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바람
2007년 7월 22일 본문 말씀: 아가 4:16(아 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아가 전체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법이 없습니다. 법이 있게 되면 그 법을 지켜야 될 자가 지목됩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무서운 징벌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법이 들어가 있는 세계에서는 법의 징벌에서 자신을 지키고 변명하기 위해서 위선과 가장과 과장으로 분산을 떨어야 하는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가는 전체가 사랑에 푹 파묻혀있습니다. 마치 사랑의 폭설이 내린 것 같습니다. 폭설 속에서는 소리도 죽습니다. 더 이상 법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법이 없다면 법을 지켜야 될 자아를 내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상대를 사랑하면 결코 자기 생각을 일체 연인 앞에서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겁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비록 내가 못났다 할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 ‘못난 자아’라 할지라도 퍼부어 주는 사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서는 법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부터 인간은 법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야만 했습니다.
결코 완벽하냐의 여부를 가지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라 법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는 점이 추방된 이유입니다. 법의 차원에서는 자아를 유지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기 위해라도 자아는 계속 잘나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 에덴동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겁니다.
천국은 법을 묻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사랑만을 말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든 자들이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 법이 주어지면 그들 사이에 변명과 경쟁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법 대신이 사랑은 무엇에 의해서 작동됩니까? 바로 ‘바람’입니다.
바람이란 위치의 차이에 의해서 불게 되어있습니다. 차이가 없는 곳에는 바람도 없습니다. 사랑의 바람은 신약 성경에 의하면 영의 세계에서 육의 세계로 불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영과 육은 그만큼 수준의 차이가 진다는 말입니다. 차이가 있는 곳에 이동과 운동이 발생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했습니다. 육과 육 사이에는 바람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같은 레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어떤 수준 차이에는 발생되는지 성경 한군데를 찾아봅시다. 창세기 25:23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리브가라는 여인이 아기를 그동안 갖지 못하다가 쌍둥이를 임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달리 말해서 똑같다는 뜻입니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둘 다 육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낼 능력이나 자질이 없는 자입니다.
수위의 차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는 바람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태어날 때부터 싸우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계시의 힘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곱은 창세 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되어 있고 에서는 창제 전부터 미움받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고 미움받을 만해서 미움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과 미움이 본인 하기 나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법적인 차원이 되려면 본인들의 어느 정도 협조가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없이도 야곱은 축복받았다고 에서는 저주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본인의 행함의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부는 바람에 의해서 결정 나 버린 상황 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특히 미움받는 차원이 어떤 차원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사랑입은 자를 이유없이 미워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은 야곱조차 에서와 다를 바 없이 육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고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즉 자기 실력으로 복을 따내려고 하고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육과 육의 만남 속에서는 영적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즉 사랑의 바람이 불어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 잘났다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분문에서 바람은 ‘사랑의 향기’를 싣고 날아 옵니다. 향기에 취하게 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단지 사랑의 향기가 날아오는 방향을 코를 실룩거리면서 마음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자신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하여 자신이 성과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이런 상황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육적인 몸으로 다른 육들과 부딪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육으로 행동하는 자들은 오로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지 남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부각케 합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기에 결국 사기치는 상황이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벌리는 모든 일 속에서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남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기치는 사태가 계속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점은 노인네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인분들은 망가진 몸으로 마지막으로 노인병원을 찾게 됩니다. 이 때, 그동안 자식에게 베풀어준 노고를 생각해내면서 뭔가 돌봄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법적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단호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자식들이 법적으로 완벽하게 봉사해도 노인 본인이 “나는 이런 사랑 받은 자격이 없다”고 여기지 아니한 이상 여전히 육입니다. 이런 노인에게는 물로 사랑의 바람이 불어올 턱이 없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을 당당한 권리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만약 이것을 포기 못하면 자신만 계속 불행해질 뿐입니다. 사랑이란 조건 묻지 않고 하늘에게 주신 겁니다. 참으로 이 사랑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랑의 향기를 따라가면서 자기를 잊을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내세우는 그런 식으로 법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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