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 않는 말씀
2017년 11월 26일 본문 말씀: 신명기 30:11-14
(30: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30: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30: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원래 말씀이 인간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뭐든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면 어려운 법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의 수준을 본인이 짐작해도 제공된 쪽에서 “그게 아닌데”라고 나오면, 말씀을 못 지킨 것이 됩니다. 즉 타인의 것인 이상 제 3자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온전히 지킨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렵지 않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30:14에 그게 나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은 그냥 공중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 수준까지 이르도록 율법과 더불어 계속 동행하신다는 겁니다.
이처럼 율법은 율법을 주신 자와 더불어 함께 하는 겁니다. 이는 곧 율법은 혼자서 성취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춤을 출 때, 같이 짝이 이루어서 추는 춤이 있습니다. 이 때, 혼자서 딴 짓하면 춤이 안 되겠지요. 즉 파트너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혼자 자기 잘난 체 하면 아무리 해도 말씀을 못 지키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철저하게 인도자에게 맡겨야 춤이 됩니다. 이처럼 말씀은 혼자서 지키는 용도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상대방의 인도, 상대방의 리더가 중요합니다. 결국 율법을 주신 분에 의해서 심히 말씀이 거역하지 못할 간격을 형성하면서 쉽게 행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은 신약시대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구약을 바라보면서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율법을 주신 지를 알아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율법에는 ‘대속죄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년에 단 한 차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한꺼번에 용서하겠다고 만드신 날입니다.
그날에 대제사장은 친히 성소의 제일 깊은 곳인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위해 제물의 피를 갖고서 언약궤 뚜껑에 바르는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7년도 7월 10일, 대속죄일을 치뤘다면, 2018년도 대속죄일 사이에 끼어 있는 모든 날은 무슨 의미를 부여받게 될까요?
이 날들은 죄를 누적시키는 날입니다. 그래야 2018년도의 대속죄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날들이 죄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껏 지었던 죄를 이미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서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을 근거로 해서 죄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는 곧 ‘사람이란 경험없이는 이해될 수 없음’을 감안한 조치입니다.
즉 아무리 스스로 죄를 알고자 해도 아직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저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고 마는 겁니다. 2017년 7월 10일이 일어난 일은 우리 죄를 위함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죄인지는 그 이후에 계속 살아가다보면 2017년 7월 10일 있었던 그 죄사함과 연계해서 새로운 차원에서 파악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2017년 7월 10일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설마 이것까지 죄?”라고 의심들었던 것도 그 이후의 체험 속에서 “과연 죄 맞구나”라고 인정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는 2017년 7월 10일의 죄씻음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2018년 7월 10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기 어렵지 않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계속 주어지는 그 법들이 어느새 인간의 능력으로 성취 가능한 말씀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하시는 쪽으로 밀고 나가시는 겁니다. 그래도 같이 ‘동행’한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신약의 해결책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의 방법은 히브리서 10:6부터 시작이 됩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즉 속죄제라는 율법을 주셨지만 이 율법 성취의 방법으로서 ‘인간이 바치는 번제와 속죄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방식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과연 율법 성취자는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10:7-8에 보면,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 준수자를 따로 하나님께서 챙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룬 율법을 모아 ‘새언약’으로 통일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새언약’을 인간이 또 지켜야 되지 않느냐로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0-17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즉 아예 성도의 마음 속까지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상주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쉬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도 자체가 율법 완수의 증거물로서 내세워집니다. 이렇게 해서 왜 그동안 인간들은 율법 완수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까지 밝혀집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의무감’으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이 ‘의무감’은 단순히 자신의 행함에만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왜 그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근거까지 의무감으로 제시해야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즉 “나는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은 제 안에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근거까지 제시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율법 지킴은 곧 독자적으로 ‘자기 의’ 생산시설까지 마련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가식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준수자로서 하나님께서 따로 선택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신약에 와서는 그 ‘율법 준수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마음 속에 이미 율법 완성. 곧 ‘하나님의 의’가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8-9)
즉 입으로 무엇이 토해지느냐가 곧 그 사람 속에 ‘율법 완성’이 들어 있음의 여부가 밝혀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에 인간적인 자기 성취욕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1강-신 30장 11 – 14절(어렵지 않는 말씀 )171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0장 11 –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약간 거짓말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이 명령을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사람이 쉽다고 할 때, 어떤 경우에 쉽다고 하냐면 내가 만들어 냈을 경우에는 쉬워요. 내 아이디어에서 나오고, 만들 때는 그것이 어떻게 완료가 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이미 감안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쉽다해도 남들이 가져다 준 것은 버벅거리기 마련이죠. 힘들지요. 내 것이 아니고 남들이 가져다주었을 때는. 그래서 이게 쉽다는 말은 누구 입장에서 하는 말이냐 하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속에 동행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게 쉬운 겁니다.
이 명령은 지키기가 쉽다고 하시는 취지가 뭐냐 하면 결국은 이 명령 지키는 것이 쉽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기어이 내가 생산해 내겠다는 거죠. 사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주의 명령을 지키기가 참 힘들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내가 말씀을 지키는 수준이 이 걸 지켜야 지켰다고 우기는 자기 기준이 따로 챙겨져 있어서 그래요.
그 기준은 자기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자존심만 버리면 참 쉬운데 자존심도 챙기고 남 앞에 하나님 앞에 “지켰습니다.”하고 큰소리 칠 것도 챙기니까 이게 힘든 거예요. 이 성경말씀 자체가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나의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서 산다는 것은 곤욕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곤욕인지 몰라요. 말씀 지키는 것도 곤욕이고.
전화 붙들고 3시간 이야기 하라 하면 전혀 곤욕이 아닌데. 주님과 전화통화 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 했을 때, 참 어려운데 어렵지 않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아직도 어렵다고 하는 우리 기준을 철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 지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어렵지 않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주님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하면 어디서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나는 지점을 제가 말씀을 해 드리겠습니다.
보통 춤을 출 때 혼자서 춤을 출 때도 있지만 둘이 짝을 이뤄서 춤을 출 때는 잘 추는 쪽에 맡기게 되면 그 쪽에서 이끌어주기 때문에 춤을 잘 추지요. 혼자 추는 게 아니고 양쪽에서 춤을 추게 되는 경우죠. 그렇다면 맡길 때에 춤추는 쪽에서 주머니에 돈 같은 거 집어넣고 귀중품 집어넣고 춤추라 하면 춤 못 춥니다.
춤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을 리드해 주고 박자에 맞춰서 춤을 춰야 되겠죠. 한쪽이 끌어 준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말이 뭐냐 하면 이 말씀이 지키기 어렵지 않다는 말은 혼자서 지키려 하면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상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와 우리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가 있고 그 사랑에 이끌리면 참 쉬워요. 사랑은 없는 채로 말씀은 지키려 하니까 이게 평소에 자기가 자기 사랑했던 게 단단하게 묶여져 있어 가지고 아무리 지켜도 결국은 나 잘났다로 돌아오는 이상은, 이거는 지키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못 지키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그런 게 나와 있거든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예요. 이 말을 줄여 보면 말씀을 지킬 때 원칙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렵지 않아요. 말씀을 지키는 그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말씀을 못 지켜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물론이고 말씀을 지켜봤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 나중에 그런 결론이 내려 질 때에 우리는 말씀을 다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죠. 지금껏 내가 사는 것이 주의 은혜로 살게 되면 나는 모든 말씀을 다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사탄이 와서 쑤실 때 나오는 것이 주님 자랑밖에 안 나온다면 사탄은 물러갈 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하고 상대해서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지난 시간도 이야기 했지만 이방인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차이점에서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였습니다. 이게 자기의 염려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걸 주님께서 이방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방인 떼놓으면 모든 인간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만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거든요. 혹시 벌로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주일 낮에 설교를 통해서 고린도후서를 쭉 보니까 제가 그중에 하나 주목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도가 복음 전하는 데 굶었다는 사실이에요. 사도가 복음 전하는 데 굶었어요. 밥도 안 먹이고 일 시킨 겁니다.
그때 사도가 어떤 마음 들겠어요? ‘뭐, 밥도 안주고 일시키는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이렇게 생각 들겠죠.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그동안 밥 먹여 주신 것에 감사하게 되면 사탄이 시비 걸려 해도 시비 걸 건덕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와서 결론 내리면 뭐냐, 주의 말씀은 뭘 남기는 게 아니고 ‘나는 말씀을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마저도 걷어내는 식으로 말씀은 우리한테 지킨 것으로 주어진단 말이죠.
내가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는 식으로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나는 지켰다’도 말씀 지킨 것이 아니에요. ‘못 지켰다’도 말씀 지킨 게 아닙니다. 나는 나 빼고 지킨 것을 나에게 제공하는 식으로 주면 되는 거예요.
어제 저녁에 별 생각 없이 드라마를 봤는데, 황금빛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 주인공 남자가 어떤 동작을 보이냐 하면 이런 동작을 보여요. 가슴을 치는 동작을 보였어요. 답답하다는 거죠. 딸은 집나갔는데 일주일째 찾지를 못하고 답답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머리를 안치고 뺨을 안치고 왜 심장을 치느냔 말이죠.
그래서 옛날부터 사랑과 미움과 모든 감정이 심장에서 나온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심장이 아프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혈액이 안 통하니까 본능적으로 가슴을 쳐가지고 피 통하라고 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 우리네 인생 얼마나 심장 칠 일이, 가슴 칠 일이 많았습니까? 차라리 죽으면 편할 정도로 가슴을 치면서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런 결정을 했을까, 바보같이 내 인생 이러려고 사느냐’는 투로 가슴을 마구 쳤다 이 말이죠.
그렇게 가슴을 마구 치는 상태에서 말씀을 지킨다고요?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이거는 혼자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는 방법 이전에 제가 먼저 말씀 드리는 것은 왜 말씀을 못 지키느냐하는 그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그런 행동이 나오는 근거까지 본인이 제시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말씀을 못 지키는 거예요. ‘나는 이런 행동을 하는데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요것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해’라는 근거까지 상대방에게 은연중에 전달해야 된다는 의무를 갖고 있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까?
“너, 왜 그런 행동을 하는데?”라고 했을 때, “이것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어. 나는 충분한 정당한 근거가 있어.”라고 자기 정당화를 자기 행동에다 자꾸 끊어지지 않고 연결시켜서 그것마저 제시하려고 하니까, 그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뭘 속여야 하냐면 정당치 못한 ‘나는 나만 살면 돼’라는 그 속셈을 계속 억눌러야 하니까 가슴을 막 치는 거예요. 안 들키면서도 남들에게는 ‘괜찮게 사네.’라는 티는 내고. 그래서 가슴을 치는 겁니다. 우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가슴을 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해 드립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못 지키느냐 하면 ‘나는 십계명의 이쪽 계명을 지켰습니다. 왜 지켰느냐 하면 이런 근거 때문에 지켰습니다.’라는 근거까지 제시를 연결 시켜서 해야 될 의무를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의무를 갖느냐 하면 자기의 본심을 감출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의 본심.
그러면 자기의 본심을 왜 감추느냐,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모든 율법은 내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남의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것은 따로 있는데 나에서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것을 억지로 지키려고 하니까 거기에 어떤 괴리가 어떤 간격이 일어나고, 간격이 일어나니까 이거는 못 지키는 게 뻔한 거예요.
못 지키는 게 뻔하면서도 또 못 지켰으면 못 지킨 데로 저주를 할 참이니까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켰단 말입니다. 최선을 다 했단 말입니다.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잖아요. 왜 그 성의는 개무시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슴 치려면요 지옥 가서 가슴 치면 돼요. “가슴 치며 통곡함이 있으리라”
드라마가 가슴 치면서 딸을 못 만나는 게 없으면 드라마 안 됩니다. 시청률 떨어져요. 그래서 어제 마지막 장면에서는 딸을 만나요. 아버지가.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는 식으로. 아직까지 아버지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딸의 모습을 어떤 간격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성경말씀에서 쉽지 않다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것은 너의 힘으로는 이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겁니다. 바로 동행하는 목적을 네가 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희들에게 율법을 줬지만 이거는 너희들이 혼자서 이룰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춤을 추듯이 상대가 말씀을 만드신 본인이 그들과 동행 할 때 ‘이거는 참 어렵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 때문에 쉬웠습니다.’라는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결과물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작업을 위해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직접 율법을 만드신 당사자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의무 ‘나는 누가 뭐래도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라는 의무가 되는 그 토대까지 자기 쪽에서 억지를 부려서 만들어 내는 그런 불합리, 거짓, 위선, 가식, 그런 것들을 주님 쪽에서 아주 친절하게 그것까지 그럴 필요 없다고 제거해 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입니다. 아예 작살을 내 버립니다. 우리 마음을 잘라버려요. “네가 말씀을 지켜? 네가 나를 사랑해? 나를 믿어? 그래서 구원 받는 거 아니야.”
내가 너의 속에 들어와 있다는 그 사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이 마태복음 10장에 있습니다.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성령이니라” 결국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 자신의 완성을 날마다 선언하고 있어요. “얘 손대지 마라, 마귀야, 이 사람은 건들이지 마. 건들 면 안 돼. 내 결과물이야.” 말씀의 완제품이라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안목이에요. 우리 안목은 뭐냐? 말씀 주셨으니, 소위, 성도니까 지킬 의무감이 등장해요. 문제는 그 의무감이 화근입니다. 그 의무감이 자꾸 내 심장을 치게 만들어요. 이 세상을 힘들게 살도록 만들어요. 예수 믿어도 기쁨이 없도록 만든다니까요. 이 의무감이.
적어도 신자라면 마귀가 보고 있으니까 마귀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하는 의무감. 백날해도 그건 착각이십니다. 바로 이 신명기에서 마태복음 10장으로 바로 넘어 갔는데 그 중에 중간다리를 말씀 드리면 이제 여러분들이 충분하게 이해 될 말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7월 10일 날이 되면 속죄일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 7월 10일 날 1년 치 죄를 다 씻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요. 2017년도 7월 10일 날 속죄일이 있다하면, 지금은 신약이라 없지만, 구약이라 생각하고 7월 10일 날 전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일을 지냈다면, 그래서 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서 대신 죄를 다 치렀다고 칩시다. 그러면 2017년도 7월 10일과 돌아오는 2018년도 7월 10일까지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세월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하는 겁니다.
속죄일은 1년 치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 날이 속죄일이에요. 그러면 2017년도 7월 10일 지나고 11일, 12일, 13일하고 돌아오는 2018년도 7월 10일까지의 모든 날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야 되는 이유는 바로 죄를 누적 시키는 일을 해야 돼요.
이것은 바로 죄를 누적시킬 때 근거가 “이미 죄를 용서했잖아”를 근거로 해서 계속해서 그 죄를 지적하는 겁니다. 제 말이 성경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용서했음을 어떤 취지에서 어떤 깊이까지 용서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고, 살면서 나오는 그 행동과 죄 씻었다는 그 내용과 더욱더 깊이 있게 파고 들게 만들어서 내년 돌아오는 2018년도 7월 10일 때는 2017년도에 알았던 그 죄 뿐만이 아니고 1년 동안 더 깊이 체험된 죄를 더 깊이 있게 말끔하게 처리하는 날이 2018년도 7월 10일이에요.
문제는 그래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거예요. 2019년도 때문에. 그렇게 해봐야 2019년도 있습니다. 또 안돼요. 2020년도 있습니다. 그래도 안돼요. 2021년도 가기 전에 죽어 버리면 죽어버리면 곤란하죠. 그래서 율법은 점점 더 율법의 완성이 우리 입까지 마음까지 가까이 옵니다. 이렇게 구약은 가까이 왔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10장에 오면 가까이 온 게 아니고 쑥 들어옵니다. 가까이 온 게 아니고 우리 마음속까지 일방적으로 허락도 없이 그냥 들어 온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새 언약이 오게 되면 율법으로 마주치던 그 대면이 이제는 우리 마음까지 완전히 장악해서 거기서 어떤 선언이 이어지느냐 하면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이런 선언을 합니다.
10장 8절에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아까 제가 속죄일 이야기 했잖아요. 구약은 속죄일 했는데 신약은 그게 아니에요. 속죄일도 없어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이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리고 17절에 보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겁니다.
아예 우리 마음까지 들어갔어요. 마음까지 들어가서 그 마음까지 들어간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이 뭐냐 하면 “내가 이러이러한 내 의무만 생각해서 내가 단독적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그게 실패였습니다. 그게 죄였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면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괜찮아요.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요. 언제 죽어도 우리 속에 “다시는 너희 죄와 불법을 내가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그런 생명책에서나 나올 그런 대상에게 주어 질 말씀을 이렇게 튀어 나오게 하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의 효과입니다.
실컷 죄를 이야기 하세요. 그리고 반드시 이걸 빠뜨리면 안 되죠.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다 감사합니다.’가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에서 그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시지 아니한다” 해 놓고 7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번제와 속죄제. 인간들이 자기 의무감에 의해서, 책임감에 의해서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고 오직 거기에 다가 예수님이, 직접 만드신 당사자가 직접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 분이 우리 대신 죄를 사함으로써 말씀을 다 행한 것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안 믿으면 저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화평치 않게 한다는 말이 뭐냐, 우리 내부를 깨버리는 거예요. 얽히고설킨 ‘나는 저분에게 최선을 다 했습니다’하는 그런 관계 말고 예수님과의 관계 말이죠.
그동안 예수님과의 관계를 인간들이 다 가로 막았어요. “나 저 사람 잘 압니다. 저게 내 자식입니다. 내가 저 아이 부모입니다.” 그런 거 말고 부모고 자식이고 관계 다 끊고 끊어진 관계에다가 “내가 있나이다, 내가 여기 왔나이다”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심을 스스로 성취하러 오신 거예요. 그걸 보고 주님이 스스로 만족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늘 만족 못하지만 주님이 만족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요, 우리는 자꾸 딴 생각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만족을 못해요. ‘내가 이거밖에 안되나’ 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책임감을 생각해가지고 만족함을 모르지만 주님은 그 순간도 우리를 보시고 만족하신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왔잖아”라고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이게 너무 놀라운 말씀이라서 사람들이 안 받아 들여요. 너무 놀라운 말씀이라서. 30~40년 교회 다녀도 이런 거 몰라요. 그런데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도 가끔 나와도 아는 분이 있습니다. 이 앞자리에 앉으시는 분이 전화로 자기 간증을 이야기해요. 자기 집에 손님이 왔는데 교도소에 있다가 왔나 봐요. 왔는데 출소해서 자기는 교도소에서 열심히 성경도 보고 예수를 잘 믿었다는 겁니다. 집사님이 교회 다니는지 모르고 열심히 자기 혼자 중얼거리는 겁니다. 자기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하고, 십일조 하고 했는데, 자기 교회 목사가 자기 아들한테 교회를 물려줘서 골치 아프다는 거예요.
서울 명성교회 이야기 아닙니다. 대구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 듣고 참을 수 없는 우리 집사님께서 또 오지랖을 떨었던 거예요. “십일조를 왜 합니까?”라고 시비를 걸은 거예요. 그러니까 또 그 사람이 교도소에서 성경을 봐가지고 십일조 하라 해서 한다고 한 거예요. 그 집사님이 교도소에서 온 사람한테 십일조는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설명을 해주는데 그 설명이 굉장히 특이해요. 평소에도 특이하지만.
저는 말라기나 마태복음 23장 말씀 하실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 아니고 신명기 23장 18절 이야기를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기의 번 돈과 개같이 받은 자의 소득은 성전에 갖고 오지 말라”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인간치고 개 같지 않은 인간 어디 있고, 창녀 같지 않은 인간이 누가 있느냐하면서 그런 돈은 성전에서 안 받는 다고 한 거예요.
말은 맞는데요, 약간 미흡한 게 있어요. 내 쪽에서 의무감으로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미흡함 때문에 말씀이 어려워요. 말씀이 어렵다는 말은 뭘 해도 미흡해요. 지켰다 싶으면 저만큼 달아나 있어요. 또 지켰다 싶으면 저만큼 가 있고.
기도했다 치면 이 정도는 해야지, 뭐 했다 치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마귀가 자꾸 놀립니다. 십일조는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십일조 되시는 분이 쳐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이미 십일조라는 말씀의 완성태를 가지고 “내가 다 이루었다”하면서 들어와서 성전에 십일조를 내잖아요, 아예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아 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십일조를 완성해서 우리 몸에 들어와 버리면 십일조가 완성이 된 겁니다.
그게 좀 빠졌는데 아마 집사님이 이 말씀 들을 거예요. 다음에 손님 오면 보충 할 겁니다. 그럴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산다는 것이 가슴 치면서 힘들게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될 정당성을 내가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을 성경 말씀에 근거해가지고 “주님 저 이정도 되니까 살려 주셔야 됩니다.” 라고 자꾸 자기가 살고 싶다는 욕망을 주님에게 자꾸 억지를 부리면서 뽑아내려고 해요. “주님, 저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이 정도면 다 지킨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신명기의 이 본문에 어렵지 않다는 이 말씀이 완성된 것은 로마서 10장에 보면 그게 완성되어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는 “할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할 게. 그 자체가 이미 완성이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가슴 치는 것은 좀 자제해야 돼요. 물론 가슴 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 답답해서 실수 했지만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니까.
한번 치고 나서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쳤는지. 벌써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안목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나의 옛사람의 안목이 주님에게 가지고 가려고 껄떡대고 있었던 겁니다. 자꾸 주님 앞에 자랑 질 하려고 설친 거예요. ‘나 참 잘 살죠? 하나님? 반듯하게 살지요, 그죠? 그러니까 나 이뻐해줘.’하는 식으로 자꾸 들이미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이 있으면 어떻게 살더라도 이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먼저 주 앞에 굴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굴복해서 감사가 안 나올려야 안 나올 수 없게 해 주시옵소서.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불평과 불만만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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