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겨울 수련회 때 가야산에서 빌려온 시집 10권을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짐이 더 무거워졌다.
그 전에 택배로 부쳤어야 했는데 8월 여름 수련회를 생각한 예정된 만남이 미루게 했는지도 모른다.
1월에서 8월이라는 시간속에 붙들려 있던 나는 시인들의 작품이 토해냈던 희노애락을 압축해서 맛본 것만 같았다.
잊을 수 밖에 없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별이 슬프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겐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만남과 이별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전에는 단순한 만남과 이별이 가져다 주는 것에 웃고 울고 하였지만 지금은 지쳐가는 인생 길 위에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
고 헤어지고...이 습관이 가져다 주는 구조 속에서 어느 덧 독해져 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이 툭툭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깊고 깊은 고독(자기 사랑, 자기 보존, 자기 집착)을 즐기며 인간은 살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만남은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을......미련없이 헤어져야 한다.
주님이 헤쳐버리고 주님이 모이게 하지 않는다면......영원히 갈라서기 전에...
사람은 저마다 인생의 기로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어 회생하게 된다. 생명의 은인이었다는 인생역전을 듣게된다.
그러나 과연 그 누구를 만나 회생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예전에 맛보지 못한 행복을 맛 볼 수 있을까?
잠시 인생의 기로에서 헤매다가 다시 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갔을 뿐인데......죽음이라는 이별을 막을 수 없는데.....한 번 죽
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는 말씀이 있는 한 인생역전은 로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누구를 만나야만 인생역전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아니 예수님이 만나러 와주셔야만 한다.
인생역전은 이 세상에서 이별이 없는 영원한 만남을 공개하시는 분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러 오신 것처럼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 창세전에 예정된 약속된 장소에 미리 오셔서 기다
리고 계셨다가 감격과 흥분되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계셨다.
예수님을 만나서 다행이고 예수님을 만나서 행복하다.
눈 먼 새처럼 자신만을 믿고 자신의 운명은 자기가 개척한다는 인간 철학에 빠져 있는 자를 만나서 깨닫게 되는 것은 절망이
라는 사실이다. 자기 밖에는 볼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왜 절망인가. 십자가의 활동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그 마음이 변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도 어두움에 있었고 한스러운 눈 먼 새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이 아니었다.
부모도 형제도 배우자도 자식도 친구도 동료도 이웃도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이 아니었다.
더더욱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 중심에 쳐져 있는 그물망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예수님이 만드신 그물망에 잡혔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 구조 속에 놓여져 있는 인간이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나 단서조항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선택권한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 속에 없는 지혜이다. 이 경로에 그 어떤 누구도 끼어 넣어주지 않는다. 불가능성이다.
지혜가 내뿜는 그 허리케인, 그 토네이도에 인간은 휩싸여 버렸을 뿐이다.
비록 내가 원해서 되어진 만남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 친구, 동료,이웃을 만나게 되면 뭔가 그들에게
잘해 줄려고 하는 행동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죽은 개 같은 자를 어찌 돌아보시나이까"라는 이 고백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 의에 미쳐서 날뛰던 미친 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의에 미친 자가 된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만
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모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오직 한 아들- 핍박받고 피를 줄
줄줄 흘리시는 예수님-만을 남게 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지혜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없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인생을 마음대로 휘젓는 시스템, 구조이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출1:6)
이 구조대로, 시나리오대로....지혜대로 되어져야만 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인간의 운명이다.
웅이 아빠는 죽었고...웃찾사에 나오는 이 코너처럼 성우가 읽는대로 되야만 한다.
살아있던 웅이 아빠는 바로 죽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둘이 싸움을 하는데 웅이 아빠가 이기고 있었다 할지라도 성우가 웅이 아빠가 진다고 하면 무릎 꿇고 바로 빌어야 하는 진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 내용을 보고 조카가 제일 웃겼다고 하길래...)
요셉은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도 아니었기에 그 꿈을 이룰 수도 없었다.
꿈이 요셉을 지배했을 뿐이다.
꿈이 그를 죽게 했고 꿈이 그를 살게 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에서 꿈은 깨어져야만 하는 불가능성으로 나왔다.
그 안에서 지혜가 활동한 것이다.
이 시나리오대로 밀려왔다는 것을 알았기에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어도 자기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꿈을 이루신 여호와를 경외하는대로 나오게 된 것이다.
요셉의 꿈은 깨어져야만 했다. 자기 주체가 깨어져야 요셉을 구원하는 긍휼이 나오는 것이다.
지혜는 다시 지혜에게로 돌아간다. 요셉은 매개체로 끝났다. '.....다 죽었고"
우리는 A라는 지점에서 B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잠언을 내가 지켜보려는 모델로 삼는다.
그러나 A는 B를 B' B".....끝없는 욕망으로 나올 뿐이다.
지혜를 말하시는 분과 지혜를 지키려는 나와 경쟁관계에 돌입되고 협력하고자 애쓴다.
인간은 결코 자기를 벗어날 수가 없다. 자기 사랑을 떠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억지로 흉내내다가 끝나고 마는 것이다.
자기 그림자만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본성상 달라지는 지혜의 책망이 있기 전에는 인간 스스로 될 일이 아니다.
A가 B가 되기를 원할 때 지혜의 잔소리가 잔소리를 해대면 C가 나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되고싶은 내가 있고 지혜되시는분의 책망이 주어지면 여호와 경외의 기쁨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마치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테이블 사이사이로 돌아다니면서 없는 것을 채워주는 서빙하는 직원들처럼..
너는 죄인되어야만 해 너 대신 피 흘리신 분이 계시단다......
너와 나 이웃이 있어서 내가 들통나는 그 숱한 만남 속에 내가 있었다.
이 만남이 없으면 오직 한 분에게만 허용되어지는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내용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독자적인 아들만이 집단적인 아들을 만들어내시기 때문이다.
이웃이 없이는 내 죄가 들통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대신 피 흘리시고 주신 예수님의 용서가 나타나는 것이다.
긍휼을 베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님 뿐이시다.
가난과 가난한 자를 보는 관점, 부와 부한 자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가난을 정당화하지는 말자. 가난해도 싼 인간이다라며 살자.
그러나 주님의 뜻에 의해서 가난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누리며 살자.
가난하게 하신 주체자가 가난한 자에게 들어와 계신다.
부와 부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가난한 자도 예수님이셨고 최고로 부한 자도 예수님이셨다.
이것을 통해서 지혜는 지혜되시는 분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알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공중의 새를 어떻게 기르시는지....들의 백합화를 어떻게 자라게 하시는지....아무리 말씀하셔도 염려할 수 밖에 없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다. 결론은 인간에게는 지혜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잠언은 자기를 높이는 교훈집이 아니라 잠언을 보고 가능성을 꿈꾸는 꿈을 박살내
불가능성으로 교체시키는 구조적인 활동을 벌리시는 말씀인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잠언을 모델 삼아 자기가 지키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언약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생각한다.
물의 구조는 물로 심판당했던 모든 이유를 무지개 보호막이 쳐있어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은 은총을 내리는 시대를 말한다.
불의 구조는 하나님의 저주를 막는 보호막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허물치 않았던,
은혜로 키웠던 보호막의 시대는 철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다른 구조로 보호된다는 것을 언약을 통해서 알게 될 때 이 언약을 이해한 사람, 이 언약을 보여줄 사람이 바로 왕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총동원해서 죄인의 왕으로 삼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신 것이다.
다윗하고만 이야기 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이라는 한 통로를 세우지 않으면 죄인인줄은 인정할지 몰라도
처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통로를 벗어나면 반성하는 내가 잘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왕 한 사람이 죄인되어서 일률적으로 죄인된 것이다.
다윗 언약안에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지혜의 원천자가 계셨다.
다윗은 그 분을 만나 무엇을 알았기에 인간의 죄만 나열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다윗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가 낳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기에 그 해결책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인 것이다.
시편 51편은 잠언의 핵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 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죄인은 피를 만나야 하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와 긍휼을 입게 되는 것이 다윗 언약이 진수였다.
이스라엘의 고난과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그들은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죄인되어야 하고 예수님은 피를 흘려 용서와 긍휼을 베푸셔야만 하셨다 (죄인+피=용서,긍휼).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은총을 주었어도 죄가 나오는 물의 구조가 불의 구조로 바뀌는 것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지혜가 확실하게 여호와께로 나온다는 것을 증거하는 솔로몬의 재판을 보라
그것은 다윗 언약의 완성된 시간의 그림자였다.
제3자의 개입으로 엄마라고 서로 우기는 두 사람의 내막을 밝혀낸다.
포기하는 것으로 친 엄마는 자식을 살린다.
억울한자를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식을 살리기 위한 진짜 엄마의 포기... 왕은 어느 쪽이 긍휼을 이해하느냐 어느 쪽
이 포기를 하느냐를 캐치할 수 있을 때 친 엄마를 찾아 줄 수 있는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포기가 없는, 불쌍히 여김이 없는, 자기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를 심판하는 일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혜로 자기가 깨어진 허공속에서 지혜가 마음껏 놀도록 해야한다.
허공으로 끝나 버리면 여전히 주체인 내가 살아서 도 닦는 것과 다를게 없다.
허공속에 지혜가 채워지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긍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운반책에 불과하다. 그 분의 십자가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죄인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는데에 동원되었다.
선과악을 면도칼의 예리함에 베어 버리는, "나"라는 잘남을 다 잡아 먹어 버리는 이 구조속에 잠언은 놓여 있다.
"나"라는 잘남을 다 잡아 먹으면 허공만이 남는다. (팩맨 게임처럼)
이 허공속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긍휼하심을 이루신 지혜가 채워지는 것이다.
만약에 허공으로 끝나버리면 모든 종교가 하나되어 버린다. 흔적만을 남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가치가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의 지혜라는 인생의 동반자, 동행자가 있다 . 인생의 시점에서 자기 혼자 나서지 말라.
비운자의 여유, 내것이 없다는 여유, 내가 지킬만한 내것이 없어질 때 그냥 복이다.
슬기로운 자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내시는-에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자기를 자처해서(?)내놓고 자기
가 박살날 때마다 잘하셨습니다라고 박수를 치는 자이다.
어리석은 자는 세상의 중심을 자기로 여긴다. 반성하는 내가 휼륭하고 착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무서운 것은 다윗 언약의 실체, 다윗이 받은 은혜가 무엇인줄 모른다는데 있는 것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0-25)
"모르겠어요. 얼른 짐작에 당연 성경에서의 만남이란 십자가안에서의 만남뿐인데 그게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지상에까지 펼쳐지는지 지켜봐야 겠지요. 성경상의 숱한 만남이, 그리고 이 지상에서 예수안에서만 형성되는 만남들이 대체 아무런 연관도 없이 남발되는 것 같은, 그냥 윤리 교훈집으로만 여겨질법한 잠언 말씀과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되는지 그 잠언의 씨줄과 날줄이 어떻게 십자가까지 길을 잃지 않고 과연 찾아갈수 있을지 그 과정이 기대되는 겁니다. "(오용익 목사님의 리플)
수련회를 떠나기 전에, 기차 여행을 하면서, 잠시 잠시 이 리플을 생각하면 만남에 대한 설레임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기대한만큼 수련회 기간내내 깨어지는 허공속에 깨어진만큼 채워지는 지혜와의 만남은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2박3일의 시간이 너무 행복에 겨워 그렇게 빨리 흘러서 각자 준비된 차를 타고 떠난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온 몸이 아픕니다. 계곡에서의 아이들과의 물싸움, 피구게임 안하던 운동을 했으니 얼마나 온 몸이 쑤시던지......그래도 거기서는 피곤을 푸는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그 시간에 만나고 싶은 분들 마음껏 만나고 싶어서 안잤더니 강의 도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틈나면 잠자기 일쑤였습니다. 변명은 자기를 정당화시킨다~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기대한 만남을 기쁨으로 채워주신 이근호 목사님 고맙습니다. 행복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애쓰신 분들께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