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 15강-어디로 갔느냐(아6'1-3) 0708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1. 24. 18:26

어디로 갔느냐     
2007년 8월 19일                              본문 말씀 6:1-3 

  (아 6: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아 6: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이 땅에서 우리가 문제 삼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마치 구름이 떠가는 것을 보고 시비 걸기를 “야, 구름아. 왜 너는 내 허락도 없는 내 영역을 침범하는거야 저리가!”라고 한다면 미친사람일 것입니다. 또는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면, “너는 왜 내 허락이 없이 벌써 가을인 거야”라고 시비 걸면 이 역시 돈키호테 같은 자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들은 구름이나 가을처럼 그냥 왔다가 가버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흘러가는 존재이기에 이런 존재를 자꾸만 못박아 고정시키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일인양 간주하게 됩니다. 즉 자신을 흘러가는 자로 보지 않고 고정시켜서 규명하려고 한다면 이 일이 곧 스스로 올무에 빠지는 일이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안 중요한 것을 억지로 중요하다고 힘주고 싶어서 흐름을 강제로 멈춘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하지도 않는 자아를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문제 삼을 가치가 없는 것들이 모두 기상해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한바탕 시위를 벌릴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중요시 여기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게 나에게 심각한 문제 거리가 되고 맙니다. 

자신이 중요시 되면 그 때부터 자기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덜 중요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 도외시 되는 대상 중에는 하나님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덤으로 매몰차게 천대받기 마련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중요한 것이 계속 중요한 것으로 고정시켜 놓으려면 가지치기를 해서 나보다 덜 중요한 것들을 제거시키는 작업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자기가 중요해지니까 자기 빼놓고 타인은 다 안 중요하거나 덜 중요해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아가는 사랑에 관한 겁니다. 사랑은 공통영역을 형성시킵니다. 즉 내가 있기에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 네가 있기에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 나와 네가 공통으로 있기에 중요한 영역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장소에 친구끼리 만났다고 칩시다. 서로가 만나자 마자 상대를 향하여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생떼를 부리게 됩니다. “새로 산 원피스가 어떻고, 새로한 머리 모양이 어떻게, 새로 산 집과 내가 아니가 성적이 올랐다거나 우리 교회가 부흥되었거나 남편이 전보다 더욱더 잘 대해준다”는 식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이 옹호를 받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도 만만치 않습니다. 즉 ‘내가 너에게 칭찬해준 만큼 뒤지지 않을 정도로 너도 나의 관한 것을 칭찬해 줄 여유가 있느냐’를 묻고 계산 튕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친구끼리 헤어지면 공통영역도 함께 와해되어버리고 맙니다. 사랑의 동산이란 이런 곳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둘을 서로 엮어지도록 한 매개에 관심이 더 가야 하는 곳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사랑 앞에서 너 나 할 것이 공통적으로 그 안에서는 자기 것을 부인해야 하는 공통 영역이 형성되어야 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언어란 항상 자기 경험을 표현하는 식으로만 남에게 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는 형태로 어떻게든 그림을 그려내듯이 전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동산이요 낙원입니다. 공통영역을 묘사하게 됩니다. 그 공통영역은 본인들이 자기 부인이 유지되어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공통영역을 거론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곧 우상이 되는 겁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조립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게 되면 이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상대방에게 강매하는 식이 되고 맙니다. 자기 자신의 귀중함과 소중함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상대를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굴복시키는 태도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희생적이고 자비를 배푼다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부인되지 아니하면 상대방에서 자비를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비를 받은 자를 자기 수하에 두는 경우가 발생되고 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목사가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었다면 더 이상 그 집사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는 계속해서 처음 교회온 사람을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하고 결국 자기 생계의, 이용물로 전락되고 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자꾸만 보이는 것으로 구체화시킬 때 이런 과오가 발생합니다. 공통영역에 작용하는 힘은 우리 인간이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시편 55:15에 보면,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보통 상식이라면 사람이 죽었으면 죽은채로 음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몸이 살아있느냐 죽었느냐를 중요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 지금 우리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영역 안에 놓여있느냐를 중요시 봅니다. 저주받을 영역이라면 그것이 곧 죽음이요, 생명의 영역 안에 있다면 그것이 곧 산 자입니다. 

히브리서 11:5의 말씀도 이에 해당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여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겼다’는 것을 대목을 어떻게 눈에 보이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노아 식구가 방주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주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 그것이 방주 들어가는 방식입니까 아니면 들어가고 싶은 솔직한 심정이 움직여서 들어간 것입니까? 방주가 아무리 거창하게 서 있어도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추호도 안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랑이 어디있든지 간에 신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는 내게 속했고 나는 그에게 속했다” 이것은 함부로 고백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는 죽어 있어도 살아 있고, 살아있어도 살아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의 능력, 나의 솜씨를 보지 말고 주님과 더불어 있는 이 사랑이라는 공통영역을 먼저 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 집행당한 강도는 비록 죽었어도 낙원에서 주님과 공통영역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자랑해서는 아니됩니다.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껴안고 있는 영역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라는 영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중요하지도 않는 일에 마음 빼앗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