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자랑
2007년 8월 12일 본문 말씀: 아가 5:10-16
(아 5: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아 5:11)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아 5: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아 5:13)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아 5: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아 5:15)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아 5: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세상에서의 부부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해도 이미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은채 사랑 상대자를 골라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온전한 사랑의 기준이란 처음 자신의 배우자를 고를 때 그 기준에 멈추게 됩니다. 생산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정적입니다.
뿐만아니라 100% 만족하는 배우자가 없기에 대충 완화된 기준을 적용하다보니 일단 혼인하고 난 뒤에는 그동안 미흡한 요건을 강제로 채워주기를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의 양만큼 상대 배우자에게 늘 실망할 여지가 남아있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만족하고는 상관없는 맺어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란 완벽하고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내놓아도 욕얻어먹지 않을 자신감에 충만한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자기 여자 친구들에게 대놓고 자기 남편 자랑에 펼칩니다. 자기로서는 예상 밖의 완전한 자가 자기 남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신이 골라서 그런 남편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남편 쪽에서 자기에게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 뜯어봐도 여자인 자신을 감동시키는 자태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머리, 손, 입술, 입, 눈, 가슴, 팔, 다리, 뺨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을 감동시키는 그런 남자로서 여자는 고백합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이토록 빠져있을 경우에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위신을 고려하지 않는 순간들입니다.
상대에게 푹 빠지게 되면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가오는 사랑은 사람이 이렇게 만듭니다. 예상 밖의 낯선 사랑이 찾아들면, 그 사랑 앞에서 인간은 자아를 잊고 삽니다. 더 이상 자기 주장이나, 자기 고집이나, 자기 위신 같은 것을 따로 챙기려고 하지를 않게 됩니다.
다가온 사랑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2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왜 성도가 주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바로 생명의 위력이 우리를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더 이상 지키려고 들거나 사수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상황인 것을 눈치 패가 만들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과 의로움을 자기를 지켜야 그나마도 남는게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성도는 더 이상 자기 몸이나 자신의 의로움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에게 반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자태는 자신이 세상에서 기대한 그 이상이라는 늘 감동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감동이 없는 사랑이란 사랑이 아닙니다. 감동이란 억지나 강요나 명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체를 묵사발 만드는데서 터져나옵니다. 큰 사랑이란 우리의 주체 보존 본능을 묵사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은 무엇을 근거로 주어진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1:13-16에 보면, 오늘날 신약 시대의 남편의 모습이 나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가의 내용과 자태를 비교해보면, 월등하게 권위 있어 보입니다. 너무 근엄하고 권위가 있어 그 아름다움에서 죽음의 능력으로 작렬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권위는 제사장으로서의 권위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거룩하게 만든 자를 말합니다. 즉 무지무지한 극한 사랑이 나올려면 죄가 없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의 양상으로 제공되어야 합니다. 즉 제대로 된 남편이라면 그 남편에게는 죄가 전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없는 남편은 단순히 사랑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사랑을 생산하는 능력이 있어 영원토록 지속적으로 사랑이 제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비와 용서입니다. 제사 기능을 이것을 겨냥한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가 생산되지 않는 제사는 헛제사입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만의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언약이 아닌 그 밖에서 제사하는 것은 이런 헛제사에 해당됩니다. 그 어떤 자비와 용서와 실질적으로 제공되지 못합니다.
보통 세상 남편들에게 죄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해 조강지처를 사랑해 주려고 용을 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위신과 체면까지 포기하지를 않습니다. 즉 자기만의 최종적인 의를 버리기까지 하면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노동을 했으면 반드시 대가를 노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도 인간들에게 일종의 노동입니다. 그 노동의 대가를 은근히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그 기대한만큼의 보답이 얻어지지 않으면 화를 내게 마련이고 그 화를 속으로 싹이다가도 언젠가는 더 이상 숨길 마음 자리가 없을 때에는 화산처럼 일시에 폭발하기 마련입니다. 즉 “나는 너에게 내 할대로 최선을 다했건만 너는 나에게 뭘 해주었는가?”라는 식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 모습을 본 여자는 초창기에 가졌던 순수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어져버리고 그 여인도 다시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금전적으로나 위신적으로 덜 손해보는 식으로 사태가 돌아가는데 분주하기 마련입니다. 상대방 남자에게 감동받는 것도 옛적 추억이 되고 맙니다. 현실은 냉정합니다.
보답없는 사랑은 추호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죽음 사건을 거쳐서 부활로 튀어나온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복을 받는 수여자입니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신부가 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그 하늘의 축복이 제공되는 중보자도 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난데없는 무한한 자비와 용서로 인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감동스럽게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성도에게 있어 인생 그 어느 구석에서도 늘 남편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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