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16강-오직 하나(아6;4-9) 0708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1. 24. 20:36
오직 하나 
2007년 8월 26일                             본문 말씀: 아가 6:4-9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아 6: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아 6: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아 6: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아 6: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아가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외모를 가지고 사랑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못 생긴 여자는 아예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극상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 어떤 추한 요소가 섞이는 법이 없음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추한 것과 대조되는 가운데 밝혀집니다. 

즉 여러 명을 동시 다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추리고 추려서 결국 유일하게 완전한 아름다운 여자 하나를 뽑아서 ‘내 사랑’이라고 말을 얹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극상의 아름다움을 제공하지 않는 사랑은 완전한 사랑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극상의 완전 아름다움은 어디서 비롯되는 겁니까? 

욥기 42:13-15에 보면,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축복이란 형태로 최고로 아리따운 여인 셋을 욥의 가정에 주셨습니다. 추한 여인이 아니라 극상의 아름다운 여인, 모든 땅에서 제일 아리따운 여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축복은 극도로 죽음의 추함 속에서 지냈다는 욥의 지난 경력이 함유되어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년에 ‘축복’하시면서 심한 질고의 시간을 보낸 욥의 추함과 극히 대조적되는 방식으로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조건 아름답다는 겁니다. 추하지 않다는 겁니다. 추함의 시기를 지난 시기로 제껴버리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소개하시켠서 세상의 추함을 경쟁 붙이시는 방식을 채택하십니다. 

“너희는 어느 것이 아름답고 어느 것이 보다 추하게 느껴지느냐?”는 식으로 물으십니다. 그것은 극상의 아름다움, 완전한 아름다움은 결코 둘이 될 수 없고 하나로 모아지게 하겠다는 겁니다. 욥의 경우, 욥의 딸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욥에게 주어진 고난이 극상의 아름다움 축복을 욥에게 제공하는 원천이다는 말입니다. 

욥이 훌륭해서 욥이 그런 축복을 받을만 하다가 아니라, 혹은 고난 뒤에 축복이 온다는 말도 아니라 고난 안에 이미 극상의 아름다운 축복을 품고 있었는데 실제로 축복이 주어짐으로 인해 전에 있던 그 고난마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이라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극상의 아름다움이나 사랑은 우리 인간 소관이 아님을 뜻합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간주하는 자들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최상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구약 에스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지 않는다면 그런 아름다움에 그 어떤 축복의 원리도 도출될 수 없습니다. 

욥을 통해서 우리는 고난의 죽음이 주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즉 사람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주는 아름다움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추함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에서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노인정에 가 보시면 모두들 허연 머리들을 하시고 세월을 죽인채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습니다. 죽음이 가득차 있는 정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부럽습니다. 다들 죽음이 넘치기에 세상의 얄팍함과 경솔함을 휘말리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그 나이에 사랑을 논하고 남 녀의 정력을 말한다는 것이 다 우습게 보일 뿐입니다. 정권교체와 주식 폭락 소식도 그런 죽음이 가득한 정경 속에서는 한낱 허약한 바람소리일 뿐입니다. 깜짝 놀라지 않고, 깜짝 흥분할 일도 없는 경지, 죽음이 주는 아름다운 정숙한 선물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흙에 속한 형상이라서 썩게 된다는 겁니다. 부패하고 연약하고 쇠락됩니다. 하지만 이런 추함이 있기에 하늘에 속한 형상이 극도로 아름다운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흙에 속한 자들만이 사는 동네에 하늘에 속한 형상을 품은 분을 보내셨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추함은 확연해졌습니다. 저주받은 사망의 위세에 눌려서 어느 누구도 아름답다고 나설 위인은 없습니다. 흑인과 백인과 황인종으로 구분되며 사는 것이 인정이라고 나이 많이 노인정에 같이 살아가면 모두 다 동일한 흙에 속한 자로서 죽음의 모습을 보이게 될 뿐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아름다움으로 우열을 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흙에 속했고, 땅에 속한 인간 전부가 승천하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추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올라오는 온갖 아름다움이라도 예수님의 하신 일에 비하면 추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라는 표현으로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것만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완전한 아름다움만 사랑하십니다. 그 지목하신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먼저 추한 인간의 죄부터 폭로되어야 합니다. 

마치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가 남원 기생을 다 사열하면서 마지막에 춘향이에게 관심이 보이는 방식과 같습니다. 완전한 아름다움이 아니면 완전한 사랑의 대상도 아니요 결정체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4:12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분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이란 이 세상에 각양 좋다는 것을 제끼면서 그 분께 접근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외에는 더 귀한 것은 없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이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서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