라 온 돌 때문에 박힌 돌이 오이 값을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니까요.

그래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뭐든지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복과 저주라고 할 수가 없어요.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일체 그러한 모든 잘남과 못남과 가난과 부자를 일체 묻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체 ‘너 가난했어? 오이 잘 키웠어? 오이 망했어?’ 이런 걸 묻지도 않고 다른 기준을 가지고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새 언약! 언약궤의 완성 새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내 중심이고 내가 잘 될 때는 좋은 하나님이고 내가 못 되면 나쁜 하나님으로 이해했던 저희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위하여 피 흘려주시고 저주 대신 받아주신 대신 담당하신 그 심판이 용서가 되어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그 예수님의 용서만 사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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