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9강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21

 

2011 겨울수련회(9강)

 

자, 시작합시다. 식사 전에 공부한 모형과 실체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봅시다. 70이레로 모든 죄는 없어집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죄가 없어진다는 말은 아니고, 하나님이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가 없어지죠.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역사적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이스라엘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악마의 정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한 것이 역사적 이스라엘이죠.

 

마귀의 정체가 뭐냐 하면, 이방 나라가 마귀인줄 알았더니만(그들도 물론 마귀지만) 십자가 사건 주변에서 가장 십자가 사건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그들(역사적 이스라엘)이 마귀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외쳐지는 그곳에 마귀도 등장하게 됩니다.

 

70이레에서 7이라는 바탕이 있는데, 이 바탕에 대해서 중요한 글이 있어요. 교재 17페이지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쉽게 정리해서, 아무리 인간역사가 길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7년에 불과한데, 이는 그들이 짐승이기 때문에 자신이 짐승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기간이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7년이면 충족된다는 말이다.]

 

‘7년이면 충족된다’는 말은, 7년(1이레)을 통해서(‘이레’라는 것은 주님이 주체가 되셔서 정해놓은 그 때와 기간) 예수님을 드러내는데 충분한데, 이 1이레(7년) 동안에 느부갓네살이 짐승 됨으로 말미암아 결국 예수님에 의하면, 7이라는 인간 역사는 짐승의 역사입니다. 그 짐승의 역사에서 느부갓네살과 주님이 만나서 결정된 상태가 역사 끝 날까지 바벨론 제국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금 신상이 서 있는데 역사라는 지층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로써 엎어짐으로 말미암아, 금 신상이 엎어진 그 자세가 남아있는 모든 역사의 시작이죠. 그러면 이것이 뭐가 되는가 하면, 권력(권세, 힘) 덩어리인데 이것이 악마의 권세가 되는 겁니다. 이 악마의 권력 덩어리가 무엇을 하나 키웠어요. 그게 뭔가? 62이레 동안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키워 왔습니다. 이것이 62이레고, 그 키웠던 성전 중심이 1이레 동안에 전개되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맞닥뜨리죠.

 

62이레의 의미를 다니엘 9장에서는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한 기름 부은 왕이 등장할 때까지 62이레가 진행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부은 왕은 메시아를 말합니다. 메시아가 등장하면서 62이레는 끝나고 1이레 시대에 돌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잘 키운 유대교가 악마의 힘에 의해서 이렇게 구축되어서 예수님과 맞닥뜨리게 되어 있고, 이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기어이 죽게 합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뭔가 하면, ‘죽는 하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죽는 하나님’ 이 말에 어패가 있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하나님이고, 인자 되시는 분이고, 그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우리는 ‘죽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쪽 사람들이 보면 하나님은 죽을 수가 없지요. 왜? 하나님 자체가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생명 주시는 분이 죽으면, 남에게는 생명을 주시면서 자신의 생명은 관리 못하는 분이 되잖아요.

 

모든 생명은 죽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안 죽는다는 이 신학, 인간의 상식들이 모여서 진짜 하나님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서론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서론을 읽으면 문장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생략하고 간단하게 넘어갑니다.

 

밑에 7이레, 중간에 62이레, 끝에 1이레가 있는데, 이 이레에서 70년의 모든 죄가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던 죄 그리고 죄 값이라는 것은 누구만 알고 있습니까? 이것은 1이레에 오실 기름 부은 왕, 메시아가 등장해야 비로소 아는 거잖아요.

 

자, 그렇다면 봅시다. 7이레에서 62이레, 1이레로 가는데(이것이 모형이고 그림자인데) 이 방향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7에서 62로, 62에서 1로 시간이 흘러가는데, 그 의미는 어떻게 돼요? 1이레에서 62이레를 통과해서 7이레로 이렇게 되겠지요.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이 이스라엘의 죄와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죄와 그 죄의 해결책 이 모든 것이 1이레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이제부터 진짜 어렵습니다. 모형과 실체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실체지요. 모형을 본떠서 실체를 만듭니까, 실체를 본떠서 모형을 만듭니까? 하늘의 성전이 먼저 있고, 그것을 본떠서 시내산 밑 땅에 성전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빠진 것이 있어요. 땅에 성전을 만들 때는 무엇을 감안하는가 하면, 땅의 속성을 감안해서 만들어요.

 

하늘에 성전이 있는데, 이것은 마지막 때 다 드러나요. 이 성전 안에 뭐가 있는가 하면, 생명책이 있습니다. 이 생명책이 마지막 때 드러나는데, 이 생명책 앞에 뭔가 붙는 거예요. 붙는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야 윤곽이 다 드러나는데(모세 때는 그냥 생명책인데) 앞에 붙은 것이 뭘까요? ‘어린 양’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생명책’이 됩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생명책’은 기록자가 누구입니까? 명단을 확정하고 기록한 분이 누구십니까? 어린양이죠. 33세 된 예수라는 청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에요.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이것이 원본이고 실체인데, 생명책이 있고 성전이 있다면, 그 모형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는데 이것은 실체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모형입니다.

 

모형은 땅에 있는 요소가 가미되어서 모형이 형성됩니다. 이 ‘땅의 요소’라는 것이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죄와 저주가 섞여서 모형이 됩니다. 그러면 실체 되시는 분이 모형을 완성하려면 실체 되시는 분이 모형을 거쳐서 실체답게 하려면 천상에서는 영광 받으신 어린양이지만 지상에서는 어떤 것이 실체입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저주 받으시는 그것이 주 되심의 실체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피 흘리심을 위하여 그전에 모형들이 마련되게 되겠지요.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주께서 어떻게 하다보니까 피 흘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죽으신다는 의미. 처음부터 지상에서 피를 흘리는 주라야 진짜 주가 되신다고 성부와 성자가 이미 창세전에 합의된 사항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전면 거부해요.

 

신학자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데(이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다는 그런 아이디어는 없었고), 마귀가 와서 유혹하는 바람에(그러면 하나님은 마귀 하나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분이 됩니다) 인간이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 그런데 그 선악과는 누가 만든 겁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관공서에 조경을 위해서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그 나무 하나하나에 팻말을 붙여 놓았어요. [관리 책임자: 000] 이런 것 보셨지요? 그러면 선악과의 책임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다 못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너무 죄 지은 인간들이 불쌍한데, 그렇다고 그냥 용서해 주기는 미안하고(하나님은 사랑의 속성뿐 아니라 공의의 속성도 지닌 분이니까) 그래서 죄 값을 하나님 쪽에서 치루면 사랑도 충족되고 공의도 시행되니까 그런 방법을 취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죽으심은 인간이 죄 짓기 전까지는 전혀 계획도 없었는데, 죄 짓고 난 후 인간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 차후 도입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수십 년 동안 듣지 않았습니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속성이 다 담겨있어서 전혀 하자가 없는 것 같은데 뭐가 빠졌습니까?

 

선악과 따먹은 후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왜 차단시켰어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영생 주면 되잖아요. 왜 그것이 안 됩니까? 결국 신학자들이 뭘 풀지 못하는가 하면,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왜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는가?’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러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봐줘야 그것이 사랑인데,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철없는 아이가 아빠 피우는 담배를 꺼내 피웠는데, 그러면 “다음부터는 담배 피우지 마라.” 하고 담배를 잘 숨기면 끝날 문제지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 라고 집에서 쫓아내면 너무 가혹하잖아요.

 

하나님이 생명나무 길을 차단하는 것은 두 번 다시 볼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너는 사람이 아니고 흙이다. 그러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늘에 숨겨진 사람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첫째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모형이었다(롬5:14).”는 겁니다. 어떤 모형? 선악과로 주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유일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선악과를 심지 말지 왜 심어 놓았는가? 그것은 처음 원인이 되시고 형상이 되신 그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주가 되시는 그 기준에 따라서 주 되심에 무엇이 부정적이고, 주 되심에 무엇이 안 맞는 요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를 심어 놓고 나중에 선악과는 회복하지 않고 없애버린 겁니다. 그게 바로 모형이에요.

 

제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것처럼 여러분들 표정이 따가운데, 제가 중간에 생략한 것이 여러 가지 있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계속 봅시다.

 

여기 선악과 있고 생명나무도 있잖아요. 이 두 나무가 에덴동산을 지탱합니다. 그러면 인간 있음 자체가 인간입니까?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나무도 없고 아담과 하와만 있으면 이것이 에덴동산이냐 이 말입니다. 에덴동산 아니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좋은 동산에 인간을 살게 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따먹지 말라는 나무가 심겨진 사실은, 이 에덴동산의 의미가 피조물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모형)로 보여줄 장차 오실 예수님에게 의미를 두고 이 에덴동산이 있는 거예요. 에덴동산은 인간들이 사는 놀이터가 아니란 말이지요.

 

인간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만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만 만들었습니까? 생명나무, 선악과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다 만든 거예요. 자신이 만든 것들을 연결시켜야 예수님의 주 되심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를 훼손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없고 생명나무만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있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가, 나는 그런 목적의 인간은 안 만들었어!” 라고 추방시켜 버린 겁니다. 그리고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환원이죠.

 

‘그러면 인간은 없고 주님만 있으면 남는 것이 없잖아요.’ 라고 할 수 있는데, 남는 게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는 그 약속만이 남아 있어요. 그 약속은 여자의 후손이 해야 될 숙제(기능)입니다. 그 기능을 위하여 뱀의 후손도 있어야 되고, 여자의 후손도 있어야 합니다.

 

그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다음부터는 인간이면서도 같은 인간이 아니고 분류되는 인간(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이 짝을 이루어서 창세기 4장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나눠지지요. 그냥 이삭을 주시면 되는데 이스마엘을 먼저 낳게 해서, 그 자식은 내팽개치고, 태가 닫힌 가운데 태어난 아이(없는데서 있게 된) 이삭을 통해서 약속의 노선에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모든 인간은 없는데서 있고, 죽은 데서 살리지 아니하면 이것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고 진짜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피는 뭔가? 그들이 구원 받는데 장차 오실 메시아와 연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연계되는 방법이 뭔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뭐죠? 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 지은 이 지상에서의 모형 말고 실체는 바로 피 흘리시는 주의 모습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자기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란 것을 드러내면서 주의 주 되심이 드러나는 거예요.

 

십자가 피가 사후(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계획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창세전부터 이미 아버지와 아들이 결정한 것입니다. 피 흘림으로 구원 얻게 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십니다. 그때 그분이 바로 주가 되시고, 그때 비로소 모든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하나)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만개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 둘만 달랑 생각해서 예수님을 차후에 추가된 그런 인물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모독하는 적그리스도의 신학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7이레와 1이레에서 ‘7이레 쪽에서 1이레 쪽으로 움직인다.’ 또는 ‘70이레가 1이레로 움직인다.’ 라고 교재 25페이지 ‘결론’ 3줄 위에 나와 있습니다. [다니엘은 70에서 1로 나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즉 70년 포로 잡혀간 그들이지만 그 시간적 의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한 분, 인자 같은 분에게 종속된 ‘인자의 나라’의 백성으로 자리 잡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 위에 있는 몰트만 이야기나 네비나스 이야기를 잠간 설명하고 지나갑시다. 인간 내부에는 시간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의식은 누구 중심인가 하면, 내 몸 중심입니다. 그러면 세 사람이 있다면 세 사람 시간이 다 다르겠지요.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은 수학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갑니다. 후설의 현상학에 보면, ‘시간이란 것은 자기 몸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시간을 만들어 낸다면, 이 시간 속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바로 기억이 들어 있어서 이 기억이 뭉쳐져 현재를 만들고, 또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현재라는 것은 기억의 뭉치입니다. 기억의 누적인데, 그러면 최근에 있던 기억이 제일 위에 있고, 그 전 기억은 그 밑에 있고, 아주 오래된 기억은 보다 더 밑에 깔리겠지요.

 

그러면 최근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아쉬운 부분은 채우고, 좋지 않은 부분은 수정해서 미래를 꿈꿉니다. 그러면 미래는 묵시가 되고 기억은 역사가 됩니다. 기억한 것을 근거로 해서 모자라는 것은 묵시로 채우겠다는 생각을 모든 인간의 몸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몸을 가지고 구원을 받겠다고 한다면 필히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미-아직]이라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 자기 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천사의 몸이 아니거든요. 위험 앞에서 불안에 떨고, 알 수 없는 공포가 찾아오고, 한 끼 안 먹으면 배고프고. 그러니까 아직 구원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누구 몸이? 내 몸이.

 

이렇게 되면 성경 전체가 내 몸 중심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시간관과 내 몸 중심의 시간관이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 몸의 구원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것을 ‘우주론’이라고 함)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너무 우리 작은 몸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을 넓게 보게 되면, 주님께서 대자연을 움직이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관이라는 겁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중심의 우주관인데, 이제는 이스라엘의 영역을 벗어나서 온 우주의 구원을 위해 신약 성경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우주론 안에 뭐가 들어 있겠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 들어 있지요. 옛날에는 교회가 개인 영혼을 위해서 외쳤다면, 이제는 좀 범위를 넓혀서 “환경운동에도 나서고, 경제 정의 실천에도 참여해서 이 우주 환경을 살리자. 이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창세기 1장 28절 말씀처럼 다스리고 정복하는 문화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고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한 손에 쓰레기봉투 들었습니까? 탄소 배출량 줄이자고 설교하셨습니까?

 

몰트만도 그렇게 감리교 이00 목사라는 사람도 그렇게 주장하고. 이들은 세상 모든 문제에 다 간섭해요. 환경, 경제, 정치 어느 분야에도 다 개입해요. 제발 교회에서만 구원이야기 하지 말고 교회 바깥에도 주님의 역사와 일이 있다고 외쳐야 현대인의 삶의 자리에 침투할 수 있는 진정한 복음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성경은 그때그때 마다 필요한 계시가 주어지듯이, 21세기에 필요한 계시는 바로 21세기 사회에 적합한 계시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 몰트만 이후의 정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많이 등장했어요.

 

그러면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가 중심입니까? 결국은 우리 몸(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악과 따먹은 후에 생명나무 가는 길을 완전히 차단시켰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 생명나무를 관리하시는 분의 일관된 뜻이에요.

 

만약 이런 상태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나무가 주는 혜택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지, 선악과 따먹은 이 세계를 온전하게 보존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자기의 종교적 욕구를 복음과 연계시켜서 그것으로 모든 성경을 해석해서, 오는 고객들에게 납득시켜서 교회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수법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몰트만의 주장을 많은 교회가 새로운 아이템이라고 도입을 한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24페이지 중간 단락에 보면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해서 개혁주의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 오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해주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리델보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류가 뭔가?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아직’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리델보스의 문제점은, 예수님이 스스로 일 안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 사람 생각에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시면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만약 교인들에게 “여러분, 주님께서 스스로 다 일하셨습니다.”라고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아이고, 그것 참 잘 됐다. 그러면 나는 교회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네. 헌금도 봉사도 필요 없네.” 이렇게 나오면 교회가 엉망이 된다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구호입니다. 놀랍게도 여기에서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 중심’이 빠졌어요. 왜 빠졌을까요? 예수님은 2인자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1인자고 예수님은 2인자고. 재벌 총수가 있으면 되지 재벌 아들이 왜 끼어듭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2인자이기 때문에 빠진 거예요.

 

이들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중심이 3개가 됩니다. 중심이 3개이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양궁 표적을 생각해 봅시다. 가운데가 10점, 그 테두리가 9점, 그 바깥이 8점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과 ‘교회 중심’이 모순이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에서 ‘교회 중심’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가능합니까? 지금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지금 하나님 자리에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있으면 이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 있지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 몸이 있는 곳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 목회하는 사람은 ‘교회 중심’을 말하고, 신학교 교수들은 ‘성경 중심’을 외칩니다.

 

‘하나님 중심’이 될 때 하나님은 몸이 없지요. 몸을 가진 것은 인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몸이 없으니까 일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인간 몸을 사용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하나님도 사람을 가지고 일하신다.’ 사람 없으면 하나님도 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돈 좀 내라.’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에게 몸이 없습니까? 있어요. 부활의 몸이 있어요. 누구시지요? 예수님이죠. 그 몸은 가만히 놔두는 몸입니까, 아니면 활동하시는 몸입니까? 활동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앉은뱅이를 누가 낫게 했습니까? 1) 베드로. 2) 요한. 3) 예수님. 몇 번입니까? 베드로가 말 했잖아요.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 사람들은 베드로가 한 것으로 알고 야단을 칩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주님이 하셨다고 분명히 말했지요.

 

바울이 로마로 가는 뱃길에서 풍랑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1) 죄수. 2) 선원들. 3) 하나님. 몇 번입니까?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켰죠. 그 전에 이미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야기했죠. ‘네가 로마에 갈 때 고생 좀 한다. 그러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알려 주셨어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뭘 압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사람은 전부 허깨비고, 그 사람을 친히 움직이시는 몸은 따로 있는 거예요.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성도 안에서 움직이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일 때 ‘예수님이 나를 움직인다. 돈 내라!’ 이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모습으로 주께서 그 사람을 움직이는 거예요.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결국은, 우리가 일 안하면 교회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중심’입니까? 성경은 주께서 지금도 일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일했다는 식으로 전부 해석을 합니다. ‘다윗은 훌륭했다. 야곱은 팥죽을 드렸기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모든 것을 인간이 행한 것으로 다 해석해요. 그 중 하나가 선지자 이야기를 꺼냅니다. ‘선지자는 어려운 가운데 참고 견뎠더니만 하나님이 사용하셨다.’

 

그런데 요나서를 보면, 요나 자신은 쪼다가 되었지요.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지요. 그런 자에게 ‘당신은 악한 자야.’ 라고 하면 화냅니까? ‘맞습니다. 나는 악한 자입니다.’ 이렇게 할 거예요.

 

그 정도로 주께서 친히 일하시는데 성도들은 증인될 뿐입니다. 주님은 영원하지만 주의 증인은 기능적으로 일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이 기능은 나의 것이라고 쥘 수 없어요. 내가 하는 일을 내 아닌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것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이런 것은 없어요. 주께서 주시는 은사가 중요하지 ‘이 기능은 나의 전문 기능이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언제든지 새로운 환경에서 바뀔 수가 있는 겁니다.

 

복음을 누구 감히 독점을 합니까? 자기가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십자가 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야, 이건 내가 평생을 해야겠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슬쩍 나오는 이야기가 ‘왜 십자가마을 강사는 당신 혼자 하는가?’ 하고 시비 거는 사람이 있어요.

 

언젠가 이런 질문 받았어요. ‘여자 목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왜 하려고 합니까?’ ‘목사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거 다 하고 싶어 해요.’ ‘왜요?’ ‘돈도 벌고, 그리고 사회적으로 목사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인정도 해주고 괜찮은 직업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여자 목사’가 아니고 ‘여자 사기꾼’이지요.

 

‘여자 사기꾼’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여자 목사’는 아무나 할 수 없어요. 왜? 복음 외치다가 핍박 받아야 될 일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도 한 분 계시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는 남들이 알아주는 목사라는 이미지, 개념에 그것이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를 자기 몸이 결정하면 안 돼요.

 

주님 몸이 시키시면 ‘주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이 말은 밑천 떨어지면 그만두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된다는 것을 항상 배경에 깔고 일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주의 일을 할 때 힘든 것이 딴 게 아니고 내가 한다고 여기고 기어오르기 때문에 주의 성령이 아니면 이것을 누를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본인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죽을 맛이라는 이야기는 여러 사람이 합니다. 그렇게 죽을 맛이면 그만두지 왜 계속 하는지 모르겠어요. 죽을 맛이라고 하면서 안 내놓는 이유가 돈 때문에 안 내놓는 수가 있거든요.

 

사도 바울이 일하는 것은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부득불 한다(고전9:16).’고 했습니다. 부득불 하는데 그 상은 뭔가? 부득불 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나 같은 인간이 감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그 이후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린 후에는 은퇴하면 끝나는 거예요.

 

이런 사람 안에 누가 일한다? 본인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복음 전한 것은 주께서 알려주셔서 한 것이지 내가 누구에게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렇게 일하신다는 말은, 지금 이 시대에 아직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런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얼마든지 나올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께서 시키시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체육복 입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복 입고 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 사람이 뭔가를 노리고, 목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겨서 하는지, 아니면 주께서 시키셔서 부득불 하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사건을 만들어 주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주님께 붙들려 부득불 하는 사람은 사태가 발생해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는 복음 때문에 이 짓해요.’ 라는 말이 나오고, 어려움이 닥쳐서 짜증내고 돈 타령하고 그러면 이건 가짜임이 판명나지요.

 

우리 몸이 우리의 몸이 아니고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지금까지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면 그리스도가 자기 언약과 택한 백성을 위해서 가라고 하면 가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 14절에서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어요. 간단히 말하면 ‘채무자’라는 겁니다.

 

복음을 나눠주어야 할 우편배달부 같은 역할, 좋은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바다 끝이든 광야든 가리지 않고 보내시는 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이 모습이 사도 바울의 모습이 아니고 지금도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몸은 사도바울이 가지만 사실은 주님의 몸이 찾아가시는 겁니다.

 

이러한 낮은 모습으로 전하면서도 그 전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잘 나가다가도 금방 다른 얼굴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우리에게는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절해도 주님의 일은 전혀 차질이 없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주께서는 또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기셔서 주님의 일은 계속 진행되게 하십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배달을 맡은 여러분들이 해야 됩니다.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 목사 이야기하지 말고,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셨다는 소식까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셔서 모든 공로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만 모이는(임시적이지만) 것이 됩니다.

 

끝으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니엘은 끝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니엘이 전해주는 것이 이것까지로 끝입니다. 다니엘이 몇 살까지 살다 어떻게 죽었다는 것은 계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끝에 사도 바울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이미 죽은 채로 주님의 시키심 따라 일했는데 어떤 반응이 있었는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주신 은사가 없는데 한 때 은사 행했다고, 한 때 내가 복음 전했다고 지금도 성도라고 우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지금 주께서 너에게 어떤 일을 시키느냐? 이 점이 중요한 겁니다.

 

내일 마지막 시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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