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사랑 2007년 7월 29일 본문 말씀: 아가 5:1-5
(아 5: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 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 들아 많이 마시라』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아 5: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아 5: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즉 ‘우리가 뭘 이것저것 해야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핵심에서 ‘우리가 뭘 이것저것 해야됨’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하나님의 일의 핵으로 남가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직선으로 연결시켜 놓고 보면, 인간이 부활에 세계에 도달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옆에서 곧바로 부활의 세계로 차고 들어가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에 세계에 도달하는데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님마저 죽었던 자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을 우리가 당해야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내가 죽은데 무슨 내가 또 수로 부활의 세계로 진입하는 시도를 당사자인 내가 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부활의 세계에 인간이 진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검문소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본인의 종교적 실력을 신봉하는 버릇이 있어서 부활의 세계로의 진출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이 발상 자체를 십자가는 뭉개버립니다. 일체 인간 쪽에서 십자가를 건너뛰고 부활의 세계에 골인하는 경우가 발생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지혜로 하나님도 생각하고 세상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들의 그 어떤 지혜로도 어리석게 보이는 겁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렇게까지 생각 못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십자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제멋대로 지어낸 십자가를 품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제대로 십자가 복음을 접해 본 사람은, 구원이란 인간의 몫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풀어 성취해 될 숙제임을 압니다. 우리 인간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을 믿고 이해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특이한 사태 속에 놓여진 기적적인 인물에 해당됩니다.
적어도 십자가를 제대로 안다면 고린도전서 15:55에 나오는,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감히 누구를 겨냥하려고 덤벼드는가”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꾸짖을 수 있을 상황임도 병행해서 알아채는 사람입니다. 불법이 있는 곳에 사망을 덤벼듭니다. 만약에 인간이 그 어떤 법을 수행할 의무에서 면제된 자라면 과연 사망이 겨냥할 목표물이 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율법이 궁극적으로 단단히 뭉쳐진 것이 십자가입니다. 거기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궁극적으로 완성된 지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안에 놓여진 사람은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즉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부활의 세계에 진입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사람들이 법에 대해서, 혹은 양심에 대해서 여전히 자신이 준수할 의무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십자가를 피해가서 부활의 세계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만약 이들의 앞에 십자가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 십자가를 향하여 주저없이 욕설을 해댈 자들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이런 한계까지 미리 언급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지혜자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구원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온다는 말은, 그 능력이 우리 인간들이 십자가에 다가섰기에 쏟아져 나오는 능력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가 율법 완성의 위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기에 쏟아져 나오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말릴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인간의 주체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울면서 예수님의 말을 씻어주니, 사람들은 빈정대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스스로 너무 깍을 정도로 더러운 여인이 하는 행위가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는 해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법을 우기면서도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필히 자기 붕괴를 병행합니다. 탕감을 많은 받은 자가 탕감해주신 분을 많이 사랑하는 법입니다. 사랑이 찾아오면, 그 사랑 앞에서 누구나 작아지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인을 찾아온 남자의 사랑으로 인해 여인은 사랑의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우선 먼저 남자가 여인을 찾아왔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 애인 자랑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기왕 좋아진 사랑을 애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여자를 찾아갔지만 여자 집의 문을 굳게 잠기고 여자는 잠 들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포기하기 않고 계속 여인을 부릅니다.
여자는 남자의 음성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옷 입기 귀찮다고 마지 못해 대충 차려입고 문을 조금만 열어주고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우리 성도 사랑에 대해서 우리 교인들이 마지못해 생색내는 식으로 대처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진지한데 우리들은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함을 우선시 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라도 내 몸 힘들게 하면 싫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기어이 우리에게 뭔가 건네 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몰약입니다. 문 틈에 끼인 남자의 손에서 몰약주머니가 깨어져 터져버린 몰약이 문에 줄줄 흘려내립니다. 그리고 남자는 가 버렸습니다.
뒤늦게 남자의 사랑의 귀함을 알게 된 여자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위험한 밤 거리로 나셨습니다. 밤 거리에는 불량배들이 있어 이 남녀의 진실된 사랑의 관계에 무심합니다. 단지 여자가 걸친 비싼 옷이 탐내서 강탈해 가버렸습니다. 그렇더라도 여인은 남자 찾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인은 ‘사랑의 병’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 이처럼 십자가 사랑이 찾아드면 이 신앙적 병이 들게 됩니다. 상사병입니다. 사랑이 우선이기에 그 어느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 됩니다. 마처 해결짓지 못한 미진한 일이 남아 있음에 다른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병이 나면, 사랑이 최우선이 됩니다. 채워도 채워도 계속 채워야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샘물이라고 했습니다. 한계 있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터져나오는 생명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생각을 존중해 드려야 합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사랑이 이제 더 이상 매말라서 안나온다는 생각은 접어야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치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랑이 십자가라면 그 십자가 뒤편에는 부활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랑의 병이 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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